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온도 차 무엇
1
나의 그리움이 누구 하나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아닌지 모른다
물빛처럼 평등한 옛날 얼굴들이
꽃나무를 보는 오후에
나를 눈물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믐밤 흙길을 혼자 걸어갈 때 어둠의 중심은 모두 평등하듯
어느 하나의 물이 산그림자를 무논으로 끌고 들어갈 수 없듯이
_ 문태준,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날> 부분
우연히 만난 시가 퍽 아름답다는 것은 잘 살고 있다는 뜻이다. 꾸준히 시집을 읽으며 절반은 놓쳐도 나머지 절반에는 붙들린다면, 내 삶이 그래도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다. 책장에 줄 세워놓은 저 나침반들. 저 쨍한 거울들.
2
정말 뜬금없는 이유로 자기가 묵고 있는 집의 하녀 포티스에게 음심을 품은 여행자 루키우스. 어떻게 한번 해보려고 아주 씩씩하게 부엌으로 돌진, 요리중인 포티스를 발견한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나의 귀여운 포티스만이 주인을 위해 군침 도는 냄새를 풍기며 싱싱한 쇠고기와 순대로 맛좋은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리넨 옷을 입고서 발간 천으로 가슴 주위를 동여매고 있었다. 그녀는 꽃다운 손으로 냄비 안을 휘저으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또한 팔이 가볍게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엉덩이도 부드럽게 요동치면서 몸 전체가 관능적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인상 깊어서 나는 멍하니 선 채 정신없이 감탄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침내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렇게 말했다.
_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황금 당나귀』
자, 무려 1세기의 작업 기술을 한번 감상해보자.
"안녕, 포티스. 냄비를 젓는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야. 또 엉덩이가 움직이는 모습도 아름다워. 그러니 당신의 고기 수프는 얼마나 맛있겠어! 당신의 고기 수프에 손가락을 적실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행복하고 축복받은 사람일 거야.“
_ 같은 책
통하겠냐?
그러자 예쁘고 괄괄한 포티스가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아궁이에서 떨어지세요. 아무리 약한 불이라도 불똥이 튀면 당신은 화상을 입을 수도 있어요.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 불꽃을 끌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요. 내가 요리를 잘한다고요? 물론이죠. 어떻게 요리해야 사람들이 군침을 흘리는지 잘 알죠. 사람들의 입맛을 잘 알죠. 그리고 부엌 아궁이뿐만 아니라, 침대 시트 속에서도 어떻게 뜨겁게 달구는지도…….“
_ 같은 책
통했다?!
물론 이건 저따위 고기 수프에 손가락 적시는 헛소리로만 이루어낸 것은 아니었고, 처음 루키우스가 이 집에 묵으러 왔던 날 자리를 봐주던 포티스에게서 이미 시그널을 확인했던 것. 그리고 그 이후에는 머리칼 페티시가 있는 루키우스의 머리칼 찬양 드립이 길게 이어지다가 이렇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포티스는 노련하게 머리를 치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머리칼은 자연 그대로의 생머리였지만, 그것만큼 매력있는 모습은 없었다. 그녀는 길고 진한 머리칼을 땋아 목덜미 위에서 리본으로 동여맨 다음 목까지 느슨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근질거리는 욕망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머리칼을 머리 위쪽으로 땋아 올린 부분에 열정적인 키스를 했다. 그러자 그녀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면서 곁눈으로 나를 훔쳐보았다. 그리고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왜 이래요, 어린애같이! 지금 당장은 달콤하지만, 씁쓸한 뒷맛은 생각 못하네요. 조심하세요. 오늘은 꿀맛을 보았지만, 머지않아 씁쓸한 맛을 삼키게 될지도 몰라요.“
_ 같은 책
포티스, 침대 시트 달구는 멘트로 훅 땅기더니 이번에는 확 밀기 스킬 시전. 루키우스는 환장.
”아, 아름다운 내 사랑이여! 그렇게 아름다운 입에서 조심하라는 말이 나오다니……. 당신의 키스만 있으면 나는 당장 당신의 불에 구워질 준비가 되어 있어.“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싸며 그녀가 항복할 때까지 키스를 퍼부었다.
_ 같은 책
아, 루키우스 선수, 나는 불고기가 될 거예요 어택 들어가네요. 포티스 선수는 과연 이 막무가내 몸통박치기 공격을 어떻게 받아낼 것인지?
그러자 그녀는 내 포옹에 화답하듯이 나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숨소리에서는 계피 향내가 났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입술을 내 입술에 갖다 대고서 자기 혀를 슬쩍 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_ 같은 책
네, 포티스 선수, 대담한 반격입니다. 루키우스 선수 지금 그로기 상태에 빠졌는데요.
마침내 서로의 혀가 섞여 나오는 천상의 음료를 맛보자, 나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아, 포티스! 죽을 것 같소. 당신이 나를 어여삐 여기지 않는다면 나는 죽은 목숨과 다름없어.“
_ 같은 책
아아아, 루키우스 선수 비굴한 기술을 선보이는데요. 자고로, 네가 지금 어찌저찌 해주지 않으면 나는 죽어버릴 테야- 하는 남자는 추후에 쓰레기로 밝혀지는 경우가 잦단 말이지요. 루키우스 선수, 자충수를 둔 것일까요? 자살폭탄 테러에 포티스 선수는 어떻게 반응할지?
그러자 그녀는 내게 숨막히게 키스를 퍼부으면서 대답했다.
”죽는 것 따위는 무서워하지 말아요. 당신이 조금 더 버틴다 하더라도 죽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내 모든 영혼을 받쳐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정말이지 당신을 사랑해요. 난 완전히 당신의 여자가 되었어요. 이제 이런 우리의 흥분을 더 이상 미루지 말아요. 횃불을 켤 시간이 되면 당신 침실로 가겠어요. 그러니 방으로 가서 오늘 밤에 벌어질 전쟁에 대비하세요. 난 밤새도록 당신과 격렬한 길고 즐거운 전쟁을 벌일 거예요.“
_ 같은 책
아, 그게 또 먹힙니다아아아아! 어제 처음 본 사람에게 모든 영혼을 ‘받쳐’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포티스 선수네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오늘 밤에 전쟁이 벌어지긴 벌어질 모양입니다. 선수들 최선을 다하시길. 오늘의 중계는 여기서 마치며 끝 곡으로 임재범의 <너를 위해> 띄워드립니다. 지금까지 해설에 syo, 중계에 syo였습니다. 여러분, 전쟁에 대비하시길.
♬
내 거친 생각과(당신의 고기 수프는 얼마나 맛있겠어!)
불안한 눈빛과(아, 포티스! 죽을 것 같소)
그걸 지켜보는 너으어으어(당신이 조금 더 버틴다 하더라도 죽지는 않을 거예요)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난 밤새도록 당신과 격렬한 길고 즐거운 전쟁을 벌일 거예요)
전쟁 양상에 대한 충실한 묘사도 있더라구요. 세심하다 후후후.
--- 읽은 ---
211. 서평 쓰는 법
이원석 지음 / 유유 / 2016
- 일독(1708xx)
- 재독(210619)
서평가로서 책 속의 정보를 대할 때에는 언제나 그 정보의 본질, 배경, 맥락, 함의 등이 얼마나 잘 소개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 책에 대해 서평을 쓰려 한다면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확실하지 않거나 의혹이 생긴다면 관련된 자료를 대조해 가며 읽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확장된 인식을 가지고 서평을 써야 잠재 독자가 그 책을 읽을 때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_ 이원석, 『서평 쓰는 법』
자료 대조. 저런 대목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일독할 당시, cyrus님과 오프라인 왕래가 없었던 syo는 ‘이원석’이 cyrus 님의 필명인가 했다. 당연히 아니었지만. 재독을 해봐도 그런 오해를 할 법했구나 싶다. 서평에 대한 관점도 문체도, 이원석 선생님과 cyrus 님은 좀 닮은 것 같다. 알라딘에서 짬 좀 찬 사람이라면 알라딘의 서평 기계 하면 바로 cyrus 님을 떠올릴 거라고 생각한다. 가끔 보면 정말 ‘만든’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서평을 써내시거든.
그렇다면 이 책이야말로 cyrus식 머신 서평으로 가는 디딤돌이 될 것인가?
물론 syo는 그 길을 가지 않을/못할 것이다. 이번 생은 너무 멀리 돌아왔다…….
그나저나 cyrus님 요즘 뜸하군. 돌아와요.
212. 사생활들
김설 / 꿈꾸는 인생 / 2021
참은 고통이 있었고 누른 울분이 있었던 것 같다. 전자는 글쓰기의 연료가 되고 후자는 엔진이 되어 작가 김설 선생님이 탄생한 듯. 자기 글쓰기의 연료와 엔진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오래 쓴다. 반대로 말하면 오래 쓰는 사람은 자신을 되짚는 과정을 한 번은 반드시 거치는 것. 어느 순간부터 ‘나는 왜 쓰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자주하기 시작했다면, 지금 알이 흔들리는 중인 것. 톡, 하고 껍질이 깨지면, 그 안에서 쓰는 내가 노란 부리를 내민다.
정말 말도 안 되게 빛나는 문장을 만나는 순간이 나는 너무나도 좋다. 그런 문장은 마치 "당신의 삶이 지금은 바닥을 치고 있지만 언젠가는 달라질 테니 잘 참고 견디라"고 나에게 해 주는 응원 같다. 어려서부터 책은 나에게 매우 중요했고 지금도 그렇다. 책을 읽으면 속이 든든해졌으니 나에게 책은 밥이었다. 가난한 내게 허락된 유일한 사치는 책을 읽는 시간이었고. 버릇처럼 끼고 잠들었고 서점에 들르게 되면 뭐라도 들고 나왔다.
_ 김설, 『사생활들』
213. 다시 시작하는 독서
박홍순 지음 / 바이북 / 2016
- 일독(1703xx)
- 재독(210620)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해로운 책인가? 새로운 발상이 없거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사실상 없다면 해로운 책에 속한다. 옹호든 반박이든, 즉 나의 생각과 일치하든 안 하든 의미 있는 발상이 있거나 논의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면 '음란한' 성행위를 매개로 하든 폭력을 매개로 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형식이 소설이든 논문이든, 문장과 표현이 쉽든 어렵든 하등 문제 될 게 없다.
_ 박홍순, 『다시 시작하는 독서』
syo는 박홍순 선생님을 참 좋아하지만 이 선생님은 가끔 사람을 숨 막히게 하실 때가 있다- 로 시작하는 리뷰를 쓰는 중이다. 확실히 좋은 책이긴 하다. 이런 책을 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옳고 좋은 말들은 빠짐없이 잔뜩 들어 있는 책인건 분명한데, 이런 책을 내야겠다는 마음을 왜 먹으셨는지, syo는 늘 그게 궁금하다.
--- 읽는 ---
애덤 스미스 구하기 / 조나단 B. 와이트
조각가 / 스콧 맥클라우드
마션 / 앤디 위어
시를 잊은 그대에게 / 정재찬
전쟁은 끝났어요 / 곽재식 외
밤을 걷는 밤 / 유희열,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무자비한 알고리즘 / 카타리나 츠바이크
처음 회계 / 편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