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를 떼어 보니 살이 잘 붙었다.
며칠 전 양파를 썰다가 왼쪽 중지 손톱 옆 살 속으로 중식칼이 쓱 들어갔다. 왼손으로 양파를 단단히 잡았어야 하는데, 이미 늦었다. 미끄덩 양파 속껍질이 미끄러져 벗겨지며 칼이 엇방향으로 내리쳤다. 순간적으로 키친타올을 뜯어 꾹 눌러 지혈하고 밴드를 찾아 붙였다. 이럴 때 보면 순발력이 없진 않은 듯. 물 안 담그고 사흘을 그대로 두었더니 완전히 붙었다. 나는 한 해가 저무는 저녁에 암시처럼 이 일을 되새김질한다.
어제는 나의 첫 분신이 태어난 날이다. 그해 12월 30일 아침 첫 수술이었다. 시간은 담당의사의 수술일정 대로 정해졌다. 사주의 시주는 그렇게 정해졌다. 세부적 운명이란 게 그러고보면 정말 우연의 결과다 싶다.
그해 연말연시를 병원에서 일주일간 보내며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외로움을 거의 처음으로 느꼈다. 그것은 두려움이나 분노보다 확실히 외로움에 가까웠다. 둘째를 낳은 5년 후에도 느낀 감정이었지만 조금은 면역이 되었던지 봄비 내리는 창밖 풍경이 위로가 되었던지 좀 나았던 기억이 난다. 어제 나와 띠동갑인 작은이모가 전화로 아빠 안부를 꺼내며 (늙고 병든다는 게) 무섭다고 말했다. 옆지기는 그 말이 무척 인상깊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미 그 무서움이란 걸 상상하고 있기에 그다지 새롭지는 않았다. 그 무서움은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도 덜어줄 수도 없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나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들 앞에서 때때로 외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몸이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에 비할 수는 없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아빠는 지금 몸의 감옥 안에서 버티고 있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으니 얼마나 외로울까. 다리를 좀 주물러 드리고 또 올게요, 하고 방을 나설 때마다 마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눈빛에 눈물을 감추고 돌아선다. 며칠 전에는 백신패스를 확인해 달라는 말씀에 마음이 마냥 어룽거렸다. 걸어나가서 그놈의 백신패스 제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불과 구월 말에도 했던 일이라 아직도 꿈인가 싶다. 어제는 침상의 상체를 완전히 세우고 겨우 앉아 계신 옆으로 내가 무릎을 구부려 앉아서 사진을 찍었다. 옆지기가 갖고 있던 라이카로 극사실적으로 찍었다. 환자치고는 낯빛이 좋고 피부가 좋아 보였다. 엄마도 같이 찍었다. 오늘 붙든 이 순간이 또 다음엔 귀한 순간이 될거라 믿는다.
엄마는 어제 생전 안 먹던 치킨을 다 사오라고 하셨다. 왠일이냐고 하니까 허한지 그런 게 먹고 싶다고. 제발 육고기 좀 드시라고 해도 잘 안 먹는 분이라 반가웠다. 아무것도 못 드시는 아빠가 안방에 누워 계신데 우리는 식탁에서 치킨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냄새가 들어갈건데 어쩔 수 없었다. 며칠전에 엄마는 대바늘로 긴 바지를 뜨고 계시더니 어제는 어느새 다 떠서 입고 계셨다. 아이보리색 털실인데 당연히 재활용실이다. 무엇을 풀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엄마의 대바늘은 모두 오랜 세월 손에서 닳고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난다. 안경도 안 끼고 뜨길래 코가 잘 보이냐니까 바늘과 손의 감각으로 정확하다고... 엊그제는 당신한테 미안해,라고 아빠가 말씀하셨다며...
영일대해수욕장(2021.12.30)
어제 아빠한테 가기 전, 포항에 들렀다. 포항 중에서도 북쪽, 영일대해수욕장 바다는 바람이 불었지만 햇살이 또 따스했다.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찍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거기서 차로 10여 분, 박찬일 셰프가 극찬한 중국집 '길성관'에서 짜춘권과 삼선간짜장을 먹고 그곳에서 또 가까운 여울 님 전시회 중인 달팽이책방으로 향했다. (길성관 강추. 짜춘권은 단연 윈! 간짜장은 먹어본 중 제일인 듯) 달팽이책방은 한 시에 오픈하는 줄 알고 갔고 골목에 주차한 후 20여분 골목을 어슬렁거렸다. 달팽이 책방, 마음에 드는 분위기였다. 사진도 찍고 여울 님의 그림도 보고 방명록을 적었다. 젊은 여성 주인장이 상자를 풀어 새로 들어온 책을 정리하는 동안 책장을 둘러보았다. 오래되었거나 핫한 여성주의 책들이 한 코너에 빼곡하고 독서관련 스터디와 모임 일정이 많이 적혀 있었다.
달팽이책방에서 구매한 책_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데뷔작 <에이미와 이저벨>
첫문장에서부터 우리의 모든 시간과 감정의 격랑을 담아내는 강물이 등장한다.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처럼.
그 강물은 맑지 않고 생활과 섞여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타운의 사람들은 익숙하고 딱히 거슬리지 않는 냄새라는 듯 산다. 우리네 삶의 진미가 그렇듯. 빛과 그림자도 슬픔과 기쁨도 한 물결에 흘러가는 것. 따로일 리가 없다.
전체를 이끌어갈 첫문장과 옮긴이의 예리하고 다감한 말을 적어둔다.
로버트슨 선생이 타운을 떠난 그 여름은 몹시 무더웠고 강물은 한동안 죽은 듯 보였다. 강은 타운의 중심을 관통하며 죽은 뱀처럼 납작하게 드러누워 있었고, 그 언저리에는 더러운 거품이 싯누렇게 부글거렸다. (11쪽)
이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감정선들은 글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것만큼 그리 잔잔하지는 않아서 내게, 혹은 내 주변에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상상하면 솟구치고 내려앉는 감정의 급물살을 탄 우리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이렇듯 격랑에 휩쓸릴 때, 강물은 집어삼킬 듯 넘실거리고 우리 자신은 죽어가는 듯 보일 때,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그 순간을 어떻게든 넘기는 것 아닐까. 훌륭하게건, 그럭저럭이건, 간신히건, 죽을 뻔하다가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넘기는 것', 우리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그런 '넘기는' 순간들을 담아내고 있다. .....
나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방법 하나는 그런 순간들의 이면을, 그 순간들을 '건너가는' 사람들의 숨은 마음을 친밀하고 세심히 바라보는 일일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라봄은 이해를 낳고, 이해는 우리를 성장시킨다. - 옮긴이의 말, 542-543쪽
<== 19, 20세기 기대되는 여성작가 단편선
<== 좋아하는 배우 키키 키린의 말
달팽이책방 (2021. 12. 30)
"타오르는 신음들로 자라는 책들"
여울 님 전시 <쉬-어, 가:다> 달팽이책방 2021. 12. 30
한 해 동안 책과 함께한 여러분과
다정하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 나누어 주신 여러분에게
마음 깊이 고마움을 전합니다.
새해 임인년에도 지긋이 바라보며 기쁨의 한자리 잃지 않고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Happy New Year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