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거처
1
도저히 말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크나큰 말들, 인간이 지닌/지녀야 할 것들 중에서 차마 그 처분을 결정하기 가장 어려운 것들을 둘러싼 거대한 말들 앞에 섰을 때, 그간 말해야 할 것들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진정 말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말이 아닌 것들만 말하면서 말인 것들을 말하고 산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 동물일 것이다. 진짜 말 앞에서 크게 한 번 침묵했던 사람들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곳에서 나올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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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유키코에게 마음을 고백한 장소도 그곳이었다. 시험공부를 하다가 그 앞에서 만나 샌드위치를 나눠 먹고 있을 때였다. 배가 고팠는지 한창 열중해서 먹던 유키코가 멀리 보이는 교내의 숲과 지금 그들의 발 앞에 놓인 땅을 손가락으로 이으며, 날아온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심지 않아도 저 숲에서 자라는 것들이 날아와 여기에 자리 잡는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흘에 한번씩 뒤엎고 갈아가며 필요 이상의 개간 작업을 한 공간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언가들이 다시 자라고 있었다. 날아와서, 행로와 목적도 없이 날아와서 여기에.
그러니 그날의 사랑한다는 말은 그 살아 있는 것들의 이동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_ 김금희, 「마지막 이기성」
2
남의 큰 아픔보다는 나의 작은 아픔이 오래 기억에 남고, 또 나의 작은 아픔보다는 나의 큰 아픔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지만, 사실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내 어떤 작은 불행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 겪었던 고통보다 더 오래 남기도 하고, 또 내게 아무 상관이 없는 어떤 남의 티끌 같은 불행이 내가 오래 앓아오고 있는 잔병보다는 더 크고 긴 아픔으로 남기도 하는 것이다. 아픔의 생명력은 그 크기나 거리와 비례관계가 없다. 아픔은 가끔 생물이다. 그게 우리 곁에 얼마나 오래 남아 있는지, 어떻게 다시 생각나는지, 혹은 잊히는지, 그런 건 종종 우리 소관을 벗어난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_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3
다가서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가갈 수밖에 없는 사랑과, 다가갈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다가가지 않으려 애쓰는 사랑이 번갈아 일어날 때, 우리가 사랑에게 하는 것들과 사랑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들.
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있어도 그 쾌감은 자족(自足)을 위해 체계를 만들며, 그 맛의 긍지 속에서 궁지(窮地)로 졸아든다. '질투'스러운 감정들이 변명 없이 증명해주는 것처럼, 욕망은 점(유)성(占性)으로 치닫고, 그래서 점성(黏性)으로 무장한다. 물론 리비도(libido)의 자폐적 순환을 막는 방법이 없진 않다. 그러나 이른바 리비도의 그 악명 높은 점착성(Klebrigkeit) 탓에 사태는 자주 혼란스러워지고 악순환의 고리 또한 여간 성가셔 보이지 않는다. 애착은 생명의 진화사 일반에서 어떤 자리와 방향을 차지하고 있을까?
_ 김영민, 『집중과 영혼』
4
그냥 그대로 되어가는 것들이 있다.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는데 저절로 움직이면서 만들어지는 마음들이다.
나는 그날 콘라딘이 내게 무슨 말을 했고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많은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우리가 젊은 두 연인처럼 한 시간쯤 길을 따라 오르내렸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불안해하며 서로를 어려워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것이 겨우 시작일 뿐이며 이제부터는 내 삶이 더 이상 공허하거나 따분하지 않고 우리 둘 모두에 대한 희망과 풍요로 가득차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_ 프레드 울만, 『동급생』
5
뱉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말은 사실 뱉기 전에 돌이킬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던 말일 확률이 높다. 그런 말은 전조 없이 단번에 탄생하지 않는다. 단지 내 마음이 그 말을 빚으러 가는 걸음걸음을 내가 몰랐거나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 너를 잘 모른다고 생각하며 헤어졌지만 후에 돌이켜보면 나를 잘 안다고 믿었기에 헤어진 것이었을 때가 많은 것도 실은 같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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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 역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두죠." 그가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압니다. 내게 필요한 건 우정이 아닙니다. 내 인생에는 단 하나의 행복만이 가능합니다. 그건 당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요, 사랑……입니다."
"사랑……." 그녀는 천천히 마음속으로 반복해보았다. 그리고 문득 레이스를 풀어낸 그때, 덧붙여 말했다. "그 말이 내게 너무나 많은 걸 의미하기 때문에,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의미하기 때문에, 그말을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_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6
지금 이 순간 우리더러 보라고 머나먼 자리에서 빛을 쏘아대던 저 별의 십억 년 동안 이어진 노력을 생각하듯이, 나란히 숨 쉬는 모든 순간이 실은 몇만 광년을 걸어 여기에 도착했음을 늘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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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_ 문태준, 〈산수유나무의 농사〉부분
--- 읽은 ---
205. 그러라 그래
양희은 지음 / 김영사 / 2021
나의 하루 속에 내게 아무것도 아니며 나를 위한 그 무엇도 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들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하다가 아찔해지곤 한다. 생은 짧고, 아무리 늘여도 부족할 것이고, 책은 많고, 아무리 읽어도 넘쳐날 것이라서, 맥없이 낭비한 시간들이 마른 가랑잎처럼 과거를 굴러다니다 바스라지는 모습을 보면 아, 벌써 내 인생도 가을인가, 한겨울에 후회하기 싫으면 이제라도 슬슬 이파리 관리 좀 들어가야 하나, 아, 이번 생은 너무 늦었나, 아닌가, 아직 할 만한가, 막 이러면서 고뇌한다. 하지만 고뇌하는 중에 청소기는 밀어야 하고, 그릇은 닦아야 하며, 쓰봉은 내놓아야만 한다. 이럴 시간 없는데, 이럴 시간 없는데…….
어떤 경지에 도달하면 마침내 알게 되는가 보다. 청소기를 미는 동작 하나, 수세미로 그릇을 훔치는 방향에 관한 미세한 습관 하나가 어떤 의미가 되는지를. 매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말고는 달리 이유가 없는 매일의 사소하고 소소한 일거리들이 내게 무엇이 되어 주는지를.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하니까, 언젠가는 알게 될 거라고 하니까.
청소기를 돌리고 냉장고와 창틀에 쌓인 먼지를 훔쳤다. 쓰레기봉투를 묶었다.
내 부엌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밥을 해 먹는 일, 제철 채소를 사다가 나물을 무치고, 맑은 국을 끓이고 제철 생선 두어 마리를 맛나게 굽는 일. 그게 무슨 대수냐고 웃을지는 몰라도 내게는 중요하다. 일 바깥의 일상을 소중히 하는 것, 그것이 내 일의 비결이다.
_ 양희은, 『그러라 그래』
206. 백의 그림자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
- 일독(롱타임노씨)
- 재독(210618)
이 누나는 왜 맨날 사람을 울리고 그래. 진짜. 에이. 어른 남자가 막 울고 그럼 안 되는 건데.
안 되나요.
안 되지 않을까요.
안 되는군요.
안 되면 안 울 건가요.
안 우는 것도 마음대로 안 돼요.
안 되면 그냥 울어버려요.
울면요.
우는 거죠.
우는 거구나.
네, 하고 내가 말했다.
울면 우는 거죠.
그러네요, 하고 내가 대답했다.
계속 걸었다.
이따금 발밑에서 축축한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무재 씨, 하고 내가 말했다.
섹스 말인데요, 그게 그렇게 좋을까요.
좋지 않을까요.
좋을까요.
좋으니까 아이를 몇이나 낳는 부부도 있는 거고.
글쎄 좋을지.
궁금해요?
그냥 궁금해서요.
여기서 나가면 해 볼까요.
나갈 수 있을까요.
언제까지고 숲이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나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고 싶은데요.
좋아하면 되지요.
누구를요.
나를요.
글쎄요.
나는 좋아합니다.
누구를요.
은교 씨를요.
농담하지 마세요.
아니요. 좋아해요. 은교 씨를 좋아합니다.
_ 황정은, 『백의 그림자』
207. 프로페셔널 스튜던트
김용섭 지음 / 퍼블리온 / 2021
전문성을 쌓고 대체 불가능한 인간이 되어라. 이게 핵심이다. 그런데 그게 핵심이 아닌 자기계발책도 있었던가. 코로나도 때리고 AI도 때리고 시대는 이렇게 막 변하는데, 그때마다 이 ‘새로운’ 시대, ‘전례 없는’ 위기를 넘기는 법을 알려준다고 나서는 책들이 언제나 같은 이야기만 반복한다면, 그리고 그 이야기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면, 대체 자기계발서는 왜 필요한 거고, 나는 왜 잊을 만하면 이 장르를 읽고 그러는 걸까?
뻔해서 어딜 가져와도 구구절절 뻔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한 대목 가져와보자.
당신의 10년 후, 아니 당신의 1년 후 어떤 기회가 올지 어떤 위기가 올지 모른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변수도 많아져서 더 이상 위기를 미리 감지하고 피해가는 건 불가능하다. 위기를 피해가는 게 아니라 이젠 위기를 맞더라도 빨리 대응해서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다. 결국 새로운 전문지식을 계속 배우는 능력과 함께, 위기대응력, 순발력, 생존력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프로페셔널 스튜던트의 태도다.
_ 김용섭, 『프로페셔녈 스튜던트』
---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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