曲
1
서울에는 다섯 개의 궁궐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경복궁을 법궁法宮이라 하고 창덕궁을 비롯한 나머지 네 개의 궁궐을 이궁離宮이라 한다. 그 부르는 모양에서부터 벌써 임금이 몸을 오래 두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드러나는 바가 있는데, 실제로 임금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곳은 창덕궁이었다고. 그 사랑엔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태종에게 경복궁은 아버지나 형제를 겨누고 벌인 칼부림의 무대였다. 광화문에 뿌려진 피 냄새가 탐탁스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은 태어나 자란 창덕궁에서 즉위했다. 그리고 그 궁에서 폭정하고 실정하다 쫓겨난다. 왜란 이후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을 중건한 선조와 광해군의 심리 속에도 아마 어떤 결락 혹은 정치적 노림수 같은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후대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다른 이유를 찾게 된다. 경복궁을 둘러보고 광화문을 되돌아 나올 때면 늘 그런 생각을 한다. 법식에 따라 배치된 건물, 지나치게 거창한 의미를 두고 획정한 공간 같은 것들은 보기에 장엄하고 시원한 맛은 있지만, 이 공간에 평생을 거처할 것을 상상하면 아찔한 느낌이라고. 창덕궁은 훨씬 숨통이 트인다. 정문에서 정전까지 대로가 트여 있는 경복궁을 궁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지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에 도착하기까지 우회전 한 번, 좌회전 한 번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의아할지도 모른다. 경복궁에 비하면 창덕궁은 지세를 누르지 않고 풍광에 순응하는 자세로 만들어낸 공간 같다. 공간을 둘러보는 관람객의 발길이 직각으로 꺾이지 않고 곡선에 가까이 에두를 때, 그 공간에 어우러진 수목, 연못, 심지어 바람이나 새소리 같은 것들도 둔각을 이루여 관람객을 품는다. 거닌다는 것은 꺾지 않고 두르는 일이고, 모서리가 많은 공간은 거닒에 저항한다.
예리하게 꺾여 들어가는 사람이고 싶은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은 때가 있다. 정확하게는, 그러고 싶은 사람이 있고 그렇게 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 같다. 함께 거닐고 싶은 사람, 그 안을 거닐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하는 사람이 있다.
창덕궁을 다녀왔고, 간단한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 3권의 책을 빌려다 읽고 있다.
2
그때가 유월이었던가요
당신이 나를 슬쩍 밀었던가요
그래서 풀밭에 덜렁 누웠던 것인데
초록이 나를 때렸죠
등짝에 찰싹, 초록 풀물이 들었죠
나는 왠지 모를 눈물이 핑 돌아
벌떡 일어나, 그 너른
풀밭을 마구 달렸죠
초록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몰랐죠
숨은 가쁘고 바람에 머리는 헝클어졌죠
나는 그때, 거의, 사랑에 붙잡힐 뻔했죠
_ 송찬호, 〈초원의 빛〉 부분
어떤 계절이 사랑에 포개어질 때, 그 사랑은 계절에 영영 포개어진다. 그날의 기후는 시간을 돌고 돌아 늘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고, 나사가 꼭 물리지 않은 책상다리처럼 마음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진동할 때, 흘러간 사랑에 물든 계절의 저릿한 습격을 받을 때, 그땐 바람이 불었었지 생각하면 창 너머로 여지없이 바람이 불고, 그땐 비가 내렸었지 생각만 하면 비가 창을 때리지는 않더라도 마음 안에서 빗소리가 나는, 기온을 체온이라 부르고 싶거나 바람결을 체취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슬쩍 밀렸을 뿐인데 온 지구가 덜렁- 하는, 욕조에 띄워놓은 고무공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뗀 것처럼 꿀렁- 하는 요동과 함께 흔들대다 씻긴 얼굴을 쏘옥 다시 내미는,
창밖엔 지나가는 1월과 오고 있는 2월.
3
교토 바이브란 창을 마주 앉아 목선을 소박하게 드러낸 여성의 뒷모습 같은 것인가요?
4
어제는, 이걸 망한다면 당신은 모든 파스타를 멸망시킬 그랜드 똥손입니다- 라는 평을 받는 파스타 계의 만만이, 알리오 올리오를 망했다. 내 똥손에 나도 무척 놀랐다. 그렇게 태어난 아아알리오 엉엉울리오는 생긴 것도 되게 재밌었다. 사진을 찍어놓을까 생각도 했지만 이 똥손이라면 이 정도 코믹한 요리는 앞으로도 종종 만들게 될 것 같다는 확신에 일단 스킵. 무엇보다 배가 너무 고팠던지라 와구와구 쳐먹었는데, 와하하, 정말 맛도 너무너무 재밌어요! 와하하하.
폭망의 원인은 조리 단계마다 하나씩 있을 정도로 다양했는데, 무엇보다도 올리브오일이 아니라 카놀라유를 썼다는 데서 팬에 기름을 두른 시점에 벌써 망하고 시작했다는 것이 중론. 그저께 이마트에서 알리오 올리오 재료를 구매하면서 올리브오일을 사야 한다고 말했더니, 三曰, 우리 집에 이미 카놀라유가 있다. 너는 기름의 맛을 구분할 수 있느냐? 심지어 마늘이랑 고추를 볶은 카놀라유와 올리브오일을 구분할 수 있느냐? 하였다. 와, 졌다. 논리적이야. 그런 이유로 카놀라유로 볶은 알리오 올리오를 꾸역꾸역 먹은 것이다. 아무리 무심하고 알뜰한 三놈도 혀는 있는 법. 올리브유의 부재가 폭망의 시발점이었을 것이라는 친구들의 증언을 전달하며, 야, 알리오 올리오의 올리오가 올리(브)오(일)이면 어쩌려고 이렇게 만용을 부렸냐?(물론 개소리입니다) 너 카놀라유하고 친하냐? 폰을 꾹꾹 누르며 묵묵히 식사를 마친 三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올리브유 주문 했다. 내일 온대……. 사실 syo가 요리를 못해서 망한건데 ㅋㅋㅋㅋㅋㅋ 정말 이맛에 너랑 친구한다.
D님이 앉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알라딘 코믹 요리 달인의 옥좌를 단숨에 찬탈한 듯.
--- 읽은 ---
14.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 송찬호 : 60 ~ 132
: 저녁에 돌아오는 것들의 발소리가 차곡차곡 쌓이면 해가 뜨고, 해가 뜨면 눈을 감지 않고서는 마주침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늘 눈을 감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 돌아오는 모든 것들이 야옹야옹 느른하게 울면서 사뿐사뿐 가볍게 찾아와주기를.
15. 맛있는 교토 가정식 / 정혜인 : 120 ~ 272
: 요리왕이 되고 싶었는데 실수로 요리 선사(禪師)가 되는 책을 빌려 버린 게 아닌지.
16. 서울 선언 / 김시덕 : 266 ~ 413
: 서울로 정했다. 근교에 자리를 잡았고, 서울을 중심으로 유동하며 살아가겠지. syo는 이유 없이 서울을 사랑했고 그러다 보니 또 서울을 사랑할 만한 이유가 몇 가지 생기기도 했다. 살다 보면 그런 이유는 점점 늘어날 거고, 때로는 반대의 이유도 찾아내게 되겠지. 그렇게 서울을 둘러싼 마음의 세목들이 쌓여가다 보면, 어느 날 서울을 위해 혹은 서울에 반해 무엇인가 선언하고 싶은 날이 올지도 테고. 그날을 미리 생각해 보니, 이 책은 어쩌면 읽을 책이 아니라 써야 할 책이 아닐까 싶다.
17. 보고서의 법칙 / 백승권 : 179 ~ 335
: syo는 syo고 보고서는 보고서다. 오빠는/형은 글을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잘 쓰니까 보고서 걱정 없겠어요- 라고 말하는 동기들이여. 니들이 syo가 알라딘에 써대는 글을 한 번 봐야, 왜 내가 불안에 떨며 손톱을 와득와득 씹다가 이런 책을 자꾸자꾸 읽어대는지 알게 될 텐데…….
18. 그놈의 소속감 / 김응준 : 134 ~ 264
: 그래도 선생님은 5급이시잖아요, 나는…… 나는!!! 으아아아아아ㅠㅠ! 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진짜 못난 마음일 뿐인가요? 으아아아아아ㅠㅠ?
--- 읽는 ---
실용 커피 서적 / 조원진 : ~ 113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 케이시 윅스 : 62 ~ 127
도시에 산다는 것에 대하여 / 마즈다 아들리 : ~ 108
문화재 해설사와 함께하는 창덕궁 / 창덕궁문화재해설팀 : ~ 82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 ~ 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