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에 각종 SNS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실버 취준생 분투기>라는 글이 화제에 올랐다. 2021년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논픽션 부분에 당선되어 세상에 알려진 이 글은 작가가 62세란 나이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4년 동안 분투한 경험을 담았다. 저임금 육체노동, 임금체납, 돌봄 노동 중 당한 성추행 같은 경험은 서늘한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글 곳곳에서 특유의 따스한 시선과 품위가 느껴졌다.
글 속에 나오는 노인 취준생이 미래의 내 모습일 수도 있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노인이 지난 서러움을 털어내고 작가로서 빛날 삶만이 남았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작가가 몇 달 전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일흔을 이른 나이로 여기며 치열히 살아간 신예 작가의 궂긴 소식을 안타까워하던 여름이 지나고, 다시 새로운 여름이 시작될 무렵 책 출간 소식을 들었다.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는 이순자 작가의 유고 산문집이다.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1부 <결핍이 사랑이 될 때>, 작가가 만난 보석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2부 <내 인생에 가장 큰 선물>, <실버 취준생 분투기>가 실린 3부 <정진하리라, 죽는 날까지>, 요양보호사로 일하던 시절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 <돌봄>이 실린 4부 <보도블럭 사이에 핀 민들레꽃처럼>으로 구성돼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인상적인 키워드는 바로 '결핍'이다. 작가는 자신의 결핍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글로 남겼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한 유복자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청각장애인이었으며 지병인 심장병으로 평생 고생했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들어가 가정 폭력에 시달리며 버틴 모진 세월 끝에는 남편의 불륜이 있었고, 이혼 뒤에는 생계를 위해 고된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결핍이 자신을 망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는 산재병원에서 사지를 잃은 노동자를 돌보고, 명동성당에서 만난 노동자들과 함께 독재 반대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20여 년 넘게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하고, 요양보호사로 제법 오래 일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뒤에는 겨우 글쓰기에 몰두할 수 있어 기쁘다며 다리미판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부지런히 글을 썼다. 무엇보다 이 책에는 작가 자신뿐 아니라 다양한 결핍을 저마다 가치 있는 존재로 승화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책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결핍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가 있다. 어떤 SNS를 하다 보면 자기계발서나 에세이를 출간했거나, 출간을 앞둔 사람이 걸어놓은 카드 뉴스 방식의 광고가 뜬다. 'OO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을 멀리하라.', 'OO한 사람은 곁에 두지 마라' 같은 문구가 피드 최대치인 10쪽을 채운다. 이런 글을 책으로 내겠다는 계획이 심심찮게 눈에 띌 정도로 타인의 결핍을 발견하면 그게 무엇이 됐건 거리 두기에 바쁜 사회가 된 것 같다. 이 세상에 아무런 결핍도 없이 사는 사람이 있을까? 결핍은 유무를 따져야 할 것이 아니라 어디로 나아가는지 방향을 살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자신의 결핍이 어둠이 아니라 빛이 있는 쪽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독자에게 여성, 노인, 장애인, 가부장제의 폐해, 열악한 노동 환경 등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지지만, 작가와 그 주변의 삶을 통해 우리가 지닌 결핍이 사랑, 희망, 긍정, 성장, 꿈과 같이 귀한 존재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걸 느낄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