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90년대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사회주의는 끝났다고 말하던 시기에 저는 이전과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탈구축적인 힘은 노골적으로 전 세계를 신자유주의로 몰아넣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사회주의, 반자본주의를 주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을 유지하게 위해서 입장이나 말을 바꾸어야 했지요. 왜냐하면 상황이 변하면 같은 말이 다른 의미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비평을 ‘트랜스크리틱’이라고 부릅니다. 트랙스크리틱이란 항상 ‘이동’을 포함하는 비평입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역시 어려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을 것이 뻔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다른 언어로 이를 표현했는데, 그 한 가지 예가 바로 어소시에이셔니즘associationism입니다. p27
실존주의자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라고 생각하죠. 즉 이것은 정명제입니다. 구조주의자는 “자유는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것처럼 보일 순 있지만 구조에서 벗어나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반대명제입니다. 둘 중 어느 쪽이 옳은지를 분명하게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명제 모두 성립하니까요. 그러니까 둘 다 칸트를 뛰어넘은 것이 아닙니다. p30
철학자 가운데 ‘자유는 없다’는 생각을 취한 사람은 스피노자입니다. 스피노자는 우리들이 무수히 많은 원인에 의해, 즉 자연적 필연에 따라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원인이 너무나도 복잡한 탓에 사람들은 자유라고 착각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자유는 상상물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p31
주석10.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유의지 혹은 초월은 표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자연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 따위는 없고, 이는 자기 원인이라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생각하기에 일체는 신=자연 속에 있으며 그 바깥에 전지전능한 신은 없다. 초월적인 신이란 바로 자연을 넘어서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생각하는 인간이 품는 표상에 불과하다.
가라타니 고진, <탐구2>, <윤리학21> p31
주석11. 자유에 관한 스피노자의 설명에 대해 가라타니는 아래의 구절을 인용한다. “인간이 자신을 자유롭다고 믿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그러한 의견의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행동은 의식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의 행동의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 그들의 자유의 관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인간의 행위는 의지에 의존한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그것에 관하여 아무런 관념도 갖지 않은 채 하는 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의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의지가 어떻게 신체를 움직이는지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에티카> [정리 35의 주해] p31
마르크스나 프로이트도 이와 같은 스피노자 계통의 사상가입니다.
저는 이런 스피노자의 결정론을 바탕에 두고 칸트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칸트의 사유가 가장 근본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칸트는 자유가 ‘도덕적인 영역’에만 있다고 말합니다. 의무를 다함으로써 사람은 자유로워진다고 말하죠.
일반적으로 사람은 ‘의무를 다하는 일이 어째서 자유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칸트를 비난합니다. 이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결책을 내놓은 사람은 저뿐입니다. 제 생각에 ‘자유로워라’라는 명령에 따를 때에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자유는 그와 같은 명령에서 오는 것이며 그 외에 자유는 없습니다.
칸트에 있어서 도덕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자유는 일반적인 의미의 자유와는 다릅니다. 칸트에게 자유는 순수하게 자기 원인적인 것, 자발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같은 말입니다. 편의상 도덕과 윤리를 구별해서 설명해보죠. 도덕은 공동체의 규범이고 윤리는 자유와 관련된 것입니다.
도덕은 공동체의 규범입니다. 칸트는 이처럼 공동체의 규범을 따르는 것은 타율적인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도덕을 개인의 행복이나 이익의 문제로 여기는 공리주의입니다. 이조차도 칸트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연적 본능’에 지배당하는 타율적인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윤리는 이와는 다른 자유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방금 말했듯이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따른다는 것, 그리고 타인 역시 자유로운 존재로 대하는 것, 즉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명령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유는 책임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 자신의 자유에 의한 것이었다고 받아들이는 것, 즉 책임을 지는 일입니다.
자본주의는 단순하게 말하면 ‘상대를 수단으로서만 취급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란 상대를 수단으로서만 취급하는 것을 ‘자유롭게’해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칸트는 오히려 ‘공적’과 ‘사적’이라는 가치부여 그 자체를 전도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공적이라고 하면 고상하고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사적인 차원이야말로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 점에 관해서 일본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데모 따위를 해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데모가 발생했지요. 이것은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이는 젊은 사람들이 일으킨 것이겠죠. 인간은 아무리 설득해도 움직이지 않지만, 구조적인 원인이 명백해지면 급격하게 움직이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주체의 욕망은 무엇일까요? 이를 그 용어 자체로 정의내리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조금 더 말해보자면, 타인의 욕망이 벗겨진 뒤에 드러나는 것, 즉 남겨진 주체의 욕망이라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소비하려는 욕망은 타인의 욕망입니다만, 이것이 사라진다고 해서 주체의 욕망까지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주체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 사라질 때라야 비로소 스스로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질문에서 언급한 바디우의 사랑 개념도 그렇습니다. 타인의 욕망이 사라진다고 해서 사랑도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가 되어야 진정한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환양식에는 A: 증여 – 답례 같은 상호부조적 공동체의 호수성의 원리, B : 약탈 –재분배 같은 국가의 지배와 보호의 원리, C : 상품 교환이라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합의에 기초한 화폐소유자와 상품소유자와의 교환 원리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D는 어떤 의미에서 A를 고차원에서 회복한 것 혹은 상상적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모습을 이루게 된 근대자본제 사회에서는 교환양식 C가 지배적입니다. 그렇지만 앞서와 마찬가지로 교환양식 A와 B도 각기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세계 = 경제, 즉 근대세계시스템입니다.
저는 특별히 오늘날의 이 시스템을 자본 =네이션=국가라는 접합체로 봅니다. 그리고 저의 과제는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각기 다른 교환양식의 기원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자본 =네이션=국가 체제를 넘어선 사회가 있는데 이는 교환양식 D가 지배적인 사회구성체입니다. 칸트도 이런 사회를 생각했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봉건 노예는 소비자가 아니지만, 프롤레타리아는 소비자입니다.
데마고그 :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시민과 민중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데마고고스를 어원으로 하는 데마고그는 그 당시에는 비난의 의미로 쓰이진 않았지만, 현대에 들어 대중의 감정과 편견에 호소하여 권력을 취하려는 선동적인 정치가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사실과 다른 내용을 허위선전하는 행위를 데마고기 혹은 데마라고 한다. 이런 데마고기에 능숙했던 대표적 인 인물이 아돌프 히틀러이다.
다중 :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주장한 개념으로 단순히 많은 수의 일반인들을 지칭하는 ‘대중’과 다르며, 동일한 목적의식의 상대인 ‘민중’과도 구분된다. 다중은 각자의 정체성을 가지며 개별적으로 행동하며, 특정한 사안에 동의할 때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공동으로 행동한다. 여기에는 영원성의 관점에서 보는 ‘존재론적 차원’과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역사적 차원’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존재론 적 차원의 다중은 역사적 힘들의 복합적 상호작용에서 이성과 열정을 통해 자유를 창조하는 존재이다. 두 번째 차원인 역사적 다중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다중이다. 제국의 출현 조건들을 토대로 해서 다중을 발생시키려면 하나의 정치적 기획이 필요하다.
그런데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다중’의 개념에 반대하며, 이에 대한 몇 가지 근거를 들고 있다. 그중 하나가 ‘분열’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의 세계적 반란’이라는 비전을 내놓았지만 그러한 대항 운동은 세계적인 연대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다중>,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세계공화국은 인간의 이념이나 선의에 의해 실현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반사회적 사회성 즉, 전쟁에 의해 실현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군비를 포기하는 것이 곧 ‘증여’입니다.
구성적 이념과 규제적 이념 : 구성적 이념은 현실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이념을 말한다. 이는 건물의 설계도와 같다. 반면에 규제적 이념은 현실에서 실현될 수는 없지만 하나의 이상향으로 현실을 비판할 근거가 되는 이념이다. 말하자면 유토피아와 같은 개념이다.
저는 세계 전쟁이 임박했다고 생각합니다......확실히 자본주의는 끝을 맞이하게 될 테지만, 엄청난 피해와 희생자들을 수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막는 것이 핵심입니다. 다가오는 전쟁에 대항하는 운동은 앞으로 교환양식 D를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청일전쟁 때 일본에게 패한 이후 강유위라는 사상가가 등장합니다. 그의 사상은 대동사회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즉 대동사회란 유교에서 유래한 것인데, 중국에서는 이를 많이 무시했지요. 하지만 앞으로는 강유위의 이러한 사상이 큰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국과 제국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제국은 근대 이전 광역국가의 형태입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라는 하나의 제국이 있었고 그 주변의 여러 나라들은 조공을 바치는 관계로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이 조공은 실제로는 중국 왕조 측의 답례가 더 많은 호수적 교환 관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제국은 이러한 교환으로 평화체제를 구축하려 했지요.
이에 비해 제국주의는 근대의 네이션 =스테이트가 확장되어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제국주의적 지배의 본질은 상대를 직접적으로 수탈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자유로운 교환을 통해서 수탈하는데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관세권을 빼앗는 것, 혹은 강제적인 자유무역 등이 그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신자유주의’라고 부릅니다.
제가 봤을 때 각각은 거의 60년 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세계사는 120년마다 비슷하게 진행된다는 논의가 도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에 일어날 세계 전쟁을 막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일어날 전쟁은 자본과 국가가 생존을 위해 일으키는 것이니까 그것을 막는 것은 곧 자본과 국가의 연명을 저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평화 운동과 혁명 운동은 별개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칸트가 말하는 ‘영구평화’와 마찬가지로 국가 간의 적대성이 없어진 상태, 즉 국가가 지양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세계동시혁명입니다.
미국이 물러서지 않으면 동아시아의 재구축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뒤집어 보면 미국은 그 점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중국과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반미 운동을 하는 것만으로는 미국을 아시아에서 내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동아시아에서 미국 이외에 전쟁의 위기를 초래하는 요소는 없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상태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남북의 대립을 해소하는 것은 동아시아 전체로 보았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 마호메드의 후계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 대립에서, 마호메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만이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한 분파가 ‘시아파’, 알리 외에도 여러 명을 후계자로 인정한 것이 ‘수니파’이다. 수니파가 코란해석과 마호메트의 말을 전적으로 중시한다면, 시아파는 알리와 그 후선들의 코란해석을 신봉한다.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과 이라크 등의 국가에서 종교 지도자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세계 무슬림의 85%는 수니파이며, 15%의 시아파 대부분은 이란과 이라크에 집중해 있다.
고든 차일드가 주장한 농업혁명입니다. 농업을 시작하고 농업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정주하고, 계급이 생겨나며,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견해입니다. 저는 이것과 반대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농업혁명이나 신석기혁명이 아니라 ‘정주혁명’이라고 부릅니다. 본격적인 농경이나 목축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인간은 정주하고 있었습니다. 농업은 정주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농업에서 국가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국가로부터 농업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요.
지금의 터키에 해당하는 이오니아라는 지방의 자연철학이 제가 생각하는 ‘철학의 기원’입니다. 이 지방의 폴리스에는 그리스의 다수자 지배 원리인 데모크라시와는 다른, ‘이소노미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동등자 지배라고 하기도 하지만,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이는 ‘지배가 없다’는 말입니다. 당시 아테네에 있었던 것은 데모크라시입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이소노미아에서는 자유와 평등이 상반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소노미아에서는 그곳이 싫어지거나 문제가 생기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토지가 없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땅에서 노예나 노동자로 일하기보다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자유와 평등이 부딪치지 않습니다. 이동해버리면 그만이니까요.
레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전쟁이나 재해의 무질서 위에서만 새로운 길로 갈 수 있는 용기가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폐허나 파국에 의해서만 국가에 의한 질서와는 다른 자생적인 질서를 가진 상호부조적 공동체가 등장한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