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주역 공부 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김승호 지음 / 다산북스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케케묵은 주역을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공자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주역을 공부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50살부터 죽기 전 까지 주역을 공부했다. 주역을 연구한 라이프니츠는 이진법을 발견했다. 이진법이 컴퓨터를 만들었으므로 결국 주역이 오늘날의 디지털 문명을 만든 셈이다.

 

김용규의 <생각의 시대>를 읽다, 지성과 무지를 가르는 기준은 범주화가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어떤 학문이건 범주화를 토대로 한다. (범주화의 대가들은 철학자나 과학자가 아니라 시인이다. 시인들은 예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범주화를 창조하니까. )

 

그렇게 본다면 주역을 내 것으로 만든다는 건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범주화 도구를 갖추는 셈이다. 주역을 어떻게 하면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음양이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고 팔괘가 64괘를 낳는다. 우선은 8개만 제대로 알면 된다. 이른 바 팔괘다. 그런데 두 괘(건과 곤)는 시간과 공간, 하늘과 땅이다. 따라서 6개만 알면 된다. 사상을 두고 밑에 것은 기존의 것, 위의 것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 가운데 음양을 끼어 넣으면 8괘가 된다. 일반적인 순서와는 다른데 건과 리, 태와 진, 손과 간, 감과 곤이다.






태괘를 살펴보자. 태괘는 고양이, 호랑이다. 연못이다. 연못은 물을 담고 있다. 따라서 담는 성질을 지닌 것은 다 태괘에 속한다. 가방, 지갑, 주머니 다 태괘다. , 고향, 단골집, 조국, 여자, 태괘다. 연못, 고양이는 침착하고 평정을 유지한다. 침착함, 혹은 평정의 성질에 해당하는 것도 태괘다. 침착한 사람, 절제력이 있는 사람, 태괘다. 호수같은 것, 태괘다.

 

손괘를 살펴보자. 손괘는 바람이다. 날아가는 것은 다 손괘다. 참새, 비행기, 손괘다. 냇물도 손괘다. 흐르기 때문이다. 소식, 새로움, 유행, , , 열려 있는 것, 쏟아진 물, 어린아이의 걸음걸이 다 손괘다. 여인의 부드러운 손길, 시원하게 달리고 있는 것, 손괘다. 바람같은 것, 손괘다.

 

운명이 제자리에 있는 사람은 손의 기운이 부족하다. 여행을 떠나 손의 기운을 흠뻑 얻으면 운명이 바뀔 수 있다. 오늘은 태괘고 내일은 손괘다.

 

무언가를 막는 것, 다 간괘다. , 우산, 담벼락, , 어린아이에게 아버지, 신용이 좋은 사람 간괘다. 관우, 춘향이, 간괘다. 군대, 남자의 배짱, 여자의 마음이 태괘라면 남자의 마음은 간괘다. 침묵, 위축, 긴장 간괘다.

 

우레와 같은 것, 진괘다. 손괘가 부드러운 움직임이라면 진괘는 육중한 덩어리가 움직이는 형상이다. 여인의 걸음걸이가 손괘라면 군인의 걸음은 진괘다.

 

물은 감이다. 와글거리는 것, 흐물흐물 한 것, 덩어리가 아닌 가루, 인간의 감정은 감이다. 어린아이, 군중. 그릇이 태괘라면 그 안에 담겨야 할 것은 감괘다. 돌보는 것이 태괘면 돌봄을 받은 것은 감괘다. 어두운 심정, 근심, 구름, 혼돈, 감이다. 쉽게 부서지는 비스킷, 모래 같은 것, 감이다. 육체적인 사랑, 나쁜 운명, 잠들었을 때, 감이다. 캄캄한 우주, 미궁에 빠진 사건, 미래, 감이다. 미지의 세계, 험난한 세계, 딱히 답이 안 나올 때, 무서울 때, 슬플 때, 지쳐있을 때, 감이다.

 

질서, 리괘다. 혼돈이 감괘라면 질서는 리괘다. , 평화, 희망 리괘다. 감성적인 것이 감이라면 이성적인 것은 리다. 덩어리는 리, 가루는 감이다. 불은 리고 물은 감이다.

 

8괘로 대성괘가 만들어진다. 팔괘가 단어라면 대성괘는 문장이다. 괘상은 2개의 파트, 상하로 나뉘어 있다. 아래에 있는 것은 현재고 위에 있는 것은 미래를 의미한다.


 

지뢰복부터 곤위지까지를 십이소식괘 혹은 군주괘라고 한다. 12개의 괘를 이어보면 양이 증가하다가 음으로 변하는 형상이다.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처음 괘상의 맨 위층이 이어지는 괘상의 맨 아래의 반대가 되고, 나머지 효들은 한층 씩 밀려 올라가는 형태다.



이런 패턴으로 저자는 64괘를 정렬한다. 12개 괘 다섯 묶음과 4괘 한 묶음.



과연 저 방법으로 주역 64괘를 공부하는 게 나을까? 주역 초보라 잘 모르겠다.

64괘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만한 다른 방식이 있을 것도 같은데.

 

저자는 주역 괘상의 이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주역 공부를 백날 해도 소용없다고 한다.

64괘의 이름을 언제 다 외우남.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madhi(眞我) 2016-04-12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역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우리 옛문화를 이해하려해도 주역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됐습니다. 미뤄두는 공부만 자꾸 늘어납니다.

시이소오 2016-04-12 10:29   좋아요 0 | URL
주역 한권 들고 산에 들어가도 몇 년은 심심하지 않겠어요 ㅋ ^^

samadhi(眞我) 2016-04-12 10:47   좋아요 0 | URL
그랬다가 산에서 광년이모드에 빠져들면 어찌합니까. 영영 속세로 돌아가지 못 할지도 모르는데 ㅋㅋ

시이소오 2016-04-12 10:50   좋아요 0 | URL
ㅋ 돌아오셔야죠. 깨달음을 얻으신 분들은 산 속이 아니라 속세에 있어야 합니다. ^^
 

레이먼드 카버는 고생했다.

 

하루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의문이 생겼다. 하루키는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를 좋아했다. 그런데, 난 왜 피츠제럴드는 싫어하고 카버는 좋아하는 걸까? (그러고보니 둘 다 알코올 중독자다.)

 

어쩌면 계급때문일지도 모른다. 피츠제럴드는 단편 몇 편만으로도 1920년대 당시에 만 달러 수준의 돈을 받았다. 오늘날로 치자면 단편 몇 편으로 억대의 돈을 받은 셈이다. 넘치는 돈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콧은 젤다와 함께 흥청망청 돈을 써댔다. 반면 카버는 그야말로 죽도록 고생했다. 스콧이 귀족이라면 카버는 거의 노예다. 혹시 내가 재벌 2세로 태어났으면 카버보단 스콧을 더 좋아할 수 있지도 않았을까?


------------------------------------------------------------


소설은 실제 경험에 기초해야만 한다.”


- 헤밍웨이.


작품을 말할 때 그 사람의 전기에 기대어 혹은 프로이드식 정신분석학을 들먹여 작품을 해석하는 평론은 들여다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작품을 위한 평론이 아니라 평론을 위한 평론에 그칠 뿐이기 때문인데, 우리가 카버에 대해서 말 할 땐 일종의 예외가 허용될 수도 있지 않을까?


10대 시절 버로우의 <화성의 공주>를 읽고 읽고 또 읽던 카버의 정신적 스승은 다름 아닌 헤밍웨이였다

그리고 헤밍웨이의 위와 같은 단언은 죽을 때까지 그의 신조가 된다.



이미 발생한 사건이라고 해서 반드시 개연성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을 역사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예술은 아니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그러나, 카버는 일상의 경험만으로 예술이 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카버는 약간의 자전적 요소로 출발하긴 했지만 거기에 풍부한 상상력을 덧붙여야 한다는 걸 지각하고 있었다.

작가는 엄청나게 대담하고, 기술적으로 능란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할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작가는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쓰도록 끊임없이 요구받는데, 자기 자신의 비밀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많은 인물을 그려내는 건 필요하지 않아. 중력의 중심은 두 사람 안에 있어야 해. 그 남자와 그 여자


- 체홉의 편지.


카버의 두 번째 정신적 멘토는 체홉이었다. 체홉의 위와 같은 단언 역시 그의 평생의 글쓰기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카버의 작품 중 주를 이루는 것은 이제 그 남자와 그 여자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그는 19살에 결혼을 하고, 21살에 두 아이의 아빠가, 41살에는 할아버지가 된다. 그리고 쉰 살에 죽음을 맞이하는데 평균의 삶에 비하면 마치 그의 글처럼 응축된 삶을 살았다고 해야 할까? 그의 때 이른 가장의 경험은 절망적이긴 했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그의 글의 자양분이었다.


글쎄....대답이 될 수 있을까. 열아홉 살에 열여섯 소녀를 임신시켜 가장이 되고, 스물한 살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가난한 청년의 절망을 상상해 본 적이 있소. 내겐 기억이 생생해요. 빨래방에서, 젖은 빨래를 한 아름 안고 빈 건조기가 나기를 기다리던 젊은 아버지는 빙빙 돌아가던 건조기 한 대가 멈추자, , 이제 저 건조기는 내 차례가 되겠구나, 그랬어요. 감히 희망이라는 걸 몇 초쯤 품어 보았다오. 하지만 희망이라는 가능성을 조롱하듯, 건조기 속 빨래의 주인이 다가오더니, 문을 열어 빨래를 만져보고는 다시 동전을 넣는 거요.

 

순간,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는 건조기 앞에서 울컥 눈물이 솟을 정도로 서러워지더군요. 그 순간,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라는 그 사실만큼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일은, 아무것도,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그 애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테고, 막중한 책임감은 영원히 내 어깨를 짓누를 테고, 언제나 그 생각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뇌리에 남아 있으리라는 사실을.”


카버의 위의 고백은 셔우드 앤더슨이 말한 카버 작품에서의 세련된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삶의 한계와 관련된 메시지를 속삭여주는 밖으로부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말이다.


마치 시지푸스처럼 어깨에 커다란 돌을 짊어진 카버는 절망하긴 했지만 단 한 번도 문학을 포기하진 않았다.


높은 곳을 향한 투쟁 그것 자체만으로도 한 남자의 가슴을 충분히 채울 수 있다.

우리는 시지푸스가 행복했다고 상상해야만 한다.


- 알베르 카뮈, <시지푸스의 신화>



카버가 행복했다고 상상해야만 할까?


내 아내와 내가 가지고 있던 성스러운, 모든 정신적인 가치들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는 시절이 오고 또 갔다. 그것은 다른 어느 가족에게서도 일어나는 걸 본 적이 없는 그런 일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침식이었고, 우린 그걸 멈출 수 없었다. 우리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동안 어찌하다 보니 아이들이 운전석에 올라앉아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리지만, 고삐와 채찍이 아이들 손에 들려있었다.

-카버의 에세이, <>


1962년 카버의 창작 단막극 <카네이션>에 관한 학교신문 럼버 잭의 평자는 이 인상주의적 등장인물들은 무섭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이 무대 위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되고 있는 광경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이러한 초기의 평은 앞으로의 카버작품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었다.


카버는 후기 산업사회의 주변부- 캘리포니아의 떠돌이 들이 모여 사는 동네들- 에 살던 사람들에 대해 썼어요. 이들은 침실 두세 개 짜리 집에서 살고 있는 아주 선량해 보이는 사람들이었지만,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가정 내 불화로 인해 갈가리 찢겨 있고, 항상 파산지경에 처해 있었죠. 이 사람들에게는 삶이란 언제나 임시이고, 또 임대로 얻은 거죠, 은퇴도 없고, 소유도 없고, 관계가 지속될 것이라거나 아이를 키우게 될 거라는 보장도 없어요. 카버는 이런 종류의 작은 비극들과 유머가 발생하는 순간들에서 뭔가 중요한 것을 봤어요.


- 첨단 :70년대의 미국의 젊은 소설. 잭 힉스


카버 단편의 내용적인 특징을 블루칼라 가정내의 불화라고 한다면 형식적 특징은 우선은 생략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부분을 생략시킴으로 해서 독자들에게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풍부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작가는 어떤 것이라도 생략할 수 있다.

- 헤밍웨이, <이동 축제일>


생략했을 뿐만 아니라 카버의 단편에는 세세한 묘사라고 할 만한 부분들이 없다.



진술의 기본적인 정확성은 글쓰기의 유일한 도덕이다” 


- 에즈라 파운드


카버의 글이 지적이지 않다고 불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체홉의 말에 따르면 그는 거기에 책임이 없다.



예술가가 작품에 임할 때 지적인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당신의 요구는 타당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두 가지, 즉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문제를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예술가는 오직 두 번째 사항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습니다.


- 체홉 <체홉의 편지>


카버의 아버지가 그랬고 헤밍웨이, 잭 런던, 치버도 그랬듯 카버 역시 알코올 중독자였다.

카버의 친구는 말한다. ‘, 당신도 술 먹는 거 좋아하고 나도 술 먹는 거 좋아하지만, 레이가 술 먹는 거 좋아하는 것처럼 술 먹는 거 좋아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이러한 시기에 카버는 아내인 메리엔이나 자식들에게 폭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또한 카버가 만난 진정한 사랑역시 가뜩이나 불운한 가정에 불을 붓는 격이었다.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것의 최대치를 이끌어내며 살지 못하는 하루하루마다 우리는 우리안에 들어 있는 세익스피어, 단테, 호머, 예수를 죽이고 있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한 굴레에 묶여 살고 있는 하루하루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힘과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여자를 차지할 힘을 파괴하고 있다.

-헨리 밀러, <우주적인 눈>


아마 이 당시의 카버는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술은 끊을 수 없고 글은 써지지 않고 새로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환상을 꿰뚫어보고 모든 가치들을 다른 가치기준에서 바라본다. 신은 악이고, 진실은 속임수이고, 인생은 농담이다. 고요함-광기의 높이에서 신의 확신을 가지고 그는 모든 삶이 악이라고 바라본다. 아내, 자식들, 친구들, 그것들은 그의 논리의 선명하고 하얀 빛 속에서 사기와 허위였음이 드러난다. 그는 그것들의 덧없음, 빈약함, 야비함, 비루함을 본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의 자유를 알고 있다. 자신의 죽음의 날을 미리 알 수 있으리라는 것. 자살, 빠르건 느리건, 갑작스럽게 쏟아져버리든 여러 해에 걸쳐 서서히 새어나가든 그것이 존 발리콘이 요구하는 대가이다.

- 잭 런던, <존 발리콘>


발작 탓이었을까? 아니면 존 치버의 말년을 보아서 였을까? 1977년은 카버에게 기념비적인 날이다. 그 해 이후론 죽을 때까지 술은 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 카버는 금주이후의 삶을 그레이비라고 부르고, 그 전의 자신을 나쁜 카버, 그레이비 이후의 카버를 좋은 카버라 부른다.


질서는 모든 세대, 모든 예술 분야, 모든 개인에게 자치권적 승리를 의미한다. 질서는 모든 개인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바이다. 이것은 모든 예술가들이 추구해야 할 비밀스런 이미지이고, 그의 존재 이유이고, 그가 창조해 내는 것의 핵심이다. 질서를 창조해 내지 않는다면, 예술가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 셈이다.

-미셀 쉐퍼, <이 세기의 조형예술>


이 좋은 카버 시기의 작품이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내가 전화를 거는 곳>, <대성당>등이 있다. , 중반기의 출구가 없는 등장인물들은 빵을 먹거나, 한 번의 키스로, 혹은 맞잡은 손으로 그리는 그림 등에 의해 어떤 희망을 본다. 위협의 대상들은 구원의 대상으로 전복된다. 카버는 칼라일 호텔에 묵을 때 해럴드 핀터의 대사를 자기식으로 바꾸어 사람이란 게 이런 방에 있으면 자기한테도 기회가 있다고 믿게 되는 법이지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술을 끊고 테스 갤러거를 만나고 왕성하게 시를 창작하던 이 시기는 나쁜 카버의 시기에 비하면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순탄했다. 마치 그가 새로 사들인 벤츠같은 삶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잘나가는 작가였다.


뉴요커의 편집자. 찰스 맥그래스는 말한다.



카버는 내가 목격한 바로는 가장 광범위하게 모방된 작가로서, 한 세대 전체의 인솔자였습니다. 내가 처음 <뉴요커>에 갔을 때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작가는 샐린져였고 그 다음에는 도널드 바셀미, 그 다음이 앤 비티, 그 후가 카버였어요. 카버가 얼마나 뛰어난지는 그의 작품과 그의 모방자들의 작품의 차이를 보면 알 수 있어요.


톨스토이가 동시대 러시아 작가들을 두고 고골리의 외투에서 떨어졌다.”가 말했다는데 1990년 대 맥커너니에 말에 의하면, 카버의 외투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고 할 만한 작가는 아마 단 한 사람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좋은 카버시절의 카버의 작품은 경이롭긴 하지만 시시하다.



<세잔의 그림들에 대해서> 이 색상들은 마치 우유부단함 중의 한 부분을 완전히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붉은 색들과 푸른 색들에 들어있는 선한 마음, 이것들의 단순한 진실성, 이게 당신을 가르칩니다. 당신은 또한 사랑을 넘어선 지점까지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매번 조금씩 더 분명하게 알아가고 있겠죠. 하나씩 만들어나갈 때 마다 그것들 각각을 사랑하게 되는 건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드러내면 작품이 조금씩 더 안 좋아집니다.......별다를 게 없는 작품에서 사랑을 완전히 비워냄으로써 어떤 순수한 것을 만들어내는 일, 이런 것이 이 노인네의 작품에서처럼 완벽하게 성취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 릴케, <세잔에 관한 편지>


어쩌면 좋은 카버는 비우기보다 채워서, 감추기보다 드러내기 때문은 아닐까?


























<알래스카에 뭐가 있지?> 1971년 작.


칼은 구두를 새로 사 신고 집으로 들어온다. 아내인 메리는 알래스카에 일자리가 생길 것 같다며 기대에 부푸는데, 칼 역시도 알래스카에 가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친구 사이인 헬렌과 잭 부부가 잭의 생일 선물로 산 물담배를 같이 하자며 칼 부부를 초대한다. 칼과 메리 부부는 소다수와 먹을 것 등을 사서 잭과 헬렌의 집에 방문한다. 소다수를 마시며 담뱃대를 돌려 피우려는 찰나, 메리는 칼은 오늘 밤 좀 짜증이 나 있어요라고 말한다. 메리의 말에 칼은 날 짜증나게 하는 좋은 방법이군 그래하고 대꾸한다. 두 커플은 이내 소다수를 마시고 물담뱃대를 돌려 피우며 잡담을 나눈다. 그러다 또 다시 칼은 메리에게 아까 자신이 짜증이 나 있다고 한 말이 무슨 뜻이냐며 메리에게 재차 되묻는다. 메리는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요라고 말하고는 눈물이 나도록 웃는다.

 

칼은 알래스카에 갈 거라고 잭 부부에게 말한다. 또 다시 잡담 등이 뒤섞이다가 잭과 메리는 음식을 가지러 부엌으로 간다. 칼은 메리가 잭의 허리를 껴안는걸 지켜본다. 칼은 소다수를 흘려 그의 구두에 엎지른다. 잭은 알래스카에 왜 가는지를 묻는다. 칼은 알래스카에선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라고 대답한다. 문을 긁는 소리가 들려오고 잭은 고양이 신디를 들여보내기 위해 일어서는데 메리는 잭에게 내 것도 하나 갖다 줘요, 여보라고 말하는데, 남편인 칼에게 말하는 줄 알았다며 자신이 실수했음을 말한다. 신디는 쥐를 물고 들어와 그들 곁에서 쥐를 먹는다. 잭과 헬렌 부부의 만류를 물리치고 칼은 메리를 부축해 집으로 돌아온다. 이미 취한 메리는 마시던 맥주를 내려놓고 잠이 들어 이내 코를 곤다. 칼이 막 램프를 끄려고 했을 때 그는 현관에서 한 쌍의 작은 눈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구두 한 짝을 쥔 칼은 그것이 한 번 더 움직이기를 기다린다.



<알래스카에 뭐가 있지?>보단 <이게 뭐지?>가 어울릴 법한 작품이다. 가히 핀터에 버금갈 만 하다. 카버의 단편들은 구석 구석 은밀한 암시들을 깔아놓긴 하지만 이 작품만큼 애매모호한 작품은 없는 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카버가 주로 쓴 단편들은 그 남자 그 여자이야기이지만, 이 작품처럼 두 커플의 이야기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들도 꽤 있다. (예를 들면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 이 작품을 해석하기 위해 카버의 글들과 그의 노트에 쓰여져 있던 글들을 따라가 본다.



내 책상 맡에는 체홉의 단편에서 따온 문장 하나가 적힌 카드도 붙어 있다. “...갑자기 모든 것이 그에게 있어 명료해졌다.” 나는 몇 안되는 이 단어들이 경이와 가능성으로 채워져 있음을 발견한다. 나는 그 단순한 명징성을 사랑하고, 그것이 암시하고 있는 계시를 좋아한다. 거기에는 또 미스터리도 포함되어 있다. 그 전까지는 무엇이 그렇게 불명료했을까? 왜 그것이 지금에야 명료해졌을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한 갑작스런 깨달음으로 인해 초래되는 결과들이 있다. 나는 날카로운 안도감, 그리고 나름대로의 예감을 느낀다.


실제로 다른 작품들에선 갑자기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와 비슷한 문장들이 제법 나온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선 그도 말하지 않을뿐더러 내게 있어서도 아직까지 모든 것이 불명료하다. 이 소모되는 듯한 대사들은 뭘까?

시나 단편 소설에서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여 지극히 상식적인 사물을 글로 표현하는 것, 또한 그러한 사물-이를테면 의자나 창문의 커튼, 포크, 돌멩이, 여자의 귀걸이 등-들에 거대하고 놀라운 힘을 부여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또한 독이 없는 대화를 통해 읽는 이의 등골에 오싹한 한기를 전달하는 글을 쓰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이 예술적 기쁨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작가로는 나보코프 Nabokov를 들 수 있다. 내가 가장 흥미를 가지는 것이 바로 이러한 종류의 글쓰기이다.



소다수가 의미하는 바가 있을까? 일종의 맥거핀일까? ‘소다수는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는데 그 단어가 계속 반복되다보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이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나는 단편 소설에 어떤 위협이나 협박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에는 약간의 협박이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그 작품이 널리 유포되는데도 도움이 된다. 긴장 역시 꼭 필요하다. 무언가 절박한 상황, 처절한 행동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소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설 작품 속에서 긴장을 만들어 내는 것 가운데 하나는 가시적인 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단어들을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다 털어놓지 않은 것, 그저 암시만 된 것, 사물의 평평한(때로는 망가지고 뒤집어진) 표면 아래 감춰진 풍경 등에서도 그런 긴장이 발생한다.


문을 긁으며 쥐를 물고 들어오는 고양이 신디는 일종의 협박 같다. 다른 소설에서도 이런 협박 집으로 들어오려는 공작, 너무나 못생긴 아이 등 은 그가 주의해야한다고 말했던 트릭이라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도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을 받는다.


그가 말했다, 그녀가 말했다식의 문장이 있어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등장인물이 많아서? 일종의 실험일까? 카버와 메리엔은 그가 말했다, 그녀가 말했다라는 텔레비전 퀴즈 프로그램의 내용을 받아 적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런 식의 문장이 독특한 음률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그는 소설가 이전에 시인이었다.)


프리체트 V. S. Pritchett는 단편 소설을 눈꼬리로 힐끗 본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힐끗 본다라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무언가를 힐끗 본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통해 생명력이 부여되고 그 순간을 조명하는 무언가가 탄생한다. 나아가 운이 좋으면-또 운을 들먹인다-보다 깊이 있는 결과와 의미에 도달할 수도 있다.

 

단편 작가의 임무는 자신의 모든 힘을 이 힐끗 보는데 투자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지혜와 문학적 기술이 무르익고(재능), 균형 감각과 사물의 합당성에 대한 감각이 길러진다. 사물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도 감지할 수 있다. 또한 명쾌하고 구체적인 언어, 디테일한 부분에까지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런 숙제를 해결할 수 있다. 디테일은 구체적이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므로, 언어는 정확하고 정밀하게 구사되어야 한다. 단어는 지극히 평범하게 들릴 정도로까지 정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임무에는 변함이 없다. 제대로 사용된 단어는 모든 음계를 아우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그가 집에서 본 듯한 한 쌍의 작은 눈의 정체는 뭘까? 그것이 무엇이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와 비슷한 알 수 없는 결말을 내리는 다른 단편이 있다. 원제는 <제재소 사장의 죽음>이었지만 <오리들>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는데, 그 작품 속에서도 아내는 남편 먼저 잠들고 남편은 창밖을 바라본다. 그리고 남편은 침대로 돌아와 아내를 깨운다. “여보, 일어나”..... .......“일어나”,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에는 체호프적인 명료함이 존재하지만, 또한 이면의 무언인가가 끔찍하게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카프카적 의식도 존재한다.”

 

-마이클 코프.


아마도 내가 카버를 좋아했던 건 체호프적인 명료함때문이라기 보단 (그런데 체홉이 명료한가?) ‘카프카적 의식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보는 게 무엇이고, 그가 듣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상관물이라는 데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섬뜩하다.


카버는 한 인터뷰에서 서로의 얘기를 듣고 있지 않는 사람들의 대화를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그런 대사를 쓴 대표작은 아마도 이 작품이 아닐까?


농담 아니야?

헬렌이 말했다.

진담이야

칼이 대답했다.

알래스카 말이야.”

헬렌이 말했다.

칼은 그녀를 응시했다.

당신이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칼은 헬렌이 무슨 말을 하건 전혀 관심이 없다. 칼은 부엌으로 간 잭과 메리에게 온 신경이 가 있을 뿐이다.

잭이 말하며 빙긋이 웃었다.

뭣 때문에 그렇게 웃는 거야, 헬렌?”

나도 몰라. 메리가 말한 게 우스워.”

헬렌이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메리가 물었다.

기억 안 나.”


헬렌은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도 못한다. 그러면서 웃기만 할 뿐이다. 잭은 그런 헬렌이 못 마땅하다

쥐를 먹어치우는 고양이같다. 아마도 메리와 잭은 여보라는 말을 쓰는 걸로 봐서 내연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칼은 그 두 사람의 관계가 미심쩍다. 그리고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역학관계에 대해서 절대로 묘사하려 들지 않는다. 단지 상황만을 만들고 암시적인 대사를 들려준다.


말들, 정확하고 진실한 말들은 행위가 지니는 힘을 가집니다. 여러분의 말들의 영혼, 여러분의 행위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것으로 준비는 충분합니다. 더 이상 다른 말은 필요 없습니다. ”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 1974


클레어의 남편과 그의 친구들인 고든 존슨, 멜 던과 번 윌리엄스는 매년 봄과 초 여름, 정기적으로 낚시를 다니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가정적인 사람들이다. 이번 낚시에서 그들은 알몸의 소녀의 시체를 발견한다. 토론 끝에 그들은 계속 낚시를 하기로 하고 시체가 물에 떠내려가지 않게 소녀의 손목을 나일론 줄로 나무에 묶어놓는다.

 

그리고 그들은 평소대로 카드를 치고 위스키를 마시고 소녀 옆에서 설거지를 한다. 이틀 동안. 다음 날 산을 내려온 그들은 경찰에 신고를 한다.

집으로 돌아온 클레어의 남편은 클레어의 다리를 벌린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클레어는 남편과 그의 친구들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듣게 된다.

죽은 소녀와 어릴 적 친구사이였던 클레어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몰고 가는데, 픽업트럭을 탄 남자가 치근덕거린다.

 

집으로 돌아온 클레어에게 남편은 클레어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알 것 같다며 블라우스의 단추를 벗긴다. 클레어는 맞아요라고 말하며 남은 단추들을 자기 손으로 푼다. 마당에 있는 아들 딘이 오기 전에 서두르라며.

이 작품은 카버의 그 남자- 그 여자 이야기에 속하긴 하지만 기존의 작품들과 비교해 약간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 중에 폭력이나 섹스를 다룬 작품은 많이 있지만 직접적으로 살인을 소재로 삼은 작품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 아마도 이 작품만을 따로 읽다 보면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품집을 순서대로 읽어가다 보면 좀 더 기이한 느낌을 받게 된다.


첫 작품을 읽었고, 그리고 나서 다음 걸 읽다가 감정적으로 너무 벅차올라서 나머지 작품들도 읽어나갔는데, 문자 그대로, 끝날 때까지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어요. 그 작품집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어요. ”

아마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읽은 독자들도 위와 같은 크리스틴(카버의 딸)과 똑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까?


고든 리시는 이 작품을 <목욕>, <여자들에게 우리가 간다고 말해줘>, <청바지 다음에> 놓았다. 특히나. <여자들에게 우리가 간다고 말해줘>와 이 작품은 카버 작품 중 유일하게도 친구들끼리의 사소한 일탈을 다룬다. <여자들에게>의 제리는 내치즈 강을 굽어보는 언덕위에 멋진 집을 갖고 있고 주말이면 그의 친구인 빌이 아내와 애들을 데리고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어느 토요일 남자들은 밖으로 나다녀야 해.”라고 말하곤 아내와 애들을 남겨두고 차를 몰고 나가 자전거를 탄 여자들에게 수작을 건다. 여자들이 자전거를 버려두고 내치즈 협곡을 오르자 빌과 제리도 그녀들의 뒤를 쫓는다. 그리고 여자들을 발견한다.


그는 제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했다. 하여튼 그건 바위로 시작하여 바위로 끝났다. 제리는 같은 바위를 두 여자에게, 처음에는 샤론이라는 여자에게, 그 다음에는 빌리의 몫인 여자에게 사용했다.”


카버의 단편은 다른 단편과의 어떤 느슨한 결합을 이루고 있는데, 이 두 작품은 친구들 간의 일탈, 그리고 내치즈강을 무대로 하는 한다는 점에서 내치즈강을 소재로 하는 유일한 두 작품- 그렇다. 그리고 그런 유추를 하자마자 끔찍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야말로 상상이다.


<너무 많은 물이>의 화자는 시체의 목격자인 클레어의 남편과 친구들이 아니라, 클레어다.

그는 가고 있는 길에 집중하려 한다. 하지만 그는 계속 백미러를 쳐다본다.

그는 알고 있다.“

도대체 뭘 알고 있단 말인가?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 흐른다.

왜 몇 마일이나 멀리 갔어야 했어요?”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는 동안 클레어는 미용사에게 말한다.

그건 살인이었어요


맞다. 그건 살인이었는데, 굳이 왜 저런 말이 필요할까? 그들이 클레어의 죽은 친구를 물 속에 그대로 방치한 행위 때문에? 아니면 혹시 그들이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단 말인가?


그렇지만 클레어는 장례식에서 살인자가 잡힌 걸 듣는다.


그들은(독자들) 자신들이 오직 액션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리고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대화와 묘사를 통한 감정의 창조였다. 독자들이 기억하고 또 그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예를 들자면 한 사내가 살해당하는 장면이 아니라 바로 그 죽음의 순간에 매끈거리는 책상위에서 종이 클립을 집어들려 애쓰는 모습이다.

 

-레이먼드 챈들러


클레어의 남편과 친구들이 직접 살인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카버는 대사와 묘사를 통해 어떤 감정을 창조한다.


살인이 없었다고 하자. 그러나, 여전히 죽은 사람을 이틀 동안 방치하는 행위에 대해선 윤리적인 질문을 제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토론을 통해 남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이미 오 마일을 올라왔고, 일 년에 몇 번 밖에 없는 자신들의 유희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건 합리적인 행위였을까?


나무들 아래로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바로 그때 나는 그 픽업트럭이 다시 돌아오는 소리를 듣는다.

폭력은 어디에나 있다. 강가에서, 차도에서 심지어 집에서도.

그토록 많은 물이 흐르니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딘이 걱정된 클레어는 위스키를 마신 남편 스튜어트 앞에서 남은 단추들을 자기 손으로 풀 수 밖에 없다.

알코올 중독시기에 카버는 아들, 딸들에게도 그리고 아내인 메리엔에게도 폭력을 휘둘렀다. 한때 두 번째 사랑이라 여겼던 세실리의 집에서 메리엔에게 컵을 던져 메리엔은 육체의 60프로의 피를 흘려 하마터면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 혹시나 이 작품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과 알코올 중독에 대한 자기반성적 작품은 아닐까?


제임스 아틀라스는 윤기없는 문체와 감정표현의 의도적인 기피가 따분해진다.”라고 비판했고 어떤 이들은 카버의 작품을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그가 쓰고자 한 것은 단 하나의 레이먼드 카버 이야기였다. 레이먼드 카버만이 포착해낼 수 있는 세상의 풍경을 레이먼드 카버만이 풀어낼 수 있는 어법으로 픽션에 담아 이야기하는 것. 레이먼드 카버가 레이먼드 카버로 존재하는 것이 때로는 고통스럽고 부끄럽고 죄 많은 일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고달픈 일이었다. 그러나 레이먼드 카버는 레이먼드 카버라는 화자를 얻음으로써 그러한 고달픔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조금이나마 구제함으로써 우리 역시 아주 조금은 구제받을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카버를 떠올리면 홍상수의 영화가 떠오른다. ‘일상 속에 감추어진 낯섬을 말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 역시 술을 어지간히 좋아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 역시 나쁜 홍상수의 시기를 거쳐 이제 좋은 홍상수의 시기를 즐기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의 영화는 그야말로 훨씬 좋아졌다. 하지만 나는 그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나쁜 홍상수가 그립다. 어차피 절망을 말할 수 있는 건 희망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오늘 바다는 거칠다. 갑자기 힘차게 불어 닥치는 바람과 더불어.

- 로렌스 더렐 <저스틴>.


카버가 가장 좋아하던 문구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16-04-10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부분만 좀 읽었어요. 피츠제럴드는 개츠비처럼 엄청 벌어 화르르한 것 같아 저도 카버에게 한표를 :-)

시이소오 2016-04-10 03:44   좋아요 0 | URL
너무 길죠? ㅋㅋㅋ

초딩 2016-04-10 03:45   좋아요 0 | URL
:-) 나중에 다시 한 번 보려구요. 셋다 애정해서요

시이소오 2016-04-10 03:48   좋아요 0 | URL
하루키, 스콧, 카버를 다 좋아하신다면, 제가 스콧을 싫어하는게 단지 계급의 문제는 아니군요. 다른 가설을 찾아봐야겠습니다. ^^

초딩 2016-04-10 04:07   좋아요 1 | URL
음 :-) 통독을 거칠게 해봤어요. 스콧은 시대에 편승해서, 문학작품에 더 가깝게 시대상을 중의적으로 표출한 것 같아요. 문학책? 같은 느낌
카버는 - 저는 대성당만 읽었어요 - 칼 같이 거칠게 그리고 승화의 어떤 단계를 벅차게 맞이해 분출 한 것 같구요.
이승우작가의 생의 이면에서 이승우작가가 앙드레 지드를 인용하며, 소설은 작가를 - 생을 - 반영한다고 하듯이,
둘다 자신의 생을 각자의 방식으로 반영한 것 같아요.
세계대전 이후 미국인들의 불편한 부분을 변호하고 덮어주듯 써낸 스콧의 개츠비가 대순풍을 맞은듯 위대해졌다는 사실을,
위대한 사진작가가 운과 우연에 의지하는 것을 끄덕끄덕 인정하듯이 인정하긴 해야하는 것 같도해요.
하루키는 앞 두 작가를 - 특히 카버 - 후에 읽고 나니 그들의 반영과 서사의 방식을 동양적으로 동양인에게 맞게 써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앙 ㅜㅜ 협소한 입력창이 ㅜㅜ 두서 없이 썼네요.
내일 다시 ㅜㅜ 봐야겠어요.
좋은 밤 되세요~

시이소오 2016-04-10 04:12   좋아요 0 | URL
늦은 새벽에 이렇게 장문의 댓글이라니요.
<위대한 개츠비>리뷰를 쓸 때 초딩님 말씀을 참고해야겠네요.
곧 아침이 옵니다.
부디 굿 밤되세요.~~ ^^

2016-04-10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10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16-04-11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먼드 카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체호프의 명료함과 카프카의 의식이라. 다시한번 읽어봐야겠어요.

시이소오 2016-04-11 09:11   좋아요 0 | URL
제가 느끼기에 카버 소설은 어떤 위협, 협박의 요소들이 있어요. 카프카적인 느낌이 들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0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nrehfhr죽도록 고생한 작가 중 한 명이 바로 코맥 메카시입니다. 한동안 풀만 뜯어먹고 살아닸네요..

시이소오 2016-05-10 16:4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존경스럽네요 ^^
 
뇌는 왜 삽질을 시킬까?
데이비드 디살보 지음, 김현정 옮김 / 청림출판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어릴 때, 아이큐 검사 결과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동물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 어쩌자고 나는 이다지도 허접하고 미성숙한 뇌를 가지고 세상에 나왔단 말인가하고 참 고민을 많이 했답니다. 그러다보니 뇌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진화해야죠.)

 

언제부터인가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란 말이 두루 쓰이는 듯합니다. 뇌가 고정된 기관이라는 기존의 상식과 달리,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기듯 뇌 역시 훈련과 노력에 의해서 좋아질 수 있다는 말이죠.

 

메타인지

 

정신은 뇌의 작용입니다. 우리의 의식적인 정신 세계에 추진력을 부여하는 일종의 점화장치에 대해 인지과학자들은 메타인지라고 부릅니다. 메타인지란 생각에 대한 생각을 말합니다. 저자는 타고난 능력만으로 메타인지를 활용할 수 없고 훈련과 노력을 통해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지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은 초당 40개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의 무의식은 초당 1,100만개의 정보를 처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무의식을 개발할 수만 있다면 영화 루시의 주인공처럼 초능력자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저자는 그러한 자기 성찰의 착각은 주로 사이비 종교나 영화에서나 가능할 뿐이라고 일축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의식 수준에서 사유할 뿐이고, 우리의 의식은 초당 40개의 정보를 처리하는 수준으로 무의식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하찮은 수준은 아니죠. 메타인지를 활용하면 정보 처리 능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훌륭한 저널리스트의 특징으로 메타인지를 활용하는 다섯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1. 신속하게 행동한다

2. 확실한 근거에 의존한다.

3. 올바른 질문을 던진다.

4. 이야기가 흐르는 대로 따라간다.

5. 불편한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


뇌의 자동성을 막는 인지 행동 치료의 문제 해결 방법

 

해결 가능한 문제에 집중하라. 무한 반복 고리에 빠져들어 당신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는 문제에 집중력을 쏟아 부어서는 안 된다.

한 번에 한 가지 문제에 집중하라. 또한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진지하게 임하라.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 집중하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하나의 방안으로 여겨라.

당신은 당신의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굳이 다섯 개의 규칙을 언급한 이유는 마지막 다섯 번째 규칙 당신은 당신의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때문입니다. 저도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이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사는지요?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증거들, 사실들 앞에서 우린 대개 외면하곤 하지 않나요? 어떤 경우엔 생각을 바꿀 필요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니까요.

 

한계를 극복하는 30가지 습관

 

1. 머리 아픈 언쟁을 피하기

 

가장 기초적인 메타인지 도구 중 하나는 잠깐 멈춰서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누군가와 논쟁 중일 경우, 우리는 인식 쐐기를 박아놓고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건설적인 논쟁인가?’

 

우리에게는 짧은 시간 동안, 혹은 긴 시간 동안 생각을 중지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압박감이 극심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생각을 중지시킬 수 있다. 생각을 중지시키면 다음 행동을 취하기 전에 상황을 재평가하는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이처럼 간단하게 느껴지는 행동이 심오한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2. 후회하고 또다시 반복하는 행동 끊기

 

얼마나 빨리 반복 행동을 바꿀 수 있을지 기대치를 낮추기 바란다. 하지만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변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면 언젠가는 변할 수 있다.”

 

3. 어떤 상황에서도 강한 믿음 가지기

 

인생의 목표를 검토할 때 스스로에게 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얼마나 확신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라. 나는 이런 방식을 철저한 믿음 검사라고 부른다. 당면한 문제를 의식적인 정신 공간 속에 밀어 넣고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믿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믿음이 없으면 당신의 뇌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지 않을 것이다.

 

4. 껌 씹기로 긴장한 두뇌 이완시키기

 

많은 연구 결과 껌이 기억력, 민첩성, 불안감 감소, 식욕 억제, 기분, 학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하네요. 20분 정도 껌을 씹으면 두뇌에 좀 더 많은 혈액을 공급할 수 있답니다. 또한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코르티솔 수치가 감소되고 전반적으로 불안감도 줄어든다고 합니다.

오랜 기간 동안 껌을 씹으면 두뇌의 특정부위가 활성화되어 우울한 감정을 덜 느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합니다.

 

껌이 왜 이런 효과들을 일으키는지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저렴하면서도 가장 간단한 두뇌 혁명 도구라고 하니, 내일이라도 당장 껌 한번 씹어 보시죠?

(저는 껌 씹으며 쓰는 중)


5. 특별한 글쓰기로 생각의 관점 바꾸기: 부고 쓰기.

 

부고를 쓰는 것의 장점으로는 첫째, 객관적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고, 둘째, 잊혀던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불러올 수 있으며, 셋째로 기존의 자기 서사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 의식적으로 답할 수 있게 된다고 하네요.

 

6. 필요 이상의 과도한 동기 제한하기

 

실험에 따르면 더 많은 현금의 유혹이 제시됐을 때 참가자들은 많은 양의 도파민이 분비되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다른 참가자들 보다 실수를 더 많이 저질렀다고 합니다.

 

7.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하는 연습하기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연습하면 우리의 감정적인 경험을 좀 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이는 감정의 강도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감정을 유도한다는 뜻이다.”

 

8.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동기 관리하기

 

메타인지적인 통제력을 발휘하려면 우리의 무의식적 동기를 뒤덮고 있는 베일을 벗겨내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자기기만을 감지하는 도구를 활용하면 우리가 무시하기 쉬운 동기, 즉 자신의 이익에만 도움이 되는 동기를 찾아낼 수 있다.”

 

9. 머릿속 갑갑한 틀에서 벗어나기; 상호적인 뇌.

 

다니엘 시겔은 비단 뇌와 신경계 내에서만 에너지와 정보가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다른 사람들의 정신 사이에서도 에너지와 정보의 조절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통합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통합은 상관적인 것이다.

 

바꿔 말하면, 당신의 뇌 활동만이 당신의 정신이라고 볼 수 없다.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맥락 내에서 당신의 뇌가 하고 있는 활동이 바로 당신의 정신이다. 정신은 개별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관적인 개념이다.”

 

10.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침묵 지키기

 

집중력을 향상시키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능력을 발달시키려면 주기적인 외적 침묵과 내적 침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혼란스럽게 흘러가는 외부 소음과 내면의 소음에서 벗어나야 할 때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소음에 휩쓸려버릴 수도 있다.”

 

11. 자동적 판단에 이의 제기해보기

 

판단 휴리스틱은 생존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자칫 이로 인해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될 수도 있다. 판단 휴리스틱이 어떻게 악용되는지 알고 있으면 위험을 막을 수 있다.”

 

12. 자제력이 필요할 때 당분 섭취하기: 설탕, 포도당 섭취

 

실험에 따르면 인공 감미료가 아닌 설탕이 들어있는 음료로 입을 헹군 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성취율이 높았다고 한다. 포도당이 혀를 자극해 뇌의 동기부여 센터를 자극했기 때문이랍니다. 설탕은 단순히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하는 행위에 개인적으로 좀 더 많은 투자를 하게만든다고 하네요.

 

13. 정지 버튼을 누르듯 생각 멈추는 훈련하기

 

셸리 카슨의 <우리는 어떻게 창의적이 되는가>에서 제시된 방법이라 하네요. 자신이 특정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언어적 명령이나 심상을 활용해서 스스로에게 그 생각을 멈추라고 이야기하면 됩니다.

 

14. 타인을 돕고 공감 능력 키우기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긍정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을 목격하면, 뇌는 그 사건을 내게도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근거로 인식한다. 다른 누군가의 성공을 돕는 것이 달성 가능한 보상이 되고, 우리는 이런 보상을 얻을 기회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15. 문제에 압도당해도 밀고 나가기

 

우리는 대개 압도적인 에너지가 치밀어 오르는 현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기 위해 관심을 돌릴 수 있는 다른 대상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관점을 바꾸고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찾는 것이 좀 더 건설적인 방법이다.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은 어디에서건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다시 시작하는 것은 임의성이라는 미심쩍은 가치에 호소하는 방법이 아니라 정신적인 마비를 약화시키기 위해 실속 있고 전략적인 방식으로 생각을 바꾸는 방법이다.”

 

16. 예민해질수록 의식적으로 잠자기

 

불빛이 어두워야 잠 호르몬이 나온다.

시원한 상태가 잠들기에 가장 좋다.

야식을 먹더라도 단백질은 피하자.

 

17. 생각의 균형으로 유연해지기

 

자기주장은 유연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 버틀러와 호프는 자기 주장을 펼치면 좀 더 많은 길이 생기고 만족할 만한 적용 방안이 탄생한다고 이야기한다. 자기주장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을 지니면 자신의 욕구와 갈망, 느낌이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더 중요하거다 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8. 적응하고 바꾸며 회복력 키우기

 

끈기라는 상호 보완적인 용어를 추가해도 된다. 회복력을 발휘하려면 끈기, 즉 꿋꿋하게 밀고 나가고, 극복하고, 중단하라고 위협하는 뭔가를 넘어서려는 투지가 필요하다......만일 당신이 목표 달성을 꾀한다면 끈기가 틀림없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19. 실패의 덫에 빠지는 원인 찾기

 

실패에 빠지는 10가지 이유

 

반드시 필요한 믿음이 빠져 있다.

다른 사람들이 정해놓은 분수를 받아들인다.

파괴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내가 내일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해 한다.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경력이 안정돼 보인다. 좋은 일 아닐까?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자리를 잡는것인가?

이미 이뤄놓은 것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한다.

내가 천장에 다다랐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한다.

어디로 가야할지 혼란스러워 한다.

 

20. 알코올에 의지하지 않기

 

21. 열정이 만드는 효과 이해하기

 

맨 처음 관심을 사로잡은 사건을 기억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과 잘 어울리는 삶을 산다

포트폴리오 사고에 능숙하다.

 

포트폴리오 사고(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보는 태도)에 능숙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력이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로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은 부정적인 요소 때문에 숨 막혀 하지도 않을뿐더러 긍정적인 요소로 인해 과도하게 들뜨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신경 쓰지 않는다.

계승 계획을 짜는 능력을 타고났다

머물러 있지만 또한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의 말에 휩쓸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을 끌어 들인다

지금 이 순간을 산다

건강하게 경쟁한다

 

22. 이미지를 각인시킬 멋진 비유 활용하기

 

너무나 미묘해서 우리의 생각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좀처럼 깨닫기도 힘든 것이 비유의 힘이다. 머릿속에 한 번 들어온 이미지는 웬만해선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23. 우울과 불안을 날려버리는 문화 생활 찾기

 

주기적으로 문화 생활을 하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이로우며, 특히 남성에게 커다란 도움이 된다. 또한 문화 노출량이 많을수록 좋다. 이 방법은 삶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지금 즉시 사용해볼 수 있는 도구다.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24. 지적 감동을 얻을 매체 가까이 하기.

 

읽고 싶은 책,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보자. 똑같은 메시지도 책이나 영화를 통해 전달되면 상상 이상의 효과가 있다.

 

25. 함께 성취하는 기쁨을 맛보기

 

꾸준한 노력

숭고한 실용주의

전략적인 결단력

책임감

 

26. 효율적인 사고방식 익히기

 

생각이 개선되면 에너지 소모량도 그만큼 줄어든다.

 

27. 달리기 등 몸을 많이 움직이기

 

달리기가 대뇌 작용을 이토록 강력하게 개선시킬 수 있는 것은 신경 형성, 즉 새로운 뇌세포의 성장을 촉진하는 역할 때문이다. 달리기가 어떻게 이런 역할을 하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달리기를 하면 혈류량이 늘어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코리티솔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 생성이 줄어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달리기를 한 쥐들의 뇌에서 새롭게 회백질이 생성됐다고 하네요.
당장 헬스권 끊어야 할까 봐요.

 

28. 위대한 사람들의 생각 읽기

 

예를 들면,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읽기.

 

 

 

29. 언젠가 다가올 슬픔을 그려보기

 

상실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려할 수는 있다. 또한 상실 시나리오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면 실제로 뭔가를 상실하게 됐을 때도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다.”

 

30. 두뇌 습관의 중요성 인식하기

 

다니엘 시겔, 전전두엽의 아홉가지 기능

 

신체제어, 의사소통 조절, 감정적인 균형, 반응 유연성, 두려움 조정, 공감, 통찰력, 도덕적 인식, 직관

 

라마찬드란, 자아의 일곱 가지 측면

 

통일성, 지속성, 구체화, 사생활, 사회적 수용, 자유의지, 자기 인식

 

열 두 개의 메타 표현

 

저널리스트 조사하고,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고,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정보원의 도움을 받아 답을 찾는다.

엔지니어 피드백 고리를 설계, 관리

통치자

조종사

이야기꾼 계속되는 자기 서사를 쓴다. 자아상을 관리한다

시뮬레이터

고문

감독

기술자

협력자

후견인

창조자

 

의심받지 않는 정신은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바이런 케이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깊이에의강요 2016-04-09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주말이어요^^
지치고 치친 뇌에
딱 맞는 시이소님 글이 눈뜨자마자 올라와서 정독했어요~~^^
감사

시이소오 2016-04-09 14:02   좋아요 0 | URL
제가 항상 더 감사하죠^^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 내 방식대로 읽고 쓰고 생활한다는 것
임경선 지음 / 마음산책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임경선은 왜 작가가 되었나? 하루키를 읽었기 때문이다.

 

임경선의 책을 읽고 싶었는데 마침 도서관에 있길래 그냥 집어 들고 와서 읽었다.

이런, 하루키에 의한, 하루키를 위한, 하루키에 대한 책이라니!’

또 하루키구나.

 

이 책은 하루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라고 할 수 없다. 자신을 작가로 우뚝 세워준 하루키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열정에 대한 고백이다. 그러므로 임경선이 하루키를 우상화, 이상화한다고 해서 비판해봤자 소귀에 경 읽기. 제 눈에 콩깍지. 사랑을 하면 원래 다 그런 법 아닌가.

 

임경선은 하루키가 젊은 시절 엄청나게 고생을 하고 고통을 당했다고 말한다. 아니, 재쯔 카페에서 고생을 하면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종업원도 아니고 사장이었는데. 하루키는 손님들 주문대로 서빙한 다음에는 뭐했나? 손님들과 잡담 따위는 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책만 읽었다. 장사도 꽤나 잘 됐다. 도대체 무슨 고생을 했다는 건지?

 

하루키는 결혼을 일찍 했다고 하지만 애를 낳아 양육하지도 않았다. 19살에 애를 낳아 21살에 두 아이를 키웠던 레이먼드 카버와 비교해 보라. 할 수만 있다면 하루키보다 고생한 작가들을 임경선 집 대문 앞에 한 트럭 실어 보내고 싶다. (작가들의 동의를 얻는 게 더 큰 문제겠지 ^^;)

 

임경선은 하루키가 죽을 둥 살 둥 고생고생하다 굉장히 늦은 나이에 등단한 것처럼 묘사한다. 하루키는 <일식>의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처럼 23살에 등단한 건 아니었지만 29살에 군조신인상 받으며 등단했다. 그 정도면 꽤 이른 등단이다.

 

오히려 하루키만큼 등단이후부터 아무런 우여곡절 없이 성공한 작가가 또 누가 있을까. ‘하늘이 내린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임경선은 전공투 세대 우리로 치면 386세대-처럼 하루키가 변절하지 않은 것을 윤리적이라 치켜세우고 양심적으로 묘사하지만 그렇다고 하루키가 데모를 하거나 작품 안에 사회적인 비판을 투영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루키가 사회의식이 없었다고 그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에 거리를 두겠다는 것도 작가의 선택이다. 내가 보기에 하루키와 김영하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들은 이념이 퇴색된 시기에 사회에 대한 무심함, 냉소를 통해 새로운 세대의 욕구를 대변해 준 최초의 작가다. 새로운 세대의 욕구는 한마디로 미국식 소비지상주의였다. 하루키와 김영하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선호, 번역한 것도 단지 우연이 아니다.

 

평론가들은 하루키를 바타쿠사이 (버터 냄새가 난다’) 라고 비판했다. 임경선의 입장에선 부당하다고 생각할 순 있다. 그러나, 평론가들의 비판을 단지 하루키의 성공을 깍아내리기 위한 질투로만 해석할 순 없다.

하루키의 무의식엔 미국에 대한 선망이 자리잡고 있다. 실제로 하루키의 문학은 일본 문학이라기보다는 미국 문학에 가깝다. ‘미국 선망 문학이랄까. 하루키는 비치보이스를 듣고 째즈를 듣고, 고베의 헌책방에서 영어로 된 미국 문학을 읽었다. 하루키에게는 미국 문화가 멋있어 보였다. 한마디로 해 보였다. 하루키는 미국 문화에 내재된 소비지상주의를 간파할 만큼 성찰적인 작가는 아니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가 셔츠를 붙잡고 우는 장면이 하루키에겐 이상하지가 않다. 아마도 하루키는 그 셔츠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하루키는 재즈 카페 경영할 때도 셔츠는 매일 매일 꼭 다려 입었다.

 

여성독자들은 왜 하루키 소설에 끌리는가? 여성 독자들은 왜 하루키가 좋은지 딱히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루키 소설은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근히 여성의 무의식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면 재벌남과 가난한 여자의 사랑을 소재로 한 막장드라마다)

신데렐라 콤플렉스, ‘데이지 콤플렉스. 편협한 일반화일까? 나는 여성들이 가장 좋아할만한 하루키 문장을 제시할 수 있다.

 

내가 바라는 건 그냥 투정을 마음껏 부리는 거야. 완벽한 투정. 이를테면 지금 내가 너한테 딸기 쇼트게이크를 먹고 싶다고 해. 그러면 넌 모든 걸 내팽개치고 사러 달려가는 거야. 그리고 헉헉 숨을 헐떡이며 돌아와 자 미도리, 딸기 쇼트케이크하고 내밀어. 그러면 내가 , 이제 이딴 건 먹고 싶지도 않아라며 그것을 창밖으로 집어던져버려. 내가 바라는 건 바로 그런 거야. (....) 그리고 난 남자애가 이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알았어. 미도리. 내가 잘못했어. [가 딸기 쇼트케이크를 먹기 싫어졌다는 거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난 정말 당나귀 똥만큼 멍청하고 센스가 없어. 사과하는 의미에서 다른 걸 하나 사다줄게. 뭐가 좋아? 초콜릿 무스, 아니면 치즈 케이크?”

 

<노르웨이 숲>의 미도리는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다. 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 했더라도 여전히 나를 사랑해 줄 남자. 어떤 여자가 개츠비를 외면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 남자가 봄날의 곰처럼 네가 좋아”, “너를 보고 있으면, 가끔 먼 별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너는 마치 카폐오레의 요정 같아라고 말하는데?

 

스콧 피츠제럴드와 마찬가지로 하루키 소설에서 소비지상주의낭만적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 이 둘은 마치 초콜릿 무스마냥 뗄레야 뗄 수가 없고, ‘소비지상주의는 빙산 아래 얼음처럼 낭만적 사랑밑에 가라앉아 있어 좀처럼 드러나지도 않는다.

 

또한 하루키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들의 원형은 <위대한 유산>의 개츠비다.

어떤 남자가 개츠비이고 싶지 않겠는가?

 

하루키 소설은 인간의 욕망을 이상화한다. 독자인 우리는 하루키를 읽으면 아무런 죄책감없이 소비할 수 있다. 오로지 나의 행복만을 바란다. 세월호 사건으로 몇 백명이 죽건 말건,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이 수십 명 죽건 말건 부당한 권력, 불합리한 사회 따위를 생각하는 건 귀찮다. 오히려 무관심하고 무심한 게 멋진 거다.

 

진지빨일 있나? 그나저나 왜 내 앞에 현빈 같은 남자가 안 나타나는 걸까.

오늘 낮엔 초콜릿 무스나 먹을까. 살 찔텐데.’

 

하루키와 김영하의 또 다른 공통점을 들자면 외국에 나가서야 자국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두 작가는 아마도 사회의 문제를 외면하고 살아온 시간에 대한 죄책감이 클 것이다. 일종의 속죄다.

 

나는 하루키 소설도 좋아하고 김영하 소설도 좋아한다.

헐리웃 영웅 영화도 좋아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다 좋아하지는 않는다.

내가 진정으로 무언가를,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내가 그 안에서 어떤 점을 경계해야 하는지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어떤 것이 내 무의식을 장악하면 그 이후엔 방법이 없다.

습관화된 무의식, 즉 아비투스는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댓글(53) 먼댓글(0) 좋아요(5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시이소오 2016-04-10 22:40   좋아요 0 | URL
에고 답신이 늦어 죄송해요 ^^:

물고기 자리님은 어쩜 이리 말씀을 잘 하시는지요?
따듯한 에세이를 한 편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
혹시 제가 모르지만 이미 책을 내셨나요?
책 내셨으면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

그리고 저, 자는 거 좋아해요 ^^


물고기자리 2016-04-11 00:13   좋아요 0 | URL
에세이라뇨!ㅋ

자기 전에 일기라도 열심히 쓰겠습니다ㅎ

시이소오 님의 칭찬은 제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 알아서 가감해 들을게요^^


그리고 정말 멋진 정의를 하셨습니다!

시이소오 님께서 하루키에게 하실 수 있는 칭찬 중 가장 높은 레벨을 하신 건 아닌가요?ㅋ 혹시라도 나중에 억울해하시면 안 됩니다!ㅎ

근데 시이소오 님은 제게 계속 `동의`한다고 하시고, 저는 `공감`한다고 하는 걸 느끼셨나요? 이렇게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집요하게 나눈 대화의 끝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입니다^^

시이소오 2016-04-11 00:23   좋아요 1 | URL
물고기님의 성품이 워낙 물같으셔서 불같은 제가 짚을 들고 뛰어간들 백전백패겠어요. ㅋ 저 임계혼탁 비유를 어디다 써먹어야겠다 생각했는데 하루키한테 쓰게 될줄은 미처 예상못했네요. 후회할것 같아요 ㅋ ^^; 덕분에 사례로 남길만한 바람직한 토론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아, 그리고 에세이든 소설이든 좋은글 기대하겠습니다. 재능을 썩혀서야 되나요? ^^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유발 하라리, 마르크스의 쓸모.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농업혁명에서 설명한 허구를 상상하는 능력이었다. 하라리에 의하면 호모사피엔스는 허구를 상상하는 능력때문에 여러 호모 종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아이디어 때문에 <사피엔스>에 결정적으로 별 다섯 개를 던졌다. 하라리는 이 아이디어를 도대체 어디서 얻었을까? 김용규의 <데칼로그>를 읽다 하나의 가설을 찾아냈다.

 

흥미로운 것은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이처럼 신이 아닌 것을 마치 신처럼 여기는 것을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역시 우상숭배와 묶어 설명했다는 사실입니다. 허위의식이란 말 그대로 잘못된 의식, 곧 현실 또는 진실을 왜곡하고 있는 사상이나 이념을 뜻하지요. 때문에 허위의식은 항상 ‘~을 마치 ~처럼이라는 형식을 갖기 마련인데,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돈을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돈이란 본디 상품교환이라는 목적을 위한 매개수단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노동자가 돈을 위해 자신의 상품인 노동을 팔 때 그에게 돈은 더 이상 수단이 아니고 목적이 됩니다. 수단을 마치 목적처럼 여기는 허위의식이 생긴 거지요. 그리고 일단 허위의식이 생겨나면 돈이 진정한 신또는 보이는 신이 되고 그것의 숭배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된다는 거지요.

 

<데칼로그> p169. 김용규

 

아마도 마르크스를 읽은 분들은 진작에 눈치 채지 않았을까. ‘허구를 상상하는 능력은 마르크스의 허위의식개념을 변형시켜 조금 더 확장했을 뿐이다. ‘허위의식신이 아닌 것을 마치 신처럼숭배하는 것이라면 허구를 상상하는 능력은 신마저 아우른다.

 

20대 때 나는 마르크스의 책을 읽지 않았다. 사유 재산을 폐지하겠다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너무도 순진하고 너무도 멍청해보였기 때문이다. ‘인간 심리에 저렇게 무지하다면 읽을 가치가 없다라고 단정했었다.

 

최근에서야 이사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를 읽었다.

그것도 칼 마르크스를 알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이사야 벌린이 썼기 때문에.

 

(10 여년 전에 듣보잡 작가의 <낭만주의의 뿌리>를 읽었다. 문학사조를 이렇게 재밌게 쓸 수 있다니!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을 발견했을 때만큼의 충격!

이사야 벌린의 책이었다. 당시엔 이사야 벌린이 세계적인 작가라는 걸 전혀 몰랐다.)

 

하라리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다시 읽고 <사피엔스>를 쓴 셈이다.

고전을 읽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

마르크스를 읽어야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 2016-04-14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야 벌린의 칼마르크스 아직인데,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좋은하루되세요~~^^

시이소오 2016-04-14 16:43   좋아요 0 | URL
저도 벌린책 다 읽고싶어요. 사랑님도 좋은 봄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