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오에 겐자부로 <읽는 인간>에 언급된 책들을 추려본다.

읽어가겠다. 

 

첫 타자는. 아마르티아 센.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에 대해 냉철한 비판을 가한 경제학자.

 

<불평등의 재검토>, <센코노믹스, 인간의 행복에 말을 거는 경제학>, <자유로서의 발전>



 













시몬 베유. 34세에 급성폐결핵 및 영양실조로 숨을 거두었다는데

방대한 양이라니, 도대체 언제부터 글을 쓴 것인지 

 

<중력과 은총>, <시몬느 베유의 불꽃의 여자>, <시몬 베유 노동일지>, <신을 기다리며>



 

















에드워드 사이드.

 

<바렌보임/사이드 음악과 사회> - <평행과 역설>

<지식인의 표상>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지성의 거장>, <문화와 제국주의>, <에드워드 사이드>

 

 


























윌리엄 블레이크.


 

                            












<Blake and Tradition>, Kathleen Raine

<Narrative Unbound>

<Blake Studies : Essays on His Life and Works>, Geoffrey Keynes.

 

맬컴 라우리.














 

더글러스 데이, <맬컴 라우리 평전>

<화산 아래서> <샘으로 가는 숲길>

 

단테.
















<단테 더 메이커>, 윌리엄 앤더슨

<Dante : the poetics of Conversion>, 

존 프레체로, 연옥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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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3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3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3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2-13 11:27   좋아요 2 | URL
그래서 제가 마인드컨트롤을 해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책은 지금 읽고 있는 책이다˝ ㅋㅋ

책읽는나무 2016-02-13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는 인간`에 나온 책들인가요?
음~~~제가 아직 `읽는 인간`을 읽지 못하고 주저하는 이유입니다
저책들을 먼저 읽고 읽어야 하는 것인지?`읽는 인간`을 먼저 읽고 저책들을 읽고 다시 `읽는 인간`을 다시 읽어야 하는 것인지?
어떤 순서가 맞을까요?^^

시이소오 2016-02-13 13:34   좋아요 1 | URL
아, 그냥 읽으셔도 무방할거에요. 읽는 인간 먼저 읽으시고 관심가는 다른 책이 있다면 그때 읽으셔도. 일단은 읽는 인간을 읽으시길^^

비연 2016-03-23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어요, <읽는 인간>. 오에 겐자부로가 얘기하는 책들 중에서 에드워드 사이드와 다니엘 바렌보임의 대담집... 읽어보고 싶더라구요.

시이소오 2016-03-23 17:03   좋아요 0 | URL
저도 사이드 책 더 읽어보고 싶어요^^
 
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허클베리 핀>의 이 한 문장이 한 소년을 노벨문학상 작가로 만들 줄이야! (, 나도 소년 시절 허클베리 핀을 읽었건만...... 안 읽었나?)

 

소년 오에는 그렇게 살기로 결단했고 노년의 오에는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책이여, 안녕!’이라고 말할 만한 노년의 오에는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준 인생의 책들을 회고한다.

 

허클베리 핀,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 포 시집, 오든 시집, 엘리엇 시집, 에드워드 사이드, 시몬 베유, 블레이크, 맬컴 라우리, 플라톤, 단테의 <신곡> 등등.

 

얼마 전 엘리엇의 <네 개의 사중주>에 꽂혀 있었는데 오에 겐자부로도 좋아했다니 반가웠다.

보르헤스도 여러 나라의 언어로 <신곡>을 읽었다고 하는데, 신곡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 그러고 보면 <신곡>청소년 권장 도서라기 보단 노년 권장 도서가 아닐는지.

 

작고한 영화감독 이타미 주조와 처남, 매제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릴 적부터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인 줄은 전혀 몰랐다. 랭보를 이타미 주조에게 배웠다니! 오에가 싱클레어라면 이타미 주조가 데미안이었던 셈. 그는 이타미 주조의 영향으로 수상한 이인조식 소설을 써왔다고 한다. 비평가는 이러한 이인조의 원형으로 사무엘 베케트를 언급하지만, 베케트보다는 헤세에 더 가깝지 않을까. ‘수상한 이인조문학은 실은 문학의 시초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기원전 3000년 경, <길가메시 서사시>의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그 원형이므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소년 오에에게 이타미주조였다면

노년의 오에 에게는 에드워드 사이드다.

(이럴 수가, 에드워드 사이드 책을 단 한권도 안 읽다니!!)

 

권력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는 에드워드 사이드와 마찬가지로 오에 역시 인권을 침해하는 권력에 날을 세운다. 오에는 천황의 문화훈장을 거부했다. (대통령 표창이라고 하면 한국 지식인들은 너도 나도 받으려고 야단법석이었을 텐데. 경제학자라고 우기는 공 모씨 같은 이들은 환장했을테지.)

 

금수와도 같은, 말라리아 같은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에게 (기생충이라고 표현하면 안 된다. 서민 박사의 책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기생충에 대한 모욕이다.) 책을 읽혀야 한다.

 

신곡을 권하고 싶다.

 

너희는 짐승처럼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덕과 지식을 구하기 위해 태어났다.”

 

 

밑줄 그은 문장

p14. 몸도 마음도 얼어붙게 만드는 궤주의 반려, ‘공황에 빠져 용맹하기로 이름난 군사들마저도 견디기 힘든 비탄에 젖어서 의욕을 잃었으니

 

p16. 그리고 센 씨는 엘리엇이 <네 개의 사중주> 세 번째 시 <더 드라이 샐비지즈>에서 크리슈나를 지지하고 있음을 덧붙입니다. 엘리엇은 이 시에서 분명 전투를 계속하는 쪽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Fair well(무사하기를)”이라 하지 않고, “Fair forward(나아가라)”라고 하지요. “나아가라, 항해자여!”라고 말입니다. fare여행하다, 나아가다라는 뜻의 옛말입니다.

 

P20. 나는 숨을 죽이고 일 분간 가만히 생각했다. 그러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 - 그렇게 말하고는 그 종잇조각을 찢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생각인 동시에,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말한 대로 행하고 있다. 그 마음을 바꾸려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당시 웬만해서는 손에 넣기 힘들던 공책을 구해서, 첫 페이지에 그 문장을 적었습니다. 문장 주변에 장식을 두르고는,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 지금껏 이걸 원칙으로 살아온 듯합니다. 사실 우왕좌왕할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런 마음가짐을 지녀왔습니다.

 

p23. <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에 제가 붉은색으로 선을 그어둔 부분 중 하나를 인용하겠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책의 내용과 저자의 말투를 알아채시리라 믿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난제들 가운데 어떤 것에도 답할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아무리 해도 포기할 수 없는 편견은, 르네상스기에 인간이 회복한 자유 검토 정신인 휴머니즘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으며, 이를 올바로 발전시켜나감으로써 필연적 통제주의마저 불관용과 기계화, 비인간화에서 벗어나 인간의 것이 될 기회를 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생각이 신중세로부터 거부당한 케케묵은 태도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p52. 그렇다면 과거의 파토스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야. 이미 지나간 것으로서의 과거 말이지. 경의를 표하고, 격찬하고 중시하는 것은 그것이 이미 지나간 것이기 때문이야. 그걸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갱신해서 현대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뭘 이야기하고 싶은지 알겠나? 역사에는 무자비한 측면이 있어서 인간의 경험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지. 어떤 것들은 결코 돌이킬 수 없어. 그것은 과거에 속한 것이니.

 

p56. 지금 자신이 있는 곳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열렬히 환영하는 가톨릭다운 환경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저는 어느 하나의 환경 속에 받아들여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바라지 않는다는 말만으로 제 기분을 제대로 표현했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쉽고 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다면 저도 바라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런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기분이 듭니다. 저는 혼자이고, 예외 없이 어떠한 인간적 환경과도 인연이 없는, 추방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제게 필요하며, 또한 그런 부름을 받았다는 기분이 듭니다......

 

p68. 그것은 3년마다 읽고 싶은 대상을 새로 골라서 그 작가, 시인, 사상가를 집중해서 읽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말이죠, 자기가 읽어온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아울러 자신의 새로운 언어 감각을 발견하게 됩니다.

 

p82. 이렇듯 외국어 책을 읽는 것과 일본어 소설을 쓰는 것이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여운을 남깁니다. 어떤 소설의 근본적인 톤, 음악으로 보자면 선율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문체라고 부릅니다. 소설의 스타일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며, ‘grief’라는 작은 단어 하나에서 문장으로, 이어서 작품 전체로 전개됩니다. 나아가 한 사람의 소설가가 지닌 인간을 바라보는 견해, 사고방식,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자세와도 이어지는 것이죠. 그것이 문체이며, 결국 우리는 이것을 읽어내기 위해 소설을 읽고 소설로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p122. 그리스어로 아남네시스anamnesis’상기하다’, 떠올리다, 생각해내다라는 뜻인데요. 이 아남네시스라는 것이 오늘날 세계에서 우리를 자기도 모르는 아름다움, 올바름으로 이끌어준다는 플라톤의 널리 알려진 철학을 다뤘습니다.

 

처음 기 형은 신약성서 <마태 복음>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워라. 그 가지가 부드러워져 싹이 트면 여름이 다가옴을 알리니라는 구절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편지에 씁니다. “나뭇가지가 부드러워진다는 부분은 실제로 깊은 숲 속 나무에 둘러싸여 사는 내게 중요하게 다가왔다하여 이번에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를 다시 읽게 되었다는 내용이 이어지지요.

 

옛날 우리는 천사처럼 하늘을 날았고, 지금도 우리는 가끔씩 새의 날개가 돋는 부분, 어깻죽지 부근이 근질근질하다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기 형은 아까 말한 무화과나무에 대한 성서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나뭇가지에서 싹이 나는 계절, 작은 가지가 돋아나기 직전에 무화과나무를 보면, 아주 약간 부풀어 있고 부푼 부분을 눌러보면 부드럽다고 합니다. 식물이 새로 잎을 낼 때에는 딱딱한 나무 살결이 부드러워지고, 조금 부풀어 오릅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도, 영혼도, 거기서 뭔가 새로운 것이 싹트려 할 땐 약간 부풀어 오르면서 부드러워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새로 움트는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플라톤은 말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내 안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움트려 하면서, 몸과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있는 듯하다. 나는 지금 완전히 새로운, 따라서 대단히 위험할 수도 있을 일을 하고자 한다.

 

124. 그 가운데 하나가 <토성 아래서>라는 시입니다. “지금 내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해서 상실한 사랑에 대한 기억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라 생각하지는 말아다오. 그게 아니라 나는, 이제 더는 젊은 날을 경험할 수 없다는, 바로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p134. 인생의 중반기에 올바른 길을 잃고 헤매던 나는, 어느 어두운 숲 속 가운데 있었다.

 

p136. 네가 올라가 저들 옆으로 가기 원한다면 그곳에 나보다 더 나은 영혼이 있으리라. 우리는 헤어질 때가 왔으니 너를 여기에 두고 가겠다.

 

p151. 조금이나마 너희 마음에 합당하다 싶으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너희 중 하나가 가르쳐다오. 너희는 정처도 없이 어디를 헤매다 죽었느냐.

 

p152. 너희는 짐승처럼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덕과 지식을 구하기 위해 태어났다.

 

p174.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기까지 하지만 서로 미워하는 듯도 한, 어쨌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인조가 오에의 소설에는 등장한다.” 고 제임슨은 말합니다. 이러한 이인조에는 원형이 있다고 하면서, 그는 사무엘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인용했어요. 베케트가 생애 최후에 쓴 소설 삼부작 <몰로이>, <말론 죽다>,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입니다.

 

p183. 그리하여 그곳을 나와 다시 하늘의 별을 우러렀다.

 

p186. 그 단편은 이토 시즈오라는 시인의 시를 인용하는 것에세 시작합니다.

 

나의 영혼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다.

그 증거를 나는 너에게 이야기하겠다.

 

p190. ‘나의 영혼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의 영혼은 기억한다.

 

p193. s 씨에 따르면, 시인은 영혼의 자발성을 믿지 않고, 영혼이 말하자면 악기처럼 외부에서 오는 울림이라고 생각했다 한다. (중략) 자체적인 힘에 의해 자기 안으로부터 노래를 발산하는 나의 영혼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악기가 되어 울리기 시작한 노래를 나의 영혼은 기억한다.......

 

p204. 또한 죽은 자들이 살아 있을 때에

말로 꺼내지 않은 것을

죽은 뒤에는 말할 수 있다.

죽은 자들의 전달은 살아 있다

인간의 언어를 초월하여 불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p224. 그는 지식인의 역할이 사회 속에서 어떤 특권도 지니지 않는 아마추어로서 권력을 비판하는 움직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지식인의 표상>을 읽어본 분들은 잘 아시겠지요.

 

p230. 본질적으로 보자면, 고향 상실의 주변인으로 언제까지나 권력을 향한 비판을 멈추지 않는 사이드가, 예를 들어 이슬라엘 지식인으로 안주한 작가 아모스 오즈에 비하면 분명히 유대계 지식인다운 특성을 지녔으며, 나는 그러한 최후의 인간이라 할 수도 있다라고 한 건 사이드다운 유머이면서 아울러 그의 진심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p231. 사이드는 아도르노에 대하여라고 주석을 달아 말합니다.

 

만년성은 받아들여지는 것이나 정상적인 것을 뛰어넘어, 그 너머에서 계속해서 살아나가겠다는 사싱이다. 아울러 만년성은 인간이 만년성을 뛰어넘고, 인간이 이를 초월해 거기서 탈피하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아도르노는 베토벤이 화해 불가능한 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화해시키는 것을 거부했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사이드 자신의 음악과 세계에 대해 몇 번이고 똑똑히 들었던 음성입니다.

 

내가 아도르노 안에서 발견하는 중요한 부분은 이런 긴장감에 대한 고찰, 내가 화해시키기 어려운 것이라 부르는 부분에 강렬한 빛을 비추어 극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고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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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환희 2016-02-13 08: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어쩜 이렇게 잘 쓰시는지요 ^^ 글쓰시는 분같아요 ^^

시이소오 2016-02-13 08:41   좋아요 1 | URL
허걱 그런 칭찬 처음 들어요. 환희의 도가니!! 감사합니다. 잘 쓰도록 해 볼게요^^
 
비굴의 시대 -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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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한국학 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당시의 러시아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역사에는 공포스러운 장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재처럼 이렇게 더러운 시대는 .......아마도 처음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그렇다. 이렇게 더러운 시대는 없었다. 국가는 잔학해지고 개인은 점점 더 비굴해지고 있다. 기득권에 기생하기 위해 대다수 지식인들이 침묵을 선택한 것과 달리 러시아의 아들박노자는 한국 현실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서슴치 않고 해왔다. 그의 비판이 소중한 것은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화한 파쇼적 아비투스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박노자는 박근혜 정권을 파쇼의 부활로 본다. 히틀러 독재가 대중 독재였듯 오늘날 대한민국은 파쇼 대중을 기반으로 한 파쇼 정권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을 해산시키는 걸 보고나 들은 적이 있나? ‘도살자박정희도 전두환도 정당을 해산시킨 적은 없다. 박노자 말대로 편집증 정권, 미친 정권이다. 오죽하면 보수적인 불교, 천주교, 개신교등 종교계가 손잡고 대통령 사퇴를 부르짖었겠는가?

 

박노자의 말대로 공포를 먹고 사는 사회가 지옥이라면 대한민국은 무간지옥이다. 예전에 리뷰를 썼던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 대해 어떤 이가 반박의 글을 올렸다. 책을 제대로 이해못했다고? 핑커의 책은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의 지력만 있다면 누구나 이해가능하다. 핑커의 주장은 한 마디로 유사이래 폭력이 감소해왔다는 거다. 박노자는 뭐라고 했을까?

 

핑커의 주장과 달리 우리 사회에서 폭력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 주된 폭력의 형태는 자본의 횡포, 이른바 갑질이다. ‘은 파견 업체를 통해서 1년 계약의 비정규직을 모집해서 정규직과 같은 라인에서 일하게 한다.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동일하거나 오히려 더 힘든 일을 한다. 그들이 비정규직 보호법에 의거해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기만 하면 갑은 바로 계약을 해지하고 그들을 내보낸다. 직장이외에는 사실상 어떤 복지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실업 수당을 최장 10개월간 받고 나면 그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갑의 이러한 횡포는 그 자체가 폭력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초적인 정의를 짓밟는 강자의 부당 대우는 바로 광의의 폭력에 속하지 않을까?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핑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우리 사회는 비폭력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패악질이 누적됨에 따라 더 더욱 폭력화되고 있다.

 

그렇다고 물리적 폭력이 없어진 것도 아니다. 희방버스 참석자들은 용역깡패에 의해 머리가 깨지고 송경동 시인은 갈비뼈가 부러져 나갔다.

 

국가폭력은 개인의 폭력을 내면화시키는 걸까. 윤일병 살인 사건, 김해 여고생 사건을 보면 대한민국은 괴물제작소. 김해 여고생 사건에서 가해자들은 성매매 강요, 폭행, 고문에 이어 시신에 휘발유를 붓고 시멘트로 암매장했다.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힘든 네팔, 이집트, 아르메니아, 시리아 등의 국민들은 왜 우리처럼 자살하지 않는 걸까.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에서 말했듯 돈이 없고 지위가 낮을수록 생명의 가치는 제로에 가까워진다. 세월호 사건은 기업과 국가가 공모한 대량 살인 사건이다.

 

미쳐가는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핑커의 말이 맞다고 아득바득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연해진다. 대한민국에서 인간답게 사는 길이 있을까. 박노자의 처방이다.

 

믿지 말라, 무조건 따르지 말라, 동류를 찾으라.

 

우리는 당장 체제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지만 체제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가질 필요가 있다. 또한 체제가 강요하는 사회화 과정을 거부한다면 체체의 보복이 뒤따른다. 박노자는 우선은 체제 안에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도록 노력하라고 말한다. 부모의 말에 따라 명문대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존중할 수 있는 학과를 선택하라. 그리고 동류를 찾으라고. 온건 사회주의자가 되든 급진 아나키스트가 되든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느낌이야 말로 중요하다고.

 

나는 좌, 우파 프레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국의 좌파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보수는 보수가 아니다. 나의 모든 척도는 만인의 인권이다. 인간답게 살 권리 말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인간답게 살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인가? 각자가 생명으로서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박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각자도생의 시대에는 사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란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 수백만 년 동안 군중 동물로 살아온 인간이 남을 짓밟고서 혼자서만 누리는 생존과 번영에 진정 행복할 수는 없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아무리 표면적으로 성공해도 이 체제와 시대가 각자에게 남기는 것은 내면의 파멸과 고통일 뿐이다.

 

인간이면 남의 고통을 진지하게 보고 이해하는 순간 자비심을 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운명이 그 자비심을 실천할 기회를 줄 것이다. 각자도생 시대의 적자생존이니 약자 도태니 하는 코드에 역류할 수 있는 심층적 집단 심성이란 결국 자비심밖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혁명적 실천의 원천이다. 파웰 코르차긴의 말대로 내 모든 생명과 정력을 다해 그것을 실천한다면 죽는 순간에는 그래도 덜 부끄럽지 않을까?


-2015. 5. 27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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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오징어 2016-02-12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자에겐 한없이 약하고 약자에겐 더없이 강한 꼰대들이 판치는 시대죠..

시이소오 2016-02-12 21:14   좋아요 0 | URL
적어도 꼰대는 안되도록 살아야되겠어요 ^^
 
강희대제 12 - 얼웨허 역사소설, 전면 개정판 제왕삼부곡 1
얼웨허 지음, 홍순도 옮김 / 더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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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잉은 또 다시 태자에서 폐위된다. 강희는 열셋째 황자 윤상마저 가두도록 어명을 내린다. 윤상을 가두도록 한 조치는 윤상을 벌하기 위해서라기보단 보호하기 위한 강희의 배려였다. 태자당의 관리들도 극형에 처해졌다. 윤잉에게 직언을 고했던 주천보와 진가유 역시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즉사한다. 강희는 황자들에게 더 이상 태자를 두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강희 57년 청나라 군은 객라오소에서 준갈이 병사들에게 전멸 당한다. 이에 강희는 열넷째를 사령관으로 임명해 변방으로 보낸다.

 

윤진은 7년 만에 연금중인 윤상을 방문한다. 윤진은 윤상으로부터 정춘화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윤잉 역시 윤상처럼 연금중이었다. 윤잉은 바깥 소식을 듣기위해 태의를 만날 목적으로 일부러 감기에 걸린다. 윤잉은 하태의에게 쪽지를 능보에게 건네주라고 명한다. 그러나, 쪽지는 윤진에게 들통난다. 법대로라면 하태의는 능지처참을 면치 못한다. 윤진은 하태의가 태감들에게 돈과 술을 사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한다.

 

윤진은 성음과 걷던 중 어디선가 들어본 노랫소리에 이끌려 오씨의 찻집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원래는 가흥루라는 간판을 걸고 물장사를 하던 곳이었으나 취고의 자살 이후 찻집으로 바뀌었다. 노래하는 여자는 정춘화였다. 윤진은 정춘화를 데리고 찻집을 나서다 자객들과 마주친다. 예전의 이름이 파란원숭이였던 성음은 가볍게 자객들을 제압하지만 윤진이 난처해질까 우려해 생포하지는 않는다.

 

강희는 황자들을 모아놓고 윤잉에게 쪽지 사건의 내막을 추궁한다. 강희는 윤잉을 함안궁에서 상서원으로 옮겨 연금시킨다.

 

강희는 어원으로 방포와 장정옥을 불러 유조를 쓸 계획을 말하며 더불어 후계자를 논의한다. 방포는 셋째나 여덟째를, 장정옥은 넷째를 후계자 후보로 꼽는다. 옥신각신 끝에 어머니가 같은 넷째와 열넷째가 후계자로 지목된다. 장정옥은 넷째와 열넷째 중에서 황손을 염두해 둘 것을 간언한다. 강희는 넷째 윤진의 아들 홍력을 떠올린다.

 

대장군왕 윤재가 갈이단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한다. 윤진은 후방에서 군량미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강희의 건강을 우려해 강희에겐 말하지 않는다. 강희는 강희대로 이미 전방을 지원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해놓고 있었다.

 

윤진은 왕섬을 통해 자신의 집에 첩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넷째의 참모들을 통해 연갱요가 여덟째 밑으로 들어갔다는 것도. 여덟째가 연갱요를 끌어들인 것은 열넷째가 다른 마음을 품을 시 연갱요가 주둔하고 있는 서안에서 열넷째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첩자는 윤진의 집사인 고복으로 밝혀진다. 윤진은 자신의 노비 신분인 연갱요와 가노들을 모아 놓고 눈 산을 만들어 고복을 눈 속에 집어넣어 얼려 죽인다.

 

여덟째의 측근인 악륜대가 열넷째 곁에서 여덟째에게로 전갈을 갖고 온다. 악륜대는 천수연(궁중 최대 규모의 어선 상차림)을 보고 싶다고 하나 여덟째는 빨리 열넷째 곁으로 돌아가라고 재촉한다. 반면 윤진은 악륜대에게 푹 쉬고 봄에 전장으로 갈 것을 제안한다.

 

강희는 즉위 60년 경축 잔치에 원로들을 초청한다. 강희는 무단, 고사기, 방포, 이광지, 봉지기, 팽학인 등 원로 대신들을 보며 회환에 젖는다. 무단은 강희에게 위동정이 죽음을 감추고 병상에 있다고 둘러댔으나 열째 윤아는 일부러 위동정의 죽음을 강희에게 넌지시 알린다.

 

윤아의 예상대로 강희는 위동정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다. 강희는 자신의 죽음 이후 측근들이 화를 입을까 우려해 왕섬, 마제, 장정옥 등을 경질시킨다.

 

강희는 죽음을 앞두고 황자들을 불러 넷째 윤진을 후계자로 삼았음을 공표한다. 여덟째는 밖으로 나가 외부와 연락하려고 하나 무단이 막아선다. 넷째는 열셋째를 연금에서 풀어주는 지의를 전달하고 반란에 대비한다. 아란은 교소천과 함께 극약을 넣은 술을 마시고 죽음을 택한다.

 

윤상은 풍대진으로 가 군대를 장악한다. 여덟째 밑의 성문운은 강희가 기거하던 창춘원을 습격하려 준비중이었으나 윤상의 명령에 의해 악륜대에 의해 목이 잘린다. 윤상은 군대를 이끌고 창춘원으로 가 강희의 임종을 보고 오열한다.

 

황자들은 유조를 듣고도 열넷째가 후계자라고 우긴다. 이에 융과다는 전위유조를 읽어 넷째 윤진이 황제임을 다시한번 천명한다.

 

윤진은 자신의 제호를 옹정으로 정한다.

옹정황제께서 납신다는 말이 메아리가 되어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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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12권 리뷰가 끝났다. 굳이 이렇게까지 1권부터 12권까지 리뷰를 쓰려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더봄 김덕문 사장님의 열정에 감화되어서다. 많은 독자들이 <강희대제>를 비롯한 <옹정황제>,<건륭황제>, <제왕삼부곡>을 찾는다면 리뷰 쓴 보람이 있을 듯.

 

밑줄 그은 문장

 

 

 

p37. 천의도 중요하나 인사도 무시를 못합니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어찌 천명에 제대로 부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물속에서 달을 건지려는 우스꽝스러운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p108 <통감>이라는 책에 나는 똑똑하지는 않으나 보는 눈은 있다라는 말이 있지.

 

p135.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물욕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시야가 흐려져 자기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옵니다. 자기를 모르니 상대를 제대로 알 리가 없사옵니다. 따라서 내 안의 가 나아갈 방향을 잃게 되는 것이옵니다. 때문에 자신을 극복하려면 먼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뼈를 깍는 노력이 우선시 돼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p136. 아들의 생각에는 어떤 학문이든지 마음을 똑바로 세우는 일이 근본으로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불학적인 뜻에서 보면 마음은 곧 영산이옵니다. 또 유학적 축면에서 봤을 때 아무리 건실한 과일나무라도 물과 거름을 주지 않으면 치국평천하라는 열매를 맺을 수 없사옵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수신도 좋사옵니다만 치국평천하 역시 좋사옵니다. 그러나 뭔가를 제대로 이룩하려면 성의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옵니다. 성의가 없으면 정심(마음을 바르게 함)할 수가 없사옵니다. 정심이 돼 있지 않으면 사물의 이치를 궁구할 수 없사옵니다.

 

p218. 자네들 중산랑에 관한 전설 들어봤지? 동곽 선생이라는 사람이 굶주린 채 얼어 죽기 직전인 늑대 한 마리를 품에 껴안아 녹여준 다음 자기가 먹으려던 음식을 꺼내 먹였어. 그런데 그 동곽 선생의 품속에서 정신을 차린 늑대는 자신을 구해준 그를 깡그리 배 속에 집어 넣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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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스 캐롤 오츠 : 작가의 신념 - 삶, 기술, 예술 위대한 생각 시리즈 8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송경아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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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인 인지도에 비해 유독 한국에서 외면 당하는 작가들이 있다. 플래너리 오코너나 조이스 캐롤 오츠가 대표적이지 않을까. 그러고보면 한국에선 단편 작가들의 작품들은 번역도 제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읽히지도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카버가 알려진 것도 거의 최근의 일이다. 왜 그런걸까?

 

이 책은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 글쓰기, 그리고 작가로서의 삶 등에 대한 JCO의 에세이다. <작가란 무엇인가2> 파리 리뷰 인터뷰를 보아도 그녀의 집필량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다.(그녀의 얼굴만큼이나) 백 권의 책이라니! 그녀가 삼십년 정도만 더 산다면 어쩌면 발자크를 능가할 지도 모르겠다. 한 작품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곧이어 다른 작품을 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당신의 가슴속에 있는 것을 써라.

 

당신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써라. 결코 당신의 주제와 그에 대한 열정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당신의 금지된 열정은 글쓰기의 연료와 같다. 일생에 걸쳐 오래 전에 죽은 아버지에 대해 분노했던 위대한 극작가 유진 오닐처럼, 일생에 걸쳐 어머니에 대해 분노했던 위대한 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처럼, 일생에 걸쳐 자살의 황홀경으로 유혹하는 매혹적인 죽음의 천사와 싸웠던 실비아 플라스나 앤 섹스톤처럼 말이다. 도스또예프스키의 난폭한 자기 파괴 본능, 플래너리 오코너의 불신자들에 대한 사디즘적 정벌의 본능 또한 그러했다. 발광에 대한 에드가 앨런 포의 공포,.....당신의 묻혀 있는 자아 또는 자아들과의 투쟁이 예술을 낳는다.

 

기죽지 마라! 곁눈질을 하거나 당신을 다른 동료들과 비교하지 마라! 글쓰기는 경주가 아니다. 아무도 진짜로 이기지 못한다. 만족은 노력에서 나오고, 그 결과 보상이 따른다 해도 그런 보상은 아주 드물게 오는 법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써라.

 

전적으로 당신이 속한 세대를 위해 써라. 그렇지 않다 해도 당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위해 써라.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후세를 위해 쓸 수는 없다. 과거의 세상을 위해 쓸 필요도 없다.

 

세계가 당신을 정당하게 대우하거나 자비롭게 다루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인생은 롤러코스터처럼 정면충돌이다. 예술은 냉정하게 선택되고, 오직 소급적으로만 창조될 수 있다. 그러나 글을 쓰기 위해 인생을 살지 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행로를 걸으면서 몇 번이나 예술 작품과 사랑에 빠진다. 다른 사람의 예술에 대한 존경과 숭배에 열중해 버려라. 드가가 마네를 얼마나 숭배했던가! 멜빌이 호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시인들이 월트 휘트먼을 얼마나 왕처럼 모셨던가! 만약 당신을 흥분시키거나, 인상적이거나, 긴장하게 하는 목소리나 통찰력을 발견한다면 그 안에 빠져 버려라.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것이다


나는 지금껏 루이스 캐럴, 에밀리 브론테, 카프카, , 멜빌, 에밀리 디킨슨, 윌리엄 포크너, 샬롯 브론테,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다양한 작가들과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책장위의 언어는 얼음처럼 차가운 매체다. 공연자나 육상 선수들과는 달리, 우리는 원하는 만큼 다시 상상하고 교정하고 완전히 퇴고해야 한다. 우리의 작품이 돌에 새겨지는 것처럼 돌이킬 수 없이 인쇄되기 전에는 원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해야 한다. 초고는 아마 잘 안 써지고 사람을 피곤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원고, 그 다음 원고들은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이 상쾌할 것이다


마지막 문장이 씌어질 때까지 첫 문장은 씌어질 수 없다는 믿음만 가져라. 마지막 문장을 쓰는 오직 그 순간에 이르러서만 당신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소설이라는 고통의 치유법은 오직 소설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당신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써라.

 

달리기와 글쓰기.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달리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일까. 워즈워드, 콜리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디킨스, 하루키, 그리고 조이스 캐럴 오츠 등등은 글쓰기에서 달리기 혹은 산책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준 이들이다.

 

이야기들은 정밀한 구현체를 요구하는 사령들처럼 나타난다. 관념적으로 말하면, 달리기는 내가 쓰는 것을 영화나 꿈처럼 그려볼수 있는 확장된 의식을 갖게 해주는 것 같다. 나는 타이프라이터 앞에서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것을 회상한다. 나는 워드프로세서를 쓰지 않고 상당한 분량을 손으로 쓴다


다시 말하지만 작가들은 미쳤어’.라는 소리를 들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글을 형식상 타이핑해 낼 때쯤이면 나는 이미 그 글을 거듭 마음속에 그려보고 있다. 나는 글쓰기란 결코 그저 책장 위에 단어들을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비치는 것, 감정의 집합체, 날것 그대로의 경험 같은 것을 구현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기억할 만한 예술을 만들려는 노력은 독자나 구경꾼에게 그 노력에 걸맞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달리기는 명상이다. 좀더 실용적으로 말하자면, 달리기는 내가 마음의 눈으로 그때까지 쓴 원고 사이를 거닐고, 교정을 해서 오류를 잡아내고 글을 더 개선시키도록 만들어 준다. 끊임없는 교정이 나의 방식이다.

 

예술의 기원

 

모방으로 시작한 것은 어느 날 흘끗 바라본 우리 자신에게서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채 발견하게 되는 그 무엇이 된다. 그건 무얼까? 인생 그 자체? 겉보기에 예술가들이 가장 의식하고 있는 것은 그의 발견에 대한 복종이다.

 

....예술 작품을 만듦에 있어 우리는 전혀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만들지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복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 즉 그것을 발견하는 일은 마치 자연 법칙처럼 필연적이며 비밀스럽기 때문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온 세상에 걸쳐 거대한 체스 게임을 하고 있는 거군요. , 물론 지금 여기가 세상이라면 말이죠. ,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제가 그 말들 중의 하나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말이 될 수만 있다면 졸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물론 여왕이 되는 것이 더 좋기는 하지만요.”

 

- 루이스 캐럴, <거울 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나는 왜 썼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죄가

나를 잉크에 담았을까, 부모의 죄일까, 나 자산의 죄일까?

아직 아이일 때, 아직 명성을 쫓는 바보가 아니었을 때,

나는 혀 짧은 소리로 시를 읇었다. 시가 내게 다가왔기 때문에.

 

- 알렉산더 포프, <애벗낫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실패의 기록

 

예술가들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실패에, 즉 실패의 정도와 적응과 타협에 능통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실패라는 용어는 대개 심오하다. 성공이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일시적 환상, 곧 꺼질 거품, 곧 지게 될 꽃인 반면, 실패는 진실이거나 적어도 타협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합리적이리라


만약 내가 믿는 바와 같이 절망이 도취감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부조리한 상태라면, 그것이 인간의 환경과 덜 어긋남은 물론이고 더욱 실질적이고 믿을 만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에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T.S 엘리엇은 비평가들의 대부분이 실패한 작가들이라는 언급을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렇지요.”

 

모든 예술이 은유거나 은유적이라면, 은유의 동기란 정말 무엇일까? 동기라는 것이 있을까? 아니면, 사실은 은유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사람이 절대적인 자신을 갖고 예술 작품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을까? 왜 그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원하고, 저항할 수 없고, 때때로 삶을 바꾸어 놓는 응답으로 느껴지는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의 의미도 없는 것일까?

 

옛날에 스물다섯 개의 양철 인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형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래된 양철 숟가락 후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인형들은 각각 자기 총을 어깨에 매고, 눈을 앞으로 꼿꼿하게 고정시키고, 아주 작은 빨강과 파랑 제복을 입고 있었습니다.....하나만 빼고 모든 군인들은 아주 똑같았습니다.


그는 다리가 하나뿐이라는 점에서 나머지와 달랐습니다. 맨 마지막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를 완성할 만큼 양철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인형들이 두 다리로 서 있는 것과 똑같이 한 다리로 잘 서 있었습니다. 사실은 바로 그가 유명해진 인형이었습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양철 병정> 중에서.

 

지드가 <수상록>에서 언급했듯이 예술가는 자기만이 열쇠를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세계를 필요로 한다. 일을 하다가 죽거나 심하게 병들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매우 현실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여기에 분명한 모순이 있다면 그 모순은 예술이라는 모험의 핵심에 있는 것이리라. 작가는 깨지기 쉬운 달걀 피라미드를 실어 나르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실어 나른다. 사실 그 자신이야말로 언제라도 떨어져 마루에서 엉망진창으로 더럽게 깨질 수 있는 깨지기 쉬운 달걀 피라미드이기 때문이다.

 

새벽이 오기 전에 잠에서 깨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드물다. 차라리 죽음을 연모케 하는 꿈 없는 잠이, 아니면 현실보다 더 무서운 환영과 기괴한 모든 것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본능이 우리의 뇌수 곳곳을 휩쓸고 다니는, 공포와 일그러진 즐거움의 밤이 우리로 하여금 깨어나 어둠 속에 있게 한다. 그 본능은 몽상이라는 질병이 정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예술, 바로 고딕 예술에 지속적 생명력을 부여하는 본능이다.

 

......겹겹으로 겹친 외올베 같은 새벽안개가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고 사물들이 조금씩 그 형태와 색채를 되찾으면 우리는 새벽이 그 고유한 바랜 빛깔로 세상을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을 지켜본다. 흐릿한 거울이 사물을 비추어 보여준다는 본연의 삶을 되찾는다.....그 무엇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밤의 비현실적인 그림자로부터 우리가 익히 알던 대로의 진정한 삶이 돌아온다


우리는 우리가 떠났던 바로 그 지점에서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하고, 이때 우리는 늘 하던 대로 판에 박힌 습관 같은 일을 힘들여 지루하게 반복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진저리를 치기도 하지만, 제어하기 힘든 갈망, 아마도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게 되면 어둠 속에서 새로이 다시 태어난 세상을 보게 될 수도 있으리라는 갈망에 몸을 떨기도 한다. 이런 세계에서 어떠한 의무감이나 후회의 의식적인 형태를 띤 과거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도리언 그레이에게는 이러한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삶의 진정한 목표였다.

 

-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중에서

 

대다수 소설가들의 특징인 몽상적인 것과 실용성의 기묘한 혼합은 <율리시즈>의 여러 가지 문체, 그 놀랄 만큼 풍부한 자기 패러디적 목소리들에 대한 조이스의 태도로 예증된다. 


내 관점에서 기술이 정확한가 아닌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 열여덟 개의 에피소드를 진군시킬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하며, 일단 내 군대가 지나간 후에는 적군이 다리를 하늘 높이 날려 버리더라도 내 알 바 아니다.”

 

실패에는 종종 문자 그대로의 이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실패란 가장 우울한 경험으로 하여금 가치 있고, 사람을 성장시키고, 깊은 중요성을 가진 경험과 비슷해질 때까지 그 안팎을 뒤집어 버리는 방법이 아닐까?......<기 돔빌>이 실패한 후 제임스는 자기 수첩에 이렇게 쓴다


나는 오래된 펜을 다시 잡는다. 나의 잊을 수 없는 모든 노력과 신성한 투쟁의 펜을. 오늘 나는 나 자신에게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크고 충만하고 드높은 미래가 아직 열려 있다. 내가 필생의 작업을 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며, 나는 그 작업을 할 것이다.”

 

만약 내가 내게 일어난 일, 혹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글을 쓰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면 나는 내게 머무는 고독과 고립의 감각을 조금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내 안에 있는 형상 없는 덩어리의 밀도와 모습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내 공책에 끄적이고 읽는다. 삶은 상상할 수도 없이 풍부해 보인다.

 

- 앨리스 제임스, <일기> 중에서

 

그러나 천재는 자기가 천재라는 것을 실제로는 알 수 없다. 희망을 갖고, 예감을 갖고, 맹렬한 편집증적 의심에 괴로워하지만, 결국 그에게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척도이다. 성공은 멀리서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지만, 실패는 충실한 동행이자 다음 책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자극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하러 글을 쓰겠는가? 그 충동은 이론적이고 철학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의 피와 뼈만큼이나 육체적인 것이다.


 “죽기전에 무엇인가 쓰고자 하는 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 인생이 짧고 열광적이라는 이 파괴적인 감각은 내가 나 자신의 닻에 집착하게 만든다.” 이렇게 버지니아 울프는 일기 속에서 우리 모두를 향해 얘기하고 있다.

 

영감!

 

우리는 모두 예전에 영감을 받은 경험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알고 있지만, 앞으로 영감을 받으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영감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자신의 일에 끈덕지게 몰두한다. 마치 작은 불꽃이 피어나리라고 믿으면서 젖은 성냥으로 계속, 계속, 계속, 성냥이 부러질 때까지 불을 켜대는 것과 비슷하리라.

 

나는 초기 초현실주의자들이 분명히 옳았다고 생각한다. 세계는 해독해야 하는 기호의 숲이다. 꿈속의 외견상의 무질서 속에 의미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세계는 무질서 속에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채로 개방성, 혹은 유용성이나 우연을 기록하려고 스스로를 열어 두고 카메라를 메고서 파리의 거리를 떠돌아다닌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와 같이, 경외심을 갖고 알아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지들은 넘쳐난다.

 

나는 그것을 한 편의 시로 적노라

맥도나와 맥브라이드

코널리와 피어스는

오늘 그리고 앞으로도

녹색 옷을 입는 곳이면 어디서든

변했다, 완전히 달라졌다.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1963년 시인 랜달 자렐은 어머니에게서 한 상자의 편지를 받았다. 그 상자에는 자신이 열두 살이었던 1920년 대에 썼던 편지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즉각 자신의 창조성의 마지막 단계가 될 일에 착수했다. 그의 아내가 말한 바로는 실로 시를 공중에서 잡아채는 일이었다.

 

노먼 메일러의 첫 소설 <나자와 사자The naked and the Dead>는 전적으로 계획적인 노력의 산물이자, “내가 스물다섯 살때까지 배운 모든 것에 따른 확실한 결과물이었다......그러나 두 번째 소설 <바르바리 강변>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것 같다. 매일 아침 그는 소설을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 생각도 없이 썼다.


....메일러의 <허크 핀>은 이와 비슷하게 석 달 동안 무아경의 백열 상태 속에서, 어떤 의미로는 주인공의 목소리로 구술되어 쓰였다.

 

조셉 헬러의 소설들은 으레 주제, 배경, 인물, 이야기와 독립적으로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첫눈에 반해 버렸다. 요사리안은 군목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라는 <캐치 22>의 첫 문장은 아무 이유없이 그저 헬러에게 떠올랐고 그가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한 시간 반 이내에 헬러는 그 소설의 독특한 어조와 교묘한 형식 그리고 인물들 대다수를 마음속에 구상했다.

 

<사건이 일어났다>의 시초는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는 내가 두려워하는 네 명의 사람이 있었다. 이 각각의 네 명은 다섯 명씩을 두려워했다.”라는 불가해한 문장이다. 문장이 떠오르기 일 분 전까지만 해도 헬러는 이후 몇 년동안이나 열중하게 될 그 작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문장이 떠오르자 한 시간 이내에 그 작품의 서두, 중간,결말 그리고 불안이라는 지배적인 어조를 파악했다.

 

조안 디디온은 인물이나 플롯, 혹은 사건의 개념초자 없이 <있는 그대로>를 시작했다. 그녀는 오직 마음속에 두 개의 그림만을 품고 있다. 하나는 온통 흰 색의 빈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라스베가스의 리비에라 호텔 카지노에서 이름을 불러 찾고 있던 할리우드 이류 배우이다. 빈 공간은 아무 이야기도 암시하지 않지만, 여배우의 모습은 이런 것을 암시한다


팔과 등이 드러나는 짧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긴 머리의 젊은 여인이 새벽 한 시에 리비에라 호텔의 카지노를 걸어간다. 그녀는 혼자 카지노를 가로질러 비치된 전화를 집어 든다. 나는 그녀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그녀를 보았다.

 

1976<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존 치버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사실들이 저절로 한꺼번에 다가오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모아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직류 전기 에너지 같은 것이다.그 다음에는 글쓰기 자체가 중량을 맞추는, 즉 단어들을 상상과 일치시키는 지난한 노력만이 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스티븐 디달러스는 조이스의 에피퍼니라는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조야한 말 혹은 몸짓이나 마음 그 자체의 주목할 만한 상태에서 갑자기 영적인 현시가 나타나는 것. 그것은 예술가들 자신에게 있어 가장 섬세하고 덧없는 순간들이기 때문에 이런 에피퍼니를 아주 조심스럽게 기록하는 것이 에술가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다.”.


...그는 대략 70개의 에피퍼니를 모았고, 그 중 40개 정도가 살아 남았다..은총이 정말로 외부에서 우리에게 쏟아진다고 상상한다면 순진한 일이다. 강림을 받을 영적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예술의 신적인 기원에 대한 플라톤의 주장의 역 명제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동일한 것, ‘악마적인예술이라는 친숙한 개념은 그런 것이다. 무엇인가 우리가 아닌 것이 우리 안에 살고 있다. 무엇인가가 우리를 통해 이야기하겠다고 고집한다. 문학적 강박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는 것은 다른 강박, 가령 가장 원시적이고 강력한 색정적 사랑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서 감정의 대상은 전적으로 인간이지만 그 감정은 어딘가 원시적이고, 냉혹할 정도이고, 때때로 불안할 정도인 비인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성난 바람, , 정령들의 힘을 암시하는 문자 그대로에 가까운 은유, 바로 정신 착란(brainstorm)’이라는 개념이다.

 

가령 윌리엄 블레이크의 무절제한 환상이나, 초기 작품을 쓰던 카프카가 건강이 안 좋았고 육체적으로 탈진했다는 것과는 상관업싱 지칠 줄 모르고 뭔가에 사로잡힌 듯이 밤새 글을 쓰던 무아경 같은 것이다. 1934727일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말한다. “창조력이 갑자기 우주 전체에 질서를 가져오다니 얼마나 놀라운가그러나 그녀는 그 우주가 결국 사람의 가장 내밀하고 탐사되지 않은, 악마적이자 신적인 자아라는 것까지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보코프는 그의 자서전 <기억이여, 말하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시는 태곳적부터의 충동으로 의식 속의 우주에 있어 작가의 위치를 표현하려는 위상적인 것이다. 의식의 팔은 밖으로 뻗어 더듬어 찾고, 그 팔은 길수록 좋다. 아폴로가 타고난 기관은 날개가 아니라 촉수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편지에서 동생 스타니슬라우스에게 말한다. “미사의 신비와 내가 하려는 것 가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다......일상생활의 빵을 그 자체로 영구적이고 예술적인 생명을 가진 것으로 바꿈으로써.....사람들의 지적, 도덕적, 영적 고양을 위하여......그들에게 일종의 지적 혹은 영적인 기쁨을 주려는 것이다.”

 

192898일 비타 새크빌 웨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소설을 시작할 때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것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건널 수 없는 심연의 저쪽 편에 그것이 존재함을 느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숨가쁜 고통 속에서만 극복된다는 것도요. 글을 쓰려고 앉을 때 나는 분명 한 시간 정도 있으면 착상에 내려앉을 언어의 그물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에서......훌륭한 것은, 그것을 쓰기 전에는 글로 쓸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며, 오직 눈에 보이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9개월 동안 절망 속에서 살면서 의도했던 것을 잊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책은 봐줄 만해집니다.

 

문체는 매우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모두 리듬입니다. 일단 당신이 그것을 파악하면, 틀린 말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리듬이라는 것은 매우 심원하고, 단어들보다 훨씬 더 깊이 내려갑니다. 광경과 감정은 그에 걸맞는 말을 만들어내기 훨씬 이전에 마음속에 이 물결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작가는 이것을 다시 잡아내어서 작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기고 그 다음에, 그것이 마음속에서 뛰어오르고 굴러 떨어지면서 그것은 딱 맞는 말을 만듭니다.

 

(윌리엄 포크너)는 내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소설을 쓰고 있다. 나는 145쪽에 머물러 있고,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것을 증오한다. 프리다는 그것이 매우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게는 잘 모르는 외국어로 된 소설 같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간신히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작가의 독서 : 기능공으로서의 작가 1

 

토마스 하디의 시를 연구하고 있었던, 더 이상 젊지도 않고 책도 내지 못하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생각해 보라. 프로스트가 어느 날 자기의 선배만큼이나 위대한 시인이 되고 미국에서 하디보다 훨씬 더 널리 읽히게 된다는 것은 프로스트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놀라운 결과였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와 나다나엘 웨스트의 <미스 론리하츠>를 발견하는 젊은 플래너리 오코너를 생각해 보라. 오코너가 나다나엘 웨스트에게 진 빚은 그녀의 전 소설에 스며들어 있고, 심지어 <오르다보면 모든 것은 한 곳에 모이기 마련이다>같이 성숙한 작품도 날카롭고 폭로적이지만 재미있는 문장, 이야기의 결말에서 갑자기 잔인하게 변하는 희극적인 어조 등은 웨스트적인 구석을 간직하고 있다.

 

동시대인 나다니엘 호손의 알레고리적 이야기 모음집 <구 목사관의 이끼>에 너무나 충격을 받아 <모비 딕>의 집필 계획을 수정하는 젊고 열의가 넘치는 허먼 멜빌을 생각해 보라. <모비 딕>의 희극적이고 피카레스크적 어조를 훨씬 더 장중하고 더 고상하고 비극적인 어조로 바꾸는 과정에서 그는 19세기는 물론 20세기에서도 가장 강렬한 미국소설 중 한 편을 창조해냈다.

 

앨저넌 스윈번, 헉슬리, 심지어 동시대인 어네스트 헤밍웨이 같은 전혀 공통점이 없는 모델들을 취하고 버리면서 하나의 목소리, 시점, 통찰력을 찾고 있던 이십대 중반의 젊은 작가 윌리엄 포크너를 생각해 보라. 그 후 그는 자신과 기질적으로 더 맞는 작가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나 조셉 콘라드의 <나르시서스 호의 검둥이>와 더불어 제임스 조이스를 발견했다


이 작품들은 모두 포크너에게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영향을 미치게 되는, 획기적으로 씌어진 산문의 걸작들이다. 이후 포크너의 특이한 시적 산문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코맥 맥카시같이 다양한 작가들에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영향을 주었다.

 

마크 트웨인이나 셔우드 앤더슨 같은 걸출한 선배들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있다. 특히 그들이 <허클레비 핀의 모험>이나 <와인스버그, 오하이오> 같은 걸작에서 미국 방언을 갈고닦지 않았다면, 그 유명한 헤밍웨이 스타일은 개발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율리시즈>를 읽고, 내 경우에 맞도록 혹은 그 반대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1/3도 채 안 되는 200페이지를 읽었다. 그리고 첫 2,3 장에서는 즐거워하고, 자극받고, 매혹되고, 흥미를 느꼈다. ......그 다음에는 여드름을 짜고 있는 메스꺼운 풋내기 대학생을 보는 것처럼 당황하고, 지루해하고, 화가나고 환멸을 느꼈다


그런데 톰(T.S 엘리엇)은 이것이 <전쟁과 평화>와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무식하고 천박한 책으로 보인다. 이것은 독학 노동자의 책이다. 그들이 얼마나 사람을 괴롭히는지, 얼마나 독선적이고, 끈질기고, 거칠고, 공격적이고, 궁극적으로는 욕지기가 나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 1922816일 일기 중에서

 

, 고마워라. 나는 내 머리를 직관으로 가득 채웠다. 직관은 지나치거나 충분하게 채울 수 없는 것이다. , 마침내 그저 자아를 놓아 버리는 것. 그 기나긴 세월동안 (엄청나게 장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희망하고 기다려온 몰두와 생산이라는 행동 그저 잠재적이고 상대적인, 물질적인 면에서의 양의 증가 에 자아를 내던지는 것. 요컨대, 더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왔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결말에 다다른 것 같다. 나는 이것만을 바란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순종과 그만큼의 감사를 느끼며 운명에 고개 숙여 절한다.

 

헨리 제임스, 1895214<작가노트> 중에서

 

십대시절부터 이미 야심찬 젊은 작가였던 존 가드너는 다른 작가의 언어에서 산문의 리듬을 느끼기 위해 모범이 되는 소설 작품을 타이핑했다고 말했다. 가드너는 특히 톨스토이의 숭배자였고, 그의 도덕적이고 설교적인 어조는 가드너의 소설 속에 울려 퍼진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다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방했던 단편 작가 중 한 명인 레이먼드 카버는 형식면에서 체오프, 이사크 바벨, 프랭크 오코너, V.S 프리쳇, 어네스트 헤밍웨이 같은 선배들에게 진 빚을 인정했다. 그는 <불길 : 에세이, , 단편>의 서문에서 책상 옆 벽에 체호프의 소설에서 나온 “......그리고 갑자기 그에게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라는 문장 일부분을 붙여 놓았다고 쓰고 있다.

 

소설가이자 영화제작자인 존 세일즈는 넬슨 올그런에 대한 존경심에 가득 차서 말한다. “당신이 꼭 당신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처럼 쓰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들이 만든 등장인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 속의 영혼은 당신의 마음속에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렇게 열거된 사례들에서 어떤 교훈이나 일반적인 명제를 끌어낼 수 있을까? 만약 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간단한 교훈이다. 널리 읽고, 열성적으로 읽고, 의도가 아니라 본능의 인도를 받아라. 당신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작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작가가 되고 싶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작가의 독서 : 기능공으로서의 작가 2

 

헨리 제임스는 예술가란 이상적으로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상상 세계에 진짜인물들이 살도록 해야 하고, 그들을 담고 있는 그 세계 또한 진짜라는 환상을 주어야 하는 소설가에게는 특히나 맞는 말이다. 작가라는 것은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감정적으로 작품을 통해 빛을 발해야 한다. 태양이 보이지 않는 흐린 날의 불빛같이 모든 것들이 동등하게 빛을 받아 보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물들을 바꿀 수 있고, 우리의 영혼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 수 있다. 사진작가들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더 날카롭게 보는 것철머, 글쓰기 훈련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더 예민해지고 관찰력이 깊어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변화를 겪을 수 있는 길은 글쓰기라는 예술을 기술로서 접근하는 것이다.

 

자기비판이라는 불가사의한 예술

 

그저 올바른 음절을 제대로 된 자리에 갖다 놓아라.’조나단 스위프트의 충고이자 완벽주의자의 신조이다. 그러나 이 신조는 작가의 악몽이 될 수도 잇다. 언제나 아름답고 찬란하게, 독창성을 발휘하며 의기양양한기세로 글을 쓰고자 하는 긴장은 스스로를 마비시키는 자기 저주가 될 수 잇다. 가장 야심작인 <노스트로모>를 쓰며 비참해하던 조셉 콘라드 같은 완벽주의자의 절망 속에는 어형과 겸손이 둘 다 들어 있다


낭떠러지 위로 14인치 널빤지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처럼 나는 계속 나아간다. 만약 비틀거리기라도 한다면 나는 파멸할 것이다.” 콘라드는 일에 대한 혐오가 발작하면 우둔한 느낌이 들 정도로 움츠러들고 두뇌가 물로 변해 버리는 느낌이며, 글쓰기는 그저 신경증적 힘이 언어로 변환되는 것일 뿐이라는 확신이 든다고 말했다.

 

입센<들오리>에서 삶의 거짓에 대해 말한다. 삶을 가능하게 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환상은 심지어 불합리한 것이라 해도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어떤 작가들에게는 삶의 거짓이 필수적이다. 그들은 자기가 천재성을 갖고 있다고 믿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글을 쓸 수 없다. 현실 생활과 너무 극적으로 충돌하지만 않는다면, 그런 확신에는 죄가 없다.

 

 

이 짧은 책의 리뷰가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글쓰기에 관한 책은 널리고도 널렸다. <작가의 신념>이 다른 글쓰기 책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짧은 분량안에 무수한 작가들이 불쑥 불쑥 출현한다는 점이다. JCO가 그렇게나 많은 책을 쓸 수 있었던 동력은 그만큼이나 많은 선배들, 동시대의 작가의 책을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죽기 전에 영화를 만들고 싶어한 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나는 실패했지만 다음 작품은 더 나아질 것이다. 정녕? 실패 이후의 헨리 제임스의 메모를 염두해 둘 것.

 

오늘 나는 나 자신에게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크고 충만하고 드높은 미래가 아직 열려 있다. 내가 필생의 작업을 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며, 나는 그 작업을 할 것이다


-2015.5.26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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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유 2016-02-11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군요.
이렇게나 일목요연하게 작성하시다니
시이소오 님의 멋진 리뷰에 제 마음이 설렙니다.
아무리 바빠도 완독하고 싶은 책 영순위에 올려봅니다.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2-11 08:11   좋아요 0 | URL
중구난방에 너무 길어서 우려했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