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斜線

 

 

 

1

 

은행이 익어가고 밤은 제법 쌀쌀하다. 약간 가을이고 가을 syo가 조금씩 오고 있다. 가을은 늘 책을 많이 읽는 계절이었다. 왠지 그냥 그랬다. 산책길도 커피도 가을에 더 맛있고, 하늘도 연인도 가을에 더욱 예쁜 법. 들여다보고 만질 것들이 잔뜩 있는 가을, 나의 가을. 아름다운 문장을 만나면 여름보다 겨울보다 조금은 더 오래 머물게 되는 아름답고 책 읽기 좋은 나의 가을. 사람은 겨울에 나이를 먹지만 읽고 쓰는 syo의 성장판은 항상 가을에 열리지.

 

1식어갈 때마다 씩 빗나가는 사람이 되는 옹골찬 가을이기를.



    

초보적인 배움은 무언가를 모방하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진정한 배움은 모방을 넘어서, 나와 전혀 닮지 않은 그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할 때 나 자신에게서 저절로 발생하기 때문인가. 나는 한 번도 인력거(친한 친구의 이름이다.)를 따라 하고 싶은 적이 없었다. 나는 그 점이 의아했다. 나는 늘 누군가를 어느 정도 따라 하고 싶어 하는데 말이다. 인력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많은 걸 배웠는데, 친구에게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친구와 비슷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친구와 나 사이의 빈 공간에서 나의 것도 친구의 것도 아닌 새로운 무언가가 발생하고 우리의 영혼이 그 빈 공간에서 무언가를 먹고 잡초처럼 쉭쉭, 자라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친구인 자들은 빈 공간에서 무언가를 배운다.

_ 문보영, 일기시대

  

  나의 목소리가 매일

  대기에 가까워진다.

 

  내 입술은

  내 목소리 바깥의 것들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아, 하고 입술이 동그래질 때

  어,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_ 하재연, <인어 이야기 2> 부분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완만한 고개에 올라서자 멀리 떨어진 곳에 가로등이 보였다. 세 개의 가로등이 또 다른 모퉁이를 향해 점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로 내려갔다. 불빛의 조그만 언저리 바깥은 대부분 어둠에 잠겨서, 공중에 떠 있는 길을 둥실둥실 가는 듯했다. 귀신일까요, 우리는, 귀신일지도 모르죠, 이 밤에, 또 다른 귀신을 만나고자 하는 귀신, 하고 말을 나누며 탁하게 번진 달의 밑을 걸었다.

어둠에 잠겼다가 불빛에 드러났다가 하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노래할까요.

_ 황정은, 백의 그림자

 

 

 

2



 

이탈리아에서는 여성 해방 운동이 좌파 및 학생 운동과는 다른 고유한 자율성을 구축했다. 그러면서 좌파와 학생 운동 진영에서도 분명 논의하고 있던 문제, 즉 사회 차원에서 어떻게 투쟁을 조직할지를 두고서는 그들과 충돌했다. 좌파가 제안하는 사회 투쟁은 공장 투쟁의 기계적 확장과 투영에 그치고, 이 투쟁을 이끄는 중심인물은 여전히 남성 노동자였다. 여성 해방 운동은 다른 무엇보다도 가정을 사회적 차원으로 간주하며, 여성을 사회 전복의 중심인물로 본다. 그리하여 여성들은 스스로를 자신이 놓인 정치적 틀의 모순점으로 상정하고, 정치 투쟁과 혁명 조직을 보는 전체 관점의 문제를 다시 열어젖힌다.

_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페미니즘의 투쟁, 1. 여성과 공동체 전복이탈리아판 서문 (24-25)

 

이 꼭지의 요지는, 가정이 사회로부터 분리/고립되어 있거나 혹은 열위적/종속적 구조물이라는 구도(이 구도에서 여성 해방은 가정으로부터 탈출하여 사회로 진입하는 개별 여성 단위에서 이루어지는데 그친다)를 거부하고, ‘가정자체를 사회적 차원으로 해석하겠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가정에 사회적 의미를 새로이 부여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가정이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었음에도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호도되어 온 사회적 특성의 존재를 드러내겠다는 선언이다. 그렇다면 그 특성, 가정은 사회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정으로부터 박탈하고 독점한 그 잊힌 차원의 좌표축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무엇이 사회를 사회로 만드는가. 그 힌트는 앞쪽 문단에 제시되어 있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이 소비의 중심이자 숨은 노동력 예비군인 건 맞지만, 우리는 가족이 그에 앞서 생산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가족이 자본주의를 위해 생산하지 않고 가족이 사회적 생산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여성은 사회적으로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집 안의 여성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없다고 가정해, 이 여성들을 생산자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게 차라리 더 낫겠다. 하지만 만약 당신의 생각이 자본주의에 꼭 필요하다면, 생산 거부, 즉 노동 거부는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핵심 수단이 될 수 있다.

_ 같은 책, (23)

 

생산. 사회는 생산하는 곳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회는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곳이다. 그래서 첫 번째 질문,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곳이 사회라는 이 순환적 정의 속에 숨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 또한, 가정에서의 노동 거부가 곧 사회적 생산의 거부로 이어진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질문, 그러니까, 어떤 생산의 중단이 끼치는 사회적 영향력을 측정하면 그 생산이 사회적 생산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뉘앙스에서 두 번째 질문이 생겨난다. ‘사회적 생산을 판단하는 방법은 저런 귀류법歸謬法과 유사한 방식(없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뿐인가? 이것은 여러 판단 방법 중 하나에 그치는가? 그리고 이와 연결되어 나타나는 세 번째 질문, 만약 사회적 생산을 판단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면, 가정 내의 여성의 생산적 노동이 사회적 노동인지를 판단할 때 다른 어떤 방법이 아닌 귀류법적 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는 어떤 메타적 억압이 존재하는가?

 

이 세 질문을 염두에 두고, 두 번째 꼭지 여성과 공동체 전복을 읽는다.

 

 

 

3

 

의 첫 소개팅은 미래의 어느 맥주맛을 위한 한 꼬집 농담으로 마무리된 듯하다.


 

"길게 늘어진 숲속의 산꿩 꼬리 기나긴 꼬리…… 정말이야, 밤이 깊으면 시간이 안 가. 죽죽 늘어져. 그러면 내가 살아온 날도 떠오르고 날 떠난 사람도 떠오르고. 긴긴밤을 그리며 나 홀로 뒤척일까…… 슌짱, 인생은 고독한 거야. 이만큼 살았는데도 어째서 이렇게 밤마다 외로울까?"

  그날 밤 나는 독립한 따님이 쓰던 이층 작은방에 누워 잠을 청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치사짱의 쓸쓸한 모습이 나의 미래 같기도 하고, 모두의 인생 같기도 했다. 인간은 저마다 긴긴밤을 뒤척이며 홀로 걷고 있구나. 그런, 슬픈 동물이구나.

_ 정수윤, 날마다 고독한 날

 

"사람이 진짜 아는 건 자기가 길들인 것뿐이야. 이제 사람들은 아무것도 알 시간이 없어. 가게에서 다 만들어진 물건을 사거든. 하지만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친구가 없지. 친구를 원한다면, 나를 길들여줘!"

  "어떻게 하면 되는데?" 어린 왕자가 물었다.

  "참을성이 아주 많아야 해. 먼저 풀밭에 그렇게, 나랑 조금 떨어져서 앉아. 나는 너를 슬쩍 쳐다볼 텐데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야. 그 대신 매일 조금씩 더 가까이 앉는 거야."

_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 읽은 ---


347.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임진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

 

- 일독(1809xx)

- 재독(210910)

 

지금 이 마음. '오늘의 나'에게 딱 맞는 '오늘의 빵'을 찾는 마음. 쟁반에는 아직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풍요롭다. 이대로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빵집을 나간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던 회의 시간의 내가 떠올랐다(물론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내 손으로 고를 수 없고 새롭게 시작할 수도 없는 인생 같았는데 그 순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나답다고 느껴진다.

  '당연히 이쪽이 맞아.'

  아직까지 빈 쟁반을 든 처지이면서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되었든 내 삶의 온갖 선택 사항들도 이런 마음으로 고를 수는 없을까?

  '아직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쟁반을 든 나'라는 인물로 한 발 한 발 나긋하고 점잖고 구수한 당당함을 지니고 싶어졌다.

  물론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하지만, 오늘 하루쯤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 정도는 '어차피 안 고를 빵'이라고 여겨도 되지 않을까.

  어떤 빵집에서는 빈 쟁반인 순간이 오히려 반짝이니까.

_ 임진아,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일독 때는 임진아 선생님의 문장에 굉장히 반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으니까 그때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조막조막 귀엽긴 한데, 내가 그렇게 환장하며 좋아했었다고? 흐음….   


커피를 내리고, 빵을 고르고, 이런 소소하고 일상적인 활동으로 스스로를 톡톡 두드려보면서 이 순간의 내가, 오늘의 내가, 이달, 올해의 내가 무엇을 바라며 어디에 서 있는지를 점검하는 일계속 자기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좋다. 그런 사람을 닮고 싶다.

 

 

 


348. 붉은 칼

정보라 지음 / 아작 / 2019

 

실은 표지에 확 끌려서 읽었다. 


그래서 그녀는 붉은 비단 칼집 안에 숨겨진 칼날을 소년에게 보여주었다.

  소년도 제국인들이 그러하듯 총은 알았으되 칼은 알지 못했다. 길고 가느다란 칼날이 배 밑바닥의 어스름한 불빛에 빛나자 소년은 넋이 나간 듯 매혹되어 손가락으로 만지려 했다. 그녀는 소년이 다칠까 봐 깜짝 놀라서 내민 손을 얼른 붙잡았다.

  그것이 처음이었다. 소년의 손은 단단하고 거칠었으며, 따뜻했다.

  소년의 입술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어둡고 차가운 배 밑바닥에서, 소년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붉은 비단 칼집에 감싸인 칼 곁에 누웠다. 소년은 그녀의 상처와 흉터와 흔적들을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소년을 향해 몸을 열었을 때 소년은 몇 번이나 그녀에게 괜찮은지, 정말로 괜찮은지, 진심으로 원하는지 되풀이해서 물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웃으며 그렇다고, 괜찮다고, 원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소녀는 소년을 뜨겁게 껴안았다. 소년은 격렬하고 절박했고 그녀를 받아들이는 행위가 마치 쾌락이 아니라 고통인 것처럼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녀가 소년에게 괜찮은지 물었고 소년은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소년은 우주선에서 내리자마자 죽었다.

_ 정보라, 붉은 칼

 

요런 대목이 괜찮았다. 뜨거운 순간조차 맺음이 차가운 문장. 소설의 대부분은 전쟁 및 전투 신인데, 그보다는 사랑하고 주장하는 부분이 읽기 좋았다. 얼개는 신박함에 무릎을 탁 칠 정도는 아니었다.

 

 

 


349. 모 비아토르의 독서노트

이석연 지음 / 와이즈베리 / 2015

 

독서는 모험과 낭만이라는 꿈을 향해 성실성과 결단력으로 인간 정신의 전역을 활보하고 측량하는 영혼의 고고학이자,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찾아 떠나는 내면의 여행입니다. 우리 시대의 석학 이어령 선생은 독서는 씨뿌리기이며, 변화이며,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한 권의 책을 읽은 사람과 백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의 인생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같아서도 안 됩니다. 모험과 도전, 꿈과 낭만과 용기를 찾는 정신은 내면의 여행인 독서와 온몸으로 떠나는 독서인 여행으로부터 나옵니다.

_ 이석연, 호모 비아토르의 독서노트

 

나도 나만의 독서노트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던 적이 있긴 하다. 왜 포기했더라. 그전에, 그걸 왜 만들기로 했더라.

 

독서에 대한 믿음이 저렇게 확고한 사람들은 멋있다. 하지만 그저 그런 마음만 가지고 어느 수준 이상의 책이 써지는 것은 아닌 듯. 독서에 대한 믿음에 더해 읽고 쓰기까지 잘하는 사람은 부럽다. “내면의 여행인 독서와 온몸으로 떠나는 독서인 여행이라는 말은 내게 이석연 선생님이 멋있음을 넘어 부러움의 겨드랑이를 살짝살짝 건드리는 사람임을 알려주는 표현이다.

 

 

 

--- 읽는 ---

소오강호 3 / 김용

이까짓, / 써니사이드업

냄비는 둥둥 / 김승희

페미니즘의 투쟁 /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일기 시대 / 문보영

냉장고를 여니 양자역학이 나왔다 / 박재용

진보의 상상력 / 김병권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 마리암 마지디

Chaeg 2021.7.8. / ()(월간지) 편집부

Now Write 장르 글쓰기 1 : SF 판타지 공포 / 낸시 크레스

 




댓글(34) 먼댓글(0) 좋아요(5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시무스 2021-09-10 21: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삼님의 연애기는 이 한문장으로요?ㅠ

syo 2021-09-10 21:30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ㅋ 망했어요......

막시무스 2021-09-10 21:32   좋아요 3 | URL
으~~~~~~~ 오늘 밤은 맥주 안마실라고 했는데 제가 대신 위로주 마셔드리겠다고 꼭 전해주십시요!ㅠ

syo 2021-09-10 21:33   좋아요 4 | URL
네, 막시무스님은 대신 위로주 마셔주시고, 저는 대신 연애를 해줄 생각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scott 2021-09-10 21: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삼님 등장 ㅎ 한꼬집 농담 ㅜㅜ 담번엔 꼬옥 !

syo 2021-09-10 21:31   좋아요 4 | URL
제놈도 이를 악 문 모양입니다 ㅎㅎㅎㅎㅎ

다락방 2021-09-10 2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삼님 왜.. 🥺

syo 2021-09-10 21:33   좋아요 2 | URL
어제였던가 카톡으로 통보받았어요...
아까 퇴근해서 지금 2시간동안 말 한마디를 안하고 있다 ㅋㅋㅋ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09-10 21: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지요?ㅎㅎㅎㅎㅎㅎ
재독에서 실망한 느낌은 왠지 몇 년 흐른 후 첫사랑을 우연히 만난 느낌? 내가 얘를 그렇게 사랑했다고???ㅎㅎㅎ
가을 syo님 기대합니다!!

syo 2021-09-10 21:47   좋아요 3 | URL
가을을 위한 쓸쓸 에너지 충전중입니다.
겁나 뜨겁게 호호 불어가면서 연애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17년째 솔로 생활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글을 뽑아내는 가을 syo가 온다!

반유행열반인 2021-09-10 21: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번 가을은 털갈이 없이 무탈한 나날 보내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ㅎㅎㅎ

syo 2021-09-10 21:52   좋아요 4 | URL
가을 털갈이 안 한지 오래입니다!! 제가 무슨 털짐승도 아니고 🐕

반유행열반인 2021-09-10 21:53   좋아요 2 | URL
그럼 물고기입니까 비늘짐승?!?! 날짐승??ㅎㅎㅎㅎ

syo 2021-09-10 21:57   좋아요 3 | URL
제가 바로 거두지도 말라는 검은 머리 짐승입니다! 👦🏾

반유행열반인 2021-09-10 22:00   좋아요 2 | URL
그 말씀 거두소서 ㅎㅎㅎ 흰머리가 보입니다….

syo 2021-09-10 22:01   좋아요 3 | URL
들켰군 🧑‍🦳

오늘도 맑음 2021-09-10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 너무 예쁘네요. 정말 가을이에요~^^

syo 2021-09-10 23:49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맑음 님께도 늘 쾌청하고 좋은 가을 되시기를^-^

페넬로페 2021-09-10 2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맥주 한 캔 마셨는데 한 캔 더 따야겠어요^^
삼님 소식 듣고요~~
가을이네요**

syo 2021-09-13 20:40   좋아요 1 | URL
三의 저 비루한 인생이 비루할 때마다 맥주를 드신다면 알콜 중독이 생기실지도 모릅니다.
한 캔만 하세요 ㅎㅎㅎㅎ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구요^-^

행복한책읽기 2021-09-11 0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는 글 마지막 문장. 훔치겠음^^

syo 2021-09-13 20:40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공짜예요.

책읽는나무 2021-09-11 05: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나?...
노랫말이~ㅜㅜ
쓰라리겠지만 툭툭 털고 담번엔 꼭!!!

syo 2021-09-13 20:4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쟤는 쓰라린데 저는 웃습니다.
다음이라고 뭐 그리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습니다만 조금은 나아지겠지요 지도 사람인데-

단발머리 2021-09-11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기시대> 나두 집에 있어요. 읽지는 않고 있지만, 집에 있기는 하다고요 ㅎㅎㅎ <페미니즘의 투쟁> 쇼님의 질문들 좋아요. 다만, 그 밑에 질문에 대한 답도 좀 달아두시라~~~~ from 답을 모르겠는 어떤 사람

syo 2021-09-13 20:41   좋아요 0 | URL
<일기시대> 좋아요. 너무 잘 써서 나는 쓰지 말아야 되나 또 혼자 진지하게 고민함.....😣
그 질문에 답을 찾으려고 읽고 있어요.... 답이.... 나오겠죠??

페크pek0501 2021-09-11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임진아 님의 글 좋은데요. - ˝오늘 하루쯤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 정도는 ‘어차피 안 고를 빵‘이라고 여겨도 되지 않을까.˝ 재밌는 표현 같아요.

저도 독서노트를 갖고 있어요. 어떤 때는 3분의 2를 읽고 더 이상 안 읽어도 될 책을 독서노트에 적어 넣기 위해 완독을 하는 경우가 있어요. 책 번호를 매기거든요. 번호의 숫자가 올라가는 걸 보는 게 뿌듯하답니다. ^^

syo 2021-09-13 20:4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한다 하는 독서가들은 독서노트를 가지고 있는 법인가요.....
그렇다면 저는 그런 훌륭한 걸 쓸 일이 없겠어요 🤣

그레이스 2021-09-11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모 비아토르‘라는 말도 좋고,
‘한권 읽은 사람과 백권 읽은 사람의 인생이 같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 🌒 ...🌓... 🌔... 🌕... 🌖... 🌗... 🌘
책을 읽습니다^^

syo 2021-09-13 20:43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 이야, 달빛배치 정성스럽다.....
좀 감동 받아서 오래 쳐다봤어요 ㅎㅎㅎ 저런 구성도 가능하군요!

감사합니다^-^

stella.K 2021-09-11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좋군요!

syo 2021-09-13 20:4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산책갔다 돌아오는 길에.

라로 2021-09-11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뭡미까? 사진도 잘 찍는 거에요??!!!
저의 독서노트는,,,음 말을 말자..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syo 2021-09-13 20:4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겁나 땀 삐질삐질 흘리며 언덕 올라오다가 정상에서 띡 마주친 광경이어서 그냥 띡 찍었어요. 띡띡. ㅎㅎ
 

 

초겨울사거리 6

 

 

 

오목한 것이 있어서,

 

그 안으로 너와 내가 들어가고, 다른 것들도, 예를 들면, 바람과 그늘과 새소리도 들어가고, 키스와 건널목과 벚꽃잎도 들어가고, 시간과 중력도 들어가고, 9월도 들어가고, 소매를 걷어붙인 처음 보는 셔츠와 비 오는 날의 맛이 나는 커피 두 잔도 들어가고, 목소리와 미소로 흥건한 오르막과 내리막들도 들어가고, 낮과 밤과 모든 만져지는 것들과 만져지지 않는 것들이 다 함께 빙글빙글 말려 들어가는 오목한 것이 있어서,

 

그 부드러운 경계에 서면 사건의 지평선에 올라선 빛처럼 모든 것들이 그 안으로 안으로 쏟아지듯 허물어지듯 되돌아가듯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그런 크고 오목한 것이 만약 우리에게 있어서,

 

들숨 날숨 한 번씩 오가는 시간이면 우리가 충분하게 가득 채워낼 무한하고 오목한 것이 있어서, 우리가 제일 먼저 그 안에 있어서, 쏟아지듯 허물어지는 모든 것들을 다 받아내며, 다 비벼내며, 바람이 만드는 그림자를 새소리에 얹어내며, 건널목마다 벚꽃잎 모양의 입술 자국을 찍어내며, 시간이나 중력이나 9월처럼 알쏭달쏭한 것들도 어떻게든 한아름 껴안아내며, 만져지지 않는 것들을 만지지 않은 날 밤에는 만져지는 것들을 서로 만지고, 만져지는 것들을 만지지 못한 날 밤에는 만져지지 않는 것들을 함께 만질 수 있다면, 그런 아늑하고 오목한 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영영 그 안에서 나오지 않아도 우리는 좋아서,

 

 

 

그래서 우리는 늘 시작해버리고 만다. 그게 무엇이든. 어떻게 되든. 사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지금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악의? 그까짓 것들.

_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

 

쇼바는 고개를 돌려 슈쿠마의 얼굴이 아닌 신발을 보았다. 그가 슬리퍼처럼 신는 낡은 모카신으로, 뒤축의 가죽은 항상 접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에 쇼바가 조금 실망한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지그시 힘을 주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말할 필요는 없어." 그녀가 다가앉으며 말했다.

  그들은 아홉 시까지 그렇게 함께 앉아 있었고, 그러자 불이 들어왔다. 길 건너편 집의 현관에서 몇몇 사람들이 손뼉 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텔레비전들이 커졌다. 갔던 길을 돌아오던 브래드포드 부부는 아이스크림 콘을 먹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쇼바와 슈쿠마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어 둘은 일어나서 슈쿠마의 손이 여전히 쇼바의 손에 감싸인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_ 줌파 라히리, 일시적인 문제

 

타협하는 사람만이 '창조 이전과 같은 카오스인 사랑의 신비'에 상처 입지 않는다. 즉 그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신 그들은 이 세상에 받아들여지고 이 세상의 인습에 의해서 지지되고 오래 살 수가 있다.

  그러나 무서운 사랑의 정열에 몸을 태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서로가 자기의 초월을 상대방에게 맡겨 버리려고 생각하고 또한 그것을 영원화하려는 무모한 의도를 갖는다.

_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읽은 ---



337. 동네 헌책방에서 이반 일리치를 읽다

윤성근 지음 / 산지니 / 2018

 

헌책방이나 동네 서점을 운영하는 이야기를 엮은 책에는 고난과 역경, 무심한 편견의 공격, 수지타산의 어두운 수렁과 그로 인한 방황에 대한 이야기가 반드시 들어있었다. 그런 글을 읽으면 꺼질 듯 말 듯한 초를 손바닥으로 겨우 감싸고 바람 부는 길을 조심조심 걸어가는 마음이 된다. 꺼지지 마요, 망하지 마요, 힘을 내요……. 하지만 기도로 배가 부르면 세상 만사 걱정이 없겠지. 결국, 책을 덮을 때는 아, 이래도 되는가, 책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여 책으로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물심양면의 포화를 한껏 맞아가며 깎이고 바스라지는 세상이, 살만한 세상인가- 하며 혼자 착잡해지곤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좀 다르다. 역경? 편견? 적자? 맞아, 그런 거 다 있지. 하지만 나는 달린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고, 누군가는 가야 할 길이니까. 달리는 내가 기껍다. 으하하하하, 위대할손 나의 끈기!!!!! 이런 패기가 문장 문장마다 깃들어 있어서, 독자가 지치지 않는다. 그게 이반 일리치 덕분일까?

 

이러나 저러나 독자로서 할 수 있는 말은 결국 선생님 화이팅- 이긴 하다.

그런데 가까이서 본 풍경은 조금 전과 완전히 달랐다. 꽃들은 바람이 부는 결에 따라 계속해서 흔들렸다. 아무것도 없는 듯 보였던 그곳엔 벌과 나비,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곤충들이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지만 이 거대한 풍요로움의 일부분이기도 했다. 나는 그것들을 마주하며 처음으로 '평화로움'이라는 한 단어를 떠올렸다. 이 평화로운 풍경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끊임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생명들로 가득한 시끌벅적한 곳이었다.

  살아오면서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내가 바라보는 풍경 속으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저 이 멋진 풍경을 멀리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에 그 속에 깃든 수많은 비밀들을 외면했던 것이다. 이것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결론에 닿았다. 그 후로 나의 목표는 '평화'가 되었다. 평화는 정지된 세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축제와도 같은 것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터전을 그런 풍경으로 만들어 볼 수는 없을까? 내 삶의 목표를 '통장'이 아니라 '꽃밭'으로 정해도 좋지 않을까?

_ 윤성근, 동네 헌책방에서 이반 일리치를 읽다

 

 

 


338. 관자

신창호 지음 / 살림 / 2013

 

어릴 때는 노자 장자가 흥미로웠는데, 나이가 드니까 관자 묵자 한비자가 매력적이다. 지키는 새끼는 없고 지키라고 윽박지르는 새끼만 잔뜩 있던 게 공맹의 도가 지닌 역사다 보니 그쪽으로는 아무래도 눈길이 잘 가지 않고. 뭐든 새로운 주제에 흥미가 생기면 일단 살림지식총서 있는지 살펴보는 건 습관이다. 다 읽고 관자를 들였다.

 

 

 


339. 벽화

김영산 지음 / 창비 / 2004

 

  언제부터인지 밤이 편안하다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고 시를 쓰지 않아도 된다

  커단 서른아홉의 중턱에서

  어느 시인은 서슴없이 꿈을 버린다 했는가

  나는 마흔을 바라 무엇을 버리는가

  애인이여 늙는 애인이여

  나는 밤을 괴롭지 않고 자고 일어나 어제처럼

  19층 아파트 젖은 벽을 타는

  눈 내리는 장엄을 볼 것이다

  나는 쏟아져내리는 흰 벽의 벽화를 그리겠고

  벽만 찬 벽만 바라보면 된다

  오래 머무르며 바라본 사람의 등이 그린

  벽화

  길을 가는 사람의 등이 그리는

  벽화

  모든 옛날의 눈 보내야 온다

  그러니 눈은 수직으로 내리지 않고

  벽을 어루며 온다

  벽화는 기울면서 그려진다

_ 김영산, 벽화 4

 

syo도 어느덧 마흔이라는 것이 코앞에서 알짱거리는 나이. 거울 속에는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녀석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녀석도 어제의 거울 속에서 그제의 그 녀석을 바라보며 자신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겠지. 또 하루 멀어져 가는 게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또 하루 멀어져 간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뭔가 아는 척했던 그 서른 즈음처럼, 어느덧 마흔에 대한 이야기를 모으는 시간. 알지 못하는 시와 노래들이 잔뜩 있다. 어떤 벽에 어떤 기울기로 기울어 어떤 마흔을 그릴 것인지, 거울에 대고 아무리 물어봐도 그 속에 든 애어른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340. 의 속삭임

루이자 메이 올컷 지음 / 김서령 옮김 / 폴앤니나 / 2021

 

하지만, 삼촌, 그건 신사답지 못한 거 아녜요? 전 아직 친절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고요. 삼촌은 어린 조카의 소소한 부탁을 거절할 만큼 야박한 사람도 아니고, 어린 조카는 마음만 먹으면 애교 있게 조를 줄도 안단 말예요. 이제 그만 대답해 주세요, ?”

  이 정도면 꽤 당돌해 보이겠지? 나는 삼촌의 목에 팔을 두르고 세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발칙하게 그의 무릎에 올라앉았다. 그는 잠깐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니 갑자기 나를 껴안고 입술과 볼 그리고 이마에 찬찬히 키스를 퍼부었다. 열정적인 삼촌의 태도에 나는 그만 얼굴이 새빨개져서 그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수치심이 분노로 바뀌고, 단호하게 놓아달라 내가 말할 때까지 삼촌은 일그러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야, 꼬마 아가씨. 내 무릎에 앉을 땐 너 좋자고 그랬겠지만 이젠 나를 위해 여기 앉아있어야 할걸. 너를 좀 더 길들여야겠어. 그럴 필요가 있어 보이거든.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이런 쪽으론 내가 경험이 좀 있거든. 가이도 그랬어. 타고나길 야생 매 같았지만 이젠 내가 부르면 순한 비둘기처럼 날아온다니까. 뭐야! 뭐 이런 맹랑한 악마가 다 있어?”

  나는 정말 그랬다. 맹랑한 악마 같았다. 그의 냉담한 모습에 분노한 나머지 이성을 잃은 상태로 갑자기 허리를 숙여 내 두 손을 잡고 있던 그의 희고 아름다운 손을 물어버렸으니까.

_ 루이자 메이 올컷, 밤의 속삭임


시빌이 겪은 고초가 당연히 시빌의 잘못은 아니지만, 잘못이 있건 없건 사람의 진심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안 된다. 그런 짓을 하면 전혀 예측치 못한 방식의 체벌이 기다리고 있다. 당장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벌은 언젠가 반드시 찾아온다.

 

무난한 소품 같다. 루이자 메이 올컷 하면 아무래도 작은 아씨들일 텐데, 그걸 읽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접한 것이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씨들 마음은 기가 차게 잘 그려내겠구나 싶긴 하다.

 

 

 


341. 술 수업

오종우 지음 / 어크로스 / 2015

 

도대체 예술을 배워서 어디 쓰냐는 폭력적인 질문에 대한 길고 친절한 대답이다. 그러나 늘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답이 필요 없는 사람들한테만 와닿고, 대답이 필요한 사람들은 대답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애초부터 궁금해서 질문한 게 아닌 것처럼.

 

우리가 창의력, 창의성이라고 할 때는 보통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기존에 없던 것을 창조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렇게 단순히 새로운 시각만을 강조하는 것은 몹시 위험합니다. 그것은 자기 확대에서 비롯되는 자기 함몰, 즉 자신만의 세계에 유폐될 위험을 안고 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자기 욕망의 발현에만 치중하는 탐욕을 부릴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죠. 창의성은 단순히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독특한 생각을 뜻하지 않습니다. 망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진짜 창의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꼭 필요합니다. 먼저, 전문성입니다. 피카소가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정밀하게 그리다가 대상의 진실을 확보하기 위해 자기 예술세계를 열었듯이, 우선 이전부터 축적된 능력을 학습하고 익혀서 전문적인 단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그 대상을 향한 애착입니다. 애정 없이는 어떠한 대상도 제대로 볼 수 없으며, 그 일을 발전시킬 수도 없습니다.

_ 오종우, 예술 수업

 

 

 


342. 마키아벨리

퀜틴 스키너 지음 / 임동현 옮김 / 교유서가 / 2021

 

자신이 만났던 통치자들과 정치가들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기록으로 남길 무렵 마키아벨리는 그들 모두가 한 가지,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교훈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이 착수했던 일에 실패했다. 그렇지 않고 성공을 거두었더라도 그것은 적절한 정치적 판단이 아닌 운으로 이루어낸 성공에 불과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적인 결점은 변화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체사레 보르자는 언제나 자만에 빠져 있었고, 막시밀리안 황제는 지나치게 조심스럽거나 우유부단했으며, 율리우스 2세는 늘 성급하고 충동적이었다. 그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깨닫지 못했던 사실은 그들이 자신의 성격이라는 틀에 시대를 끼워맞추려 노력하는 대신에 자신의 성격을 시대의 상황에 맞게 적응시켰더라면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두었으리라는 점이다.

_ 퀜틴 스키너, 마키아벨리

 

이 책은 개정판이다. 한겨레출판에서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던 이전 책을 syo는 너무나 사랑하였는데, 그것은 뭐랄까, 개론서의 표본 같은 존재랄까, 하여튼 미친 개론서 덕후의 포지션이 도무지 침착을 허락치 않는 책이었다. 알고 보니 그 책은 Oxford 대학 출판사에서 나오는 ‘A Very Short Introduction이라는 시리즈의 한 권을 옮긴 것이었는데, 최근 교유서가에서 그 시리즈를 선별적으로 번역하여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는 중. 그렇게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마키아벨리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타난 것이다.

 

마키아벨리에게 악명을 부여한 군주론이외의 다른 저서들을 조망하고, 그 책은 마키아벨리의 네 가지 얼굴 중 하나일 뿐이라는 관점을 제시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지옥에서 돌아온 양아치, 도덕으로 똥 닦은 남자의 이미지가 마키아벨리의 1/4, 그것도 왜곡된 1/4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훌륭한 점이겠다.

 

긴 말을 했지만 사실 긴 말 필요 없지. 미친 개론서 덕후가 인정하는, 한글로 읽을 수 있는 최고의 마키아벨리 입문서입니다.

 

 

 


343.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

 

잘한다! ,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부러 도망치지 말고 진즉 좀 읽어둘걸. 짧은 그림책이라 활자 수 대비 비싸긴 하지만…….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죽어가는 모양인데, 지금 할아버지와 손자가 있는 공간은 할아버지의 사라져가는 기억을 형상화한 점점 좁아지는 광장의 어느 벤치다. 이런 설정은 뻔하고 유치하기 쉬운데, , 글을 겁나 잘 써 버리니까, 이건 뭐 펀치가 어디로 날아올지 알지만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서 그냥 이제 나는 얻어터지는 일만 남았겠구나, 언제쯤 도착하려나 그 펀치- 하는 마음으로 페이지만 넘기게 된다. 이런 대목. 이런 비유. 꼭 이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제가 드릴 수 있는 거라고는 정주행뿐이겠군요, 배 선생님…….

 

  "선생님께서 어른이 돼서 뭐가 되고 싶은지 쓰라고 하셨어요."

  노아가 얘기한다.

  "그래서 뭐라고 썼는데?"

  "먼저 어린아이로 사는 데 집중하고 싶다고 썼어요."

  "아주 훌륭한 답변이로구나."

  "그렇죠? 저는 어른이 아니라 노인이 되고 싶어요. 어른들은 화만 내고, 웃는 건 어린애들이랑 노인들뿐이잖아요."

  "그 얘기도 썼니?"

  "."

  "선생님께서 뭐라고 하시던?"

  "과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너는 뭐라고 했니?"

  "선생님이 제 답변을 이해하지 못하신 거라고 했어요."

  "사랑한다."

_ 프레드릭 배크만,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344. 가까운 날들의 사회학

정인호 지음 / 웨일북 / 2017


- 일독(1802xx)

- 재독(210906) 


30대 후반의 미혼여성들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연예인 1위는 누구일까? 이 질문에 대부분 사람들은 송중기’, ‘현빈’, ‘송승헌’, ‘박보검등을 답할 것이다. 그러나 정답은 <전국노래자랑>MC송해. 30대 후반 미혼여성들의 마음을 관찰해보면 이렇다. 송해 선생은 1927년생으로 나이가 아흔 살이 넘었다. 그런데도 잔병 하나 없이 너무나 건강하다. 후배 개그맨인 엄용수는 아직도 송해 선생님은 소주를 됫병으로 드신다고 한다. 나이 90세에 이토록 건강하니 무엇이 부러우랴. 또한 나이 90세에 직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송해 선생은 30년 세월동안 <전국노래자랑>의 국민MC로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안정적 소득에 인기까지 먹고 살 수 있으니 여성들의 이상적 배우자로 꼽힐 만하다. 이러한 현상을 송해 효과라고 한다. 송해 효과는 지나친 긍정보다 오히려 현실적 부정을 강조해 상대방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가는 현상을 말한다.

_ 정인호, 가까운 날들의 사회학

 

이런 게 있다고? 싶어서 녹색창에 송해 효과를 검색해 봤는데, 나오지를 않는다. 송해 선생님이 어느 광고에 등장해서 그 회사 매출이 어떻게 되었다든가, 어떤 프로에 등장해서 패널들 눈물을 쏙 뽑아냈다든가 하는 식으로 송해 효과라는 표현을 쓰는 기사들이 몇 건 검색될 뿐이다. 그럼 이 송해 효과라는 말은 정인호 선생님이 이 책에서 만드신 말인가? 웃자고 하신 이야기인가? 모르겠다. 저 대목은 뭔가 약간 비꼬는 것 같기도 하고(니들 말대로라면 니들이 진짜로 원하는 사람은 바로 송해 선생님이겠네?)……. 모르겠다. 노명우 선생님의 세상물정의 사회학과 이 책을 같은 계통에 배치한다면 두 권 중에 어느 쪽을 권할지는 명확하다.

 

 

 


345. 보통의 우리가 알아야 할 과학

윤석만 지음 / 타인의사유 / 2020

 

그래도 최소한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말 속의 최소한한다에 대해 늘 생각이 많다. 처음에는 대체 그걸 누가 정하며 그걸 누가 정하는지는 또 누가 정하며- 뭐 그런 무한연쇄에 대한 고찰이었지만, 요즘은, 과연 뭔가를 최소한만 알고 지나가는 게 정말 되는 일인지가 궁금한 중이다. 관심이 없는 것은 아예 모르거나 알아도 자꾸만 잊어버리게 되고, 관심이 있는 것은 자꾸만 알고 싶고 알아도 더 알고 싶다. 세상에는 내가 알고 싶은 것들과 알든 모르든 상관없는 것들이 있어서, 후자에 대해서는 최소한알기 어렵고 전자에 대해서는 최소한알기가 어려운 것. 신학 시대의 과학뿐 아니라, 과학 시대의 과학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알면 좋지. 근데 실은 관심이 먼저다. 관심이 생기면, ‘보통의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이상의 것들을 가르쳐 주는 과학책을 알아서 뒤지겠지. 그러나 관심이 없다면? 그렇다면 이 책인가?

 

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읽는 과학책과 과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읽는 과학책 중 어느 책이 더 많이 읽히는 과학책이 될지를 생각해보면,

 

오늘날 다수의 종교인들도 지동설을 과학이 아니라 상식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리라고 믿엇던 신념이 오랜 시간에 걸쳐 변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의식으로 인지할 수 있는 만큼의 진리를 엿보고 있을 뿐입니다.

_ 윤석만, 보통의 우리가 알아야 할 과학

 

 

 

346. 소오강호 2

김용 지음 / 전정은 옮김 / 김영사 / 2018



바로 그때, 왼편 산자락 위로 별똥별이 쐐액 지나가며 어두운 하늘에 길고 긴 꼬리를 남겼다. 의림이 말했다.

  "의정 사저는 별똥별을 보고 옷고름을 묶으며 속으로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셨어요. 만약 별똥별이 사라지기 전에 옷고름을 다 묶으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던데, 정말 그럴까요?"

  "모르겠소. 한번 해봅시다. 그렇게 손이 빠를 것 같지는 않지만."

  영호충은 웃으며 대답하고 옷고름을 잡았다.

  "사매도 미리 준비하시오. 아차 했을 때는 늦소."

  의림도 그를 따라 옷고름을 잡고 까마득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름밤은 유달리 별똥별이 많았다. 금방 별똥별 하나가 하늘을 갈랐지만 너무 빨라 의림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의림은 포옥 한숨을 쉬고는 좀 더 기다렸다. 두 번째 별똥별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길게 꼬리를 늘이며 나타났다. 의림은 재빠르게 움직여 매듭을 지었다.

  "잘했소, 정말 잘했소! 성공했군! 관세음보살님이 보우하사 반드시 소원을 이루게 될 거요."

  영호충이 기뻐하며 말했지만 의림은 도리어 한숨을 쉬었다.

  "매듭을 짓느라 소원 비는 것을 깜빡했어요."

  영호충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미리 생각해두시오. 속으로 외고 있다 보면 매듭 때문에 소원을 잊어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의림은 옷고름을 잡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슨 소원을 빌지? 무슨 소원을?'

  영호충을 흘끗 바라보는 그녀의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의림이 수줍어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그때 마침 별똥별 몇 개가 잇달아 하늘을 가로질렀다.

_ 김용, 소오강호 2

 

이렇게 신필 진선생은 알퐁스 도데 싸닥션을 가볍게 날린다. 왕복으로 훅훅. 옆에 멀뚱히 서 있던 생텍쥐페리도 얼결에 같이 한 대 맞았다.

 

 

 

--- 읽는 ---

빵 고르듯 살고 싶다 / 임진아

붉은 칼 / 정보라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 마리암 마지디

호모 비아토르의 독서 노트 / 이석연

하품의 언덕 / 문보영

살면서 한번은 경제학 공부 / 김두얼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 이치조 미사키

살인자의 건강법 / 아멜리 노통브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당신을 위한 책 / 이경수

미아로 산다는 것 / 박노자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5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1-09-09 21: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쇼님, 태그 만든거 왜 나 오늘 알았어요? 잘했어요, 잘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남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먼저 읽을거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9-09 21:00   좋아요 3 | URL
선캄브리아기부터 있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1-09-09 2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9-09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1-09-09 21: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쇼님! 三님 오늘 페이퍼에 출연 안하시니 허전,,,,, ㅎㅎㅎㅎㅎ

syo 2021-09-09 21:14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ㅋㅋ 앞으로 그 꼴 지겹도록 보실 판인데요 뭐 ㅎㅎ

붕붕툐툐 2021-09-09 23: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왠지 모르게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담아갑니다! 줌파 라히리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용!^^

scott 2021-09-10 00:54   좋아요 2 | URL
툐툐님 줌파+ 전혜린도 추천 합니돵!ㅎㅎㅎ

붕붕툐툐 2021-09-10 08:03   좋아요 2 | URL
전혜린 메모메모
오! 제가 읽은 작품도 꽤 많이 번역하셨네요! 심지어 이 분 책을 읽은 듯도 합니다! 전혜린님 번역도 읽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syo 2021-09-10 21:22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알라딘의 진짜 AI scott님......

청아 2021-09-10 0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살인자의 건강법>재밌게 읽었어요ㅋㅋㅋ리뷰 고대하겠습니다😊

syo 2021-09-10 21:23   좋아요 1 | URL
앗 잠들기 전 시간대에 배치했더니 몇 쪽 읽다가 자고 몇 쪽 더 읽다가 자고 이래서 집어던지려고 했더니 안 되겠다 ㅋㅋ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9-10 00: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다 싶더니 책이 한가득.
웬일로 접근하고픈 책도 수두룩.
하여 주섬주섬 보관함에 쏘옥쏙. ^^

syo 2021-09-10 21:24   좋아요 2 | URL
오 라인마다 글자 수 맞추신 건가요 ㅎㅎㅎㅎㅎ

레삭매냐 2021-09-10 1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자>는 제나라의 환공을 보좌한
그 관이오가 맞는지 궁금하네요.

그렇게혜윰 2021-09-10 14:12   좋아요 1 | URL
맞지 않을까요? 우리가 흔히 관중으로 알고 있는.

syo 2021-09-10 21:24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바로 그 관이오관중관자입니다.
 

 

의 귀환

 

 

 

1

 

그가 돌아왔다. 영영 돌아왔다. 젠장.

 

 

 

2

 

애초에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과 서울에서 공무원하는 syo가 함께 살려고 성남에 집을 구했으나, 반년이 조금 더 지난 시점 이 집에는 서울에서 일하는 공무원이 사라졌고(백수됨), 동시에 서울에서 일하는 직장인이 사라졌다(오송 발령). 그래서 이 집은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소기의 목적과 전혀 다른, 백수가 책 읽고 글 쓰고 밥 짓고 연애하는 공간이 되고 말았으니, 이것은 운명의 장난질인가.

 

백수만 노났다. 둘은 부대껴도, 혼자 살기에는 적당한 집이었기 때문에.

 

그랬는데,

 

서울 본사 인사총무팀 직원 두 명이 동시에 이직과 사직을 감행하는 바람에 결원이 생겼고, 급하게 이 서울로 소환되었다. 엊그제까지 오송의 논밭을 소형차로 달리던 은 이제 대한민국의 심장, 강남역으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며칠 전까지 이직을 생각하고 있던 은 이번 발령이 만족스러운 모양. 여기 빈자리 생기면 메꾸러 투입되고, 또 저기 빈자리 생기면 그쪽으로 튕겨 나가는 입지에다가 심지어 자기 전공도 아니고 입사했던 부서도 아닌 곳을 빙빙 돌리는 회사에서 syo 같았으면 벌써 이직을 알아봤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천하태평이다.

 

 

 

3

 

1년 남짓 오송에 살았던 이 용달차에 싣고 올라온 짐은 양이 만만치가 않았다. 이 좁은 집에. 쓸 수 있는 모든 용을 다 보았지만 여전히 내 동선 위에 잡동사니들이 얹혀 발에 차인다. 20,000개쯤 되어 보이는 컵라면을 보면 그의 오송 식생활을 능히 짐작할 수 있고, 지나치게 많다 싶은 휴지와, 휴지보다 부피가 적은 책들을 보면 그의 취미생활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가관인 것은 판촉물인 듯 보이는 곽티슈인데, 커다란 글씨로 여대생 다방’(?), ‘69다방’(!)이라고 쓰여 있다. 이 미친놈아 이런 걸 부끄러워서 어떻게 집에 두고 쓰냐- 따졌는데, 은 덤덤하게, 대구에서 엄마가 쓰라고 올려 보내주신 거다, 된장, 매실액, 고기 굽는 불판이랑 같이- 한다. 그러고 살펴보니 그 다방이라(고 주장하)는 곳 지역 번호가 053이긴 하다. 탈룰라.

 

, 누가 이 집에 들이닥치기 전에 저 민망한 것을 소진해야만 하는데…….

 

 

 

4

 

그래서 휴방 중이었던 남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가 다시 재개될 것 같다. 아 귀찮아.

 

 

 

5

 

, K씨와의 만남은 그녀의 사정으로 또 미루어졌다고 합니다.

 

 

 

 

--- 읽은 ---

 


329. 사랑이 아닌 것은 별 

사이하테 타히 지음 / 정수윤 옮김 / 마음산책 / 2020

 

  나의 가치가 너의 욕망으로 규정될 정도라면, 나는 그런 가치 필요 없어. 사랑과 희망이라는 언어의 보호도 필요 없다. 죽은 물고기가, 러브레터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교실. 다 함께, 라는 말에 섞여들지 못하면 죽을 거래. 무서워.

  외로움이, 나를, 너에게 팔고자 한다.

  사랑해달라고 조르는 건 폭력이다. 그러니 꼭 끌어안고 싶다고 말해본다. 차라리 욕정으로 말하는 게 믿음이 간다고 했던 애가, 누구였더라. 아무도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냥 결혼해 아이를 낳고 죽는 인생은, 평온한 행복감으로 가득했다.

 

  너보다 훨씬 더 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네가 살아 있는 의미 같은 건 지워줄 듯한, 그런 살갗을 걸치고, 너는 살아 있다. 좋아해. 심장을 내민다는 각오로,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오늘도 우리 반 친구 하나가, 자기가 죽으면 여기저기 화제가 될 거라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그다음엔 죽어도 좋은,

  폭력적인 감정 밤, 외롭니, 죽어도 외로워서,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그 사람을 버려두고 떠나며,

  죽어보고 싶다 밤, , 아침,

_ 사이하테 타히, 교실전문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사실 모두 성욕이었다. 그러니 여러분 사랑에 목을 매는 일은 목을 매다는 일입니다. 멈추세요. 믿지 마세요. 그냥 죽자구요. 이 별을 좀 편하게 해주자구요-

 

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좋은 사랑이라면 하고 싶은데 그 불가능성이 보여서 길고 느슨하게 좌절하고 환멸하다가 그것을 태도로 삼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환멸은 그냥 힙해 보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힙하게 환멸하려면 적절한 배치, 배합, 배려, 자신을 향한 끝없는 배신 같은 것들을 달성할 줄 알아야 하겠다는 걸 배웠다. 나는 인간에 대한 환멸을 지니고 있는 편인데, 그동안 참 폼이 안 났겠구나 싶다.

 

 

 


330. 리코를 위해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 이기웅 옮김 / 모모 / 2020

 

앞으로 험난하겠구나, 혹은, 이거 모터 달린 돛단배에 노 저은 듯 치고 나가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기까지 몇 페이지만 읽어봐도 충분한 것은 뭐 모든 책이 비슷하겠지만, 추리 소설은 유독 그렇다. 내게(내가 추리 소설을 읽는 데에) 잘 맞는 문체와 아닌 문체가 있고, 잘 맞는 경우 트릭 이해, 심리 이해, 동기 이해, 줄거리 이해, 심지어 작품 의도 이해까지 도합 십해가 일사천리로 획득되는 반면, 아닌 경우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의욕도 없고 하여간 없는 것 투성이인 독서로 끝나는 것. 처음 읽은 노리즈키 린타로는 앗, 이거다! 할 정도로 syo같은 추리 소설 삐약이에게 걸맞았다. 줄줄이 읽어나갈 생각입니다.

 

그런 기대를 한다고 해도, 제가 그 사람들 구미에 맞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애당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잖아.” 경시가 쌀쌀맞게 툭 내뱉었다. “필요한 건 네가 등장함으로써 사건에 뭔가 곡절이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믿게 만드는 거지. 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을 정도야.”

  “그렇게 뜻대로 될까요?”

  “. 세상 사람들은 노리즈키 린타로라는 이름에 일종의 선입견을 갖고 있으니까,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멋대로 사식을 곡해할 거야.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고 생각하고는 새 불씨를 찾아 나서겠지. 그러는 사이 누군가 익명의 관계자라고 자칭하며 시답잖은 소문을 흘릴 테고. 사이메이 여학원을 망가뜨리려는 음모가 있다느니 뭐니 하는, 멍청한 놈들이 환호할 유언비어를 말이야. 네 이름이 등장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겠지. 진짜 불씨는 따로 있구나, 사이메이 여학원은 함정에 빠졌구나, 하면서. 스캔들이 무마되면서 학교 이미지도 지켜지는 거지. 그리고 네 사건 파일에는 미해결이라는 세 글자가 찍힐 테고. 이게 실제 시나리오야, 알겠어?”

  “한심하군요.”

  “그래, 한심하기 짝이 없는 시나리오야. 하지만 두고 봐, 분명 내 말대로 될 테니까.”

  “그럼 제 입장은 뭐가 되죠?”

  “그렇긴 하지.” 진절머리 난다는 목소리로 경시가 말했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꾸며도, 너 같은 건 높으신 분들의 편리한 선전도구에 불과해.”

_ 노리즈키 린타로, 요리코를 위해

 

 

 


331. 천국보다 성스러운

김보영 지음 / 변영근 그래픽 / 알마 / 2019

 

영희의 아버지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

  그는 오십 세에 은퇴했고 일을 하지 않은 지 올해로 십 년이 되었다. 그는 소박한 사람이라 삶에 그다지 바라는 것이 없다. 부귀영화도 좋은 집도 세계 일주도 원치 않는다. 단지 삼시 세끼 따뜻한 밥과 된장국이 그의 방 앞에 놓이기를 바란다.

  그는 이처럼 소시민적이 꿈을 이루기가 왜 이토록 고단한지 매일 의문한다. 어쩌면 강성주의자들이 젊은이들을 홀렸을지도 모른다. 공산주의자들이 뭔가 했거나 정부 차원에서 모종의 음모가 작동하는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처럼 선량하고 무해한 사람이 이토록 구차하게 살 리가 있는가.

  그의 아내는 그 대단찮은 노동을 참 힘들어했다. 참 게을러빠진 사람이었지. 남들 다 하는 일인데 뭐 그리 힘들다고. 평생 내가 벌어다 준 돈으로 먹고살았으면서 말이지.

  나이가 들면서는 점점 밥하는 게 시원찮아졌다. 언제부터인가는 시들시들하며 병원에 입원했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더니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제 누가 내 밥을 해주느냐고 육성으로 말하며 울었다. 딸애는 새벽녘에 나갔따가 저녁에야 돌아온다. 한동안은 여동생이 와서 밥을 해주었고 또 한동안은 조카애들이 왔다. 하지만 다들 슬슬 발이 뜸해지더니 이제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무정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그는 신세 한탄을 한다. 요새 세상이 어떻게 되어먹었기에 아내까지 잃은 불쌍한 늙은이 하나 돌볼 사람이 없단 말인가.

  그는 채널을 돌리며 구차함을 잊고자 한다. 그는 선한 사람이고 사는 게 별 볼 일 없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다가도 고작 삼시 세끼 먹기가 왜 이리 서러운가 싶어 울화통이 터지곤 한다.

  그는 알지 못한다. 아주 간단히 그 구차함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을. 가족에게서 괄시 대신 사랑을, 멸시 대신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족의 화목과 삶의 풍요가 그의 것이 되리라는 것을. 잃어버린 모든 품위와 권위를 돌려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쌀을 씻어 밥통에 넣고, 냄비에 국을 앉히기만 한다면. 더러워진 옷을 세탁기에 넣어 돌리기만 한다면. 빗자루를 들어 집을 쓸고 걸레질을 한다면.

  하지만 그는 영영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의 비천함은 오직 그가 하루를 온전히 홀로 생존하지 못하는 데에서 온다는 것을. 그의 구차함은 오로지 남이 지은 밥을 대가 없이 제 입에 쑤셔 넣는 데에서 온다는 것을.

_ 김보영, 천국보다 성스러운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내게는 신앙이 있는데 내 생각에 신은 여혐을 한다. 신앙인으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김보영 선생님은 다섯 개의 짧은 이야기를 엮어 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야기들은 하늘에서 신이 내려왔습니다. 그 신은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라는 세 문장을 등장시키며 전개된다.

 

무리가 없다. 인격신이라는 존재를 떠올릴 때 개개인의 머릿속에 구현되는 이미지들을 특성별로 분해해서 집계한다면,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특성들이 곧 현실에서 그 특성을 지닌 인간들이 권력 또한 지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줄 것이다. 그 신은 백인이고, 남성이고, 비장애인이며, 이성애자고……. 이건 당연하다. 내가 권력자고 비장애인인데, 이 세계를 창조하고 세계의 운영 원리를 세웠으며 매주 주말마다 꼬박꼬박 내 기도와 찬양의 대상이 되는 신이 장애가 있는 모습이라고 상정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뜻밖에 단순해서, 거두절미하고 보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순환 명제에서 근거와 의지를 길어내며 살아가기도 한다. 신은 나와 닮았다. 그래서 나는 신과 닮았다.

 

SF는 그냥 자체적으로 목적이다. 어떤 수단으로서 굳이 현실의 뭔가를 빗대고 비틀며 지금 이곳과의 접점을 구성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성공적으로 그렇게 할 때, 문장과 서사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장르적 아름다움이 분명 있다. SF라서 할 수 있고 SF라서 얻을 수 있는 추가 점수 같은 것.

 

 


332. 데이트가 피곤해 결혼했더니

김수정 지음 / 마인드빌딩 / 2021

 

남편의 목덜미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를 사랑한다. 피곤할 때마다 뿜어내는 텁텁한 냄새마저도 귀엽다. 정수리의 쿰쿰한 냄새, 땀내 전 발냄새에서도 포근함을 느낀다. 그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품에 안겨 냄새부터 킁킁 맡는다. 일터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간식으로는 무얼 먹었는지 냄새에서 단번에 읽힌다. 내가 없는 곳에서 보낸 그만의 시간을 냄새로 가늠한다. 냄새를 몰고 우리만의 공간으로 돌아온 남편이 더없이 반갑고 사랑스럽다.

  결혼생활은 서로의 체취를 감당하는 행위라 생각한다. 피로의 냄새가 풍기기 시작할 때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데이트 말고, 피로의 냄새와 함께 우리 집으로 향하는 일. 밤사이 수북이 쌓인 침 냄새와 머리 냄새를 맡는 바쁜 평일의 아침. 공중화장실 말고, 서로의 냄새가 밴 우리 집 화장실. 너와 나만이 아는 체취가 곳곳에 짙게 깃든 신혼집. 내가 나일 수 있고, 네가 너일 수 있는 곳. 부끄럽지만 솔직한 단상이다.

_ 김수정, 데이트가 피곤해 결혼했더니

 

~더니 라는 접미사가 붙어서 이놈의 결혼- 뭐 그런 이야기일 줄 알았더니.

 

내 연인에게서는 별다른 냄새가 나지 않는데, 그래서 자꾸만 냄새를 찾아서 파고들고 파고들게 된다. 냄새라는 것이 어감이 좀 그래서 그런데, 확실히 사랑하는 사람한테서 나는 냄새는 사랑스럽긴 하다. 그렇지만 뭐랄까, 내 감각은 사랑하는 사람의 냄새는 퀴퀴하지 않고 텁텁하지 않고 쿰쿰하지 않고 쩔지 않는다는 식인데, 일단 퀴퀴텁텁쿰쿰쩖을 모두 인정하고 거기서 포근함을 느끼다니, 저건 정말 대단하다! 결혼은 저 정도의 무시무시한 결의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인가 보다. .

 

 

 


333.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21

 

쇼펜하우어는 처음에 이 개에게 헤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헤겔은 당시 독일 철학계를 석권하고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헤겔을 절대정신이라는 허구를 가지고 세계와 역사에 대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야바위꾼이라며 경멸했다. 헤겔에 대한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쇼펜하우어는 헤겔과 같은 시간대에 강의를 개설하고는 헤겔의 강의보다 훨씬 더 많은 학생이 자신의 강의를 들으러 오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거의 다 헤겔의 강의실로 몰려갔고 쇼펜하우어의 강의실은 텅 비어 있었다. 자신의 기대가 무참하게 깨지자 헤겔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적개심은 더욱 심해졌다. 쇼펜하우어가 게에게 헤겔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화가 날 때마다 개에게 이놈의 헤겔이라고 욕을 퍼부으면서 화풀이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개와 함께 살면서 개의 충직함에 감동하여 개가 인간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쇼펜하우어는 개 이름도 헤겔에서 아트만으로 바꾸게 된다. 아트만은 인도의 성전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용어로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진아眞我, 즉 참된 자아를 가리킨다. []

  이렇게 개를 높이 평가했던 그에게 사람들이 그러면 당신을 개라고 불러도 좋으냐고 물었을 때 쇼펜하우어는 기꺼이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거꾸로 함께 살던 개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할 때 쇼펜하우어는 개를 이 사람아라고 불렀다.

_ 박찬국,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어느 책에서 읽은 건데 데칸쇼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랬나, 널리 알려진 철학자랬나, 하여튼 뭐 그런 사람들로 데카르트-칸트-쇼펜하우어를 들며 줄인 말이라고 한다. 몰라, 그 말이 나온 시절에는 그랬는지, 혹은 그 말을 만든 사람과 동료계층에서는 그런지 모르겠지만, 개론서나 2차저작의 비중으로 보면 데칸쇼는 무슨, 단연 마니프다. 데칸쇼 읽은 사람? 그런데 저런 식의 인간이라면 쇼펜하우어는 좀 읽어보고 싶긴 하다.

 

물론 쇼펜하우어가 개 이름을 헤겔로 지은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동네 사람들이 그가 산책하는 시간을 보며 시계를 맞추었다는 칸트의 에피소드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스웨덴 여왕 과외하러 갔다가 2주만에 감기걸려 죽은 데카르트의 에피소드보다는 더 유명하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데칸쇼를 그들의 에피소드나, 그들 작품 속 한 구절 정도로 기억하는 것이다.

 

 

 


334. SF가 세계를 읽는 방법

김창규, 박상준 지음 / 에디토리얼 / 2020

 

워낙 SF시대니까.

 

SF에 등장하는 미래란 무엇일까. 우선 낯선 상황이 주는 흥미로움의 무대로 의미가 있다. 그와 동시에 실제 역사의 과거와 현재를 변형시켜 투영하는 영사막으로 작동한다. SF는 앞으로 다가올 모월 모시에 어떤 사건이 터질지 얘기하지 못한다. 그 대신 우리가 과거에 저질렀고 지금도 지속하는 어리석음이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반복될 거라는 이야기는 들려줄 수 있다. 12년 뒤에 발생할 대규모 자연재해로부터 어떤 직업인들이 우리를 구해줄지 점찍을 수는 없지만 묵묵히 제 일을 수행하는 성실한 사람들이 앞으로 닥쳐올지 모르는 위기에서 세상을 유지해 나갈 거라는 공감대는 이끌어낼 수 있다. SF 작가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어서 미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다. 과거와 현재와 그 안에 사는 사람을 알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은 일도 그만큼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다.

_ 김창규, 박상준, SF가 세계를 읽는 방법

 

해설 한 꼭지, 짧은 이야기 한 꼭지를 번갈아 가며 SF가 어떤 것이며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책이다. 특별한 깨달음이나 감흥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SF를 더 많이 읽어보지 뭐, 하는 수준의 뽐뿌가 이루어졌다.

 

 

 


335. 소소하게 독서중독

김우태 지음 / 더블:/ 2016

 

크게 재미가 있지도 않고, 크게 교훈이 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소소했다. 김우태 선생님의 글에 중독될 일은 없을 것 같다.

 

 

 


336. 소오강호 1

김용 지음 / 전정은 옮김 / 김영사 / 2018

 

소설에 관해서는, 단순하게 좋은지 싫은지, 감동적인지 지루한지만 이야기했으면 한다. 나는 독자들이 내 소설 속 어떤 인물을 좋아하거나 미워할 때 가장 기쁘다. 그런 감정이 든다는 것은 소설 속 인물들이 독자들 마음에 가닿았다는 뜻이다. 소설 작가의 가장 큰 바람은, 작가가 빚어낸 인물이 독자들 마음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나, 피와 살이 있는 진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술은 창조다. 음악은 소리를 창조하고, 그림은 시각적 이미지를 창조하고, 소설은 인물과 이야기, 그리고 그 내면 세계를 창조한다. 세상을 사실대로 반영하기만을 원한다면, 녹음기나 카메라가 있는 요즘, 음악과 그림이 왜 필요한가? 신문이 있고, 역사서가 있고, TV 다큐멘터리와 사회 통계, 병력 기록, 정부와 경찰의 인사 정보가 있는데 소설이 왜 필요한가?

_ 김용, 소오강호 1

 

 

 

 

--- 읽는 ---

관자 / 신창호

벽화 / 김영산

동네 헌책방에서 이반 일리치를 읽다 / 윤성근

페미니즘의 투쟁 /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약속의 땅 / 버락 오바마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 오치 도시유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 요나스 요나손

미아로 산다는 것 / 박노자

재즈 가이드 / 세실리아

보통의 우리가 알아야 할 과학 / 윤석만

예술 수업 / 오종우

가까운 날들의 사회학 / 정인호

니체 / 정동호

모더니즘 / 피터 게이

저는 주식투자가 처음인데요 / 강병욱

넛지 / 리처드 H. 탈러



댓글(23) 먼댓글(0) 좋아요(5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1-09-04 16: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가 댓글의 1등이 될까요?

syo 2021-09-04 16:13   좋아요 5 | URL
되셨네요? ㅎㅎㅎㅎ

scott 2021-09-04 16:4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소요님 三님 북플에서 셀럽인거 알고 계신가여 ? ㅎㅎ

syo 2021-09-04 17:58   좋아요 3 | URL
제가 지겹도록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ㅎㅎㅎㅎㅎ

페크pek0501 2021-09-04 17:0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누가 집에 온다고 하면 귀찮고 막상 간다고 하면 서운하고 허전하고... 저는 그렇습니다. ^^
syo 님은 어떠하신지요?

syo 2021-09-04 17:59   좋아요 5 | URL
이제껏 이 집에 저와 三 이외의 사람이 방문한 것은 에어컨 설치 아저씨, 인터넷 설치 아저씨, 냉장고 배달 아저씨 등 각종 아저씨들을 제외하면 제 여친 한 사람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귀찮음은 모르고 서운함만 압니다 ㅎㅎ

얄라알라 2021-09-04 17: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곽티슈의 빠른 소진 응원합니다^^ 三님과의 따뜻한 우정 이야기, 연재 즐겁게 기다리겠습니다!

syo 2021-09-04 17:59   좋아요 4 | URL
한장으로 풀 수 있는 코를 두세 장으로 푸는 호사를 누리고 있씁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1-09-04 17: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냄새가 사랑스러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결의!
재미있네요^^
sf가 세계를 읽는 법, 오히려 더 좋은 도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syo 2021-09-04 18:00   좋아요 4 | URL
냄새며 SF며..... 하여튼 많이 배웁니다.
다 까먹겠지만요 🙄

잠자냥 2021-09-04 17:3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휴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취미생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응원합니다.

syo 2021-09-04 18:01   좋아요 6 | URL
ㅋㅋㅋㅋㅋㅋ 그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휴지를 작은 방 한 구석에 쌓아올리며 한숨을 내쉬는 저를 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9-04 18:15   좋아요 5 | URL
이거 휴지곽(혹은 두루마리 화장지)이라고 정확하게 묘사하지 않으시면 오해를 낳을 수도…(다 쓴)휴지를 작은 방 한 구석에 쌓아올리며 한숨(?)을 내쉬는 저를 보면서…무서운 장면이다…

페넬로페 2021-09-04 17:47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죄송합니다
책얘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계속 남자 둘의 삶을 연재하시기 바랍니다. 코로나로 인한 집콕생활에 단비같은 존재이신 삼님의 서울귀환을 축하드려야 할지는 모르겠어요 ㅋㅋ

syo 2021-09-04 18:02   좋아요 8 | URL
ㅋㅋㅋㅋㅋㅋ 집콕생활에 단비 같은 존재는 아니고 입에 단내나는 존재에 가깝습니다.
남자 둘의 삶이란, 아마 투정과 빡침과 치킨으로 얼룩진 이야기가 되겠으나...

오늘도 맑음 2021-09-04 18:5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 이건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깜찍함입니다~!! 졸려서 커피 한 잔 마셨는데 웃느라 잠이 다 깨네요^^ 저도 페넬로페님 의견에 한표 던져봅니다~!!!

syo 2021-09-09 20:36   좋아요 1 | URL
답댓글이 늦었습니다 ㅎㅎㅎㅎㅎ
들러 주셔서 감사해요 맑음님^-^

bookholic 2021-09-04 19:5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더욱 흥미진진한 에피소드가 기대됩니다~~^^

syo 2021-09-09 20:37   좋아요 1 | URL
답이 늦었네요.
이웃님들께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는 아무래도 제 속을 뒤집어 놓을 것이니, 제가 저를 불태워서 여러분의 소소한 웃음을 만들어내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새파랑 2021-09-04 19:5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syo님이 날카로우시다면 3님은 유쾌하실듯 합니다. 아주 재미있는 두 남자 이야기가 기대가 되네요. 연애 이안기는 다음편에? 😆 언제봐도 깜놀하는 책 리스트네요 ~!!

syo 2021-09-09 20:38   좋아요 1 | URL
아닙니다. 제가 날카롭다면 제가 유쾌합니다. 쟤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ㅎㅎㅎㅎㅎㅎㅎ

붕붕툐툐 2021-09-04 22: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삼님의 귀환은 쇼님의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해질 거라는 신호탄 아니겠습니까? 저는 찬성입니다~ㅎㅎ 그리고, 삼님이 잘 안될 거 같은 삘이 점점 짙어지고 있습니다.ㅎㅎㅎㅎ

syo 2021-09-09 20:38   좋아요 0 | URL
이야깃거리는 늘어나는만큼 저의 주름과 흰머리도 함께 늘겠지요.....
그리고 실제로 잘 안 된 모양입니다.....
 

 

생각해 보면 을 위한 나라는 있었는데 없었던 건 그저 三의 용기

 

 

 

1

 

다음은 알라디너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시는 의 고백 관련 소식이다. ‘고백관련 소식이라고 적은 데서 벌써 짐작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맞습니다. 아직 고백상태입니다.

 

 

 

2

 

previously on Three.

 

을 회사에 꽂아줬던 전 이사님이 그를 연애에도 꽂아주겠다는 생각에 소개팅을 주선해주셨으니 이사님이 첫 번째 보살님이시다. 그리고 저 말 없고 재미없고 눈치 없고 배려도 없으며 소개팅하고 들어온 날 잘 들어가셨느냐, 즐거웠다, 잘 주무시라, 내일도 좋은 하루 보내시고 다음에 또 만나자, 이런 정리 카톡을 보내는 게 당연하다는 것조차 syo가 알려주기 전까지 몰랐던 소개팅 오랑캐 과 무려 여섯 번이나 만나주신 K씨가 두 번째 보살님이시다. 그리고 그 무지렁이를 그래도 사람처럼 입히고 말을 가르치고 인의도덕을 주입하여 여섯 번이나 그 자리에 내보낸 syo님이 바로 마지막 보살님이시다…….

 

보살님s의 무한한 노력에도 멍청하게 그냥 주말마다 출근하듯 만나러 가기만 하지 도통 다음 스텝을 밟지 않던 . 이러면 이거 사람 아니라는 주변의 압박에 못 이겨 다섯 번째 만남에 드디어 고백을 준비했는데, 이게 우물쭈물 타이밍 놓치고 준비해 간 멘트 놓치고 정신줄도 놓치고 하여튼 놓칠 수 있는 건 다 놓치는 바람에 고백 멘트는 뭔가 고백이 아닌 것처럼 두루뭉수리하게 되어 버렸고, 결론적으로 K씨가 그걸 고백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고백은 망했고 바로 그날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었던 의 욕망도 함께 망함.

 

그래서 여섯 번째 만남에는 그냥 다이렉트로 좋아한다 만나자를 꽂아넣기로 하고 나갔는데, 이 빙구는 또 언제 말하지 언제 말하지 언제 말하지 하면서 그날의 데이트 7시간을 통째로 날렸고, 결국은 9시 반, 헤어지는 지하철역에서, K씨가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다녀오기 전인가 다녀오고 나서인가 하여튼 이거나 저거나 망했기는 매한가지인 그 두 타이밍 가운데 하나에 좋아한다 만나자를 투척함. 대답 : 생각해 볼게요. 그게 지지난 토요일.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까지입니다.

 


 

3

 

그리하여 일월화, 그때 우린 대구에 있었고 은 그냥 아주 카톡만 기다렸다. 핸드폰에 진동만 오면 2초 만에 들여다봤고, 엄마면 실망했고 스팸이면 분노했다. 저게 저렇게 감정이 많은 인간이었다니. 화요일, K씨 성격에 대뜸 먼저 생각해봤는데요하면서 말을 거는 건 생각하기 어려우니, 니가 먼저 간단한 말을 붙여서 판을 깔아보라고 조언했더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지금 태풍 때문에 난리니까 거기서 시작해보라고, 어차피 무슨 말을 걸어도 걸기만 하면 니가 왜 그 말을 걸었는지 저쪽에서 얼추 알아챌 거라고 이야기했다. 은 대답이 없었다. 그날 저녁, syo가 물었다. 야 그래서 뭐라고 하디? 까였냐? 이 대답했다. 말 안 걸었는데……. 이런 식이니 여러분은 이제 K씨와 syo가 보살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인정 못하시겠다구요?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수요일에는 성남에 있었다. 아직 말도 못 걸어본 상황. 은 초조했다.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그래도 싫었으면 여섯 번이나 만났겠어? 이러면서 희망회로를 돌린다 싶으면 제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아무래도 우린 아닌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해주었다. , 근데 이렇게 대답이 없는 거 보니까 진짜 아닌가보다 이러면서 머리를 쥐어 뜯을 때는 야 그래도 싫었으면 왜 여섯 번이나 만났겠냐. 그리고 하루나 이틀 지나면 말했겠지. 안녕히 계시라고.” 이렇게 위로해주었다. 그때마다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보는 게 쏠쏠했다. 건 뭐 처음에 고백 종용할 때는 내가 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며 쎈척하더니, 이제는 완전 그냥 반쯤 사람꼴이 아니었다. 이것이 진정한 밀땅이로구나.

 

하여튼, 또 그놈의 회사에서 유해한 과장인지 부장인지로부터 전화가 왔고, 방에 들어가서 한 20분 동안 통화하고 나온 은 의자에 앉으면서 뻘소리를 시작했다. 주된 맥락은 이럴 거면 손이라도 잡아 볼걸- 뭐 그런 거였는데, 듣는 순간 나는 빡쳤다. 그거 아니라고 내가 이야기했잖아. 그랬더니 三曰, 아니, 다들 내가 손도 하나 못 잡고 등신 같다고 말하니까 내가 진짜 뭔가를 잘못하고 있나 싶어서 그렇잖아. 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할 걸 그랬나?

 

- 하고 머릿속에서 인내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는 식의 표현을 읽을 때마다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툭- 하고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지 이건 뭐랄까, 분노와 서운함과 한심함이 어우러져 한탕 걸쭉한 춤을 추는데……. 나는, 정말이지 네가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을 했다. 내 경험만으로는 안 될까 봐 주변에 물어보기도 했다. 남자 입장에서 나올 수 있는 답이 비슷할 것 같아서 여자 인맥을 총동원했다. 여친, 여사친, 여동생은 물론이고 하여튼 자만 들어가면 여의봉(?) 여의주(??) 여진구의 여드름(???)한테도 물어보겠다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녔고, 취합해서 너한테 알려줬다. 그런데 너는 9시 반의 지하철 화장실 앞에서 고백하는 븅신이었고, 지금 니가 이 모양 이 꼴인 건 니가 그런 븅신이어서인데, 이제 네가 이렇게 나오겠다면 나는 이 일에서 손을 뗀다. 아디오스 친구여.

 

은 거의 조아리면서 용서를 빌었고, 나는 그 허망한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은 핸드폰을 들었다. 40분 후 호랑이치킨이 배달되었다. 우리 집에는 다시 웃음과 평화가 깃들었다.

 

 

 

4

 

그러고 나서 K씨에게 카톡을 보냈다. 별말 안 하고 그냥 평소처럼 주말에 만나자고 했고, 토요일에 식물원 가자고 했는데 OK 사인이 떨어졌다. , 이런 말씀은 얼굴 보고 드리는 게 예의인 것 같아서 만나자고 했어요. 우린 아닌 것 같아요. 사요나라- 이럴 것 같았으면 식물원 앞에서 만나자 할 때 그러자 했겠어? 그냥 카페 같은데서 잠깐 이야기하자 했겠지. 아무래도 이건 오케이 각인데? 이랬더니 신나서 대답하는 . , 가자, 대부도 가자!

 

……?

 

대구에 내려가기 전, 갑자기 바지락칼국수가 너무 먹고 싶어서, 대구 갔다 오면 수요일이나 목요일쯤에 대부도 가서 바지락칼국수나 먹고 오자고 지나가듯 말한 것인데, 화요일 저녁 대구에서 바지락칼국수 맛집에 다녀오는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말을, 심지어 지가 카톡 기다리며 일희일비할 때는 지도 모른 척하던 그 약속을 갑자기 꺼낸다고?

 

오케이 각 잡히자마자 데이트코스를 물색하는 이었다. 언젠가는 K씨와 갈 거라며 그 전에 미리 답사하자는 것. 하여튼 이놈은 이게 문제다. 고백도 화장실 앞에서 겨우 말 꺼낸 놈이 대부도 생각부터 하는. 손을 잡니 허리를 감니 뭐 이런 소리에 팔랑거리는 게 다 이새끼 천성이다.

 

 

 

5

 

그래서 남자 둘이 대부도를 갔다고 합니다. 시화나래 전망대도 올라가고, 메타세쿼이아 길도 걷고…….

 

 

 

6

 

근데 막상 약속 날 K씨 바빠서 약속 한 주 밀림. 이번 주 토요일이 D-Day네요. 그때는 과연 고백관련 소식이 아닌 연애관련 소식을 전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 읽은 ---

하도 오랜만에 쓰는 페이퍼라, 오늘은 읽은 책이 좀 많다.

 



310. 아주 편안한 죽음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_ 시몬 드 보부아르, 아주 편안한 죽음

 

 

 


311. 나를 뺀 세상의 전부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

 

syo는 시인이 쓴 에세이를 참 좋아한다. 에세이 속에서도 그들은 시인이기 때문이다. 시인이라는 자각을 남기려는 에세이는 물론, 시인이 아니라 에세이스트로서 써야지 하는 느낌이 나는 글에서도 시인이 아니라하는 순간 이미 시인의 에세이가 되는, 이 기묘한 마법이 가능한 이유는 뭘까. 대체 시인이 뭐길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시인의 산문은 대부분 아름답고 그 시인이 김소연 시인이라면 아름다움은 당연의 영역이다. 40문단 정도를 훔쳤는데, 대체 하나같이 아름다운 이놈들 중에서 뭘 여기에 옮겨놔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 그래도 기왕이면 시에 대한 고민이 담긴 대목을,

 

어째서 다시 시집이 읽히고 시집을 선물하는 시대가 돌아오게 된 걸까. 사람을 만나도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없어서일까. 진지한 얘기를 꺼내면 놀림받는 분위기 때문에 진지함은 혼자만의 시간에서나 누려야 할 은밀한 영역이 되어버린 탓일까. 매정한 시대에 건조한 표정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감성의 영역이 복용해야 마땅할 영양제가 된 탓일까. 인간의 얼굴이 도무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실제로 만나는 얼굴들로부터는 확인받을 길이 없어서 가장 내면의 얼굴을 엿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 것일까. 시는 잠깐잠깐 한 편씩 읽을 수 있는 것이어서 늘 시간이 없는 우리에게 용이하게 읽히는 걸까. 말에 대한 피로함과 침묵의 시간에 대한 소중함을 동시에 해갈할 수 있는 영역이어서일까. 어제를 복제한 듯한 오늘을 사는 일이 파리해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목소리 한 자락을 듣고 싶은 간절함 때문일까. 아니면, 출구가 모두 봉쇄된 듯한 시스템 안에서 지리멸렬함을 견디다 견디다 자유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어 시를 통해서라도 인공호흡을 해보려는 마지막 도전 같은 것일까.

  독자는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적혀 있는 시집을 찾아 헤맨다. 꼭 듣고 싶은 한마디가 시에 적혀 있기를 바란다. 이 시대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사랑한다는 말도, 희망이 있다는 말도, 인간을 믿어보자는 말도, 세상은 그래도 아름답다는 말도 뻔히 거짓말인 줄 다 아는 시대다. 어쩌면 뻔한 거짓말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다시 한번 고려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시가 다시 읽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 번 사람을 믿어보겠다며 다른 방식으로 고백해보고 싶어서 시집을 선물하게 되는 건 아닐까.

_ 김소연, 나를 뺀 세상의 전부

 

인류애가 생겨나는 기분이다.

 

 

 


312. 에드문트 후설, 엄밀한 학문성에 의한 철학의 개혁

박인철 지음/ 살림 / 2013

 

- 일독(1712xx)

- 재독(210823)

 

이 책은 진짜 기가 막힌다. 후설의 주요 개념을 연결해서 물 흐르듯 좔좔 설명하는데, 읽다가 근데 이게 된다고?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면 어찌 알았는지 바로 다음 문단에 "그런데 이게 된다고? 싶을 것이다. 후설은 그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는데" 하고 대답하는 점쟁이식 구성이다. 처음 읽기는 이걸로. 다음은 조광제 선생님의 <의식의 85가지 얼굴>이라든가, 이남인 선생님의 <현상학과 해석학> 정도가 좋겠다. 박이문 선생님 전집 중에도 현상학에 대해 할애된 부분이 있다.

 

물론 지평은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 무수히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무엇을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지평의 범위와 내용은 달라질 수 있다. 자연과학자들이 보는 세계도 그 나름의 특수한 지평적 세계다. 그런데 지평은 의미의 연관성만 있다면, 기본적으로 부단히 확장 가능하다. 이때 모든 가능한 개별 지평들을 포괄하는 궁극적 보편적 지평을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보편적 지평으로서의 세계’, 곧 후설적 의미에서의 생활세계. “모든 이 세계의 주어짐은 지평의 방식 하에서의 주어짐이다. 지평들 속에 그 이상의 또 다른 지평들이 함축되어 있으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모든 세계적으로 주어진 것은 세계지평을 지니게 되고, 단지 이를 통해 세계적인 것으로 의식된다(위기, p.146).”

_ 박인철, 에드문트 후설, 엄밀한 학문성에 의한 철학의 개혁

 

 

 


313. 수전 손택의 말

수전 손택, 조너선 콧 지음 / 김선형 옮김 / 마음산책 / 2015

 

이것저것 뒤지고 찾아내서 엄청 준비를 많이 해온 인터뷰어와 그냥 평소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그 모든 질문에 유연하고도 유려하게 대답하는 인터뷰이. 손택 멋있쪙.

 

, 내가 원하는 건 내 삶 속에 온전히 현존하는 것이에요. 지금 있는 곳에, 자기 삶 ''에 자기 자신과 동시에 존재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세계에 온전한 주의를 집중하는 것 말입니다. 사람은 세계가 아니고 세계는 사람과 동일하지 않지만, 사람은 그 안에 존재하고 그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지요. 그게 바로 작가의 일입니다. 작가는 세계에 주의를 기울여요. 저는 머릿속에 모든 게 다 있다는 유아론적인 관념에 반대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사람이 그 속에 있든 없든 항상 거기 그 자리에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가 정말로 있어요. 그리고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내게는 글쓰기를 지금 현재 내게 벌어지는 일과 연결하는 쪽이 그 경험에서 물러나 다른 일을 하려는 것보다 훨씬 쉬워요. 안 그러면 그냥 자기 자신을 두쪽으로 나누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_ 수전 손택, 조너선 콧, 수전 손택의 말

 

 

 


314. 내 마음과 거리 두기

설기문 지음 / 좋은습관연구소 / 2021

 

당신은 감정체가 아니며 감정 또한 당신이 아니다. 감정은 그냥 당신이 경험하는 것일 뿌니다. “나는 우울하다고 할 때 나는 우울이다의 뜻이 아니라 나는 우울한 감정을 경험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슬프다나는 슬픔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나는 슬픔의 감정을 경험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다. 감정 자체가 아니라 감정의 에너지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느 그 에너지가 나쁜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것을 좀더 쉽게 털어낼 수 있다.

_ 설기문, 내 마음과 거리 두기

 

그냥 저게 핵심이다. 감정에서 나를, 아니, 나에게서 감정을, 아닌가? 감정에서 나를-인가? 모르겠다, 하여튼 감정 그것과 나를 분리하는 것. 그러라고 이런저런 방법들을 제시하는데, 그게 어떤 것들인지는 목차에 짜르르 나온다. “잠재의식 속 진짜 원인 찾기처럼 딱 듣는 순간 그렇게 해야겠다는 건 알겠지만 뭐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 기술부터 드론이 되는 상상해보기같은 초보적인 것도 있다. “죔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보기이런 것도 있다. 허허.

 

 

 


315.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하재연 지음 / 문학과지성서 / 2012

 

  바람이 지나가고

  벚꽃잎이 떨어진다

  이 기차는 나를 어디엔가는

  데려다줄 것이다

 

  떨어진 벚꽃 위로

  떨어지는 벚꽃의 얼굴이 한순간 반짝인다

  나는 올려다본다

  스카 라스카 알라스카

 

  단단하고 하얀 이름이 입속에서

  조금씩 녹아내릴 때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또렷한 목소리로

  너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한 꽃송이였다가 흩어지는 벚꽃잎들

 

  이 기차는 나를 언제인가는

  데려다줄 것이다

  어떤 약속도 없이 매달려 있는 벚꽃잎의

  무성한 색깔

 

  스카 라스카 알라스카

  바람이 지나가지 않아도

  벚꽃잎이 떨어진다

 

  반짝임이 사라지고

  기차는 종착역에 닿는다

 

  내가 불렀던 너의 이름이

  벚꽃잎의 색깔과 함께 흩어지듯이

  우리가 만났던 도시가 녹아내려

  지구의 물이 되듯이

_ 하재연, 언제인가 어느 곳이나

 

그러니까 얘네는 헤어진 모양이고,

 

 

  이곳은 플라나리아의 나라

  너와 나의 무성생식은 평화롭고 순조롭게

  명료한 얼굴과 침착한 미소로

  우리들은 밤의 튜닝을 시작한다

 

  노이즈는 제멋대로 흘러들게 내버려두고

  우리들은 천을 짜기 시작한다

 

  아홉 가지 색깔의 실을 걸고

  열두 가지 향기의 실을 짜 넣으면

 

  이 밤의 퀼트는 완벽해진다

  이곳은 플라나리아의 나라

 

  우리들은 밤의 숨결에

  땀과 설탕을 흘려 넣는다

 

  불안정한 빛의 색깔들에 의해

  나는 반죽되고 몸뚱아리는 늘어난다

 

  아름다운 인형들의 눈에 눈동자를 붙이는

  밤의 작업과도 같이

 _ 하재연, 고요한 밤의 증식

 

얘네는 한 모양이다.

 

같은 애들일까?

 

쉽고 예뻤다. 아름답고 잘 읽혀서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시집 독서라는 것은 뭔 소린지 잘은 모르겠지만 하여튼 멋있는 말을 만났을 때도 즐겁지만, 지금 내 역량으로 이게 대충 어떤 상황이고 무슨 말이고 마음인지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시들을 몇 편 연속으로 읽었을 때도 뿌듯한 즐거움을 준다. 오늘의 나는 2012년의 하재연 선생님이구나.

 

 

 


316. 런던을 걷는 게 좋아,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버지니아 울프 지음 / 이승민 옮김 / 정은문고 / 2017

 

원문을 본 건 아니지만 울프의 문장이 실은 읽기에 만만치는 않다. 다른 책들도 좀 그랬던 걸 보면 원래 좀 길고 빡빡한 문장을 구사했었나 보다. 워낙 늘어지는 만연체를 즐기는 syo인지라, 이런 문장들을 수월치 않게 읽을 때면 두 가지 방향으로 죄책감이 든다. 1. 무려 울프가 써도 읽어내기 만만찮은 게 긴 문장인데, 한낱 syo나부랭이가 그런 걸 써도 되는 걸까? 2. 혹시 남들은 좔좔좔 읽어내는데 나만 저는 거 아냐? , 아직도 독서가 부족하구나…….

 

왜 그래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늘 쓰는 사람의 눈으로 읽는 게 습관이 되버린 syo에게 울프의 에세이가 던져주는 교훈은 크다. 시야에 잡히는 모든 것이 글이 된다. 그건 포착, 섭취, 소화, 배출의 4행정 엔진이 완벽하게 맞물려 동작할 때 겨우 달성할 수 있는 경지다. 그리고 어떤 필사적인 마음 없이는 유지할 수 없는 습관이다. 멋있다.

 

그런즉 런던을 단순히 멋진 구경거리로, 시장과 궁과 산업의 중심지로 알지 않고 사람들의 만남과 대화, 결혼과 죽음, 글과 그림과 공연, 통치와 입법이 이뤄지는 장소로 이해하려면 꼭 크로 부인을 알고 지내야 했다. 부인의 응접실에서라면 이 거대한 메트로폴리스의 무수한 파편들이 하나로 합쳐져 비로소 납득이 되고 호감이 가는 생생한 유기체로 거듭나는 듯했다. 여러 해 동안 떠나 있던 여행자들, 인도나 아프리카 혹은 맹수와 야만이 득실대는 외딴 모험지에서 방금 돌아온 형편없는 몰골의 사내들이 다시 문명의 품으로 성큼 들어서기 위해 이 조용한 거리의 소박한 집으로 직행한 것도 이런 까닭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런던이라고 해도 크로 부인을 영원히 살게 할 힘은 없었다. 결국 시계가 다섯 시를 울려도 크로 부인이 난로 옆 안락의자에 앉지 않고 마리아가 문을 열지 않으며 미스터 그레이엄이 장식장 옆을 지키지 않게 되는 날이 왔다. 크로 부인은 세상을 떠났고 런던은, 아니 비록 런던이 여전히 존재하더라도 다시는 예전과 같은 도시가 아닐 것이다.

_ 버지니아 울프, 어느 런던 사람의 초상

 

 

 


317. 밤에 읽는 소심한 철학책

민이언 지음 / 쌤앤파커스 / 2016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중요한 것은 지금 시작해야 하는 '미약'이다. 그럭저럭 여건을 다 갖춘 '나중'은 오지 않는다. 언제나 저 자신의 시점을 굳건히 지키면서 늘 '저기'에 자리할 뿐이다. 제대로 할 겨를이 없기에 아예 하지 않는다는 변명은 걷어치우자! 제대로 할 수 없기에 지금이 미약의 적기인지도 모르며, 당신이 버린 '짬짬이''틈틈이'로 이루어낸 자들이 '천지빼까리'. 절대 시간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아직 '나중'이 되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나중에 할 일을 지금 하지 않는 것뿐이다. 지금 뭐라도 해야, 무언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나중'도 도래하는 것 아니겠는가? 농사는 파종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씨앗을 뿌리기 이전부터 미리미리 지력地力을 걱정해야 한다.

  미래는 현재 뒤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아니다. 지금의 시간을 짓이겨 다시 쌓아올려야 하는, 그 또한 현재다.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은 당신이 딛고 있는 순간의 성질을 묻는 것이다. 이 삶이 다시 반복되어도 기꺼이 다시 살아줄 수 있는 가치관으로 '지금'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어느 시제를 살아가던, 당신은 지금을 반복할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 기대하지 마라! 오늘 지고 있는 태양도 돌아보지 않는 이에게 내일의 태양은, 내일 이 무렵에 세상 끝으로 사그라질 오늘의 하늘일 뿐이다.

_ 민이언, 밤에 읽는 소심한 철학책

 

, 철학을 꼼꼼히 공부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게 되는구나. 입을 헤 벌리고 무릎을 탁 치면서 보느라 윗도리는 침에 젖고 아랫도리는 무릎이 해어졌다. 그리고 자꾸만 뼈를 때려서 깁스를 했다. 소심하다 그래놓고 장쾌하게 공격한다. 훌륭하다. 얼마 전에 여자친구도 비슷한 말을 해줬다. 철학책 한 권 안보는 그녀가. 훌륭하다. 훌륭하다.

 

 

 


318. 민주주의의 발전과 위기

임혁백 지음 / 김영사 / 2021

 

헤테라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빅데이터를 활용한 정보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정보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누구나 정보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고, 서로 정보를 공유할 것을 장려한다. 또한 시민이 생산한 정보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만일 재산권을 통제할 수밖에 없을 때는 적절하게 보상해주어야 하나.

  정보 민주화를 위해서는 소수의 정보 귀족들이 자신의 영지에서 정보를 독점하고 통제함으로써 정보가 일반인들에게 공유되거나 확산하지 못하는 정보 봉건제를 타파해야 한다. 정보를 독점한 특정세력은 시민들의 성적, 종교적, 정치적 성향을 모니터링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민을 감시, 통제하는 데이터 감시국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_ 임혁백, 민주주의의 발전과 위기

 

요 대목만 보면 어쩐지 뜬구름 잡는 말을 하고 그를 뒷받침하기 위해 귀족’, ‘영지’, ‘봉건제같은 단순한 동시에 매콤한 단어를 갖다 붙이는 귀여운 청소년 도서 같아 보이지만, 짧은 분량에도 민주주의의 발전위기라는 제목에 걸맞게 발전상과 위기상을 깨알같이 설명해두었다. 휙휙 읽고 다른 책으로 넘어가면 좋다.

 

 

 


319. 우리는 영원하지 않아서

이낙원 지음 / 들녘 / 2017

 

엄마의 병을 다루던 병원에 친구가 일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나와서, 함께 재수를 했고, 같은 대학에 들어가 같은 하숙방에서 2년을 산 친구다. syo가 진로를 따라 멍청한 syo가 되는 동안 친구는 항로를 수정하여 의사가 되었다. 친구는 신장내과도 혈액종양내과도 아니었지만 병실 문턱(병실에는 문턱이 없다)이 닳도록 드나들며 엄마의 상태를 체크하고, 안심시키고, 나를 위로했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국면에서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전화를 했던 것도 그 친구였다. 친구는 급한 수술에 들어가는 길이어서 내려와 보지 못했고, 그 사이 엄마는 돌아가셨다. 다음 날 누구보다 먼저 분향소를 찾아온 친구는 조용히 울다 갔다. 이후 대구에 머무는 동안 몇 번을 더 찾아와줬고, 그때마다 그날 응급실에 혼자 서서 멍하니 엄마의 시신을 내려다보던 내 옆에 있어 주지 못했던 것을 미안해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나 너는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했다. 아들보다 더 나은 아들친구였다. 엄마는 아들이 병실에 들어올 때보다 박선생이 병실에 들어오는 모습을 더 크게 웃으며 반기기도 했다.

 

많은 죽음이 그의 뒤에 있었고 앞에 있을 것이다. 슬프고 안타깝지 않은 것이 하나 없을 것이다. 엄마의 죽음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이 있듯, 그가 배운 것이 있겠구나 싶었다. 우리는 영원하지 않아서, 앞으로도 끝없이 슬프고 안타까울 그에게 감사와 경의 말고도 더 표현할 게 있을지 찾는 중이다. 엄마가 넥타이를 하나 사주라고 했는데 그게 일종의 유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죽음이 전문화, 의료화된 것도 문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태어나고 병원에서 죽어가지만, 정작 병원에서는 임종을 병원의 업무로 이해하지 않는다. 의학은 아프기 이전의 삶을 회복하고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학문이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는다. 난 의사가 되는 과정에서 임종하는 환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체계적으로 교육받지 못했다. ‘더 이상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란 말은 말기 질환으로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에게 의사들이 종종 하는 말이다. 나 역시 유 할머니의 아드님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는 말 외에는 어떤 것도 건넬 것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지만 의학은 또는 의사는 여전히 삶에만 집착하고 있지 않은지. 죽음이 일상화된 병원이지만, 아직도 병원은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덜 되어 있다.

_ 이낙원, 우리는 영원하지 않아서

 

 



320. 대불호텔의 유령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

 

이제 더는 박지운을 찾아가지 않으리라. 이제는 내가 정리한 이야기 속의 박지운을 들여다보리라. 그런 방식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리라. 그렇게 이야기를 쌓고 쌓고 또 쌓다보면, 진짜 마음을 알 수 있겠지. 왜 그렇게 알고 싶어하느냐고? 왜 계속 쓰고 싶어하느냐고? 왜냐하면 그 마음이 결국은 나의 마음이니까. 내가 나를 이해하는 방식이니까. 나의 이야기니까. 그리하여 나는 나의 이야기를 또 상상한다.

_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

 

사랑이라고 써도 되겠고 또 그래야 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아서 이 책이 사랑에 관한 책이라는 맥락의 리뷰를 쓰긴 했지만, 사실 처음에는 이 책은 쓰기에 관한 책이라고 느꼈다. 천재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쓰는 사람의 삶에는 좌절과 방황, 환멸, 질투, 자기비하 같은 감정들이 사막의 크고 작은 모래언덕처럼 점멸한다. 구조적으로 보면 이 책은 쓰는 일에 실패하였다가 쓰는 일에 달리 성공하는 책이다. 안에서 벌어지는 서사는 그 서사대로 의미가 있겠으나, 읽기에 따라서는 저 문단이 설명하는 내용에 그대로 복무하는 것이기도 하다. 화자가 페이크 저자라는 이중 구조 내부에 액자식의 또다른 중첩 구조가 있는 책답게, 독서하는 입장에서도 여러가지 관점을 통해 책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듯하다.

 

 



321. 딱 이만큼의 경제학

강준형 지음 / 다온북스 / 2018

 

 

322. 사조영웅전 6

323. 사조영웅전 7

324. 사조영웅전 8

김용 지음 / 이지청 그림 /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 김영사 / 2020

 

 


325.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4

326.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5

327.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6

328.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7

이희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 2021

 

 

 

--- 읽는 ---

요리코를 위해 / 노리즈키 린타로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 박찬국

SF가 세계를 읽는 방법 / 김창규, 박상준

소소하게, 독서중독 / 김우재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 임건순

마키아벨리 / 퀜틴 스키너

불평꾼들 / 제프리 유제니디스

장정일의 공부 / 장정일

소오강호 1 / 김용

구의 증명 / 최진영

데이트가 피곤해 결혼했더니 / 김수정

천국보다 성스러운 / 김보영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 이라영

모더니즘 / 피터 게이

사랑이 아닌 것은 별 / 사이하테 타히

예술 수업 / 오종우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6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1-09-01 13: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흥미진진 쫄깃쫄깃합니다ㅋㅋㅋㅋ K님이 숨은 고수는 아닐까 생각도 살짝 드네요ㅋ제발 좋은 소식 있기를..근데 잘되도 syo님 더 일이 많아지시는 것은 아닐까요?😆 (기다리는 연락 있을때 스펨와서 그 회사 홍보부에 전화해 따진적 있는1인;;)

syo 2021-09-01 14:43   좋아요 4 | URL
저희도 혹시 K님이 조련하는 게 아닐까 의심은 해보았지만, 지금은 그냥 K님 역시 三처럼 지나치게 무덤덤한 캐릭터로 잠정 결론을 내린 상태입니다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9-01 14: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떡하지? 그 과장인지 부장인지 하는 사람 말예요. 어떡해? 그 사람을 일주일에 닷새 보는거 아녀.. 그걸 어떡하죠 대체? 떼어놓아야 한다...닷새간 세뇌당하다가 주말동안 쇼님 만나는 거면, 이쪽이 너무 약해.. 저 닷새로부터 빼내야 하는데.. 게다가 그사람 옆에는 그 사람말 옳소 옳소 하는 사람들도 있을거 아녜요. 답답하기 짝이없네. 이 모든 것은 운명인가.....Orz

syo 2021-09-01 14:47   좋아요 4 | URL
참 뭐랄까, 지금은 그래도 지가 아는 거 없다는 인식이 있어서 말을 들어 먹는데, 나중에 좀 해보고 하면 지 쪼대로 할거잖아요. 그 쪼가 좋은 쪼였으면 하는 바람만 가질 뿐이지요 뭐..... 나이 40먹은 애를 기저귀 채워서 데리고 다닐 수도 없고.....

페넬로페 2021-09-01 14: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글을 계속 읽어나가며 제가 마치 연애 분석가라도 된 것 처럼 상황을 이미지로 정리하고 있었어요 ㅎㅎ
어쨌거나 삼님의 연애는 알라딘에서도 폭발적인 관심이 있지만 삼님 회사에서도 그런가봐요~~이래저래 보살 3 syo님께서 중간에서 힘들겠어요
삼님의 연애가 희망적으로 보입니다^^

syo 2021-09-01 14:50   좋아요 4 | URL
그렇지요? ㅎㅎㅎㅎ
시작하면 뭐하겠어요, 그때부터 고난과 역경 시작인데 ㅎㅗㅎ

연애하고 나면 알라딘에 폭로하는 일도 어렵겠지요.... 三만 걸려 있는 게 아니라 K씨도 걸려 있으니까....
마지막 뽕을 뽑아야겠다 ㅋ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09-01 14: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토요일이 기대가 되네요. syo님의 마지막 조언이 성공을 결정하겠군요 😆 엄청난 책 리뷰들~! 하재연님 시집을 읽어보고 싶은데 이번 주문에서 빠뜨렸네요ㅜㅜ 역시 대부도는 남자 둘이 가야 제맛~!!

syo 2021-09-04 16:10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ㅎ 제맛!

그치만 그 제맛 다시 한번 느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ㅋㅋㅋㅋ 역시 바다는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책읽는나무 2021-09-01 14: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3님 멍충이!!!!!
화장실 앞에서 급하게 고백을!!!ㅜㅜ
거기다 팔랑귀까지~~팔랑귀 멍충이세요.ㅜㅜ
여섯 번 만남을 모두 오케이 했다면 지금 k님은 고백을 기다리고 있을 듯 한데 말이죠?
제 느낌도 그러한데 말입니다.
근데 어떤 생각이실지 저도 같은 여자라도 좀 헷갈리긴 하네요?

3님이 데이트할때 분명 어떤 숨은 매력을 뿜으셨나 봅니다...k님은 알쏭달쏭해서 더 만나 보고자 결정을 내리신 듯 한데...어설픈 스킨십 떼찌!!하시고 진중하게 다시 고백하셔야 합니다.
엄마 문자에 실망하시고 스팸 문자에 분노하신다면 3님도 여자분이 엄청 마음에 들어 애를 태우시는 듯 하신데....저도 토요일 응원하겠습니다.
멍충이로 돌아오시면 안됩니다!!!!
남의 연애사는 나이 먹어도 심장이 쫄깃하네요^^

syo 2021-09-04 16:11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
그의 만남은 또 한 주 밀렸다고 합니다. 참, 점점 더 종잡을 수가 없네요.
화장실에서 급하게 고백하는 멍충한 친구의 친구라서 송구스러울 지경입니다.....

막시무스 2021-09-01 15: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고백이 아닌 연애소식을 기다려 보겠습니다!ㅎ 덕분에 후설 입문책 시도하는 용기도 가져봅니다! 좋은 글 항상 감사드리고 9월도 즐겁고 건강한 독서하시길요!ㅎ

syo 2021-09-04 16:11   좋아요 2 | URL
막시무스님 오랜만에 뵙네요 ㅎㅎㅎㅎ 잘 지내셨죠?
환절기 건강 조심하시고, 즐독하세요!

Falstaff 2021-09-01 16: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흠. 왜 저는 호랑이 치킨 일화가 젤 눈에 확 들어올까요. 三 선생, 우와 천연기념물 아녀요?

syo 2021-09-04 16:11   좋아요 1 | URL
천연이긴 한 모양인데, 저런 걸 기념하는 것은 오염입니다.....

붕붕툐툐 2021-09-01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치킨이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을 쓰고 싶네요. 삼님과 k님도 식물원 구경 후 치킨을 먹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아, 진짜 연애 얘기가 세상에서 젤 재밌어요! syo님의 중계에 감사드립니다!ㅎㅎ

syo 2021-09-04 16:12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 아직 연애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이야기가 연애이야기가 될지, 그냥 산처럼 쌓인 븅신같은 에피소드의 한 조각 구성물로 그치고 말지, 그게 결정되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습니다 ㅎㅎㅎㅎ
 
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얼마 전, 엄마가 죽었다. 카뮈가 이와 비슷한 문장을 남긴 이후로, 다른 누구도 이런 문장을 함부로 쓸 수 없게 된 것 같다. 일생에 오직 한 번, 실제로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를 빼면.

 

엄마가 죽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러나 이 말들을 내뱉기 어려운 것이 사실 카뮈 탓은 아니다. 나는 입으로, 손가락으로, 심지어는 침묵으로 저 문장을 수십 번 이상 뱉어내면서, 그때마다 아프고 슬프면서, 많이 생각했다. 세상에서 죽음이라는 개념을 가장 멀리 밀어내는 단어가 엄마라서, 그 엄청난 척력을 찍어누르고 한 문장으로 묶기 위해서 마음의 힘을 많이 소모하는 것은 아닌지를.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153)

_ 시몬 드 보부아르, 아주 편안한 죽음

 

 

 

2

 

엄마는 길지 않은 생의 아래쪽 절반을 암과 이런저런 방식으로 싸우다 갔다. 지금의 나보다 고작 몇 살이 더 많았던 나이에 첫 암을 만났다. 그놈은 골수에 생겼다. 골수 이식을 두 번 받았고, 오랜 시간을 무균실에서 지냈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나 모르게 넘겼다고 나중에 들었다. 몇 개의 천운이 있었고, 천운과 천운 사이를 의지로 이어붙이며 엄마는 암과 싸웠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항암이 끝나고 새로 나는 머리와 눈썹은 이전의 것들보다 굵고 진해서 좋다고, 엄마는 말하며 웃었다.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엄마는 그 후로도 10년은 날것을 먹지 않았다. 과일도 익혀 먹었다. 주기적으로 내원했고, 엄마의 이런저런 혈액 수치는 우리 가족의 근심거리가 되었다가 낭보가 되었다가 했다. 일희일비했지만 며칠이면 잊고 우리는 살았다.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아버지가 암에 걸렸고, 동생이 대학에 입학했고, 나는 군대를 갔고, 아버지가 죽었고, 내가 전역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엄마는 꾸준히 엄마였다. 10년이나 무사했으니 이제는 괜찮을 거라고 모두들 말했지만 그건 엄마에게 그저 말에 지나지 않았다. 고통, 공포, 절망, 그리고 외로움. 정말로 그 모든 걸 다 겪은 사람은 말을 하는 우리가 아니라 말을 듣는 엄마였다. 암은 끝나도 끝난 게 아니었다. 엄마에겐 그랬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렇지 않았고, 우리는 안일했으며, 결과는 처참했다.

 

 

 

3

 

배변이 원활하지 않고 소변에 살짝 핏기가 비친다고 엄마가 처음 말했을 때, 우리가 한 것은 병원에 가보라는 말이 다였다. 엄마는 언제나처럼 병원에 가지 않았다. 우리는 암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만했고, 엄마는 혹시나 암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을 먹고 회피했다. 암 환자 가족들은 안다. TV에서 의사들이 불러주는 발암 물질을 외우고, 암에 좋다는 각종 먹거리들과 조리법을 노트에 꼼꼼하게 적어가며 암의 가능성으로부터 최선을 다해 도망치는 사람이, 정작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 병원 가기를 피하는 일은 하나도 모순적이지 않다. 암을 통과해온 사람에게, 암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훨씬 무서운 것은 암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하여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렀다


뒤이어 우리가 한 것은 병원에 가보자는 제안이었다. 그리고도 엄마를 병원에 데리고 가기까지 또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과에서는 CT촬영을 권했고, 방사선과에서는 이 CT를 들고 큰 병원에 가라고 했다. 아닐 거라고 말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있었고, 맞을 것 같다고 대답하는 엄마의 마음속에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예감이 이기고 희망은 졌다. 엄마의 생은 엄마에게 두 번째 암을 선고했다. 요관암 3. 예후가 나쁘기로 유명한 암이었다. 이미 방광과 신장에 전이가 있었다. 수술했고, 신장 하나와 방광의 일부를 떼어냈다. 2019년이었다. 림프 전이를 막지 못했고, 2020년부터 항암에 들어갔다.

 

 

 

4

 

당신은 죽을 거라고 끝내 알리지 못했다. 엄마에게 당신의 죽음에 대해 알려준 것은 죽음이었다.

 

 

 

5

 

  "미뤄야…… 만해…… 조금."

  "지금 미뤄야 한다고요?"

  "아니, 죽음을."

  엄마가 죽음이라는 단어를 매우 강하게 강조해서 말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죽고 싶지 않구나."

  "그럼요, 엄마는 다 나으신걸요!"

  그러고 나서 엄마는 조금은 헛소리를 했다.

  "내 책을 발표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 여자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 젖을 물려야 해."

  동생은 옷을 입었다. 엄마가 의식을 거의 잃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엄마가 외쳤다.

  "숨이 막혀."

  입이 벌어지고, 살이 쏙 빠진 얼굴에서 유난히 커 보였던 두 눈이 부풀어 오르듯이 확장됐다. 경련을 일으키면서 엄마는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쿠르노 씨가 "언니분께 전화 드리세요"라고 말했다. 푸페트가 전화를 걸었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교환원이 30분이나 계속해서 전화를 걸고 나서야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사이 푸페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엄마 곁을 지켰다.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가운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흐릿한 눈을 하고는 주저앉은 채 숨만 겨우 쉬면서 말이다. 그렇게 끝이 났다.

  "의사들 말로는 촛불이 꺼지듯이 돌아가셨대.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동생은 흐느끼며 말했다. 간병인이 답했다.

  "하지만 보호자분, 제가 보증하건대 어머니께서는 아주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셨어요." (126-127)

 

그래도 고생 덜하고, 일찍 가신 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남겨진 사람을 위한 말이었고, 말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최선을 다해 조심스러워하는 기미가 보였다. 나중에는 내가 먼저 그 말을 하게 되기도 했다. 어쩌면 다행일지도요. 길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보았다. 죽음이 엄마에게 들이닥치는 모든 순간을 세세히 보았다. 그걸 모두 본 사람은 세상에 나 하나뿐이었다. 엄마는 한 번도 쉬지 않고 100km를 달리고 있는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몸이 떨리고 눈이 자꾸 뒤집어졌다. 내 손을 힘있게 맞잡지 못했다. 내 말을 듣고 있었겠으나, 숨을 쉬느라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감히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아프고 무서웠을 것이다. 아파, 아들, 나 너무 무서워,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인데 말할 수 없어서 더욱 아프고 무서웠을 것이다. 그 고통과 공포 속에서 마지막 남은 몸부림을 치는 엄마를, 나는 보았다. 나만이 보았다.

 

당신들이 그 모습을 보지 못해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고생 덜하고 일찍 가신 게 어쩌면 다행이라는 위로의 말을 어렵게 건네는 그 따뜻한 마음 뒤에 눌러두었을 슬픔을 나도 위로하고 싶어서, 길지 않아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편히 가셨을 거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다.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 같은 죽음 뒤에, 남은 이들이 주고받은 거짓말들만 남았다. 죽음은 그렇게 완성된다는 것을 배웠다. 자기도 채 온전히 믿지 않는 말을 던져 믿음을 주고, 돌아오는 말을 들으며 믿음을 더하고. 끝내 모두가 그렇게 믿거나 믿기로 결정했을 때, 죽음은 1차적으로 완성된다. 그 누빔점으로부터 시작해 죽음은 완전한 완성을 향해 가고, 그 길 위에서 남은 이들의 슬픔은 시간에 풍화된다.

 

 

 

6

 

영성체를 위한 기도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영성체를 했다. 신부는 다시 한 번 짤막하게 설교했다. 그의 입에서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라는 이름이 불려 나왔을 때 나와 동생은 둘 다 격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 이름은 엄마를 되살아나게 했다. 그 이름은 엄마의 생애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결혼 생활을 하던 시절을 비롯해 과부였던 시절과 관 속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마지막 시기마저도 포함하는 생애 전체 말이다.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

  이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적이 거의 없는, 잊힌 여인에 불과했던 엄마가 한 명의 주체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145-146)

 

막내삼촌이 엄마의 추도 예배를 집전했다. 삼촌의 추도사는 남은 이들의 엄마, , 누나, 동생, 고모였던 사람을 단지 그렇게 호칭하다가 끝났다. 이름은 말해지지 않았다. 그 이름은 분향소의 입구 모니터에 쓰여 있었고, 상주가 서명해야 했던 몇몇 서류에 적혀 있었으며, 비석에 새겨져 그 이름 주인의 뼛가루 위를 덮었다. 그러나 말해지지는 않았다. 행정과 자본의 영역에서 엄마의 이름을 삭제하기 위해 나는 몇 번 그 이름을 입에 올려야 했다. 삭제되기 위해 호명되는 이름. 그런 이유로 불리는 것이 그 예쁜 이름의 마지막이라면 너무 슬플 것이어서, 다가오는 명절에 나는 엄마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한껏 그 이름을 불러주기를 청할 작정이다.

 


엄마는 이름으로 있을 재 자와 향기 향 자를 썼다정말이지 이름 같은 사람이었다.




댓글(61) 먼댓글(0) 좋아요(8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오늘도 맑음 2021-08-31 11: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머님을 닮으셔서 syo님이 멋지시군요~!
어머님 처럼 아름다운 글입니다.
가슴 한 켠이 먹먹해서 감당하기 힘이 드네요ㅠㅠ 재향님은 분명 행복 하실 꺼에요..
이렇듯 아드님의 사랑이 애틋 하니까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 글을 읽는 지금이 제게도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syo 2021-09-01 13:28   좋아요 4 | URL
보잘 것 없는 글에 대한 칭찬, 좋은 말씀, 위로, 명복을 빌어주신 것까지 모두 감사합니다.
맑음 님께 쓸모없는 시간이 아니었다니, 그것만으로도 좋네요. ㅎㅎㅎ
환절기 건강 조심하세요^-^

mini74 2021-08-31 14: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명절이 되면 좋아하는 음식을 좋아하시던 프로를 좋아하시던 색과 꽃과 산을. 좋아하시던 영화와 책을 볼때마다 슬프고 그리워요. 어쩌다 마주치는 흔적들엔 그리워서 울게 되고요. 자연스러운 일인걸요. 그렇게 그렇게 지나도 보면 그립고 슬픈데 너무 보고싶은데 그런 말들 그런 기억들을 눈물대신 웃으며 할 수 있을거예요. 저도 아직은 힘들지만요. 마음으로 한 번 안아드리고 갑니다.

syo 2021-09-01 13:29   좋아요 4 | URL
어, 안아주시고 가셨네요 ㅎㅎㅎㅎ 감사합니다.
조금씩 잊고 조금씩 기억하고 그렇게 분류하면서 사는 게 남은 사람들 일이겠지요.

감기 조심하세요. 날이 춤습니다.

2021-08-31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9-01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21-08-31 23: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쇼님이 한 페이퍼에 한 권의 책을 쓴 거 처음 본 거 같아요. 그만큼 쇼님의 삶과 공명하는 부분이 큰거겠죠? 이렇게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있는 거 보면 쇼님 애도의 기간을 너무나 잘 보내고 계신 거 같아요. 페이퍼에서도 향기가 나네요.

syo 2021-09-01 13:31   좋아요 3 | URL
네 ㅎㅎㅎㅎ 저는 무척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가끔 울컥울컥 하는 건 있지만 그것조차 그정도면 양호할 정도입니다.

툐툐님 감사합니당

봄밤 2021-09-01 00: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진 속 어머님 모습이 참 멋지고 아름답네요. 어머님 글 많이 많이 적어주세요. 그 사람을 기억하고 쓰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애도의 방법인 것 같아요. 더 이상의 추억을 만들 수 없는 건 아픔이지만 그간의 시간들을 아로새길 수 있는 건 축복이니까요. 늘 syo님의 글에 묘한 위안과 위로를 얻어요.

syo 2021-09-01 13:32   좋아요 3 | URL
ㅎㅎㅎ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요즘 봄밤님 글 읽으면서 문장 많이 다듬습니다. 아직 멀었지만.
비도 오고 날도 추워지니까, 감기 조심하세요.

희선 2021-09-01 02: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yo 님, 어머님 명복을 빕니다 이런 말밖에 못하겠네요 이런 책 보면 더 어머님이 생각나겠습니다 저세상에서는 편안하셨으면 합니다 그러실 거예요 어머님이 저 위에서 syo 님하고 동생분 지켜보실 거예요


희선

syo 2021-09-01 13:33   좋아요 4 | URL
때마침 이 책이 책상 위에 놓여서 조금 놀라긴 했습니다. 펼쳐보기 전까지 무슨 내용인지 몰랐거든요.


희선님 감사합니다. 건강 잘 챙기시구요^-^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