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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개인적인 - 내 방식대로 읽고 쓰고 생활한다는 것
임경선 지음 / 마음산책 / 2015년 10월
평점 :
임경선은 왜 작가가 되었나? 하루키를 읽었기 때문이다.
임경선의 책을 읽고 싶었는데 마침 도서관에 있길래 그냥 집어 들고 와서 읽었다.
‘이런, 하루키에 의한, 하루키를 위한, 하루키에 대한 책이라니!’
또 하루키구나.
이 책은 하루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라고 할 수 없다. 자신을 작가로 우뚝 세워준 하루키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열정에 대한 고백이다. 그러므로 임경선이 하루키를 우상화, 이상화한다고 해서 비판해봤자 ‘소귀에 경 읽기’다. 제 눈에 콩깍지. 사랑을 하면 원래 다 그런 법 아닌가.
임경선은 하루키가 젊은 시절 엄청나게 고생을 하고 고통을 당했다고 말한다. 아니, 재쯔 카페에서 고생을 하면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종업원도 아니고 사장이었는데. 하루키는 손님들 주문대로 서빙한 다음에는 뭐했나? 손님들과 잡담 따위는 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책만 읽었다. 장사도 꽤나 잘 됐다. 도대체 무슨 고생을 했다는 건지?
하루키는 결혼을 일찍 했다고 하지만 애를 낳아 양육하지도 않았다. 19살에 애를 낳아 21살에 두 아이를 키웠던 레이먼드 카버와 비교해 보라. 할 수만 있다면 하루키보다 고생한 작가들을 임경선 집 대문 앞에 한 트럭 실어 보내고 싶다. (작가들의 동의를 얻는 게 더 큰 문제겠지 ^^;)
임경선은 하루키가 죽을 둥 살 둥 고생고생하다 굉장히 늦은 나이에 등단한 것처럼 묘사한다. 하루키는 <일식>의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처럼 23살에 등단한 건 아니었지만 29살에 군조신인상 받으며 등단했다. 그 정도면 꽤 이른 등단이다.
오히려 하루키만큼 등단이후부터 아무런 우여곡절 없이 성공한 작가가 또 누가 있을까. ‘하늘이 내린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임경선은 전공투 세대 –우리로 치면 386세대-처럼 하루키가 변절하지 않은 것을 윤리적이라 치켜세우고 양심적으로 묘사하지만 그렇다고 하루키가 데모를 하거나 작품 안에 사회적인 비판을 투영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루키가 사회의식이 없었다고 그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에 거리를 두겠다는 것도 작가의 선택이다. 내가 보기에 하루키와 김영하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들은 이념이 퇴색된 시기에 사회에 대한 무심함, 냉소를 통해 새로운 세대의 욕구를 대변해 준 최초의 작가다. 새로운 세대의 욕구는 한마디로 ‘미국식 소비지상주의’였다. 하루키와 김영하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선호, 번역한 것도 단지 우연이 아니다.
평론가들은 하루키를 ‘바타쿠사이 (버터 냄새가 난다’) 라고 비판했다. 임경선의 입장에선 부당하다고 생각할 순 있다. 그러나, 평론가들의 비판을 단지 하루키의 성공을 깍아내리기 위한 질투로만 해석할 순 없다.
하루키의 무의식엔 ‘미국에 대한 선망’이 자리잡고 있다. 실제로 하루키의 문학은 일본 문학이라기보다는 미국 문학에 가깝다. ‘미국 선망 문학’이랄까. 하루키는 비치보이스를 듣고 째즈를 듣고, 고베의 헌책방에서 영어로 된 미국 문학을 읽었다. 하루키에게는 미국 문화가 멋있어 보였다. 한마디로 ‘쿨’해 보였다. 하루키는 미국 문화에 내재된 ‘소비지상주의’를 간파할 만큼 성찰적인 작가는 아니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가 셔츠를 붙잡고 우는 장면이 하루키에겐 이상하지가 않다. 아마도 하루키는 그 셔츠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하루키는 재즈 카페 경영할 때도 셔츠는 매일 매일 꼭 다려 입었다.
여성독자들은 왜 하루키 소설에 끌리는가? 여성 독자들은 왜 하루키가 좋은지 딱히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루키 소설은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근히 여성의 무의식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면 재벌남과 가난한 여자의 사랑을 소재로 한 막장드라마다)
신데렐라 콤플렉스, ‘데이지 콤플렉스’다. 편협한 일반화일까? 나는 여성들이 가장 좋아할만한 하루키 문장을 제시할 수 있다.
“내가 바라는 건 그냥 투정을 마음껏 부리는 거야. 완벽한 투정. 이를테면 지금 내가 너한테 딸기 쇼트게이크를 먹고 싶다고 해. 그러면 넌 모든 걸 내팽개치고 사러 달려가는 거야. 그리고 헉헉 숨을 헐떡이며 돌아와 ‘자 미도리, 딸기 쇼트케이크’하고 내밀어. 그러면 내가 ‘흥, 이제 이딴 건 먹고 싶지도 않아’라며 그것을 창밖으로 집어던져버려. 내가 바라는 건 바로 그런 거야. (....) 그리고 난 남자애가 이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알았어. 미도리. 내가 잘못했어. 네[가 딸기 쇼트케이크를 먹기 싫어졌다는 거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난 정말 당나귀 똥만큼 멍청하고 센스가 없어. 사과하는 의미에서 다른 걸 하나 사다줄게. 뭐가 좋아? 초콜릿 무스, 아니면 치즈 케이크?”
<노르웨이 숲>의 미도리는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다. 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 했더라도 여전히 나를 사랑해 줄 남자. 어떤 여자가 개츠비를 외면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 남자가 “봄날의 곰처럼 네가 좋아”, “너를 보고 있으면, 가끔 먼 별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너는 마치 카폐오레의 요정 같아”라고 말하는데?
스콧 피츠제럴드와 마찬가지로 하루키 소설에서 ‘소비지상주의’는 ‘낭만적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 이 둘은 마치 초콜릿 무스마냥 뗄레야 뗄 수가 없고, ‘소비지상주의’는 빙산 아래 얼음처럼 ‘낭만적 사랑’밑에 가라앉아 있어 좀처럼 드러나지도 않는다.
또한 하루키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들의 원형은 <위대한 유산>의 개츠비다.
어떤 남자가 개츠비이고 싶지 않겠는가?
하루키 소설은 인간의 욕망을 이상화한다. 독자인 우리는 하루키를 읽으면 아무런 죄책감없이 소비할 수 있다. 오로지 나의 행복만을 바란다. 세월호 사건으로 몇 백명이 죽건 말건,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이 수십 명 죽건 말건 부당한 권력, 불합리한 사회 따위를 생각하는 건 귀찮다. 오히려 무관심하고 무심한 게 멋진 거다.
‘진지빨일 있나? 그나저나 왜 내 앞에 현빈 같은 남자가 안 나타나는 걸까.
오늘 낮엔 초콜릿 무스나 먹을까. 살 찔텐데.’
하루키와 김영하의 또 다른 공통점을 들자면 외국에 나가서야 자국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두 작가는 아마도 사회의 문제를 외면하고 살아온 시간에 대한 죄책감이 클 것이다. 일종의 속죄다.
나는 하루키 소설도 좋아하고 김영하 소설도 좋아한다.
헐리웃 영웅 영화도 좋아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다 좋아하지는 않는다.
내가 진정으로 무언가를,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내가 그 안에서 어떤 점을 경계해야 하는지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어떤 것이 내 무의식을 장악하면 그 이후엔 방법이 없다.
습관화된 무의식, 즉 아비투스는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