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는 고생했다.

 

하루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의문이 생겼다. 하루키는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를 좋아했다. 그런데, 난 왜 피츠제럴드는 싫어하고 카버는 좋아하는 걸까? (그러고보니 둘 다 알코올 중독자다.)

 

어쩌면 계급때문일지도 모른다. 피츠제럴드는 단편 몇 편만으로도 1920년대 당시에 만 달러 수준의 돈을 받았다. 오늘날로 치자면 단편 몇 편으로 억대의 돈을 받은 셈이다. 넘치는 돈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콧은 젤다와 함께 흥청망청 돈을 써댔다. 반면 카버는 그야말로 죽도록 고생했다. 스콧이 귀족이라면 카버는 거의 노예다. 혹시 내가 재벌 2세로 태어났으면 카버보단 스콧을 더 좋아할 수 있지도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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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실제 경험에 기초해야만 한다.”


- 헤밍웨이.


작품을 말할 때 그 사람의 전기에 기대어 혹은 프로이드식 정신분석학을 들먹여 작품을 해석하는 평론은 들여다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작품을 위한 평론이 아니라 평론을 위한 평론에 그칠 뿐이기 때문인데, 우리가 카버에 대해서 말 할 땐 일종의 예외가 허용될 수도 있지 않을까?


10대 시절 버로우의 <화성의 공주>를 읽고 읽고 또 읽던 카버의 정신적 스승은 다름 아닌 헤밍웨이였다

그리고 헤밍웨이의 위와 같은 단언은 죽을 때까지 그의 신조가 된다.



이미 발생한 사건이라고 해서 반드시 개연성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을 역사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예술은 아니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그러나, 카버는 일상의 경험만으로 예술이 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카버는 약간의 자전적 요소로 출발하긴 했지만 거기에 풍부한 상상력을 덧붙여야 한다는 걸 지각하고 있었다.

작가는 엄청나게 대담하고, 기술적으로 능란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할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작가는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쓰도록 끊임없이 요구받는데, 자기 자신의 비밀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많은 인물을 그려내는 건 필요하지 않아. 중력의 중심은 두 사람 안에 있어야 해. 그 남자와 그 여자


- 체홉의 편지.


카버의 두 번째 정신적 멘토는 체홉이었다. 체홉의 위와 같은 단언 역시 그의 평생의 글쓰기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카버의 작품 중 주를 이루는 것은 이제 그 남자와 그 여자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그는 19살에 결혼을 하고, 21살에 두 아이의 아빠가, 41살에는 할아버지가 된다. 그리고 쉰 살에 죽음을 맞이하는데 평균의 삶에 비하면 마치 그의 글처럼 응축된 삶을 살았다고 해야 할까? 그의 때 이른 가장의 경험은 절망적이긴 했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그의 글의 자양분이었다.


글쎄....대답이 될 수 있을까. 열아홉 살에 열여섯 소녀를 임신시켜 가장이 되고, 스물한 살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가난한 청년의 절망을 상상해 본 적이 있소. 내겐 기억이 생생해요. 빨래방에서, 젖은 빨래를 한 아름 안고 빈 건조기가 나기를 기다리던 젊은 아버지는 빙빙 돌아가던 건조기 한 대가 멈추자, , 이제 저 건조기는 내 차례가 되겠구나, 그랬어요. 감히 희망이라는 걸 몇 초쯤 품어 보았다오. 하지만 희망이라는 가능성을 조롱하듯, 건조기 속 빨래의 주인이 다가오더니, 문을 열어 빨래를 만져보고는 다시 동전을 넣는 거요.

 

순간,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는 건조기 앞에서 울컥 눈물이 솟을 정도로 서러워지더군요. 그 순간,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라는 그 사실만큼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일은, 아무것도,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그 애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테고, 막중한 책임감은 영원히 내 어깨를 짓누를 테고, 언제나 그 생각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뇌리에 남아 있으리라는 사실을.”


카버의 위의 고백은 셔우드 앤더슨이 말한 카버 작품에서의 세련된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삶의 한계와 관련된 메시지를 속삭여주는 밖으로부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말이다.


마치 시지푸스처럼 어깨에 커다란 돌을 짊어진 카버는 절망하긴 했지만 단 한 번도 문학을 포기하진 않았다.


높은 곳을 향한 투쟁 그것 자체만으로도 한 남자의 가슴을 충분히 채울 수 있다.

우리는 시지푸스가 행복했다고 상상해야만 한다.


- 알베르 카뮈, <시지푸스의 신화>



카버가 행복했다고 상상해야만 할까?


내 아내와 내가 가지고 있던 성스러운, 모든 정신적인 가치들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는 시절이 오고 또 갔다. 그것은 다른 어느 가족에게서도 일어나는 걸 본 적이 없는 그런 일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침식이었고, 우린 그걸 멈출 수 없었다. 우리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동안 어찌하다 보니 아이들이 운전석에 올라앉아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리지만, 고삐와 채찍이 아이들 손에 들려있었다.

-카버의 에세이, <>


1962년 카버의 창작 단막극 <카네이션>에 관한 학교신문 럼버 잭의 평자는 이 인상주의적 등장인물들은 무섭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이 무대 위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되고 있는 광경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이러한 초기의 평은 앞으로의 카버작품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었다.


카버는 후기 산업사회의 주변부- 캘리포니아의 떠돌이 들이 모여 사는 동네들- 에 살던 사람들에 대해 썼어요. 이들은 침실 두세 개 짜리 집에서 살고 있는 아주 선량해 보이는 사람들이었지만,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가정 내 불화로 인해 갈가리 찢겨 있고, 항상 파산지경에 처해 있었죠. 이 사람들에게는 삶이란 언제나 임시이고, 또 임대로 얻은 거죠, 은퇴도 없고, 소유도 없고, 관계가 지속될 것이라거나 아이를 키우게 될 거라는 보장도 없어요. 카버는 이런 종류의 작은 비극들과 유머가 발생하는 순간들에서 뭔가 중요한 것을 봤어요.


- 첨단 :70년대의 미국의 젊은 소설. 잭 힉스


카버 단편의 내용적인 특징을 블루칼라 가정내의 불화라고 한다면 형식적 특징은 우선은 생략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부분을 생략시킴으로 해서 독자들에게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풍부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작가는 어떤 것이라도 생략할 수 있다.

- 헤밍웨이, <이동 축제일>


생략했을 뿐만 아니라 카버의 단편에는 세세한 묘사라고 할 만한 부분들이 없다.



진술의 기본적인 정확성은 글쓰기의 유일한 도덕이다” 


- 에즈라 파운드


카버의 글이 지적이지 않다고 불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체홉의 말에 따르면 그는 거기에 책임이 없다.



예술가가 작품에 임할 때 지적인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당신의 요구는 타당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두 가지, 즉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문제를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예술가는 오직 두 번째 사항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습니다.


- 체홉 <체홉의 편지>


카버의 아버지가 그랬고 헤밍웨이, 잭 런던, 치버도 그랬듯 카버 역시 알코올 중독자였다.

카버의 친구는 말한다. ‘, 당신도 술 먹는 거 좋아하고 나도 술 먹는 거 좋아하지만, 레이가 술 먹는 거 좋아하는 것처럼 술 먹는 거 좋아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이러한 시기에 카버는 아내인 메리엔이나 자식들에게 폭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또한 카버가 만난 진정한 사랑역시 가뜩이나 불운한 가정에 불을 붓는 격이었다.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것의 최대치를 이끌어내며 살지 못하는 하루하루마다 우리는 우리안에 들어 있는 세익스피어, 단테, 호머, 예수를 죽이고 있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한 굴레에 묶여 살고 있는 하루하루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힘과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여자를 차지할 힘을 파괴하고 있다.

-헨리 밀러, <우주적인 눈>


아마 이 당시의 카버는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술은 끊을 수 없고 글은 써지지 않고 새로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환상을 꿰뚫어보고 모든 가치들을 다른 가치기준에서 바라본다. 신은 악이고, 진실은 속임수이고, 인생은 농담이다. 고요함-광기의 높이에서 신의 확신을 가지고 그는 모든 삶이 악이라고 바라본다. 아내, 자식들, 친구들, 그것들은 그의 논리의 선명하고 하얀 빛 속에서 사기와 허위였음이 드러난다. 그는 그것들의 덧없음, 빈약함, 야비함, 비루함을 본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의 자유를 알고 있다. 자신의 죽음의 날을 미리 알 수 있으리라는 것. 자살, 빠르건 느리건, 갑작스럽게 쏟아져버리든 여러 해에 걸쳐 서서히 새어나가든 그것이 존 발리콘이 요구하는 대가이다.

- 잭 런던, <존 발리콘>


발작 탓이었을까? 아니면 존 치버의 말년을 보아서 였을까? 1977년은 카버에게 기념비적인 날이다. 그 해 이후론 죽을 때까지 술은 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 카버는 금주이후의 삶을 그레이비라고 부르고, 그 전의 자신을 나쁜 카버, 그레이비 이후의 카버를 좋은 카버라 부른다.


질서는 모든 세대, 모든 예술 분야, 모든 개인에게 자치권적 승리를 의미한다. 질서는 모든 개인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바이다. 이것은 모든 예술가들이 추구해야 할 비밀스런 이미지이고, 그의 존재 이유이고, 그가 창조해 내는 것의 핵심이다. 질서를 창조해 내지 않는다면, 예술가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 셈이다.

-미셀 쉐퍼, <이 세기의 조형예술>


이 좋은 카버 시기의 작품이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내가 전화를 거는 곳>, <대성당>등이 있다. , 중반기의 출구가 없는 등장인물들은 빵을 먹거나, 한 번의 키스로, 혹은 맞잡은 손으로 그리는 그림 등에 의해 어떤 희망을 본다. 위협의 대상들은 구원의 대상으로 전복된다. 카버는 칼라일 호텔에 묵을 때 해럴드 핀터의 대사를 자기식으로 바꾸어 사람이란 게 이런 방에 있으면 자기한테도 기회가 있다고 믿게 되는 법이지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술을 끊고 테스 갤러거를 만나고 왕성하게 시를 창작하던 이 시기는 나쁜 카버의 시기에 비하면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순탄했다. 마치 그가 새로 사들인 벤츠같은 삶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잘나가는 작가였다.


뉴요커의 편집자. 찰스 맥그래스는 말한다.



카버는 내가 목격한 바로는 가장 광범위하게 모방된 작가로서, 한 세대 전체의 인솔자였습니다. 내가 처음 <뉴요커>에 갔을 때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작가는 샐린져였고 그 다음에는 도널드 바셀미, 그 다음이 앤 비티, 그 후가 카버였어요. 카버가 얼마나 뛰어난지는 그의 작품과 그의 모방자들의 작품의 차이를 보면 알 수 있어요.


톨스토이가 동시대 러시아 작가들을 두고 고골리의 외투에서 떨어졌다.”가 말했다는데 1990년 대 맥커너니에 말에 의하면, 카버의 외투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고 할 만한 작가는 아마 단 한 사람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좋은 카버시절의 카버의 작품은 경이롭긴 하지만 시시하다.



<세잔의 그림들에 대해서> 이 색상들은 마치 우유부단함 중의 한 부분을 완전히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붉은 색들과 푸른 색들에 들어있는 선한 마음, 이것들의 단순한 진실성, 이게 당신을 가르칩니다. 당신은 또한 사랑을 넘어선 지점까지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매번 조금씩 더 분명하게 알아가고 있겠죠. 하나씩 만들어나갈 때 마다 그것들 각각을 사랑하게 되는 건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드러내면 작품이 조금씩 더 안 좋아집니다.......별다를 게 없는 작품에서 사랑을 완전히 비워냄으로써 어떤 순수한 것을 만들어내는 일, 이런 것이 이 노인네의 작품에서처럼 완벽하게 성취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 릴케, <세잔에 관한 편지>


어쩌면 좋은 카버는 비우기보다 채워서, 감추기보다 드러내기 때문은 아닐까?


























<알래스카에 뭐가 있지?> 1971년 작.


칼은 구두를 새로 사 신고 집으로 들어온다. 아내인 메리는 알래스카에 일자리가 생길 것 같다며 기대에 부푸는데, 칼 역시도 알래스카에 가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친구 사이인 헬렌과 잭 부부가 잭의 생일 선물로 산 물담배를 같이 하자며 칼 부부를 초대한다. 칼과 메리 부부는 소다수와 먹을 것 등을 사서 잭과 헬렌의 집에 방문한다. 소다수를 마시며 담뱃대를 돌려 피우려는 찰나, 메리는 칼은 오늘 밤 좀 짜증이 나 있어요라고 말한다. 메리의 말에 칼은 날 짜증나게 하는 좋은 방법이군 그래하고 대꾸한다. 두 커플은 이내 소다수를 마시고 물담뱃대를 돌려 피우며 잡담을 나눈다. 그러다 또 다시 칼은 메리에게 아까 자신이 짜증이 나 있다고 한 말이 무슨 뜻이냐며 메리에게 재차 되묻는다. 메리는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요라고 말하고는 눈물이 나도록 웃는다.

 

칼은 알래스카에 갈 거라고 잭 부부에게 말한다. 또 다시 잡담 등이 뒤섞이다가 잭과 메리는 음식을 가지러 부엌으로 간다. 칼은 메리가 잭의 허리를 껴안는걸 지켜본다. 칼은 소다수를 흘려 그의 구두에 엎지른다. 잭은 알래스카에 왜 가는지를 묻는다. 칼은 알래스카에선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라고 대답한다. 문을 긁는 소리가 들려오고 잭은 고양이 신디를 들여보내기 위해 일어서는데 메리는 잭에게 내 것도 하나 갖다 줘요, 여보라고 말하는데, 남편인 칼에게 말하는 줄 알았다며 자신이 실수했음을 말한다. 신디는 쥐를 물고 들어와 그들 곁에서 쥐를 먹는다. 잭과 헬렌 부부의 만류를 물리치고 칼은 메리를 부축해 집으로 돌아온다. 이미 취한 메리는 마시던 맥주를 내려놓고 잠이 들어 이내 코를 곤다. 칼이 막 램프를 끄려고 했을 때 그는 현관에서 한 쌍의 작은 눈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구두 한 짝을 쥔 칼은 그것이 한 번 더 움직이기를 기다린다.



<알래스카에 뭐가 있지?>보단 <이게 뭐지?>가 어울릴 법한 작품이다. 가히 핀터에 버금갈 만 하다. 카버의 단편들은 구석 구석 은밀한 암시들을 깔아놓긴 하지만 이 작품만큼 애매모호한 작품은 없는 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카버가 주로 쓴 단편들은 그 남자 그 여자이야기이지만, 이 작품처럼 두 커플의 이야기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들도 꽤 있다. (예를 들면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 이 작품을 해석하기 위해 카버의 글들과 그의 노트에 쓰여져 있던 글들을 따라가 본다.



내 책상 맡에는 체홉의 단편에서 따온 문장 하나가 적힌 카드도 붙어 있다. “...갑자기 모든 것이 그에게 있어 명료해졌다.” 나는 몇 안되는 이 단어들이 경이와 가능성으로 채워져 있음을 발견한다. 나는 그 단순한 명징성을 사랑하고, 그것이 암시하고 있는 계시를 좋아한다. 거기에는 또 미스터리도 포함되어 있다. 그 전까지는 무엇이 그렇게 불명료했을까? 왜 그것이 지금에야 명료해졌을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한 갑작스런 깨달음으로 인해 초래되는 결과들이 있다. 나는 날카로운 안도감, 그리고 나름대로의 예감을 느낀다.


실제로 다른 작품들에선 갑자기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와 비슷한 문장들이 제법 나온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선 그도 말하지 않을뿐더러 내게 있어서도 아직까지 모든 것이 불명료하다. 이 소모되는 듯한 대사들은 뭘까?

시나 단편 소설에서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여 지극히 상식적인 사물을 글로 표현하는 것, 또한 그러한 사물-이를테면 의자나 창문의 커튼, 포크, 돌멩이, 여자의 귀걸이 등-들에 거대하고 놀라운 힘을 부여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또한 독이 없는 대화를 통해 읽는 이의 등골에 오싹한 한기를 전달하는 글을 쓰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이 예술적 기쁨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작가로는 나보코프 Nabokov를 들 수 있다. 내가 가장 흥미를 가지는 것이 바로 이러한 종류의 글쓰기이다.



소다수가 의미하는 바가 있을까? 일종의 맥거핀일까? ‘소다수는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는데 그 단어가 계속 반복되다보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이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나는 단편 소설에 어떤 위협이나 협박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에는 약간의 협박이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그 작품이 널리 유포되는데도 도움이 된다. 긴장 역시 꼭 필요하다. 무언가 절박한 상황, 처절한 행동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소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설 작품 속에서 긴장을 만들어 내는 것 가운데 하나는 가시적인 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단어들을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다 털어놓지 않은 것, 그저 암시만 된 것, 사물의 평평한(때로는 망가지고 뒤집어진) 표면 아래 감춰진 풍경 등에서도 그런 긴장이 발생한다.


문을 긁으며 쥐를 물고 들어오는 고양이 신디는 일종의 협박 같다. 다른 소설에서도 이런 협박 집으로 들어오려는 공작, 너무나 못생긴 아이 등 은 그가 주의해야한다고 말했던 트릭이라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도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을 받는다.


그가 말했다, 그녀가 말했다식의 문장이 있어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등장인물이 많아서? 일종의 실험일까? 카버와 메리엔은 그가 말했다, 그녀가 말했다라는 텔레비전 퀴즈 프로그램의 내용을 받아 적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런 식의 문장이 독특한 음률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그는 소설가 이전에 시인이었다.)


프리체트 V. S. Pritchett는 단편 소설을 눈꼬리로 힐끗 본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힐끗 본다라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무언가를 힐끗 본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통해 생명력이 부여되고 그 순간을 조명하는 무언가가 탄생한다. 나아가 운이 좋으면-또 운을 들먹인다-보다 깊이 있는 결과와 의미에 도달할 수도 있다.

 

단편 작가의 임무는 자신의 모든 힘을 이 힐끗 보는데 투자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지혜와 문학적 기술이 무르익고(재능), 균형 감각과 사물의 합당성에 대한 감각이 길러진다. 사물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도 감지할 수 있다. 또한 명쾌하고 구체적인 언어, 디테일한 부분에까지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런 숙제를 해결할 수 있다. 디테일은 구체적이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므로, 언어는 정확하고 정밀하게 구사되어야 한다. 단어는 지극히 평범하게 들릴 정도로까지 정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임무에는 변함이 없다. 제대로 사용된 단어는 모든 음계를 아우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그가 집에서 본 듯한 한 쌍의 작은 눈의 정체는 뭘까? 그것이 무엇이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와 비슷한 알 수 없는 결말을 내리는 다른 단편이 있다. 원제는 <제재소 사장의 죽음>이었지만 <오리들>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는데, 그 작품 속에서도 아내는 남편 먼저 잠들고 남편은 창밖을 바라본다. 그리고 남편은 침대로 돌아와 아내를 깨운다. “여보, 일어나”..... .......“일어나”,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에는 체호프적인 명료함이 존재하지만, 또한 이면의 무언인가가 끔찍하게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카프카적 의식도 존재한다.”

 

-마이클 코프.


아마도 내가 카버를 좋아했던 건 체호프적인 명료함때문이라기 보단 (그런데 체홉이 명료한가?) ‘카프카적 의식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보는 게 무엇이고, 그가 듣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상관물이라는 데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섬뜩하다.


카버는 한 인터뷰에서 서로의 얘기를 듣고 있지 않는 사람들의 대화를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그런 대사를 쓴 대표작은 아마도 이 작품이 아닐까?


농담 아니야?

헬렌이 말했다.

진담이야

칼이 대답했다.

알래스카 말이야.”

헬렌이 말했다.

칼은 그녀를 응시했다.

당신이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칼은 헬렌이 무슨 말을 하건 전혀 관심이 없다. 칼은 부엌으로 간 잭과 메리에게 온 신경이 가 있을 뿐이다.

잭이 말하며 빙긋이 웃었다.

뭣 때문에 그렇게 웃는 거야, 헬렌?”

나도 몰라. 메리가 말한 게 우스워.”

헬렌이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메리가 물었다.

기억 안 나.”


헬렌은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도 못한다. 그러면서 웃기만 할 뿐이다. 잭은 그런 헬렌이 못 마땅하다

쥐를 먹어치우는 고양이같다. 아마도 메리와 잭은 여보라는 말을 쓰는 걸로 봐서 내연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칼은 그 두 사람의 관계가 미심쩍다. 그리고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역학관계에 대해서 절대로 묘사하려 들지 않는다. 단지 상황만을 만들고 암시적인 대사를 들려준다.


말들, 정확하고 진실한 말들은 행위가 지니는 힘을 가집니다. 여러분의 말들의 영혼, 여러분의 행위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것으로 준비는 충분합니다. 더 이상 다른 말은 필요 없습니다. ”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 1974


클레어의 남편과 그의 친구들인 고든 존슨, 멜 던과 번 윌리엄스는 매년 봄과 초 여름, 정기적으로 낚시를 다니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가정적인 사람들이다. 이번 낚시에서 그들은 알몸의 소녀의 시체를 발견한다. 토론 끝에 그들은 계속 낚시를 하기로 하고 시체가 물에 떠내려가지 않게 소녀의 손목을 나일론 줄로 나무에 묶어놓는다.

 

그리고 그들은 평소대로 카드를 치고 위스키를 마시고 소녀 옆에서 설거지를 한다. 이틀 동안. 다음 날 산을 내려온 그들은 경찰에 신고를 한다.

집으로 돌아온 클레어의 남편은 클레어의 다리를 벌린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클레어는 남편과 그의 친구들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듣게 된다.

죽은 소녀와 어릴 적 친구사이였던 클레어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몰고 가는데, 픽업트럭을 탄 남자가 치근덕거린다.

 

집으로 돌아온 클레어에게 남편은 클레어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알 것 같다며 블라우스의 단추를 벗긴다. 클레어는 맞아요라고 말하며 남은 단추들을 자기 손으로 푼다. 마당에 있는 아들 딘이 오기 전에 서두르라며.

이 작품은 카버의 그 남자- 그 여자 이야기에 속하긴 하지만 기존의 작품들과 비교해 약간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 중에 폭력이나 섹스를 다룬 작품은 많이 있지만 직접적으로 살인을 소재로 삼은 작품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 아마도 이 작품만을 따로 읽다 보면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품집을 순서대로 읽어가다 보면 좀 더 기이한 느낌을 받게 된다.


첫 작품을 읽었고, 그리고 나서 다음 걸 읽다가 감정적으로 너무 벅차올라서 나머지 작품들도 읽어나갔는데, 문자 그대로, 끝날 때까지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어요. 그 작품집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어요. ”

아마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읽은 독자들도 위와 같은 크리스틴(카버의 딸)과 똑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까?


고든 리시는 이 작품을 <목욕>, <여자들에게 우리가 간다고 말해줘>, <청바지 다음에> 놓았다. 특히나. <여자들에게 우리가 간다고 말해줘>와 이 작품은 카버 작품 중 유일하게도 친구들끼리의 사소한 일탈을 다룬다. <여자들에게>의 제리는 내치즈 강을 굽어보는 언덕위에 멋진 집을 갖고 있고 주말이면 그의 친구인 빌이 아내와 애들을 데리고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어느 토요일 남자들은 밖으로 나다녀야 해.”라고 말하곤 아내와 애들을 남겨두고 차를 몰고 나가 자전거를 탄 여자들에게 수작을 건다. 여자들이 자전거를 버려두고 내치즈 협곡을 오르자 빌과 제리도 그녀들의 뒤를 쫓는다. 그리고 여자들을 발견한다.


그는 제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했다. 하여튼 그건 바위로 시작하여 바위로 끝났다. 제리는 같은 바위를 두 여자에게, 처음에는 샤론이라는 여자에게, 그 다음에는 빌리의 몫인 여자에게 사용했다.”


카버의 단편은 다른 단편과의 어떤 느슨한 결합을 이루고 있는데, 이 두 작품은 친구들 간의 일탈, 그리고 내치즈강을 무대로 하는 한다는 점에서 내치즈강을 소재로 하는 유일한 두 작품- 그렇다. 그리고 그런 유추를 하자마자 끔찍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야말로 상상이다.


<너무 많은 물이>의 화자는 시체의 목격자인 클레어의 남편과 친구들이 아니라, 클레어다.

그는 가고 있는 길에 집중하려 한다. 하지만 그는 계속 백미러를 쳐다본다.

그는 알고 있다.“

도대체 뭘 알고 있단 말인가?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 흐른다.

왜 몇 마일이나 멀리 갔어야 했어요?”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는 동안 클레어는 미용사에게 말한다.

그건 살인이었어요


맞다. 그건 살인이었는데, 굳이 왜 저런 말이 필요할까? 그들이 클레어의 죽은 친구를 물 속에 그대로 방치한 행위 때문에? 아니면 혹시 그들이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단 말인가?


그렇지만 클레어는 장례식에서 살인자가 잡힌 걸 듣는다.


그들은(독자들) 자신들이 오직 액션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리고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대화와 묘사를 통한 감정의 창조였다. 독자들이 기억하고 또 그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예를 들자면 한 사내가 살해당하는 장면이 아니라 바로 그 죽음의 순간에 매끈거리는 책상위에서 종이 클립을 집어들려 애쓰는 모습이다.

 

-레이먼드 챈들러


클레어의 남편과 친구들이 직접 살인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카버는 대사와 묘사를 통해 어떤 감정을 창조한다.


살인이 없었다고 하자. 그러나, 여전히 죽은 사람을 이틀 동안 방치하는 행위에 대해선 윤리적인 질문을 제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토론을 통해 남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이미 오 마일을 올라왔고, 일 년에 몇 번 밖에 없는 자신들의 유희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건 합리적인 행위였을까?


나무들 아래로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바로 그때 나는 그 픽업트럭이 다시 돌아오는 소리를 듣는다.

폭력은 어디에나 있다. 강가에서, 차도에서 심지어 집에서도.

그토록 많은 물이 흐르니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딘이 걱정된 클레어는 위스키를 마신 남편 스튜어트 앞에서 남은 단추들을 자기 손으로 풀 수 밖에 없다.

알코올 중독시기에 카버는 아들, 딸들에게도 그리고 아내인 메리엔에게도 폭력을 휘둘렀다. 한때 두 번째 사랑이라 여겼던 세실리의 집에서 메리엔에게 컵을 던져 메리엔은 육체의 60프로의 피를 흘려 하마터면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 혹시나 이 작품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과 알코올 중독에 대한 자기반성적 작품은 아닐까?


제임스 아틀라스는 윤기없는 문체와 감정표현의 의도적인 기피가 따분해진다.”라고 비판했고 어떤 이들은 카버의 작품을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그가 쓰고자 한 것은 단 하나의 레이먼드 카버 이야기였다. 레이먼드 카버만이 포착해낼 수 있는 세상의 풍경을 레이먼드 카버만이 풀어낼 수 있는 어법으로 픽션에 담아 이야기하는 것. 레이먼드 카버가 레이먼드 카버로 존재하는 것이 때로는 고통스럽고 부끄럽고 죄 많은 일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고달픈 일이었다. 그러나 레이먼드 카버는 레이먼드 카버라는 화자를 얻음으로써 그러한 고달픔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조금이나마 구제함으로써 우리 역시 아주 조금은 구제받을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카버를 떠올리면 홍상수의 영화가 떠오른다. ‘일상 속에 감추어진 낯섬을 말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 역시 술을 어지간히 좋아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 역시 나쁜 홍상수의 시기를 거쳐 이제 좋은 홍상수의 시기를 즐기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의 영화는 그야말로 훨씬 좋아졌다. 하지만 나는 그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나쁜 홍상수가 그립다. 어차피 절망을 말할 수 있는 건 희망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오늘 바다는 거칠다. 갑자기 힘차게 불어 닥치는 바람과 더불어.

- 로렌스 더렐 <저스틴>.


카버가 가장 좋아하던 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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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04-10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부분만 좀 읽었어요. 피츠제럴드는 개츠비처럼 엄청 벌어 화르르한 것 같아 저도 카버에게 한표를 :-)

시이소오 2016-04-10 03:44   좋아요 0 | URL
너무 길죠? ㅋㅋㅋ

초딩 2016-04-10 03:45   좋아요 0 | URL
:-) 나중에 다시 한 번 보려구요. 셋다 애정해서요

시이소오 2016-04-10 03:48   좋아요 0 | URL
하루키, 스콧, 카버를 다 좋아하신다면, 제가 스콧을 싫어하는게 단지 계급의 문제는 아니군요. 다른 가설을 찾아봐야겠습니다. ^^

초딩 2016-04-10 04:07   좋아요 1 | URL
음 :-) 통독을 거칠게 해봤어요. 스콧은 시대에 편승해서, 문학작품에 더 가깝게 시대상을 중의적으로 표출한 것 같아요. 문학책? 같은 느낌
카버는 - 저는 대성당만 읽었어요 - 칼 같이 거칠게 그리고 승화의 어떤 단계를 벅차게 맞이해 분출 한 것 같구요.
이승우작가의 생의 이면에서 이승우작가가 앙드레 지드를 인용하며, 소설은 작가를 - 생을 - 반영한다고 하듯이,
둘다 자신의 생을 각자의 방식으로 반영한 것 같아요.
세계대전 이후 미국인들의 불편한 부분을 변호하고 덮어주듯 써낸 스콧의 개츠비가 대순풍을 맞은듯 위대해졌다는 사실을,
위대한 사진작가가 운과 우연에 의지하는 것을 끄덕끄덕 인정하듯이 인정하긴 해야하는 것 같도해요.
하루키는 앞 두 작가를 - 특히 카버 - 후에 읽고 나니 그들의 반영과 서사의 방식을 동양적으로 동양인에게 맞게 써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앙 ㅜㅜ 협소한 입력창이 ㅜㅜ 두서 없이 썼네요.
내일 다시 ㅜㅜ 봐야겠어요.
좋은 밤 되세요~

시이소오 2016-04-10 04:12   좋아요 0 | URL
늦은 새벽에 이렇게 장문의 댓글이라니요.
<위대한 개츠비>리뷰를 쓸 때 초딩님 말씀을 참고해야겠네요.
곧 아침이 옵니다.
부디 굿 밤되세요.~~ ^^

2016-04-10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10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16-04-11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먼드 카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체호프의 명료함과 카프카의 의식이라. 다시한번 읽어봐야겠어요.

시이소오 2016-04-11 09:11   좋아요 0 | URL
제가 느끼기에 카버 소설은 어떤 위협, 협박의 요소들이 있어요. 카프카적인 느낌이 들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0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nrehfhr죽도록 고생한 작가 중 한 명이 바로 코맥 메카시입니다. 한동안 풀만 뜯어먹고 살아닸네요..

시이소오 2016-05-10 16:4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존경스럽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