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위대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오마르 하이얌에게 과학은 이슬람의 지적 구속에 저항하는 반역이었다.


저 엎어놓은 사발을 하늘이라고 부른다.

그 아래 갇혀 우리는 한생을 살다 간다.

하늘을 향해 도움을 구하는 손을 내밀지 말지니,

하늘도 그대와 나처럼 무력하게 돌고 있을 뿐이다.

 

현 세기에도 우리는 소련의 감옥에 수감되었던 물리학자 레프 란다우와 목숨을 걸고 스탈린에게 란다우의 사면을 호소한 표트르 카피차를 기억하고 있다.

 

수학자 앙드레 베유와 그를 구해준 수학자 라르스 알포르스도 알고 있다.

 

수학자 챈들러 데이비스. 동료를 밀고하라는 요구를 거절한 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 수감됐다.

 

힐베르트는 이 보편적 과정을 발견하는 문제를 결정문제라고 명명했다.

그는 결정문제를 풀게 되면 수학의 유명한 난제들도 모두 풀 수 있다고 믿었다.

 

힐베르트가 70세가 되었을 때, 쿠르트 괴델은 탁월한 분석을 통해 힐베르트의 방식으로는 결정문제를 결코 풀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였다. 일반적인 산술규칙들을 포함해 모든 수학의 공식화에는 명제들의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과정이 존재할 수 없음을 입증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참이나 거짓을 증명할 수 없는, 유의미한 산술적 명제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괴델의 정리. 괴델의 정리는 순수수학에서 환원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아인슈타인은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물리학 전체를 통합할 수 있는 방정식들을 찾는 일에만 매달려 무익하게 보냈다.

 

노년의 아인슈타인과 노년의 오펜하이머는 블랙홀의 수학적 아름다움에만 눈이 멀어서, 그것의 실제 존재 여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은 환원주의 철학에 빠져 길을 잃었다. 그들은 모든 물리적 현상들을 몇 개의 기본 방정식들로 환원하는 것을 물리학의 유일한 목표로 삼았다.


 

프랜시스 크릭은 금세기 최고의 과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말년에 자신이 주동했던 미생물학 혁명에 대한 개인적인 해설을 책으로 출간했다. 존 키츠의 시구에서 제목을 빌린 <열광의 탐구What mad pursuit>가 그것이다. 그 책에서 크릭이 참여한 두 가지 발견, DNA의 이중나선구조와 콜라겐 분자의 삼중나선구조를 비교, 설명한 부분이 내겐 가장 인상적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기념비 중 하나는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 알라모에 있는 새뮤얼 곰퍼스의 석상이다. 석상 아래에는 곰퍼스가 했던 연설의 한 구절이 적혀있다.

 


노동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우리는 감옥보다는 교사를

총보다 책을

범죄보다 배움을

탐욕보다 여가를

복수보다 정의를

우리의 훌륭한 본성을 배양시켜줄 기회를 더 원한다.

 

새뮤얼 곰퍼스는 미국노동총동맹을 설립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했던 사람이다.

 

과학이 최근 수십 년간 가난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지 못하게 된 까닭은 두 가지 현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순수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인간의 현실적 요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현상이 한 이유요, 응용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점점 더 즉각적인 이윤에 집착하고 있는 현상이 또 한가지 이유다.

 

토머스 제퍼슨이 자명한 이치라고 주장했던 말이 있다.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창조되었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그 권리에는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에 동의한다면, 수백만 명이 실질과 빈곤에 내몰리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원자력발전소들 버금가게 이 지구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것도 자명한 이치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위상을 기억한다는 것은 귀가 미세조정공명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공명기는 무음 간격 동안에도 끊임없이 진동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골드의 실험은 음의 고저 구분이 뇌가 아니라 주로 귀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골드가 옳았던 또 다른 이론은 청각이론보다 더 오랫동안 학계로부터 배척당했다. 바로 지구의 자전축이 90도 뒤집힌다는 이론이었다. 1955년 골드는 지구 자전축의 불안전성이라는 제목의 매우 혁명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요약하자면, 지구의 자전축이 100만 년에 한 번꼴로 90도 각도로 회전해 이전의 북극과 남극이 적도가 되고, 적도의 두 지점이 각각 양극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997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암석자기학의 대가였던 조셉 커시빙크는 한 편의 논문에서 캄브리아기 초기에 지질학적으로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지구의 자전축이 실제로 90도 회전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이것은 생명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발견이었다. 왜냐하면 자전축의 90도 회전이 일어난 시기가 캄브리아기 폭발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골드가 제시한 혁명적인 이론은 그의 저서 <깊고 뜨거운 생물The deep hot biosphere>의 주제이기도 하다. 골드는 지표의 수 킬로미터 아래에도 생물들이 서식하는 또 다른 생물권이 있다고 설명한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먹이>는 무책임하게 응용된 생물학적 지식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 세상이 그 메시지를 듣기를 바란다.

 

두 번째로 빌은 나노기술의 선도자 에릭 드렉슬러의 말을 인용한다. 드랙슬러는 나노기술의 활용을 장려하는 동시에, 오용을 경고하기 위해 포어사이트 인스티튜트를 설립했다. 다음은 드랙슬러의 말이다.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합성박테리아는 진짜 박테리아를 압도할 수도 있다. 이것들은 꽃가루처럼 바람에 날려 퍼질 수도 있고, 빠르게 복제해 수일 내에 생물권을 초토화시킬 수도 있다. 이 위험한 복제자들은 아주 작고 억세고 빠르게 퍼지기 때문에 막을 수가 없다.



 

나노기술은 한마디로, 기능면에서는 생물세포와 비슷하나 구성성분이 달라서 세포보다 훨씬 강인하고 다재다능한 미시 규모의 기계를 만드는 기술이다. 어셈블러도 그중 하나다. 어셈블러는 쉽게 말해 스스로를 복제할 뿐 아니라 다른 기계를 제조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공장이다.

 

 

버나드스키는 생물권이라는 용어를 고안하지 않았지만, 생물권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지구과학과 생명과학을 최초로 통합한 러시아의 과학자다. 바츨라프 스밀은 프라하에서 교육받고 캐나다에 살면서 스스로 동서양을 잇는 가교임을 자처했다. 그는 자신의 책을 통해 버나드스키를 새롭게 조명하고 서구에 그의 이론을 소개하고자 했다. 스밀은 <지구의 생물권 : 진화, 역학 그리고 변화>에서 거의 모든 장에 걸쳐 버나드스키의 <생물권>을 인용한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핵전쟁의 결과를 철저하고 솔직하게 묘사한 톰 스토니어의 <핵 재앙>을 읽었다.

 

일종의 직업으로서 군인의 소임을 다하는 것과 광신적인 군인의식은 엄연히 다르다. 너무 진지한 타입이 아니었던 발크는 호감가는 인물이었다. 그는 군인으로서 당연히 전쟁에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교를 빙자한 허세나 자만심도 없었다. 발크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대단히 훌륭하고 고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전투는 단지 임무였을 뿐이다.

 

하지만 군인의 소임을 인간성보다 더 높이 둔 요들은 호감 가는 인물이 아니었고, 결국에는 악당이 되었다. 그는 군인의 맹세를 신성한 서약으로 여겼다. 군인의 의무는 히틀러에 대한 충성이라고 확신했고, 결국 자신도 히틀러의 광기에 전염되고 말았다.

 

전략폭격이라는 복음을 전파한 것은 1920년대 이탈리아의 줄리오 듀헤였으나, 그 복음을 처음 실천한 사람은 영국의 휴 트렌차드 경이었다. 트렌차드는 중폭격기들을 제작해 독일의 민간경제를 공격하자고 정부를 설득했다. 그 순간, 영국은 과거 특정한 적만을 공격했던 19세기 전쟁의 전통에서 완전히 돌아서버렸다.

 

퀘이커교가 이룬 불멸의 위업은 노예제 폐지였다.

 

오늘날 평화운동에 필요한 교훈도 이것이다. 평화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전쟁의 완전한 금지다. 모든 전쟁이 악이지만, 핵무기 사용은 더 악랄한 악이다. 핵무기 폐지가 전쟁을 금지하는 것보다 정략적 목표로서 실현 가능성이 더 크다. 18세기의 퀘이커 교도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평화주의자들은 보다 무너뜨리기 쉬운 악을 첫 번째 표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핵무기 폐지에 성공하면, 다음 세대들이 전쟁금지를 공략하기가 수월해 질 수도 있다.

 

간디는 사티아그라하(진리의 힘이라는 뜻의 힌디어로, 비폭력 저항철학을 담고 있다)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그것은 비폭력주의 그 이상을 의미했다......사티아그라하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저항하거나 폭력적 행동을 포기하자는 뜻이 아니다. 사회적, 정치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무기로서 도덕적 압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자는 의미다.

 


필립 할리는 <무고한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은 히틀러에 대항해 비폭력 저항의 길을 선택한 프랑스의 한 마을에 관한 이야기다.....유대인을 숨겨주면 추방이나 사형이 구형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르 샹봉쉬르리뇽마을은 수백 명의 유대인을 숨겨주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개신교 목사 앙드레 트로크메를 따르고 있었다.

 

르 샹봉쉬르리뇽 마을 이야기는 훌륭한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다. 바로 1987년 피에르 소바주가 제작한 <영혼의 무기Weapons of the Spirit>.

 

조지프 로트블랫은 지구상에서 핵무기를 없애기 위해 생애의 대부분을 헌신했던 과학자다. 19391월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물리학자 회의가 열렸을 때, 불행히도 그는 폴란드에 있었다. 그 회의에서 핵무기의 가능성이 처음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로트블랫도 그 가능성을 알고 있었지만, 공개토론에서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만약 그가 그 자리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 1939년에 그 엄청난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생물학자들이 히포크라테스 윤리의 전통으로 생물학 무기개발을 중단시켰던 것처럼, 물리학자들이 핵무기에 반대하는 윤리적 전통을 세울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그 기회는 물거품이 되었고, 그때부터 역사는 무정하게 히로시마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1944년에 독일에 핵폭탄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졌을 때에도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들 중 단 한 명만 연구에서 손을 뗐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그가 바로 조지프 로트블랫이었다. 로트블랫은 로스앨러모스를 더난 후 퍼그워시Pugwash(조지프 로트블랫과 버트런드 러셀, 아인타인 등이 국제평화를 위협하는 요인들을 해결하기 위해 설립한 국제 기구)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노벨 평화상이 수여된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며, 로트블랫이 노벨 평화상을 받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그때 학생 하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직 소식 못 들으셨나요? 오늘 아침에 로트블랫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 말에 나는 놀라서 소리쳤다. “만세!” 학생들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헤이스팅스는 <아마겟돈>에서 동부 유럽에서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마지막 둘째 장에 묘사한다. 스탈린은 19454월에 베를린에 대한 최후 공격을 개시했고, 3주 만에 35만 명을 잃었다. 독일군은 전체 병력 중 약 1/3을 잃었다. 영국군과 미국군은 엘베 강에서 전쟁을 멈췄고 살아서 귀환했다.

 

우리는 두 배로 운이 좋다. 통찰력과 감성이 넘치는 유리 마닌의 <수학과 물리학>이 있는 것도 행운인데다가 섬세하고 꼼꼼하게 영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100
쪽 남짓 된 이 작은 책에 실린 문장들은 한 문장 한 문장이 모두 인용할 가치가 있다.

 

이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기계와 같다. 그 기계를 움직이는 나사들과 기어들의 작동방식이 밝혀진다면, 새로운 대형으로 조립되고 정렬될 수 있다. 그 결과 이 세상은 활과 직기를 얻거나 집적회로를 얻는다.’

 

20세기 과학의 위대한 혁명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혁명과 쿠르드 괴델의 혁명이다. 두 혁명은 기존의 과학 개념을 뒤집고 새로운 과학 개념을 만들어냈다. 하이젠베르크는 고전물리학을 전복시켰고, 쿠르트 괴델은 수학의 토대를 전복시켰다.


 

 

역사적 차원에서 간결하고 탁월하게 과학을 파고든 책이 또 한 권이 있다. 바로 폴 포먼의 <바이마르 문화, 인과성과 양자이론1918~1927: 적대적인 지적환경에 대한 독일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의 적응>이다.

 

포먼은 클라인의 괴팅켄 연설을 이용해 바이마르 독일의 지적 대반전을 극적으로 묘사하려고 한다. 새로운 시대는 파멸과 우울의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상징하는 주제곡은 오스발트 슈펭글러가 쓴 묵시론적 세계사 <서양의 몰락>이었다.


 

각각의 문화는 발생하고 무르익고 타락하고 완전히 사라지는 자기 현시의 가능성들을 저마다 가지고 있다. 하나의 문화에는 조각, 그림, 수학, 물리학이 하나씩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깊은 본질적 측면과 존속기간, 독립성이 각기 다른 것들이 다수 존재한다.’

 

오늘, 과학의 시대가 저물고 회의주의가 승리하고 있다. 이 무대에서 구름은 흩어지고, 조용한 아침의 경관은 명료하게 다시 나타나고......고투 끝에 지친 서양 과학은 영적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에드워드 텔러의 <회고록 : 20세기 과학과 정치 여행>은 재밌으면서도 아주 독특한 역사기록이다.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에르빈 슈뢰딩거가 심오한 사색가로서 임루를 완수한 후, 문제해결사들은 새로운 개념들을 이용해 실용적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다. 텔러와 그의 친구 한스 베테, 레프 란다우, 조지 가모프 그리고 엔리코 페르미가 그런 문제해결사였다. 그들은 새로운 개념들을 이용해서 물리학과 화학을 기초부터 깡그리 다시 세웠다.

 

보통 달은 지구 둘레를 일정한 방향으로 공전하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오로지 앞면만 보인다. 그런데 달이 그 공전궤도를 아주 살짝 벗아나 뒤뚱거릴 때가 있다. 그때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지역이 가시적인 앞면 가장자리로 슬쩍 드러난다. 무어는 달이 고전궤도를 최대로 이탈하는 그 순간을 포착했다.

 

무어는 달이 공전궤도를 최대로 이탈하는 그 순간을 포착했다. 그리고 달에서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충돌 크레이터 마레 오리엔탈을 발견했다.

 

이런 관점은 원자핵을 발견한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말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물리학만이 진정한 과학이다. 나머지는 나비 수집에 불과하다

 

과학에는 크게 두 종류의 학파가 있다. 흔히 역사학자들은 베이컨 학파와 데카르트 학파라고 부른다. 베이컨 학과의 과학은 세부적인 것들에 주목하고, 데카르트 학파의 과학은 개념에 관심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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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2-28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에 있는 내용을 직접 옮겨 쓰신 건가요? 정말 대단합니다. 이렇게 많은 양의 내용을 입력하는 게 쉽지 않으니까요. ^^

시이소오 2016-02-28 18:08   좋아요 0 | URL
워낙에 머리가 안 좋답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 잊어버릴까봐서요.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과학은 반역이다 - 물리학의 거장, 프리먼 다이슨이 제시하는 과학의 길
프리먼 다이슨 지음, 김학영 옮김 / 반니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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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의 거장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프리먼 다이슨 전작을 했다고 자랑했었다. 오늘날 프리먼 다이슨을 물리학자 혹은 과학자라고 말하는 건 그의 행적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게 아닐까. 이제 그는 사상가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프리먼 다이슨의 과학에 대한 서평, 서문, 여러 주제에 대한 논평들을 엮은 것이다. 요약이 불가능한 책이다. 나에겐 금시초문인 과학자들, 그들이 저술한 책들이 숱하게 등장한다. (세상에! 이런 과학자들을 모르고 잘도 살았다.) 그렇다고 과학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과학을 축으로 정치, 역사, 문학을 가로지른다.

 

다이슨에 의하면 과학은 반역이어야 한다. 권력에, 국가에, 부자들에게 봉사하는 과학은 과학으로서 가치가 없다. 과학은 가난한 이웃에게 봉사해야 하고 지구 평화에 이바지해야 한다. 또한 과학자는 언제나 이단자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

 

토머스 골드는 대표적인 이단자다. 그는 끊임없이 기존 과학에 반대되는 가설을 주장했고 그가 틀린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주장들이 대부분 정설로 인정받았다. 예를 들어 그는 1955년에 지구 자전축이 100만 년에 한 번꼴로 90도로 뒤집힌다고 주장했다. 당시만 해도 과학계에서는 미친 소리로 취급했다. 1997년이 되어서야 그의 이론에 대한 증거가 제시되었다.

 

최근에 그는 지표면 수 킬로미터 아래에 또 다른 생물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의 이론이 또 다시 맞을까. 안타깝게도 골드 자신은 이론의 증거를 더 이상 눈으로 확인할 순 없다. 토머스 골드는 20046월 운명했다.

 

반역자로서의 과학자의 대표적인 인물은 조지프 로트블랫이다. 조지프 로트블랫은 독일에 핵무기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로스앨러모스 프로젝트를 제 발로 걸어 나간 유일한 과학자로 남은 생을 반핵운동에 헌신했다.

 

신동으로 유명했던 노버트 위너는 도덕적 이유로, 정부와 기업에 관련된 모든 일을 거절한 위대한 수학자다. 다이슨은 <생물권>을 강조해 지구 환경의 보호를 강조한 러시아 과학자 블라디미르 버나드스키, 버나드스키를 널리 알린 바츨라프 스밀에 관해, 그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리처드 파인만에 관한 일화도 들려준다.

 

 

이밖에도 다이슨은 수 십권의 흥미진진한 과학 도서들을 소개한다. 왜 아인슈타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푸앵카레는 잊혀졌는지, <스타메이커>가 왜 단테의 <신곡>에 버금가는 책인지, 오팔 빛을 발하는 임계혼탁이란 무엇인지, 브라이언 그린의 초끈이론은 과연 만물의 이론인지 등등 (내가 여태까지 읽은 과학책 중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은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였다. 너무 재밌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

 

그중에서도 존 데즈먼드 버널이 28세였던 1929년에 출간한 <세상, 육체 그리고 악마 : 이성의 세 적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가 가장 눈에 띈다. 다이슨이 읽은 모든 책 중 최고의 문장으로 시작한다고.

 

두 가지 미래가 있다. 원하는 미래와 운명적 미래.

인간의 이성은 이 둘을 구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인공유기체의 아이디어 (예를 들면 플라스틱을 먹어치우는 유기체), 행성이 아닌 혜성으로의 이주 (이곳에서 나무는 수백킬로미터까지 위로 자랄 수 있다) 등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과학 이야기들이 우주에 떠도는 별처럼 널려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구는 아랍의 위대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오마르 하이얌의 시였다.

 

저 엎어놓은 사발을 하늘이라 부른다.

그 아래 갇혀 우리는 한생을 살다 간다.

하늘을 향해 도움을 구하는 손을 내밀지 말지니,

하늘도 그대와 나처럼 무력하게 돌고 있을 뿐이다.

 

유레카! 하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영문도 모른 채 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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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주변과 중심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프란츠 파농


 

누구에게나 이뤄지지 못한 약속의 땅에 사랑하는 사람을 묻는 일이 한번쯤은 찾아오리라...... 사랑하는 사람을 묻을 땅을 파느라 더러워진 옷, 아니 얼룩진 옷......옷이야 갈아입으면 되지만, 얼룩진 마음은 기억에서 잊혀질지언정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고로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의 마지막 장면, 비행기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소년이 죽은 여동생을 공항 부근에 묻고 돌아오는 장면을 소설가 김연수는 이렇게 썼다.

 

며칠을 이 문장과 함께 살았다. ‘얼룩진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내가 약자의 삶을 선택하면, 일부러얼룩진 옷을 입으면 얻게 되는 인식론적 자원이 있다......하지만 나는 당연히 얼룩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정의로워서가 아니다......얼룩으로 인해 감당해야 할 삶이 있다. 얼룩의 이물감, 분노 조절 실패, 사회적 시선과의 싸움.......

 

평화 혹은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얼룩진옷을 벗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소외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행복보다 괴로움이 안전하다. 행복은 지켜야 하는, 피곤한 것이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36살에 죽은 파농이 27살에 쓴 책이다. 이런 책은 지식만으로 쓰여지지 않는다. 1970년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성의 변증법>25살에 썼듯이 자기 위치성에 대한 정치적 자각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걸작이다.

 

타자를 만지고 느끼며 동시에 그 타자를 내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고정희 시전집1,2, 고정희


 

이 책은 시선집이 아니라 시 전집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전집이 아니라 마치 한국 명시선’ ‘한국 현대 시인선처럼 연애편지에 인용하기 좋은 시부터 신학, 민, 자연에 이르기까지 인생과 시대를 아우르는 주제가 망라돼 있다.

 

섣부른 생각이지만 고정희 같은 인물이 다시 나올까 싶다

시집을 뒤적이다가 <사랑법 첫째>라는 시에 연필을 꽂아 둔다.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하여

내 외로움 짓무른 밤일수록

내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놓습니다

 

이별의 기술, 프랑코 라 세클라.

 

나의 소원은 인류 멸망이다. 내 소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죽사는 모든 사람의 희망일 것이다.

 

시간 차 비극의 제일은 무엇일까. 며칠 전 사랑의 반대말은 사랑이다. 사람들마다 각자 사랑의 개념,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부모 자식 간에 사제 간에 연인 간에 갈등이....” 이런 하나 마나 한 장광설을 늘어놓던 내게 친구가 말했다. “너는 아직도 그러고 사는구나, 사랑은 그런 게 아냐. 사랑한다, 사랑했다. 이게 서로 반대야

 

비극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의 책을 좋아하는데 <이별의 기술>이 그렇다. 이별 와중에 의문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부제는 인류학자가 바라본 만남과 헤어짐의 열 가지 풍경이지만 내용은 이보다 흥미롭고 참혹하다.

 

상대에게 떠난 이유를 따지는 것은 전혀 효과가 없다.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실리 측면에서도 그렇고, 사실 진짜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오하지 않다. ‘피해자에게 관심도 없다.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쪽이 약자가 될 뿐이다. 그들은 단지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들이 될 수 있다.

 

트라우마는 가해자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순간 시작된다.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낸시 홈스트롬

 

살해된 통영 초등생(<한겨레> 2012724일자 1)와 정치학자 이성형 교수의 영면. 두 사건은 내가 사는 세상을 요약하는 듯하다. 충격과 슬픔도 컸지만 열패감이 더했다. , 세상이 세구나.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35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섹슈얼리티, 공공정책, 인종, 군사주의까지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다. 이 책은 내가 접한 페미니즘 입문서 중에서 가장 우수하며 가장 충분하다. 또한 가슴 죄는 명언들이 즐비하다. 여성주의는 양성 평등이 아니라 사회 정의를 위한 것이다.

 

너 자신을 파괴하고 눈에 띄지 말라.”는 사회의 메시지, 아니 협박을 받으며 살아가는 주변인에게 가장 중요한 생존 전략은 자기부정이다. “‘숨자, 살아남으려면 숨자.’ 라고 생각했다. ”

 

파멸이 약자스스로에 의해 저질러진다면 권력자들은 더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들인 우리는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사회는 어려운 조건에 놓인 어린이를 보호하는 데 총력을 쏟아야 하며, 선하고 재능 있는 이가 53살에 세상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약성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성경은 언제나 원본 없는 개정판이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정치적(신화적)해석 말고 표현상으로도 바이블은 없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의 앞 구절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반대하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보복하지 말라, 저항하지 말라, 앙갚음하지 말라, 대적하지 말라 등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나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가 가장 맘에 든다.

 

악의 활동, 피해가 발생하는 시간은 짧다. 그러나 악의 이유를 묻게 되면 영원히 피해자가 된다. “?”라고 질문하는 그 순간부터 피해자 됨의 진정한 의미, 불행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악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피해자의 자아 존중감을 파괴하는 악의 본질이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무관심으로 악의 기능을 중단시키자. 그럼, 누가 악과 싸우나? 그건 악 자신이 할 일이다.

 

성의 변증법, 술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을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대표작, 여성학의 고전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부정의하다

이 책은 그냥 인류의 고전이다.

 

부모 사랑 금기는 오이디푸스/엘렉트라 콤플렉스, 동성애 혐오를 낳았다. 파이어스톤은 이 세 가지 억압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기본 장치이며 가족 폐지를 통한 근친상간 금기의 종식은 성, 계급, 자아 개념을 바꾸는 인류의 혁명을 가져올 것으로 보았다. 현재 가족은 계급 우월과 인생 성패의 기준으로 절대시되고 있다. 가족 제도가 만악의 근원이라거나 인간이 발명한 가장 폭력적인 행위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필요한 것은, 가족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장 인위적인 제도라는 인식이다.

 

세 가지 물음, 톨스토이. 지금 접촉하고 있는 사람


 

며칠 전 어떤 사람이 내게 물었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는 주저 없이 엄마라고 대답했다. 그는 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 나 자신?” “아니면 통찰을 주는 예술가?” 나는 계속 틀렸다. 답은 지금 접촉하고 있는 사람이다. 톨스토이의 우화 <세 가지 물음>에 나오는 질문 중 하나다.

 

톨스토이의 단편은 그의 지혜만큼이나 넘치게 출간되어 있다. 최근 국내 최대 47편을 수록한 책이 나와서 사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 접촉하고 있는책부터 읽기로.

 

경제적 공포, 비비안느 포레스테


 

아직도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들을 만난다. 이 헌신적인 사도들에 대한 내 감상은 세 가지다. ‘, 저 열정이 부럽다.’ ‘천당이 그렇게 좋으면 먼저 가시지’ ‘여기가 지옥인데 뭘 벌써부터 걱정을..’

<경제적 공포 노동의 소멸과 잉여 존재>의 저자 비비안 포레스테는 그의 다른 명저 <고요함의 폭력>에서 이 상황을 요약한다. “지옥은 비어 있고 악마들은 다 여기 있다.”

<경제적 공포><자본론> 이후 가장 많이 팔린 경제학서라고 한다.

 

지금 이 체제에 시너를 부을 것인가? 폭탄을 설치할 것인가? 자폭할 것인가? 필요한 것은 앎이다. ‘무능한 잉여의 유일한 자원은 생각하는 능력뿐이다. 필독을 권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 자녀 교육, 투표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렉 버렌트 외


지금 누군가 이 책을 사고자 한다면 결사적으로 말리겠다.....이런 책을 사려고 망설이는 상태라면 이미 연애가 깨졌거나 시작하지도 않은 것이다. 남자가 신뢰를 준다면 이 책의 존재를 알 리 없다. 책을 읽고 진실을 직면한 치료 효과가 없진 않겠지만, 자신에 대한 분노로 최소 며칠간은 미칠 가능성이 있다.

 

심화학습을 원한다면 자본주의의 고전인 재클린 사스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으면 된다. 자본주의는 사랑과 가족 문제를 여성의 일, 성 역할로 할당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다만, 가장 추잡한 남자는 헤어지면서 좋은 인상으로 기억되고 싶어 희망 고문을 지속하는 자, 두 번째 저질 남자는 거절 못하고 질질 끌면서 여자의 감정과 자원을 착취하는 부류다. 이런 분들은 코끼리에 밟혀 죽어야 한다.’

 

보스턴 결혼 에스터 D. 로스불름 외 엮음, ‘그것


섹스 생활 없는 여성 동성 결혼을 다룬 <보스턴 결혼>을 읽으며 행복해하다가, 새삼 베스트셀러에 문제의식을 품게 되었다. 여성주의나 동성애는 그들에 대한 이슈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담론이다....깊이 있는 지식과 통찰력, 편집, 번역에서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는 책(이 책!)여성’, ‘레즈비언이라는 레터르가 붙어 툭수분야의 서적으로만 여겨진다면, 공동체 전체의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 <보스턴 사람들>에서 유래한 보스턴 결혼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 도시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독립한 여성들 간의 동거 관계를 말한다. 보스턴 결혼은 여성에게 돌봄, 연대감, 로맨스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보스턴 결혼>의 매력과 성취는 인류사 전반에 대한 상상력과 모색에 있다. 로맨틱하고 헌신적이지만 섹스가 필수적이지 않은(asexual) 동성 결혼은, 진부한 질문을 근본적인 질문으로 바꿔놓는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섹스, 금욕, 육아, 친밀성, 가족이란 무엇인가.

 

<보스턴 결혼>에는 지시대명사가 많다. “그것 하기”, “우리가 뭐였든 하여간 그거였을 때, 우리에게 있었던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그 여자는 결코 모를, 그 사람 전부를 알 길”, “소녀가 소녀를 만나고 소녀가 소녀를 잃고, 소녀가 소녀를 얻는다.” 이 책에서 섹스는 그것it’이다. 섹스는 미지의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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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2-27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 님 정말 책을 꼼꼼하게 읽으시는군요.. ㅎㅎㅎㅎ

시이소오 2016-02-27 21:48   좋아요 0 | URL
모르는 책이 너무 많아서 컬쳐 쇼크였거든요^^;
 

 

그런데 90년대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사회주의는 끝났다고 말하던 시기에 저는 이전과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탈구축적인 힘은 노골적으로 전 세계를 신자유주의로 몰아넣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사회주의, 반자본주의를 주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을 유지하게 위해서 입장이나 말을 바꾸어야 했지요. 왜냐하면 상황이 변하면 같은 말이 다른 의미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비평을 트랜스크리틱이라고 부릅니다. 트랙스크리틱이란 항상 이동을 포함하는 비평입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역시 어려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을 것이 뻔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다른 언어로 이를 표현했는데, 그 한 가지 예가 바로 어소시에이셔니즘associationism입니다. p27

 

실존주의자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라고 생각하죠. 즉 이것은 정명제입니다. 구조주의자는 자유는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것처럼 보일 순 있지만 구조에서 벗어나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 이것은 반대명제입니다. 둘 중 어느 쪽이 옳은지를 분명하게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명제 모두 성립하니까요. 그러니까 둘 다 칸트를 뛰어넘은 것이 아닙니다. p30

 

철학자 가운데 자유는 없다는 생각을 취한 사람은 스피노자입니다. 스피노자는 우리들이 무수히 많은 원인에 의해, 즉 자연적 필연에 따라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원인이 너무나도 복잡한 탓에 사람들은 자유라고 착각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자유는 상상물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p31

 

주석10.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유의지 혹은 초월은 표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자연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 따위는 없고, 이는 자기 원인이라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생각하기에 일체는 신=자연 속에 있으며 그 바깥에 전지전능한 신은 없다. 초월적인 신이란 바로 자연을 넘어서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생각하는 인간이 품는 표상에 불과하다.

가라타니 고진, <탐구2>, <윤리학21> p31

 

주석11. 자유에 관한 스피노자의 설명에 대해 가라타니는 아래의 구절을 인용한다. “인간이 자신을 자유롭다고 믿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그러한 의견의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행동은 의식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의 행동의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 그들의 자유의 관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인간의 행위는 의지에 의존한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그것에 관하여 아무런 관념도 갖지 않은 채 하는 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의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의지가 어떻게 신체를 움직이는지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에티카> [정리 35의 주해] p31

 

마르크스나 프로이트도 이와 같은 스피노자 계통의 사상가입니다.

 

저는 이런 스피노자의 결정론을 바탕에 두고 칸트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칸트의 사유가 가장 근본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칸트는 자유가 도덕적인 영역에만 있다고 말합니다. 의무를 다함으로써 사람은 자유로워진다고 말하죠.

 

일반적으로 사람은 의무를 다하는 일이 어째서 자유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칸트를 비난합니다. 이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결책을 내놓은 사람은 저뿐입니다. 제 생각에 자유로워라라는 명령에 따를 때에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자유는 그와 같은 명령에서 오는 것이며 그 외에 자유는 없습니다.

 

칸트에 있어서 도덕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자유는 일반적인 의미의 자유와는 다릅니다. 칸트에게 자유는 순수하게 자기 원인적인 것, 자발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같은 말입니다. 편의상 도덕과 윤리를 구별해서 설명해보죠. 도덕은 공동체의 규범이고 윤리는 자유와 관련된 것입니다.

 

도덕은 공동체의 규범입니다. 칸트는 이처럼 공동체의 규범을 따르는 것은 타율적인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도덕을 개인의 행복이나 이익의 문제로 여기는 공리주의입니다. 이조차도 칸트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연적 본능에 지배당하는 타율적인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윤리는 이와는 다른 자유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방금 말했듯이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따른다는 것, 그리고 타인 역시 자유로운 존재로 대하는 것,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명령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유는 책임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 자신의 자유에 의한 것이었다고 받아들이는 것, 즉 책임을 지는 일입니다.

 

자본주의는 단순하게 말하면 상대를 수단으로서만 취급하는시스템입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란 상대를 수단으로서만 취급하는 것을 자유롭게해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칸트는 오히려 공적사적이라는 가치부여 그 자체를 전도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공적이라고 하면 고상하고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사적인 차원이야말로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 점에 관해서 일본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데모 따위를 해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데모가 발생했지요. 이것은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이는 젊은 사람들이 일으킨 것이겠죠. 인간은 아무리 설득해도 움직이지 않지만, 구조적인 원인이 명백해지면 급격하게 움직이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주체의 욕망은 무엇일까요? 이를 그 용어 자체로 정의내리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조금 더 말해보자면, 타인의 욕망이 벗겨진 뒤에 드러나는 것, 즉 남겨진 주체의 욕망이라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소비하려는 욕망은 타인의 욕망입니다만, 이것이 사라진다고 해서 주체의 욕망까지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주체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 사라질 때라야 비로소 스스로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질문에서 언급한 바디우의 사랑 개념도 그렇습니다. 타인의 욕망이 사라진다고 해서 사랑도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가 되어야 진정한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환양식에는 A: 증여 답례 같은 상호부조적 공동체의 호수성의 원리, B : 약탈 재분배 같은 국가의 지배와 보호의 원리, C : 상품 교환이라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합의에 기초한 화폐소유자와 상품소유자와의 교환 원리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D는 어떤 의미에서 A를 고차원에서 회복한 것 혹은 상상적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모습을 이루게 된 근대자본제 사회에서는 교환양식 C가 지배적입니다. 그렇지만 앞서와 마찬가지로 교환양식 AB도 각기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세계 = 경제, 즉 근대세계시스템입니다.

 

저는 특별히 오늘날의 이 시스템을 자본 =네이션=국가라는 접합체로 봅니다. 그리고 저의 과제는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각기 다른 교환양식의 기원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자본 =네이션=국가 체제를 넘어선 사회가 있는데 이는 교환양식 D가 지배적인 사회구성체입니다. 칸트도 이런 사회를 생각했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봉건 노예는 소비자가 아니지만, 프롤레타리아는 소비자입니다.

 

데마고그 :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시민과 민중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데마고고스를 어원으로 하는 데마고그는 그 당시에는 비난의 의미로 쓰이진 않았지만, 현대에 들어 대중의 감정과 편견에 호소하여 권력을 취하려는 선동적인 정치가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사실과 다른 내용을 허위선전하는 행위를 데마고기 혹은 데마라고 한다. 이런 데마고기에 능숙했던 대표적 인 인물이 아돌프 히틀러이다.

 

다중 :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주장한 개념으로 단순히 많은 수의 일반인들을 지칭하는 대중과 다르며, 동일한 목적의식의 상대인 민중과도 구분된다. 다중은 각자의 정체성을 가지며 개별적으로 행동하며, 특정한 사안에 동의할 때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공동으로 행동한다. 여기에는 영원성의 관점에서 보는 존재론적 차원과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역사적 차원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존재론 적 차원의 다중은 역사적 힘들의 복합적 상호작용에서 이성과 열정을 통해 자유를 창조하는 존재이다. 두 번째 차원인 역사적 다중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다중이다. 제국의 출현 조건들을 토대로 해서 다중을 발생시키려면 하나의 정치적 기획이 필요하다.

 

그런데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다중의 개념에 반대하며, 이에 대한 몇 가지 근거를 들고 있다. 그중 하나가 분열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의 세계적 반란이라는 비전을 내놓았지만 그러한 대항 운동은 세계적인 연대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다중>,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세계공화국은 인간의 이념이나 선의에 의해 실현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반사회적 사회성 즉, 전쟁에 의해 실현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군비를 포기하는 것이 곧 증여입니다.

 

구성적 이념과 규제적 이념 : 구성적 이념은 현실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이념을 말한다. 이는 건물의 설계도와 같다. 반면에 규제적 이념은 현실에서 실현될 수는 없지만 하나의 이상향으로 현실을 비판할 근거가 되는 이념이다. 말하자면 유토피아와 같은 개념이다.

 

저는 세계 전쟁이 임박했다고 생각합니다......확실히 자본주의는 끝을 맞이하게 될 테지만, 엄청난 피해와 희생자들을 수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막는 것이 핵심입니다. 다가오는 전쟁에 대항하는 운동은 앞으로 교환양식 D를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청일전쟁 때 일본에게 패한 이후 강유위라는 사상가가 등장합니다. 그의 사상은 대동사회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즉 대동사회란 유교에서 유래한 것인데, 중국에서는 이를 많이 무시했지요. 하지만 앞으로는 강유위의 이러한 사상이 큰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국과 제국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제국은 근대 이전 광역국가의 형태입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라는 하나의 제국이 있었고 그 주변의 여러 나라들은 조공을 바치는 관계로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이 조공은 실제로는 중국 왕조 측의 답례가 더 많은 호수적 교환 관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제국은 이러한 교환으로 평화체제를 구축하려 했지요.

 

이에 비해 제국주의는 근대의 네이션 =스테이트가 확장되어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제국주의적 지배의 본질은 상대를 직접적으로 수탈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자유로운 교환을 통해서 수탈하는데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관세권을 빼앗는 것, 혹은 강제적인 자유무역 등이 그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신자유주의라고 부릅니다.

 

제가 봤을 때 각각은 거의 60년 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세계사는 120년마다 비슷하게 진행된다는 논의가 도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에 일어날 세계 전쟁을 막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일어날 전쟁은 자본과 국가가 생존을 위해 일으키는 것이니까 그것을 막는 것은 곧 자본과 국가의 연명을 저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평화 운동과 혁명 운동은 별개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칸트가 말하는 영구평화와 마찬가지로 국가 간의 적대성이 없어진 상태, 즉 국가가 지양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세계동시혁명입니다.

 

미국이 물러서지 않으면 동아시아의 재구축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뒤집어 보면 미국은 그 점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중국과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반미 운동을 하는 것만으로는 미국을 아시아에서 내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동아시아에서 미국 이외에 전쟁의 위기를 초래하는 요소는 없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상태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남북의 대립을 해소하는 것은 동아시아 전체로 보았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 마호메드의 후계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 대립에서, 마호메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만이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한 분파가 시아파’, 알리 외에도 여러 명을 후계자로 인정한 것이 수니파이다. 수니파가 코란해석과 마호메트의 말을 전적으로 중시한다면, 시아파는 알리와 그 후선들의 코란해석을 신봉한다.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과 이라크 등의 국가에서 종교 지도자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세계 무슬림의 85%는 수니파이며, 15%의 시아파 대부분은 이란과 이라크에 집중해 있다.

 

고든 차일드가 주장한 농업혁명입니다. 농업을 시작하고 농업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정주하고, 계급이 생겨나며,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견해입니다. 저는 이것과 반대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농업혁명이나 신석기혁명이 아니라 정주혁명이라고 부릅니다. 본격적인 농경이나 목축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인간은 정주하고 있었습니다. 농업은 정주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농업에서 국가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국가로부터 농업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요.

 

지금의 터키에 해당하는 이오니아라는 지방의 자연철학이 제가 생각하는 철학의 기원입니다. 이 지방의 폴리스에는 그리스의 다수자 지배 원리인 데모크라시와는 다른, ‘이소노미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동등자 지배라고 하기도 하지만,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이는 지배가 없다는 말입니다. 당시 아테네에 있었던 것은 데모크라시입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이소노미아에서는 자유와 평등이 상반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소노미아에서는 그곳이 싫어지거나 문제가 생기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토지가 없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땅에서 노예나 노동자로 일하기보다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자유와 평등이 부딪치지 않습니다. 이동해버리면 그만이니까요.

 

레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전쟁이나 재해의 무질서 위에서만 새로운 길로 갈 수 있는 용기가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폐허나 파국에 의해서만 국가에 의한 질서와는 다른 자생적인 질서를 가진 상호부조적 공동체가 등장한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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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중심 - 가리타니 고진 인터뷰 궁리 공동선 총서 3
가라타니 고진 지음, 인디고 연구소 기획 / 궁리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저는 세계 전쟁이 임박했다고 생각합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이다. (나 역시 동감이다.) 그는 왜 전쟁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전쟁이 임박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가라타니는 문학평론가 아니었던가. 그랬었는데......이젠 노암 촘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본을 대표하는 전 세계적인 사상가, 혹은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본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가와 데마고기들, 어용 지식인들은 신자유주의를 옹호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전 세계적인 비극만큼이나 진부한 주제도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재를 공위의 시대라고 말했다. 기존의 가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새로운 가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전 세계 99% 인류를 불행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를 갈아엎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뭘로? 어떻게?

 

가라타니 고진의 대안은 세계공화국이다. 이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냐고!! 그의 주장을 듣다보면 마냥 황당하지만도 않다. (규정적 이념이라고 한 발 물러선 듯 보이지만) 그는 우리가 노동자이면서 한편으로 소비자임에 주목한다. 즉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에 초점을 맞췄다면 가라타니 고진은 교환에 초점을 맞춘다.

 

박노자의 대안이 자비라면 가라타니 고진의 대안은 증여.

고진의 분석에 따르면 네 가지 교환 방식이 있다. 교환방식A는 증여와 답례라는 호수적 교환이다. 그는 마르셀 모스를 언급하진 않았지만 다분히 모스의 증여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이러한 포틀래치고차원적으로 회복한 것이 교환방식D.

 

세계공화국은 국가 간의 연합으로 증여의 관계를 맺는다. 코스타리카처럼 전쟁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 세계동시혁명이란 이러한 증여를 모든 국가들이 공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120년 전 동아시아에선 청일 전쟁이 있었다. 고진의 주장에 따르면 역사는 120년마다 순환한다. 전쟁의 징후는 널리고도 널렸다. 전쟁이 임박해있다. 빠르면 2018년 말에서 2019년 초쯤이 되지 않을까. 전쟁은 이명박 때 이미 기획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허락 없이 절대로 평화헌법 9조를 철폐할 수가 없다.

 

고진은 어쩌면 세계공화국으로 가기 위해선 전쟁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혹은 이미 전쟁을 막기엔 늦었다고 생각하는지도.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한국에서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됐을 때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할까. 개성공단 철수도 이미 계획되었던 것일까.

 

전쟁을 막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단초가 있다면 내게는 교환양식D.

하나의 플랫폼을 상상하고 있을 때 그의 책은 내게는 마치 계시와도 같았다.

 

고진을 따라 나 역시 규정적 이념이라고만 해두자. 하나의 플랫폼을 상상한다. 이곳은 일종의 인터넷 시장 혹은 쇼핑몰이다. 만일 한 명의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의 어떤 활동을 보고 좋아요를 누를 때 사이트에서만 통용되는 가상의 화폐를 받는다고 가정해본다. 예를 들면 좋아요한 번은 천원의 가치를 지닌다. 만일 이렇게 받은 좋아요로 쌀과 생필품을 살 수 있다면? (필수품만을 살 수 있다. 아무리 좋아요를 많이 받는다한들 람보니기니를 살 순 없다)

누가 돈을 댈 것인가? 국가의 보조금. 혹은 기업의 광고비로.

 

만일 이 플랫폼이 가능하다면 전 세계인 중 그 누구도 굶어죽지 않을 텐데.

과연 이게 가능한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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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빠 2016-02-27 1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진을 좋아하는데 시이소오님 리뷰를 보니 고진이 더 좋아지네요

시이소오 2016-02-27 11:32   좋아요 2 | URL
고진도 전작에 도전해 봐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