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안다는 것.
프로이트 1,2 피터 게이
페미니즘 내에서도 프로이트를 유용한 자원으로 삼는 이론이 있고 비판 세력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정신분석학 자체가 젠더 이론이기 때문에 프로이트를 전제하지 않고는 페미니즘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둘은 근친, 최소 ‘절친’인데 대개는 페미니즘과 프로이트주의가 서로 ‘웬수’지간인 줄 안다.
근대성의 키워드가 ‘개인(주체)’이라면 프로이트만큼 공정하고, 깊이 있고, 폭넓게 인간을 해부한 사상가도 없다.
프로이트 전기 중에서 가장 빼어나다고 평가받는 거장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를 정영목의 번역으로 읽게 되어 기쁘다.
방법에의 도전, 파울 파이어아벤트
과학철학의 걸작인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끊임없이 인용되는 이유는 그가 객관성의 신화를 정면 비판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그것을 신봉하는 집단 안에서만 과학이지, 반례와 새로운 세력에 의해 신앙심이 흩어지면 과학의 지위를 잃고 새로운 과학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이것이 패러다임 혁명이다. 이후 기존 이론은 오류, 데이터, 역사로 남는데, 이 과정이 과학의 발전이다.
파이어아벤트는 “모든 과학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일 뿐 아니라 모든 이데올로기에 객관적인 척도로 이용된다. 기존의 거대한 독단주의는 사실로서 지위를 가질 뿐 아니라 그보다 극히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도그마 없이 과학은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한다.
약자의 대응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객관을 향한 욕망을 접고 자기 입장을 더 깊이 있게 전개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당신 입장은 뭐냐?”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 뜻대로 균형 감각과 중도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물론 불가능하다. 균형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란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권력자의 주관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익명성은 가장 무서운 서명이고 객관성은 가장 강력한 편파성이다.
역사철학 테제,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은 1940년 그가 자살하던 해 <역사철학 테제>여덟번째 장에 이렇게 썼다. “억눌린 자들의 전통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비상사태’가 예외가 아니라 상례라는 점이다.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그 반대자들이 진보를 역사적 규범으로 삼아 이를 들고 파시즘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인생의 시시각각이 비상이고, 민중의 고통으로 품위를 유지하는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민중의 각성이 비상이다.
벤야민이 그토록 비판한 역사주의는 인과관계에 기초한 역사의 연속성, 기원을 전제한 단선적 진화 발전주의, 도달해야 할 바람직한 미래가 있다는 신념을 말한다. 비로 우리 모습이 아닌가? 그는 진리는 불꽃처럼 순간적이며, 역사는 원래부터 파편적이고 또 과거의 승리자와 동일시해서 기록한 것이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려, 진보는 ‘그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회학적 상상력, C 라이트 밀즈
찰스 라이트 밀스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어떻게 소개하든 사족이다. 이 책은 전공을 막론하고 공부를 주제로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고, 인식하고 갖춰야 할 정치학과 윤리학을 다루고 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논하는 부분은 특이하게도 부록인 “장인 기질론”이다. 지식인을 화이트칼라로 여기는 것은 앎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오해다. 자료 조사, 인터뷰, 독서, 집필..... 논문 하나를 위해 수천 쪽의 자료를 읽는 것은 기본이다. 체력과 끈기가 관건이다. 연구는 고된 노동이다.
밀스가 좋아한 용어 ‘기예Craft’는 세 가지 조건을 함축한다. 외롭고 지루한 노동, 완성도에 대한 비타협성, 창의력. “기존의 집단 문화에 저항하라.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방법론자가 되자.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이론가가 되고, 이론과 방법이 지식을 생산하는 실천이 되도록 하자.”
무엇을 할 것인가? , V.I 레닌
<지젝이 만난 레닌 –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권한다. 마르크스라면 몰라도 요즘 세상에 웬 레닌? 이렇게 생각한다면, 레닌주의에 관한 오해가 아니라 지식 일반에 대한 오해다. 사상은 과학이든 이데올로기든 조류가 아니라 현실의 필요와 상황에 근거한 것이다. ....어떤 지역에서 ‘한물간’이야기가 다른 이들에겐 절실할 수 있고 가장 올바른 길일 수 있다. 사상은 보편성이 아니라 공간적 맥락에서 논해져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요지는 변혁 운동에서 나타나는 경제주의 비판과 그 대안으로서 전위 조직 건설이다. 두 가지는 같은 주제의 얘기다. 사회 구조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현실 마르크스주의자 레닌의 크레도(Credo)다. 근대성의 핵심은 계몽, 기획성, 인간 의지에 의한 사회와 자연 개조다. 나는 이 책이 근대적 사유를 끝까지 밀어붙인 최고의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구조와 개인의 관계는 이미 루이 알튀세르, 미셀 푸코, 샹탈 무페 등 수많은 포스트구조주의자에 의해 ‘해결’됐다. 내가 이 글을 쓴 진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 이 수동태 표현이 숨막힌다. ‘하면 된다’가 아니고 무엇인가가 ‘되어 있어야 한다’니. 이젠 무엇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안함으로써 세상이 바뀌길 바란다. 무엇을 안 할 것인가? 무엇이 가장 올바른가 보다 최소한 어떤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가 화두가 돼야 한다.
선악을 넘어서, 프리드리히 니체
두치펑, 푸코, 니체까지, 이 세 텍스트의 공통점은 희망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없고 ‘나쁜 ’ 것 일색이라는 점이다. 좋은 말로 ‘나쁜’ 거지, 이들은 지향 자체가 잔인하고 염세적이다. 근데, 그게 위안이 된다.
니체의 위대함은, 철학이 플라톤 시대부터 순수 정신과 선 자체를 날조하고 이에 상반된 방식으로 지식을 생산해 왔던 기존 인식론의 전제를 뒤흔들었다는 점이다. 즉, 대립적 사고에 필요한 개념인 원인, 결과, 상호성, 숫자, 법칙, 자유, 목적 등은 인간이 만든 것 일뿐 실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부당한 질문을 받는 사람이다. “너 빨갱이지?”, “폭력적이지?” “게으르지?” “더럽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신으로부터 면허라도 받았는가?
성의 정치 성의 권리, 권김현영 외.
선을 구획하는 것은 자연도 신도 아닌, 사소하고 우연한 권력들이다. 이 권력을 가시화해야 한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 포함되길 거부하라.”(한채윤)라는 말이 이 책의 패러다임을 요약한다. 선택 밖에서 선택하라! 제도 안에 머물게 되면 그 안에서 또 다른 배제가 진행되고 굴요적인 자기 조정을 계속 요구받게 된다.
기존 규범을 문제 삼지 않고 그 안에서 약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중 메시지에 ‘자발적으로’ 수갑을 채우는 행위다. 사회가 당연시하는 사유의 경로를 추적하는 것이 지성이고 운동이다. 권력의 법칙을 해체(즉, 인식)하지 않는 저항은 ‘반칙, ’불평불만‘, ’낙오자의 불복‘ 심지어 ’역차별의 가해자‘라는 엉뚱한 비난을 뒤집어쓴다. 인간의 기준이 남성인 상태에서, 여성은 남성과 같음을 주장하면 이중 노동을 해야 하고 다름을 주장하면 시민권을 잃고 피보호자가 된다.
‘주류’가 되고 싶다면 무조건 노력하지 말고 일단, 포함과 배제의 원리를 공부하라. 이 책은 그 노고를 덜어줄 것이다. 여성주의의 실용성과 지적 수월성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빅 이슈, 일본어판214호
세계 41개국에서 발행되며 1만 4000명의 노숙인이 판매원으로 일하는 잡지 <빅 이슈>는 노숙인의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네트워크다. 편집, 기획, 집필에 각 분야의 전문가가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실제작비 외 수익은 모두 노숙인에게 돌아간다.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말은 오랫동안 사회운동에 참여해 온 유명 여가수 가토 도키코(71세)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1989년 베를린 방벽 붕괴부터 2011년 일본 동북부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 이른바 ‘3.11’까지의 인생 역정에서 깨달은 바를 이렇게 요약했다. “레벌루션에는 반란의 의미도 있지만 회전re – volution)한다는 뜻도 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삼라만상은 항상 운동하고 있으니 사는 것이 혁명이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무수한 작은 변화가 세상을 흔들리게 하고 시대를 변화시킨다.”
빼앗긴 우리 역사 되찾기, 박효종 외
나는 광주민주화운동, 4.3 사건에 대한 보수 세력의 ‘역사 날조’에 분노한다. 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비를 반복하지 않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역사 인식을 달리하는 집단이 이분화되지 않고, 각자 내부에서 분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수 진영이 부패 파렴치 집단만이 아닌 지적인 보수, 이데올로기적 보수, 문화적 보수, 사상적 보수 등으로 다양화되고 그들 사이에-서도 비판과 논쟁이 활발해지기를 바란다. 하긴, 우리에게 부재한 것은 토론 문화가 아니라 토론하는 사람이다.
“건국과 산업화는 ‘에피소딕’한 사건이 아니라 ‘시멘틱’한 사건”이라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에피소드는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다. 끼어든 것, 삽화, 간주, 토막 이야기, 큰 흐름에서 벗어난 해프닝이라는 뜻이지만, 에피소드=삽화라는 인식은 역사가 연속적이라는 가정 안에서만 그렇다. 역사는 불연속적이다. 하나의 정사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반복도 법칙도 없다.
이에 반해 ‘시맨틱(semantic)’은 단어, 단락, 기호, 상징의 표현과 함의 등에서 이야기의 관계성을 총칭하는, “문명사적 지성의 큰 흐름”이다. 한마디로 ‘에피소딕’은 우연이고 ‘시맨틱’은 필연이라는 것이다.
문화의 위치 – 탈식민주의 문화 이론 – 호미 바바
‘한 글자도 고치지 말라’는 유형이 있다. 대개 글을 못 쓰는 사람들이다. 원래 못 쓰는 데다 타인의 지혜를 무시하니까 더 못 쓰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편집자가 고치라는 대로 고친다. 이유는 두 가지다. 그들은 무조건 옳다. 독자와의 관계에서는 그들이 전문가다. 또한 누구나 자기 글에 대해서는 객관적 판단이 어렵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점검해줄수록 좋다.
문제는 문장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있을 때다. 이때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담당자의 나이와 지위를 불문하고 ‘싸운다’ (실은, 하소연하다가 사과한다.)
하이브리디티hybridity는 유명한 용어다. 탈식민주의 이론의 핵심 용어로 혼성성, 잡종성으로 번역한다. 이종 식물을 교배하여 제3의 종을 만드는 원예학에서 유래했지만, 호미 바바의 <문화의 위치>를 계기로 하여 근대성 논쟁에 전환점이 되었다. 사실 이 책은 혼성성 개념만 다루기에는 아쉬운, 한 문장 한 문장이 이론인 당대의 고전이다.
혼성성은 역사를 기원이 아니라 흔적으로 본다. 순수성이나 (순수성이 여러 개인) 다양성은 같은 차원의 관념일 뿐, 현실로서 존재할 수 없다.
글쓰기 홈스쿨, 고경태, 고준석, 고은서
은유는 해석자가 개념을 상상한다. 기존 개념은 이동하고 여러 가지로 분화한다. 전이, 전의다. 은유를 잘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비교적 간단한데, 일단 박식해야 한다. 아는 단어가 3개인 사람과 30개인 사람의 언어가 같을 수 없다.
또 하나는 정치적 입장이다. 은유는 특정 세계관 안에서만 작동한다.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2 조혜정
지식인은 해체된 지 오래된 단어다. 임시 복원한다면, 자기 노동과 일상을 언어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통념적 의미로 그냥 쓴다면, 우리 사회에는 세 유형의 지식인이 있다. 지식이 없는 사람, 지식인이라고 주장하고 간주되는 사람, 서구 지식과 ‘지금, 여기’의 경합을 쓰는 사람이다. 조혜정 ‘선생님’은 세 번째에 속하는 극소수 중 한 사람이자, 그중에서도 선구자다. .....만일 나더러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책 열 권을 선정하라면 아홉 권은 모두 이 책 다음이다.
이 책은 절박했던 나를 해명해주었다. 민족 해방과 탈식민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조혜정 덕분에 나는 ‘이상한 여성주의자’이자 ‘삐딱한 민족해방론자’가 될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탈식민 페미니스트로 살아갈 ‘자신감이 생겼다.’
‘주류(서구,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의 범위는 유동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삶과 기존의 언어는 일치한다. 그러나 ‘주변’의 경험은 불일치한다. 이것이 근대의 가장 강력한 통치 방식이다.
에피스테메episteme는 미셀 푸코가 부각시킨 말로서 주어진 시대의 앎의 기본 단위를 말한다. 중심은 앎을 말하지만, 우리는 혼란을 호소한다. 이 혼란은 혼란 자체로 멈출 수도 있지만, 이해되지 않은 새로운 현상이다....바위처럼 보이는 기존의 권력 관계는 의외로 쉽게 조각날 수도 있다. 바위 틈새에 콩을 집어넣고 계속 물을 붓는다. 가진 자의 혼란! 거대한 바위 덩어리, 우리를 억압했던 그들의 거대 담론은 부서진다.
과학과 젠더, 이블린 폭스 켈러
이른바 통섭의 시대에 공부의 ‘유목민’에게 비전공자 운운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사람이 지식인인가? 그런 판관 노릇을 하고 싶으면, 이 정권에서 장관을 하시는 게 맞다. 공부의 의미를 독점하고 지식인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문지기들. 여기 들어오지 마. 그렇게 지킬 것이 없어서 겨우 지식의 문지기 노릇을 하는가?
이 책은 초기 여성주의 인식론을 대표하는 고전으로서 인류 지식의 연원을 추적한다. 개인(남성)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성 차별 주조를 통해 과학과 철학으로 둔갑했는가를 역사, 정신분석, 과학사의 세 차원에서 분석한다.
포스트모던의 조건, 장프랑스와 리오타르
나는 미래에 관심이 없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인생은 ‘사후 해석’이다. 그때 혹은 지금 일어난 일의 의미를 당시에 아는 사람은 없다. 나중에 ‘주변이 정리된 후’, 즉 맥락이 생긴 후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며, 이는 사건 이후의 삶에 따라 달라진다.
포스트는 최근 인류 300년 역사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담론이다. 이 논쟁에서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시간은 순서가 아니라는 것.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순으로 흘러 앞으로 나아간다는 개념은 근대에 고안된 것이다.
흔히 생각하듯 봉건 다음에 근대, 근대 다음에 탈근대가 아니다. “근대가 실현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탈근대?”라든가 “시대 착오, 시기상조”식의 논쟁 구도는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직선적 시간은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이전의 시간 개념은 내부가 닫힌 순환하는 원의 구조로서 미래라는 개념이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고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의 부제도 시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지식의 문제’이다. 총체적 거대 서사에 대한 비판과 재현(표상)의 위기, 인식의 안정성, 확실함, 합리성, 이런 가치들이 도전받기 시작했다.
세계사의 해체, 사카이 나오키 외
사카이 나오키, 도미야마 이치로 등 주목할 만한 일본의 탈식민주의 지식인들이 우리 사회에 잘못 소개되는 방식은 전형적이다. 식민 지배를 반성하는 양심적 친한파 지식인? 그렇지 않다. 이들은 서구 중심주의를 비판하지만 저항의 단위를 국가로 설정하지 않는다. 한국의 국가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좀 더 친근한 글을 고른다면, <세계사의 해체>가 좋다. 깊이와 박학을 두루 갖춘 니시타니 오사무와 나오키의 대담집이며 부제는 ‘서양을 중심에 놓지 않고 세계를 말하는 방법’이다. 동아시아 시각의 탈식민주의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누구나 상황에 따라 ‘미국’, ‘도쿄’, ‘오키나와’, ‘미야코지마’일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중심과 주변이 어디냐가 아니라 자기 위치 설정이다. 중심이든 주변이든 내부의 차이는 내외부의 차이보다 더 큰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심과 주변, 이 이분법의 가장 큰 문제는 실재하지 않는 덩어리를 하나의 단위로 동결시킨다는 점이다. 이것이 현실의 운동을 가로막는 지배의 본질이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제임스 M 케인
<국민과 서사>(호미 바바 편저)에서 제프 베닝턴의 글을 읽고 이 ‘암호’를 해독했다. “포스트맨은 – 벨을 – 두 번 – 울린다.” 모든 음절이 중요하다. 첫째, 우편배달부뿐 아니라 발신자나 방문객은 두 번 행동한다. “딩동, 딩동”, “똑,똑” “여보세요?, 안 계세요?” 한 번 시도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한 번만 길게 누른다면 ‘싸이코’ 혹은 최소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상당한 부정적인 행동의 전조다. 그러니까 ‘언제나 두 번’ 울린다.
둘째, 우편 제도와 인쇄술의 발달은 근대 국민국가의 중요한 물적 토대였다. 그 이전의 사자, 사신은 집단과 집단이나 개인 간의 일대일 메신저였지만 철도의 발달과 함께 온 국민을 횡단하는 전달 제도가 자리를 잡았다. 사자에 비해 동시적, 다중적 소통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남성은 모두 죽는다. 프랭크는 멕시코 출신, 그의 정부의 남편은 그리스인이다. 우편배달부는 국가를 대변하는 국민이다. 이들은 ‘소수자 우편배달부’쯤 될 것이다. 벨 울리기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 같은 행위다. 떠도는 삶, 이유 모를 죽음, 우편배달부끼리 쫓고 쫓기는 삶.
무엇이 달라졌을까. 메시지는 대개 비문으로 되어 있다. 편지 내용을 알고 죽거나 모르고 죽는 것. 이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정확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남성성/들, R, W 코넬
여성주의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사상이라는 인식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것이며 평등이 아니라 정의를 지향한다. 여성주의나 마르크스주의는 당파적이지만 인간 해방을 위한 ‘계몽’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저자 코넬은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적인 석학으로서 남성성 연구의 선구자이며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이다. ‘그’는 남성으로서 자기 몸의 경험을 성찰하면서 여러 차례 성전환 수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를테면 ‘그녀’는 “트랜스젠더 여성이면서 50대에는 머리가 벗겨지고 아내와 사별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를 수밖에 없는 남성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여자는 자기를 잘 아냐고? 인종 차별 사회에서 유색 인종은 자기 처지를 알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말로 답을 대신하겠다.
이 책은 ‘학술적’이지만 사례가 풍부하고 성별 이론 전반에 박식한 옮긴이(현민)의 주석 덕분에 쉽게 읽을 수 있다. 내가 ‘책으로 배웠어요’ 유형이이서 그런지, 남성은 여전히 놀라운 존재다. 흥미로운 생애사와 쉽게 풀어낸 정신분석, 정치학, 퀴어, 역사 이론은 인문학 입문서로서도 손색이 없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안드레아 도킨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원제는 <삽입섹스Intercourse>다. <삽입섹스>는 남성의 섹슈얼리티 권력을 다룬 1970년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대표작인데 여기서 급진적은 발본적이라는 뜻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공적 영역에 국한된 남성 기준의 평등 개념에 반대하고 새로운 사조를 추구했다. 사적인 문제로 간주되는 성, 가족의 권력 관계를 이론화했다. 개인적인 것은 본디, 정치적인 것이다. 인류 최초로 사적인 영역이 정치학의 대상이 되었다.
무지는 약자를 무시하는 권력에서 나온다. 자신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여성’과 ‘흑인’의 목소리를 공부하지 않는다. 간혹 고민하더라도 그것을 공부로 착각해서, 자기도취와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여성은 남성 이론을 모르면 무시받지만, 남성은 좌우를 막론하고 여성주의는 물론 자기 생각도 모르는 이가 숱하다. 주체가 타자를 모르면 자기를 알 수 없다. 간단한 이치다.
좌파는 무엇으로 사는지가 궁금한가? 무지로 산다. 이는 여성주의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해당한다. 거듭 말하지만, 의미는 찾아나서는 것이다. 있는 의미는 이미 권위다. “현존하는 것이 진리일리는 없다.” (<좌파로 살다>, 에른스트 블로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