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Judge You By Your Bookshelf>는 처음에는 머리를 끄덕이며 나만 그런 거 아니었어! 하면서 재미있게 읽었지만 뒤로 갈수록 글 쓰는 사람이 공감할 내용이라 흥미가 좀 떨어졌다. 더군다나 중간에 라틴어가 나오면서 라알못인 나는 일일이 사전을 검색해가며 보니 더욱 그랬다. 이런 건 딱 보고 푸하하 해야 하는데 단어 찾아서 아 이렇구나 하하하 이렇게 열 박자는 늦게 웃게 되니 말이다.
그러다 페넬로페 님과 잠자냥 님의 페이퍼를 보게 되었는데 나도 내 책장에 있는 책에 대해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제 읽은 책도 가물거리는 내 기억력 탓에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책' 뭐였지? 무지 많았던 거 같은데? '펴볼 엄두가 안 난 책'도 많았잖아? 근데 제목이 뭐였더라... 이렇게 내려가다가 아,이거다! 싶은 대목이 있었다. '어째서인지 두 권 있는 책' (책에는 세 권 있는 책인데 페넬로페님과 잠자냥님 모두 두 권으로 하셨길래. 사실 나는 세 권을 가지고 있는 책은 없다.)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책을 가지고 있는 걸 까먹고 또 사거나, 가지고 있는 걸 알지만 좋아하는 책이라 다른 에디션을 또 사거나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치(?)를 누릴 수가 없다. 해외에 살고 있다보니 책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가 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겁도 없이 해외 배송으로 책을 구입하기도 했지만 배송료가 너무 부담스러워 (알라딘 US 같은 경우는 얼마 이상 구입 시 미국 내 배송료가 없지만 책값 자체가 무척 높게 책정되어있다) 한국에 갔을 때만 책을 구입해 직접 들고 왔다.(어떤 해에는 책만 100권을 들고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너무 고생한 이후 한 번에 30여 권을 넘기지 않는다) 이렇기 때문에 책을 살 때 심혈을 다해 고르고 같은 책을 구입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두 권씩 가지고 있는 책은 어떤 것일까?
대학 시절 작고 마른 체구(지금은 체중조절을 경고받은 후덕한 아줌마가 되었지만 대학 시절에는 형제복지원 탈출자라고 할 정도로 빼빼 말랐었다)였던 나는 보기와 다르게 술을 아주 잘 마셔 술친구가 많았다. Y는 과 친구였는데 연애가 잘 안 풀릴 때 나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그가 채였다고 하면 위로주를 같이 마셔주곤 했었다. 이과생이라 책을 읽는 남학생이 별로 없었는데 Y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라 이야기가 잘 통했다. 그가 나에게 건네주었던 책. 장 그르니에의 '섬' 과 '어느 개의 죽음에 관하여' 내가 처음 '섬'을 읽었을 때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마구 뛰었던 느낌과 읽고 또 읽으며 줄 긋고 노트에 적었던 그 순간의 기억은 생생하다. 이 책으로 술친구 중 한 명에서 마음까지 통하는 특별한 이성 친구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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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청하에서 나오는 장 그르니에의 전집을 하나씩 모았다. 사실 청하의 '섬'은 전집을 맞추느라 나중에 샀고 읽지는 않았다.
이번에 이데아 총서의 '섬'을 펴보고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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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한자가 막 섞여 있네. 나 한자 까막눈인데 이거 어떻게 읽었지? 그리고 생각해보니 1988년 한겨레 신문이 한글로 된 신문을 창간하기 전에는 모든 신문에 한자가 함께 사용되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별일이 아니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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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지고 있는 '청하'의 그르니에 전집
대학 시절 내가 좋아하던 작가 중 한 명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였다. '그리스인 조르바'에 푹 빠진 뒤 고려원에서 나온 그의 전집을 마구 읽었는데 그때 Y가 추천해 준 책이 바로 '성 프란시스코'였다. 당시만 해도 신심이 무척 깊었던 Y와 함께 카잔차키스의 작품을 읽고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하던 기억이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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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욱 가깝게 해 준 '그리스인 조르바'는 집에 없어서 나중에 구입을 했고, 이번에 친정 아버지 책장에 있는 것을 내가 들고와 두 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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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서로 책을 권해주고 좋은 책에 같이 흥분하던 Y는 시도 썼었는데 가끔 술집에서 같이 술 마시다가 냅킨에 즉석에서 시를 써주기도 하고, 단골 카페의 낙서장에 쓴 시에 누가 곡을 붙였다며 주인 아저씨가 건네준 적도 있다. 이러니 내가 안 넘어갈 수가 있나!
하지만 그는 결혼 후 책은 한 권도 읽지 않았고 시는 고사하고 편지나 카드도 쓰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건 나를 꼬시기 위해 작전을 쓴 거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쓰다 보니 책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연애 이야기가 된 거 같아 좀 민망한데... 실은 옛날 생각이 떠오른 건 며칠 전이 결혼 기념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우리 이번 결혼 기념일도 (평소와 같이!) 그냥 넘어갑시다! 라고 선언을 했는데 둘째 엔양이 어찌 결혼기념일을 그냥 넘어가냐고 자기가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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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니 허접해 보이는데 우리 가족들이 무척 좋아하는 요리이다.
그리고 엔양은 나한테 카드를 하나 사서 건네면서 "엄마, 아빠한테 카드라도 쓰세요." 라고 한다. "엄마가 카드도 안 샀을 거 같아서..." 나를 너무 잘 아는 딸. 무심한 나한테서 어떻게 저렇게 다정한 아이가 나왔는지 참으로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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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사온 꽃(발렌타인스 데이 꽃이 남아있는데 꽃을 또.... 융통성 제로임) 과 케익
엔양이 나 대신 사서 쥐어 준 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