오이채

 

 

1

 

올해 1월에 많이 들었던 질문은 이런 식이었다. , 책은 왜 읽는 거예요? 대답은 이런 식이었다. 그러게?

 

조금 더 쉬운 질문으로는 이런 게 있었다. 오빠, 책을 읽으면 진짜 인생이 바뀌어? , 그런 사람 실제로 본 적 한 번도 없네?

 

 

 

2

 

오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서 종일토록 읽었다. 어제도 저녁 약속 전까지 줄창 읽기만 했다. 그리고 문득, 저런 질문들에 내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까닭을 깨달았다. syo가 책을 읽는 이유에 관한 문제였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 그건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3

 

syo는 책을 읽으며 어떤 사람이 되었지만,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서 책을 읽은 적이 없다. 공대 나와서 행정직 공무원 하는 인간이 철학책을 읽는 이유는 인간을 위해서도 철학을 위해서도 아니었고 단지 읽기 위해서였다. 상상계-상징계-실재계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책을 읽기 위해 라캉에 대해 읽었다. 마르크스를 읽은 것은 혁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유물론적으로 전개되는 책들의 페이지를 넘길 때 절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나의 책은 다른 책으로 가는 징검다리였고, 그렇게 책과 책을 이은 선으로 어두운 인생에 별자리를 긋긴 했지만 그 별자리가 동서남북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밤이 있고 하늘이 있어서 별이 있듯이, 내가 있고 책이 있어서 독서가 있었다.

 

 

 

4

 

가장 나이브해 보이고 가장 진솔해 보이며, 동시에 가장 고수의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대답인 재미역시 syo가 하는 독서의 목적은 아니다. 설령 그것이 재미라고 하더라도, 어떤 목적이 존재하는 것 자체로 독서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독서가 수단이지 말라는 법도 없고 그게 나쁘다는 것도 아니지만, syo에게 독서가 어딘가로 향하는 과정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읽는 일이 미치도록 재미없을 때가 팔 할이다. 아무리 꼼꼼히 읽어도 보름이 지나면 주인공 이름조차 가물거리는 머리통을 달고 사는 사람에게, 지식을 남기고자 하는 것 자체가 욕심이다. 수천 권의 책을 읽었으나 뭐 특별히 훌륭한 인간이 되지도 못했고, 이 책들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어마어마한 쓰레기가 되었을 것 같지도 않다. 책이 이런저런 인연들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늘 책과 상관없는 시간과 장소에서 생겨났다. 요컨대, syo에게 책 읽기는 늘 책 읽기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5


아무것도 이루거나 바꿀 욕심이 없는 인간에게 삶은 길다.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살해하며 살아야 한다. 오늘 하루를 읽으며, 읽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평화롭게 보내며, 나는 생각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언젠가, 나도 모르게 나는 내 앞에 던져진 기나긴 시간을 활자를 통해 천천히 부드럽게 죽여나가기로 정한 것은 아닐까.

 

 

 

6

 

수나 양도, 진보나 혁명도, 재미나 의미도,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결국 독서는 중요하지 않다. 책은 크고 값비싼 것은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고, 나는 나대로 책에게 많이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냥 주말이 오면 저녁까지 책 위에 올려놓은 시간을 다른 책으로 탁탁탁 채 썰어 씹어 먹을 테고, 지친 일상의 목을 축일 테고, 아침이 오면 출근할 것이다.

 

 

 

--- 읽은 ---


 

53. 물리학은 처음인데요 / 마쓰바라 다카히코 : 137 ~ 288

 

처음 읽는 물리학 책은 어때야 할까?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할 길이 없다. 고등학교 때 처음 배우기 시작해서, 어쨌든 물리학에 뿌리가 있는 과목들의 지식을 암기하고 문제를 풀고 시험을 치고 울고불던 세월이 8년쯤 되는지라, 이런 기초 책을 읽긴 읽지만 과연 이게 좋은 기초 책인지 그저 그런 기초 책인지 말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이다. 이제 그만 읽을까, 이런 거?

 

 


54. 남자의 자리 / 아니 에르노 : 67 ~ 128

 

통념적 의미의 사랑이 아닌 것들에 대해 쓸 때 아니 에르노의 문장은 가장 빛났던 것 같다. 사랑이나 사랑이 아닌 것 같은, 사랑이 아닌 것 같으나 사랑인, 그런 것들. 그러나 가족에 대해 쓸 때, 그리고 그것이 덤덤하거나 담담할 때, 나는 그녀의 문장에 완전히 파묻히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아버지라는 소재가 내게 미치는 영향 탓일지도 모르겠다.



 

 

55. 어중간한 나와 이별하는 48가지 방법 / 쓰루다 도요카즈 : 111 ~ 228

 

어중간하다. 이별해야겠다.

 

 

 

 

--- 읽는 ---

회계 천재가 된 홍대리 1 / 손봉석 : ~ 134

만화로 보는 경제학의 거의 모든 것 / 마이클 굿윈 : ~ 112

/ 장 그르니에 : ~ 92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고 싶습니다 / 김고명 : ~ 98

스피노자 / 스티븐 내들러 : 234 ~ 430

최한기가 들려주는 기학 이야기 / 이종한 : ~ 100

에코 페미니즘 / 마리아 미스, 반다나 시바 : ~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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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6-07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의 모든 문장이 좋아요.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언젠가, 나도 모르게 나는 내 앞에 던져진 기나긴 시간을 활자를 통해 천천히 부드럽게 죽여나가기로 정한 것은 아닐까.˝ 이 문장도 좋아요.
˝그냥 주말이 오면 저녁까지 책 위에 올려놓은 시간을 다른 책으로 탁탁탁 채 썰어 씹어 먹을 테고, 지친 일상의 목을 축일 테고, 아침이 오면 출근할 것이다.˝ 이 문장도 역시나 좋아요.

그렇게나 많은 책을 읽고 또 읽고, syo님은 문장을 얻은 거 아닐까요?

syo 2020-06-07 23:28   좋아요 1 | URL
문장 이게 얻었다고 할 만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걸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고, 알라딘에서 흥청망청 놀기나 할 생각이에요 ㅎㅎㅎ

2020-06-08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3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8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3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이 2020-06-08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청망청이라니! 멋있어요!

syo 2020-06-13 11:47   좋아요 0 | URL
흥청망청의 멋인가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답댓이 늦었네요......

감은빛 2020-06-11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굳이 아인슈타인을 찾지 않더라도 시간이 상대적이란 것을 깨달아요.
적어도 제게는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리가는 것이 사실인 것 같아요.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거나, 다를 수 있겠지요.

책읽기도 마찬가지로 상대적이겠죠.
누군가는 책이 재미있어서, 또 누군가는 어떤 것을 얻으려고 읽겠지만,
그냥 책이 좋아서, 책을 읽는 행위가 생활이어서 읽는 사람들도 있겠죠.

좋은 책을 만나면 그 자체로 기분이 좋고,
가끔 썩 좋지 않은 책을 만나더라도 그냥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이고.

알라딘에서 syo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너무 좋네요. ㅎㅎ

syo 2020-06-13 11:47   좋아요 0 | URL
매번 좀 더 자주 들어와야지 하면서도
어어어 하는 사이에 일터에서 닷새,
힐링을 외치며 방바닥에서 이틀,
그렇게 일주일이 후다닥 도망치네요.

감은빛님, 건강하시죠? ㅎㅎ

Angela 2020-06-13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기는 왜 하시는지요? 궁금해졌어요^^

syo 2020-06-14 12:07   좋아요 0 | URL
저는 책 읽기를 위해서 책 읽기를 하는 것 같아요 ㅎㅎㅎ
 


아정말아무것도쓸거리가안생기는시멘트빛인생이여

 

 

1

 

초라한 내 자신에 화가 난다. 그런데 그 화를 다른 사람에게 낸다. 최선을 다해 나를 망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인 걸 뻔히 알면서, 누군가 나를 망치고 있다며 스스로에게 건네는 거짓말을 덜컥 믿어버린다.

 

 

 

2

 

간간이 부는 바람이 실어나르는 새소리가 아침 하늘을 가득 채웠고 옥상에서 내려다본 태평동은 초여름 아래서 끝없이 태평하다. 가끔 남쪽 소식이 궁금할 때가 있는데 바라보면 커다란 산이 가로놓여 있어서 그런가, 남쪽으로부터 도착하는 것은 늘 정적과 침묵뿐.

 

언제더라 이 선명한 출근 길

 

 

3

 

같이 사는 녀석은 장맛비처럼 콧물을 흘리는 중인데 대충 휴지를 말아서 콧구멍에 쑤셔놓았다. syo의 전화에는 우리 구 28번째 확진자의 동선과 함께 최초 발현 증상이 콧물이라고 기록된 메시지가 와 있다.

 

가끔 생각하는데, 저놈과 함께 살며 다정함을 유지하려고 힘쓰는 일은 굉장한 정신수양이 된다. 집에서도 단련을 이어나갈 수 있다니, 복지 업무 담당자로서 저런 워킹 호러블을 옆에 끼고 있다는 것은 거대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와행복해미치겠네?

 

 

 

4

 

여름은 처음이 아니지만 회사에 다니는 것은 거의 처음이고, 여름에 회사에 다니는 것은 조금 더 처음이고, 여름에 회사에 다니는 아저씨가 된 것은 완전 처음이라서, 요즘 제일 큰 화두는 바로 냄새.

 

1L에 만 원도 안 하는 저렴이 바디클렌져 바디로션을 내다버리고 mL125원은 줘야 하는 녀석으로 바꾸어보았다. 신발장 옆에 신발탈취제를 비치했고 혹시 몰라 휴대용도 하나 구매하여 스틱향수와 함께 가방에 넣어 다닌다. 여름에는 아무래도 쿨한 향이라기에, 널리 쓰이지만 그리 비싸지 않고 쿨하게 생긴 향수를 하나 주문했고, 땀 냄새를 향수로 덮는 것은 또 다른 대형참사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는 땀냄새 제거 아이템을 따로 하나 샀다. 다이소에서 산 섬유 탈취제는 내다 버리고 있어 보이는 놈을 하나 갖췄으며, 집에서 아저씨 냄새가 날지도 몰라서’(아저씨 냄새 나는 집에 사는 아저씨들은 아저씨 냄새를 맡지 못하는 아저씨들입니다. 이건 과학입니다.) 디퓨저 4개를 들여와서 급한 불을 껐다.

 

사실 세상 모르겠고 나 하나만 챙기자고 들면, 그냥 내 코밑에 슥 바를 고체 향수 하나면 땡인데.

 

자본주의 참 무섭지, 도무지 중간이 없다. 안 하든가, 하려면 부위별로 디테일하게 마련된 상품들을 다 갖추든가, 둘 중 하나의 길을 골라야 한다. 냄새나는 인간이 되지 않으려다가 온갖 냄새를 이고 다니는 인간이 된다. 저 냄새 다 바르고 다니면 그게 사람이냐 화학무기냐.

 

어쨌거나 마음의 가벼움과 지갑의 가벼움이 비례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무거움입니다. 이건 과학입니다.

 

 

 

 

--- 읽은 ---


48. 시장, 세상을 균형 있게 보는 눈 / 김재수 : 91 ~ 192

 

자본에 관한 이런저런 책들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자본은 자본주의 ㅈ까라 그러라는 책이 아니고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하고도 심오한 분석이 담긴 책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알기 위해서 아직도(+필수적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뭐 이런 식의 변론이었다. 좋은 이야기인데, 마찬가지로 주류경제학이며 신자유주의적 학풍이며 이런 것들이 아무리 엿 같고 똥 같고 똥으로 만든 엿이나 엿으로 만든 똥 같은 사람이더라도, 그런 책들을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정치와 경제는 발과 발톱같은 존재라서(누가 발이고 누가 발톱일까), 경제학 책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데, 그게 싫다거나 나랑 안 맞는다거나 해서 대충 읽고 집어던지면 아무 데도 가지 못하니까. 그야말로 균형 있게 보는 눈은 한 권의 책으로 갖춰지는 게 아니라 이 책 저 책 다 보는데서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49. 사회이 고민입니다 / 장대익 : ~ 191

 

장대익 선생님의 책을 싫어하지는 않는데, 읽을 때는 그렇군 그렇군 하며 읽는데, 희한하게 읽고 나면 늘 내가 뭘 읽은 건지 잘 모르게 된다.

 

 


50. 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 / 이현우 : 219 ~ 350

 

요즘 로쟈 선생님의 수업은 어떨까. 직접 들어본 게 5년쯤 되었으니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다를까. 그때 syo가 들은 수업은 러시아 문학하고 노벨상 수상 작품 수업이었는데, 그때 잠깐이지만, 어쩌면 저 사람은 모든 수업이 가능하겠다, 모든 걸 수업으로 가능케 하는 깊이와 폭의 적절 지점을 찾아내는 데는 도가 트셨겠다,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얼핏 난다.

 

 


51. 사자와 생쥐가 한 번도 생각 못 한 것들 / 전김해 : ~174

 

어른이 되고 나서 동화는 아이들의 것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은 그냥 읽는 동화책들을 읽기 위해 어른에게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 ‘아이처럼읽거나, ‘아이 때와는 다르게읽거나 하는 그런 기술. syo는 모든 글을 syo처럼 읽는 고집쟁이기 때문에, 어떤 어려운 책이 뜻밖에 쉬운 반면 어떤 쉬운 책은 지나치게 어렵기도 하다. 호불호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52. 흑인 페미니즘 사상 / 패트리샤 힐 콜린스 : 399 ~ 520

 

말할 수 없이 좋은 책이다. 모두에게 저마다의 것이 있고, 그것을 가져오거나 닮을 수는 있어도 같을 수는 없다. 동의와 공감의 선언을 넘어서, 배워야 하고 훔쳐야 한다.

 

그렇지만, 올해 읽은 여성주의 책들 가운데 가장 재미있었다는 모 회원님의 말씀을 syo가 싫어합니다……. 여러 가지 외적 상황이 겹친 탓이 크겠지만, 굉장히 느리고 고되게 읽히는 책이었다. 빌리 홀리데이가 남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읽는 ---

물리학은 처음인데요 / 마쓰바라 다카히코 : ~ 137

맨 얼라이브 / 토머스 페이지 맥긴 : 57 ~ 152

남자의 자리 / 아니 에르노 : ~ 67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 정희진 : 92 ~ 169

스피노자 / 스티븐 내들러 : 82 ~ 234

다시, 자본을 읽자 / 고병권 : ~ 84

미치게 친절한 철학 / 안상헌 : 141 ~ 310

보라색 히비스커스 / 치마난다 응고지 아디치에 : ~ 116

예술의 사생활 / 노승림 : ~ 177

시작의 기술 / 게리 비숍 : ~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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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6-06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디 제품 끝까지 쓰십시오.
쓰다버리면 아깝고 물도 오염되고. 바디 제품 거기서 거기 아님감요?

올봄에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로쟈님 저의 동네 도서관에 와서 문학 강의하실뻔 했는데
아깝게도 못 들었어요. 강의료까지 다 지불하고 동선까지 다 파악했었는데...
로쟈님 슬슬 강의 다니시는 모양인데 저의 동네 도서관은 다시 안할 모양인가 봅니다.ㅠ
예전에 모처에서 강연하시는 거 들었는데 되게 편하게 잘 하시더군요.

syo 2020-06-07 22:1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어차피 한 번 산 이상, 쓰다 버리나 다 써 버리나 버려지는 제품의 총량은 같으므로 제가 시키는 오염의 총량이 변하는 건 아닙니다..

로쟈님 강의야 대단하지요. 못 들은지 한 세월이라 궁금해졌어요.

반유행열반인 2020-06-06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하늘빛 말갛고 나무도 짙푸른 동네 사시는데 마음은 왜 회색빛이에요...색칠색칠...(바닥 굴러다니는 크래파스 주워다 주섬주섬 칠함...)

syo 2020-06-07 22:19   좋아요 1 | URL
저런 하늘 아주 가끔 등장합니다.
그리고 저런 하늘을 발견하고 잠깐 멈춰서 사진을 찍을 여유는 더 가끔 등장하지요.....

크레파스는 빨강으로 부탁해요.

수연 2020-06-06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이랑 소주 마셔야 하는데.......

syo 2020-06-07 22:20   좋아요 0 | URL
저 눈 이제 거의 완치단계입니다. 으하하하하.
핏기 멸종되면 마셔요 ㅎㅎ

북다이제스터 2020-06-06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크스 형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루종일 직장 생활은 할 말을 없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노답...^^

syo 2020-06-07 22:2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 형님 말도 맞지만, 제가 유독 체력이 부족한 것도 같습니다 ㅎㅎㅎ휴ㅠㅠㅠ

베터라이프 2020-06-06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시네요 쇼님! 방가운 마음에 몇자 적고 갑니다. 여전히 독서생활은 잘 하고 계셨군요. ^^ 날 더운데 항상 건강 잘 챙기세요. 그럼....

syo 2020-06-07 22:21   좋아요 0 | URL
베터라이프님도 날씨, 코로나, 하여간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소서....

무식쟁이 2020-06-07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 산너머 구름까지 닿을 것 같은 출근길이로군요.
3. 확진자가 창궐하는 동네에서 음주 후 씻지도 않고 잠자리에 드는 인간과 15년째 동거중이에요. 진정행복해미치겠어요.

syo 2020-06-07 22:21   좋아요 0 | URL
우리가 행복을 공유하는 사이였군요. 와하하하하.....

감은빛 2020-06-11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터를 다니며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죠.
게다가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한다는 것도 역시.

여름을 맞아 땀 냄새 걱정이 많으신거죠?
비록 일터에서 여름을 맞는 것은 처음이지만,
지금까지 syo님이 보낸 여름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가끔 아침에 걸어서(일부 구간은 뛰면서) 출근하는 날엔 옷이 땀에 흠뻑 젖어요.
그러면 제 땀냄새가 너무 신경쓰이고, 그것 때문에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요.
하지만 일하다가 젖었던 옷이 마르고 나면 또 그닥 냄새가 신경 쓰이지 않더라구요.
일 때문에 만난 다른 사람들도 별로 신경쓰는 것 같지는 않구요.

만약 일터에 샤워장이 있다면 땀 흘린 후 샤워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 참 좋을텐데.
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만, 가난한 인생. 가난한 일터에 샤워장은 불가능하다 싶어요.

syo 2020-06-13 11:49   좋아요 0 | URL
언젠가 죽기 전에 운이 좋아서 뭐라도 제 일터를 꾸밀 수 있게 되면,
샤워장을 설치할까봐요 ㅎㅎㅎㅎ
사우나도...
수영장도....
도서관도....

이거, 다시 태어나야겠네요? ㅎㅎㅎ
 


소진의 어떤 형태

 

 

1

 

어려서는 이 세상의 뒷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구멍을 찾겠다고 그림자를 막대기로 쑤시고 다녔다. 유성 매직을 들고 동네를 싸돌아다니며 눈에 띄는 차마다 보닛에 소용돌이 모양을 그려 넣고는 그 소용돌이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상상을 했다. 동쪽 하늘에 뜬 구름이 바람에 밀려 서쪽 산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해질 때까지 바라보다 발갛게 물든 마음을 안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흐르는 것들은 늘 좋았다. 강이 좋았고 바람이 좋았으며 강가에서 바람맞는 것이 가장 좋았다. 여기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여기보다 늘 저기가 좋았다.

 

어디까지 왔는지를 늘 생각한다.

 

어제와 내일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고 우리가 있는 곳은 결국 늘 오늘이듯이, 우리는 늘 여기에 머물 뿐이고 모든 저기는 도달하는 순간 고개를 돌려 여기가 된다. 어제와 내일도, 거기와 저기도, 결국 오늘 여기를 가꾸는 능력에 발맞춰 채색된다. 어디까지 왔는지 늘 생각하지만, 답은 늘 여기다.

 

 

 

2

 

지난주 초반에 앓기 시작한 눈병이 금주에 정점을 찍고 슬슬 끝물이다.

 

아프다기보다는 불편했다. 붓고 붉은 눈을 하고 동료들과 민원인을 대해야 했고 그 와중에 만만치 않은 양의 육체노동까지 겸했다. 짬짬이 안약을 들이부었으며 부은 것의 두 배를 눈물로 뽑아냈다. 자려고 눈을 감으면 눈이 까끌거려서 짜증이 치밀었고 어찌저찌 참고 잠이 들어봐야 얼마 못 가 굳은 눈곱을 휴지로 닦아내느라 깨어났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혓바늘이 세게 돋아서 물만 마셔도 아팠다. 인간이 말을 할 때 혀가 이 안쪽을 마찰하는 일이 굉장히 잦다는 사실을 아픔 속에서 깨달아야 했다. 대구로부터 동생이 알바를 구하지 못하고 있으며 엄마가 빈혈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병원에 몇 번 다니면서 쓴 진료비며 약값이며가 10만 원에 육박했는데, 내 급여라는 게 이런 식으로 열 번 조금 넘게 돌고 나면 깡그리 사라지는 수준이라서 인생이 참 엿 같았다. 그렇게 지난주는 여러모로 최악의 한 주였고 이번 생에는 희망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날씨가 너무 좋았고, 꽃이 잔뜩 피었고, 나는 바닥없이 지쳐가고 있었다.

 

 

 

3

 

어떤 소진은 건조하다. 슬픔도 분노도 없다. 그냥 비어 있는 시간 속을 지나가는 느낌. 날카롭게 까끌대는 칼모래 주머니에 심장을 넣고 흔들 때 나는 소리처럼, 뾰족하고 외로운 비명을 지르는 마음이 제 비명을 저 혼자 듣는다. 아픈데도 아무려면 어떠냐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 가장 많이 떠오르는 동사는 늦었다‘, 부사는 어차피.

 

 

 

4

 

그냥 하루 쉬면서, 멍하니 책이나 읽다 보니 괜찮아졌다. 눈은 참을만하고 혀는 다 나았다. 동생은 성에 안 차지만 일단 뭐라도 하기로 한 모양이고 엄마는 철분제를 먹기 시작했다. 나는 아침이면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어떻게든 8시 전에 회사에 도착하기 위해 출근 전 시간을 조율한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안부 문자 보내는 걸 자꾸 잊을 만큼 정신없이 일하고, 10시 전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게 퇴근 시간에 신경을 쓴다. 늘 자던 시간에 잔다. 늘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나기 위해서.

 

나는 늘 여기고, 늘 오늘이다. 좋건 나쁘건, 모든 의미에서 그렇다. 점점 더 그걸 명확히 알게 된다.

 

 

 

 

 

--- 읽은 ---

 

45. 식물의 책 / 이소영 : 154 ~ 287


가볍다.

 


46. 인생이 왜 짧은가 / 루키우스 아이니우스 세네카 : 130 ~ 278


스토아학파의 철학 사상은 철학보다는 자기계발서처럼 다이렉트로 인생에 뭔가를 떠먹여 주는 데가 있다. 오히려 동양 사상에 가깝다. 그들이 이상으로 여기는 인간상이란 이른바 아파테이아를 실현한 인간인데, 그게 무슨 유교의 군자나 도교의 진인처럼 도무지 저게 되나 싶을 정도의 탈인간적 허무맹랑함을 자랑한다. 실제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니 믿긴 믿겠는데. 오늘 저녁에 죽을 건데 점심쯤 내기바둑 두고, 내 목 따러 온 망나니한테 이 바둑판 내가 이긴 거 니가 증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에게 위대하다는 말 말고 무슨 말을 더 해드릴 수 있을까요.


 

47. 대량살상 수학 무기 / 캐시 오닐 : 236 ~ 390


만사에는 명과 암이 있는 법인데, 그것과 관련하여 사람들은 종종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이 있지.’ ‘모든 게 다 일장일단이 있는 법.’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거야.’ 따위의 명제를 한 번 주워섬기는 데서 만족하고 만다. 그런 진리를 아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거짓말이 아니다. 의미 없는 말일 뿐. 극단적인 중도주의와 맹목적인 중용의 사고가 형편없는 뻘소리로 끝나고 마는 때가 잦은 이유는 그것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좋은 핑곗거리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진리를 입밖에 내뱉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렇다면 변화의 방향은 어디로 잡아야 하며 그 과정은 어떤 식으로 펼쳐나가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빅데이터라는 물건이 우리에게 가져올 거대한 효용과 치명적인 해악이 나란히 드러났다면, 득이 실보다 많으니(혹은 그 반대이니) 계속 가야한다(그만 가야한다)든가, 심지어 어차피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라는 무색투명한 헛소리나 하고 말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득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 실을 줄일 수 있는지, 득실을 교차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불합리한 정황이 발생하지는 않을는지, 그런 것들을 꼼꼼히 따져보는 일이 중요하다. 훌륭하다.

 

 

 

--- 읽는 ---

시장, 세상을 균형 있게 보는 눈 / 김재수 : ~ 91

맨 얼라이브 / 토머스 페이지 맥긴 : ~ 57

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 / 이현우 : 115 ~ 219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 정희즌 : ~ 92

스피노자 / 스티븐 내들러 : ~ 82

미치게 친절한 철학 / 안상헌 : ~ 141

흑인 페미니즘 사상 / 패트리샤 힐 콜린스 : 177 ~ 339

콜로노스의 숲 / E. M. 포스터 : 124 ~ 249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 최현우 : ~ 60

어중간한 나와 이별하는 48가지 방법 / 쓰루다 도요카즈 : ~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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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5-24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코로나로 마스크쓰고 업무처리하시는데 더해서 눈까지 아프셨군요. 그 와중에도 책을 읽으시니 세종대왕의 책사랑에 못지 않습니다. 모쪼록 푹 쉬시고 건강한 한 주 보내세요!^^:)

syo 2020-05-24 19:2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멘탈이 제일 큰 문제였는데 언제 그랬냐는듯이 다 나았어요 ㅎㅎㅎㅎ
눈은 아직 벌겋긴 한데 차츰 괜찮아지네요. 또 한주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읽어야지요.
호랑이님도 늘 건강 챙기시구요^-^

북다이제스터 2020-05-24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량 살상수학무기> 저도 읽어봤지만, 어떤 세상이 될지 잘 모르겠고 궁금합니다.

syo 2020-05-25 07:20   좋아요 0 | URL
이런 주제의 책이 차츰 더 나타나지 않을까요. 그러고 나면 뭐든 좀 선명해질 것 같아요.

반유행열반인 2020-05-24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맨얼라이브 진작 사 놓고 보지는 않은! 역시 잘 써. 눈 얼른 나으셔서 자주자주 글 올려주세요. 쾌유를 기원합니다.

syo 2020-05-25 07:21   좋아요 1 | URL
맨 얼라이브 참 좋아요. 독창적인 문장들이 잔뜩!!

2020-05-24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5 0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20-05-25 0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안과 다녔습니다. 몸이 아프면 사소한 일상도 버거워지지요. 쾌유하시기를.... 게다가 우리들은 읽는 자들이니 눈이 천금입니다.

syo 2020-06-06 13:29   좋아요 0 | URL
열흘을 넘겨 댓글을 다네요.... 인생....

정말 눈 아프고 나니까 눈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구요.
blanca님도 눈 보중하소서...

비연 2020-05-25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끝물이라니 다행이에요... 안 아프기요.

<대량살상 수학무기>를 저도 읽었었는데, 꽤 괜챦은 책이었죠. 요즘 하도 빅데이터 빅데이터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아서 헷갈리기 쉬운데 중심을 잘 잡아주는 책이기도 했구요. 뚜렷한 해결책이랄까. 문제의식을 던지고 끝난 듯 해서 좀 찝찝했지만, 무슨 일이든 만병통치약은 없을 거고 허다한 결론도 쉽게 나진 않을 테니, 좀더 기다려봐야할 것 같아요.

사는 건, 살수록 녹록치 않은 것 같으나.. 또 그렇게 살아지는 거겠죠. 오늘도 일상처럼.

syo 2020-06-06 13:30   좋아요 0 | URL
이런 책이 좀 더 많이 나와서 사람들이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관심이 생겨야 연구도 늘어나고.
아무래도 빅데이터 뭐 이런 놈들은 진짜 우리네 삶에 직격타를 날리는 녀석들이니까요.

그러나저러나 삽니다.....

추풍오장원 2020-05-26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캐시 오닐의 책 읽어봐야 되겠네요. 아즈마 히로키 일반의지 2.0 과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일 산 넘어 산은 아닌데 산 다음엔 강도 나오고 그다음엔 바다도 나오고 사막도 나오고 그런 것 같네요..

syo 2020-06-06 13:31   좋아요 0 | URL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이라고 하더라구요.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일반의지 2.0> 그 책 매번 도서관에서 손끝으로만 스치고 지나갔는데.....

댓글이 늦었습니다.

감은빛 2020-05-26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서 제일 아프고 짜증나는 것이 눈병인 것 같아요.
눈병에, 혓바늘에, 고향에서 올라온 힘빠지는 소식들에, 그 어려움 속에서도 지속해야 하는 일상에.
얼마나 힘드셨을지 저는 온전히 짐작할 수 없겠지만,
제 기준에서 조금은 공감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최근 다시 시작된 관절 통증에 힘들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기분이 축 처져 있었어요.
잠시 몸살 기운을 앓기도 했구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한 달만 푹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차라리 코로나19에 감염되면 합법적으로 2주간 쉴 수 있다는 생각도 잠시 해봤지만,
2주간 아무도 만나지 않고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건 견디기 어렵겠구나 싶었어요.

곧 5월이 가고 6월이 오겠네요.
매일 매일이 어렵고 힘든 날이겠지만, 그 안에서 작은 행복을 찾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syo 2020-06-06 13:32   좋아요 0 | URL
아니나 다를까 6월이 왔고, 6월이 오고 나서야 댓글을 달았네요 ㅠㅠ
일이 바쁜 것도 있지만 바빠봐야 감은빛님 만한 것도 아닌데, 그냥 사람이 단련이 안 되어 있어서 조금만 힘들어도 온갖 여유가 없어지나봐요.

벅찬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 찾는 방법, 나중에 한번 꼭 가르쳐주세요.
 

 

나무

 

 

1

 

올해 여름은 두 걸음 다가왔다가 한 걸음 물러나는 식으로 오려나 보다. 비 그치고 새 소리 들리는 가운데 사뭇 쌀쌀하다.

 

 

 

2

 

일은 일이고 삶은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때 세상은 지금보다 간단했다.

 

 

 

3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특산종 관목의 이름과 같은 표기의 이름을 가진 사람을 오래 사랑했었는데, 식물 책을 읽다가 그 나무를 만나면 끝없이 아련해진다. 1속에 1종밖에 없다는 진귀한 그 나무에서는 개나리를 많이 닮은 꽃이 핀다. 나는 그 꽃의 꽃말보다 아름다운 꽃말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벌써 아득해졌지만, 그 사람과 같이 있는 순간은 늘 그 꽃말과 같은 순간이었다. 이제 와 그립다 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생각한다.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떤 꽃말이었는지를.



학명 Abeliophyllum distichum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겨울이 오면 그 숲에 '아침의 병듦이 낯설지 않다' '아이들은 손이 자주 베인다'라는 말도 도착할 것입니다 그 말들은 서로의 머리를 털어줄 것입니다 그러다 겨울의 답서처럼 다시 봄이 오고 ''이나 '우리'나 '엄마같은 몇 개의 다정한 말들이 숲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 먼 발길에 볕과 몇 개의 바람이 섞여 들었을 것이나 여전히 그 숲에는 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박준」 부분 


  

 

4



인종, 젠더, 계급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흑인 여성의 위치가 지니는 특수성이 있고,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란 그 특수성 위에서 발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이 있(어야 했). 언어는 권력의 도구이므로 권력의 중추에서 멀리 서 있을수록 자신의 위치를 설명할 도구는 빈곤하다. 송곳으로 나사를 돌릴 수는 없기에, 그들은 송곳을 내던지고 드라이버를 만들거나, 심지어는 송곳으로 박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나사를 발명해야 한다. 발명의 어머니는 필요라서, 필요는 자기와 닮은 모양의 발명을 낳는다. 그렇게 발명된 언어는 자신의 어머니인 필요와 닮을 뿐더러, 거슬러 올라가 그 필요의 어머니인 억압, 결핍, 박해 등과 닮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다른 사상과 완전하게 닮을 수도, 완벽하게 호환될 수도 없다. 그럴 수 있었다면 도리어 이 책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언뜻, 흑인 여성이 압도적으로 적은 이 사회에 사는 우리가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 관한 독서를 통해 과연 무엇을 얼마나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 의심하게 한다.

 

어느 나라의 법도 모든 특수한 상황을 상정하지는 못한다. 조문의 유추 적용과 유사판례를 통해 특수성에 대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어떤 특수성을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다른 특수성을 위한 혜안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치면 세상 모든 텍스트가 유추와 적용의 양분이 된다. 굳이 이 책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이 책의 가치는(아직 절반도 못 읽었으나), 그러니까 흑인 페미니즘 사상과 상당히 멀리 서 있는 한국인-남성으로서 이 책을 읽어 볼 명분은,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세한 균열을 조율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을 확인해보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경험상 그 조율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고, 늘 망했다.

 

흑인 여성과 한국 여성이 겪는 억압의 닮은 모습에 집중하여 여성 일반이 겪는 고통에 대한 결론으로 나아가게 되면, 어쩌면 그것은 반쪽짜리 독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면, 이 책을 흑인 여성이 겪는 경험의 특수성에 대한 증언으로만 인식하고 오늘날-우리 사회를 위해 변용할 만한 여지가 그다지 없는 책으로 치부하며 몇 개의 밑줄만 건지고 돌아선다면 당연히 그것도 온전한 읽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줄을 잘 타야 한다.

 

요는, 이 책은 읽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껏 우리가 읽어왔던 다른 책들에 비해 학문적으로 난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얘들은/도 이래?” 양쪽 모두가 위태로울 수 있어서.

 

 

 

 

--- 읽은 ---



42. 더 저널리스트: 카를 마르크스 / 카를 마르크스 : 98 ~ 190

 

평전을 읽어보면, 마르크스는 거의 모든 장르의 글쓰기에 한 번쯤은 도전해본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문학 쪽으로는 그다지 큰 소질이 없었다는 평이 있긴 한데, 읽어보진 않았지만 글쎄, 수제비 맛집에서 평균 이하의 칼국수를 먹기는 힘든 법이니까. 어쨌든 마르크스는 정말 글을 잘 쓴다. 솔직히 syo가 마르크스에 흠뻑 빠진 것은 그의 사상보다 문장에 두들겨 맞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 마르크스의 저널리즘은, 아니 저널리즘 속의 마르크스는 당연히 철학서나 정치 팸플릿 속의 마르크스보다 담백하고 직선적이다. 그것은 저널리즘이 어떤 장르인지(어떤 장르여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훌륭한 검객이라면 찌르는 칼로도 벨 수는 있겠으나, 강한 적을 맞닥뜨리면 찌르는 칼로 찌르고 베는 칼로 베어야 이긴다.

 

 

 

43. 쓰레기책 / 이동학 : 138 ~ 273

 

어마어마한 추천에 비해 어마어마한 통찰이 있지는 않다. 문제의식은 뚜렷하나 한칼이 없다. 저자는 눈을 뜬 사람이지만 다른 이들의 눈을 뜨게 할 힘은 조금 부족하다. 훌륭한 운동가가 될 수는 있겠지만 매혹적인 선동가가 되기까지는, 앞서 나갈 수는 있겠으나 끌고 나갈 수는. 좋은 책이지만 매력적인 책일 수는.

 

 


 44. 대도시의 사랑법 / 박상영 : 181 ~ 341

 

syo의 사랑은 대부분 대도시에서 시작해 대도시에서 끝나거나 작다고 해봐야 광역시 규모에서 끝나거나 했다. 대도시에서 사랑한다고 대도시의 사랑법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모양.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다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닌 모양. 특정한 모양의 사랑이 대도시의 사랑법을 혼자 독점하거나 전유를 주장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대도시에서 시작하는 사랑과 대도시에서 끝나는 사랑들, 특히 끝나는 모든 사랑들을 찬찬 들여다보면서, 어쩌면 끝나기 위해서 시작하는 것이 대도시의 사랑이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해보면서, 어떻게든 대도시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대도시의 사랑법이 진짜 있는지는 몰라도, 사랑법의 대도시는 저기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내 머리맡에 앉은 저 대도시에는 정말 사랑도 사랑법도 너무 많다. 이러니 내가 저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 읽는 ---

식물의 책 / 이소영 : ~ 154

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 / 이현우 : ~ 115

인생이 왜 짧은가 / 세네카 : ~ 130

대량살상 수학무기 / 캐시 오닐 : 123 ~ 236

흑인 페미니즘 사상 / 패트리샤 힐 콜린스 : 89 ~ 177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 정희진 : ~ 92

스피노자 / 스티븐 내들러 : ~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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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0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1 0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0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1 0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0-05-10 16: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에서 삶으로 회복하는 시간을 만들기 어려운 요즘이네요. 왜 이렇게까지 간단치가 않은 건지. 이 어려운 걸 간단하게 풀고/혹은 풀지않은 채로 고단히 살아가는 인류는 어때먹은 종족인 건지. 가끔 눈물나요 ㅠㅠ..

syo 2020-05-11 07:24   좋아요 0 | URL
울지 마... 울지 마... ㅜ_ㅡ

또 봄. 2020-05-19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말을 알고 나무이름을 보니 달리 느껴지네요.
syo님 글은 마음을 간지럽게 하는 뭔가가 있어요.
멋지심!

syo 2020-05-20 18:36   좋아요 0 | URL
또봄님 오랜만입니다.
저도 자주 못 들락날락하느라 더 뜸했네요. 시국은 이래도 봄은 좋응 봄이지요?? 건강 조심하세요^-^
 

 

스탠바이

 

 

1

 

시작과 동시에 금방 끝날 것만 같아 사람 불안하게 만들던 연휴가 금방 끝났다. 여지없다. syo는 마카롱을 씹어먹으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네 개만 사도 두 사람이 호주산 소고기로 한 끼 든든하게 해결할 수 있는 가격이 나오는 미친 간식 마카롱은 커피와 같이 먹으면 맛나다. 일주일 전쯤 얼음 곽을 구매한 덕에 커피는 아이스커피. 어쩐지 비리다. 마카롱이 있어서 참 다행이야.

 

부지런한 나의 룸메 이 얼음 곽을 비틀고 흔들어 통에다 얼음을 모으고 있다. 가끔 저렇게 시키지도 않았는데 성실할 때, syo는 많은 것들을 용서하게 된다. 그의 무심함, 그의 불결함 등등의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저 정갈한 연속 동작을 좀 보라지. 얼음 곽을 비튼다. 큰 그릇에 얼음을 쏟는다. 얼음 통에 붓는다. 얼음 통의 뚜껑을 닫는다. 싱크대 수돗물을 튼다. 얼음 곽을 가져다 댄다. 곽에 물이 가득 차자 뚜껑을 닫는다. 그리고 그걸 냉동실에 넣고 앉았다……. 그래. 아이스커피가 비린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커피 머신에 수돗물 넣어서 만든 커피에 수돗물 얼린 얼음을 띄워놓고 고급지다 폼난다 아주 좋다고 마셨던 모양이다.


저놈의 무심함과 불결함을 용서하기가 힘들다. 마카롱, 마카롱…… 마카롱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고 한다. 살인을 면하는 데 드는 비용이 단돈 8,000. 의 목숨값은 헐하다.

 

 

 

2

 

저와 제 가족 중 누구 하나 크게 아파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은 본인한테는 행복한 일이겠지만(그걸 알긴 알는지), 같이 사는 사람한테는 불쾌한 일이 되기도 한다. 코로나 사건이 터지고 한 달이 지나도록, 저 친구는 집에 돌아와도 손을 씻지 않았다. 그냥 옷 갈아입고, 컴퓨터 하고, 드러누워 있고, 그러다 요리나 하게 되면 흐르는 물에 잠깐 손을 적셨을 뿐. 쟤가 마스크라는 걸 차고 다니기 시작한 시점에, 세상에는 이미 마스크 5부제가 실행되고 있었다. 옆에서 보면 정말 무서운 인간이 아닐 수 없다. 아파 본 적이 없어서 아픈 게 얼마나 무섭고 지치는 일인지 쟤는 모른다. 위생 관념 없는 인간으로 35년을 살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그가 전생에 쌓았을 공덕에 무한한 갈채를 보낸다.

 

 

 

3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과 그 윤곽선을 그려나가는 데서 책은 시작한다. 그것은 지난한 일이다. 증거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내놓아야 하는 법이다 보니,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척이나 쉽다.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 하나도 없는데. 인간이여, 인간의 불상사란 내가 내 주변이 어떤지 다 알고 있을 수는 없는데도 나만은 그걸 다 안다고 착각하다가 터지기 마련이라오. 각설.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해 본 이들이 듬직하다. 운이 좋아 온몸에 이런저런 증명들을 바르고 태어나는 바람에 증명하는 방법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의 말보다 무겁고 무섭다.



가난한 사람들이 현실에서 겪는 좌절은 지식과 정보의 부족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비유하자면 그것은 조명의 문제이지 사물의 문제가 아니다지식과 정보량을 늘린다고 삶의 자세가 달라지지는 않는다지식의 축적이 곧바로 좋은 삶으로 연결되지 않음은 인문학자 자신의 삶이 보여준다게다가 장애인들과 함께 공부하다 보면 장애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제도와 관행이 무엇보다 우리 시대의 인문 지식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그리고 인문학자 자신이 그런 지식의 생산자라는 것도 알게 된다.

고병권묵묵 


이는다시 한번 맑스의 문장으로 말한다면프롤레타리아에게서 물질적 무기를 발견하고 프롤레타리아에게 정신적 무기를 제공하는 것그리하여 기존의 세계 질서를 해체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창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프롤레타리아와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새로운 생산의 방식을 창조하는 것그것이 바로 철학이 비-철학(프롤레타리아!)을 통해 사유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다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가자신을 탄생시켰고 자신을 말 그대로 무산자(프롤레타리아)로서 재생산하는 자본주의의 외부를 창조하는 것.

이진경자본을 넘어선 자본


 

 

4

 

아무것도 증명해보지 못한 사람보다 더 어려운 적은 피나는 노력으로 한두 가지를 증명해 본 사람 중에서 나온다. 내가 직접 증명한 것들이 내가 아직 증명하지 않은 것들의 증명이라고 믿는 사람들. 내가 증명한 것에 비하면 네가 증명할 것은 작고 가벼운 것일 뿐이므로 나는 증명 없이 너를 증명할 수 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5

 

야구 시작한 모양이다. 봄이군.

 

 

 

6

 

연휴라고 간만에 여유롭게 책을 좀 읽을 수 있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급한 대로 어느 정도 수혈은 된 듯.


 

"가장 큰 고민은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거야아마 내가 망가지면 그건 책을 못 읽어서야.“

김필균문학하는 마음

 

 

 

7

 

철학책을 (다시) 시작할 때는 스피노자가 좋다.

 

스피노자 하면 기냥 스티븐 내들러 선생님


플라톤이랑 아리스토텔레스는 위대하긴 한데 낡을 대로 낡아서, 거기서 시작하면 오히려 그들의 위대함을 느낄 수 없고, 다른 철학책을 읽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쳐다볼 때에서야 간신히 위대하다. 그 다음으로는 데카르트가 눈에 띄긴 한다만, 21세기 사람들이란 정규교육만 마쳐도 데카르트 쌈 싸드시는 회의懷疑의 인간이 되는데, 심지어 여기가 코리아인지라 우리는 기본적으로 회의/의심을 넘어 불신의 달인이 되었다는 증거로 주민등록증을 받는다. 그 바람에 데카르트는 연구의 대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독서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삐꾸다. 멍뭉이는 기계라는 둥,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 빼고 모든 전제를 싸그리 의심해가며 내린 결론이 신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는 둥, 읽고 있으면 회의/의심을 넘어 불신이 생기게 만드는 희한한 재주가 있다. 무엇보다 감정과 욕망을 똥으로 본다.

 

여혐을 하면서도 여혐인 줄 모르고, 자본의 방식에 편승하여 살아가는 스스로를 인정하기 위하여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이들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과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그때 그가 가장 입에 많이 올린 단어가 객관적’, ‘중립적’, ‘논리적이었으므로 syo는 그날 이후로 그 단어들이 기본적으로 역겹다. 그리고 그가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며(그것이 그 나이에 그만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며) 같잖게 데카르트의 이름을 입에 올린 이후로, syo는 데카르트가 해롭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같잖은 인간에게는 모든 철학이 해롭다.

 

스피노자를 읽기 전에 스피노자를 읽어도 되는 사람이 되어야지…….


마부가 대답했다나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나는 음식이지 생명이 아닙니다저 소년이 우뚝 선 것처럼 당신도 혼자 힘으로 서십시오나는 당신을 구해드릴 수가 없습니다왜냐하면 시는 정신이기 때문입니다시를 숭상하는 사람은 정신과 진실 속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_ E. M. 포스터천상의 합승 마차

 

어떤 사람이 경계하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로부터 작은 기술이라도 한 가지 재주를 지니고 있으면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없게 된다스스로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를 믿게 되면 점점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겨난다이렇게 되면 작게는 욕과 비난이 온몸을 덮고크게는 재앙과 환난이 따르게 마련이다이제 그대가 날마다 문자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힘써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자료를 만들자는 것인가?" 이에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말했다. "감히 경계하지 않겠는가."

이덕무이목구심서 4

 

 

 

--- 읽은 ---


40. 사랑 밖의 모든 말들 / 김금희 : 128 ~ 231

 

말들이 있었던 것이다. 풀어놓기 전에는 미처 몰랐지만, 안에 있음으로써 삶을 충만하게 하고 충만함으로써 안을 부딪는 말들이 있었던 것이다. 생의 어느 곡면을 휘감고 도느라 알록달록 물든 말들. 어느 날은 젖었다가 어느 날은 메말랐다가 꾸글꾸글 주름으로 남은 말들. 종이 한 장 마주하고 앉은 어떤 날, 맑았거나 흐렸거나 했을 어떤 시간에 나는 뭔가 말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이 뭔가 말했고, 그 순간 내 삶이 다른 쪽을 가리키며 회전했을 것이다. 자기 안에 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다시 그것을 모르던 때처럼 살 수는 없다. 결코.

 

사랑 안에서든, 밖에서든, 누구도 모든 말들을 다 할 수는 없어서, 이 책이 있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내가 말할 수 있다. 내가 어떻게 무엇까지 말할 수 있게 되더라도 여전히 이 책은 존재할 수 있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을 겨냥한다면, 우린 모두가 이 책을 함께 읽어야 하고, 써야 한다.

 

 


41.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 : ~ 96

 

그게 있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교과서로 배웠던 시를 교과서 밖에서 만나는 일은 오묘한 느낌을 준다. 학창 시절 싫다고 싫다고 손사래 쳐도 지겹도록 달라붙던 그 아이를, 교복을 벗고 다시 만났는데 그 찰랑대는 숏컷하며, 봄빛 같은 분홍분홍 입술하며, 왼손으로 머리를 넘기는 자태하며, 우와, 얘를? 얘를 깠다고? 내가? 하게 되는 그런 느낌 비슷하달까.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그 비슷한 일조차 없었다…….

 

 

 

--- 읽는 ---

더 저널리스트: 카를 마르크스 / 카를 마르크스 : ~ 98

대량살상 수학무기 / 캐시 오닐 : ~ 123

쓰레기책 / 이동학 : ~ 138

철학이 필요한 순간 / 스벤 브링크만 : ~ 89

흑인 페미니즘 사상 / 패트리샤 힐 콜린스 : ~ 89

대도시의 사랑법 / 박상영 : 70 ~ 181

어느 작가의 오후 / 페터 한트케 : ~ 82

당신에게 베토벤을 선물합니다 / 임현정 : ~ 99

콜로노스의 숲 / E. M. 포스터 : ~ 124

에티카를 읽는다 / 스티븐 내들러 :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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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5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06 0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20-05-05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단순한 인간인지라 마카롱 하나에 무장해제되는 경험이 많아 syo님 글 읽고 죄송한데 빵 터졌어요. 그분.... 후덜덜 정말 무서운 사람인데요. 저도 주변에 아픈 사람이 있고 ˝나는 아닐거야˝가 얼마나 오만인지 경험으로 알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한편 부러우면서 세상 무섭습니다. --;; 사실 걱정하고 배려하고 준비하는 마음이라는 게 일면 그 이면의 아픈 경험이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서.. 당사자로서는 참 괴롭지요. 압니다...

syo 2020-05-06 07:23   좋아요 0 | URL
역시 마카롱인가요. 좀 줄여야되는데..... 웬만하면 그러려니 그냥 넘어가는 사이지만 감염병 시즌에 저러니 빡치더라구요.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아무 일 없이 끝났지만 저러다 쟤 언제 한 번 크게 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Angela 2020-05-05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삼님과 단짝인게 보여요~

syo 2020-05-06 07:24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지옥에서 온 우정

북프리쿠키 2020-05-05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다는 게 수혈함에 빗댄 건 정말 공감합니다 ^^ 서울 공무원 하는 게 여간 쉽지 않지요. ? 연휴의 끝밤은 너무나 과롭습니다.ㅎ 건투를 빕니다!!

syo 2020-05-06 07:24   좋아요 0 | URL
쿠키님 감사합니다!! 피충전 마쳤으니 또 달려야겠네요...

비연 2020-05-06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을 다시 시작할 땐 스피노자군요. 한 권 푱 보관함에 넣습니다..

syo 2020-05-06 19:21   좋아요 0 | URL
스피노자가 최고죠..... 드루와 드루와요

라로 2020-05-06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로즈 마카롱!! 아니면 얼그레이,,,,이 글은 저를 무지 슬프게 해요...여기서는 도대체가 없는 것이 왜 이리 많은가요? 한숨 신세계 백화점에서 먹었던 마카롱이 떠오르는 아주 슬픈 글이에요. 그래서 스피노자도 슬프게 기억 될 것 같아요....

syo 2020-05-06 19:2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마카롱 하루 두 개씩 먹어야지 해놓고 한끼 두 개씩 먹어서 없앴어요....

2020-05-18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0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rabelle 2020-05-2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카롱을 좋아하시는군요 :) 프랑스도 마카롱은 비싸서 먹어본게 손에 꼽네요 리뷰 재밌게 읽고있어요. 힘내세요!

syo 2020-05-24 18:56   좋아요 0 | URL
네... 그냥 다들 좋아하는 분위기라서 저도 분위기 따라 좋아하는 것으로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 것도 같고....
아무튼 비싸잖아요. 작작 먹어야겠어요.
Mirabelle님,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5-21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4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