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연간 통계 리포트

 

 

시간 단위는 단순한 약속일 뿐이야. 시간에는 눈금이 없지. 세기가 바뀔 때 총을 쏜다거나 종을 울린다든지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뿐이야.

 - 토마스 만, 『마의 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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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연말은 기분이 영 꿀꿀하다. 그렇다고 올해 빼고는 매년 연말마다 기분이 뿌듯했던 것도 아니다. 올핸 경제도 연말로 올수록 점점 더 내려앉는 듯한 느낌인 데다가, 기분 좋은 뉴스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구경조차 하기 어렵다.

 

오늘은 괜히(?) 알라딘에 들어 왔다가 '서재 결산' 때문에 꿀꿀한 기분이 살짝 더해졌다. 최근 몇 년 동안 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번쩍 나타나던 '서재의 달인 앰블럼'조차 나를 외면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못 태연자약하게 '내 이럴 줄 알았지' 라고 말할 기분도 아니다. 예년에 비해 서재활동이 영 부실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를 아예 저버리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내가 쓴 글이 확실히 적기는 했다. 통계상으로는 총 111개의 글을 올렸다고 하지만, 밑줄긋기로 올린 글이 무려 7할이나 되고, 내가 손수 지은 글은 고작 35개에 불과했다. 그러고도 무슨 앰블럼이 붙길 바랬나 싶다.

 

2018년 oren님이 작성해주신 글은 총 111개이며, 작성해주신 글자수는 2,153,982자 입니다. 이는 <엄마를 부탁해> 같은 단행본으로 만든다면 18.7권을 출간할 수 있는 분량입니다.
oren님은 전체 알라디너 중 399번째로 글을 많이 작성해주신 알라디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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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oren님이 작성해주신 글은 총 151개이며, 작성해주신 글자수는 2,851,134자 입니다. 이는 <엄마를 부탁해> 같은 단행본으로 만든다면 24.75권을 출간할 수 있는 분량입니다.
oren님은 전체 알라디너 중 233번째로 글을 많이 작성해주신 알라디너십니다.   

 

 

그런데, <알라딘 서재 / 북플 결산 2018> 코너에 갔더니, 뜻밖에도 < 방문자가 많은 서재>에 내 서재가 네 번째 순위에 올라 있었다. 이게 무슨 변고인가 싶었다. 1년에 고작 35개의 글을 올린 게으른 서재가 어찌 감히 1년에 수백 편씩 혹은 수천 편씩 글을 올리는 다른 분들의 서재를 제치고 감히 그 자리에 올라설 수 있다는 말인가.

 

너무나 의아하여 방문자 통계를 찾아 봤더니,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1년간 총 방문자는 327,857명이며, 방문자가 가장 많았던 날은 8월 7일(화)119,614명이 방문하셨습니다.

 

 

알라딘에 자리를 튼 지 10년도 넘었지만, 여태까지 쌓인 누적 방문자수가 668,885회에 불과한데, 지난 여름 몹시도 뜨겁던 어느 하루에만 무려 119,614명이 내 서재를 방문했던 것이다! 어쨌든 알라딘 통계는 결코 허위와 조작을 하지는 않을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연유로 내 서재를 방문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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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나? 어쩌면? 했던 얌체스런 앰블럼에 대한 헛된 기대는 이제 깔끔하게 사라졌지만, 그래도 스스로를 위로할 만한 구석이 아예 없지는 않다. 경제적 효익이라는 측면에서는 뜻밖에도 쏠쏠한 성과를 거뒀기 때문이다. 밑줄긋기 형식으로 올린 글을 제외하면, 꼴랑 35편의 글만 올리고도 무려(!) 15편의 당선작을 냈으니 말이다. 암튼, 이제는, 마지막 꼬랑지밖에 붙들 게 없는 개같은(어쨌든 戊戌년은 개年이니) 18년은 이쯤에서 깔끔하게 떠나 보내고, 다가올 19년이나 씩씩하게 맞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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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o 2018-12-20 0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이 엠블렘을 달지 못하셨다는 사실이 엠블렘의 가치를 의심스럽게 만드네요..... 다른 것도 아니고 서재의 ‘달인‘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서는 누구보다 ‘달인‘에 부합하는 oren님을 선정하지 않다니......

    oren 2018-12-20 01:17   좋아요 0 | URL
    아이고... 그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을요...
    서재를 매일같이 뜨겁게 달구신 ‘달인‘ 분들이 얼마나 많으신데요...
    저는 서재를 늘 서늘하게 식힌, 말하자면 그 누구보다 ‘안 달인‘ 축에 드는 사람일 뿐입니다요.^^

    syo 2018-12-20 01:33   좋아요 1 | URL
    말도 안 되는 ‘과공‘이십니다. 알라딘의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거구요ㅎㅎㅎ

    그리고 어차피 이런 허울에 동요하지도 않으시겠지요ㅎㅎㅎㅎㅎ

    바람도 자는 겨울밤입니다. oren님 오늘도 이달도 한 해도 잘 마무리하시길^-^

    oren 2018-12-20 11:54   좋아요 0 | URL
    알라딘 나름의 선정 기분이 있고, 저는 그 기준에 미달된 거 뿐이니,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아무쪼록 syo 님께서도 올 한 해 잘 마무리 하시길요.^^

    카스피 2018-12-20 0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아쉽게도 엠블렘을 달지 못하셨지만 15개의 당선사실이 당당히 서재의 달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것이라고 샤료됩니다^^

    oren 2018-12-20 12:01   좋아요 0 | URL
    제 스스로 돌아 보더라도, 올핸 알라딘 서재 활동에 소홀했다는 걸 많이 느꼈답니다.
    올린 글을 살펴 봤더니, 금년 5월과 7월에는 아예 단 하나의 글도 올리지 않았더군요.
    어떤 달은 딸랑 글 하나만 올렸었고요.
    그런데도 저렇게 자주 당선작으로 뽑아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요.^^

    2018-12-20 0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0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8-12-20 0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18년 oren님의 글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가야할 길을 확인했습니다. 항상 감사드리며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oren 2018-12-20 12:04   좋아요 1 | URL
    제가 드릴 말씀을 겨울호랑이 님게서 다 해 주셨네요.^^
    늘 성원해 주셔서 감사드리고, 내년에도 더욱 좋은 한 해 만드시길 바랍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0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이 서재의 달인이 아니시라는 사실이 조금 놀랐습니다 너무나 깊고 견고한 글들을 써주시는데, 단순히 빈도 탓이라니 씁쓸합니다만, 그 Oren님의 내공이 어디가겠습니까? 알라딘에서 Oren님을 만난 것도 저에겐 행운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로 많은 도전 주시길 바랍니다 ^^

    oren 2018-12-20 12:20   좋아요 1 | URL
    알라딘에는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공이 깊으신 분들도 많은데, 서재의 달인 선정 기준 때문에 그런 분들이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는 듯해서 살짝 아쉬울 때도 있더라구요. 알라딘 서재 활동 기준이 요 몇 년 사이에 북플 활동 위주로 너무 급작스럽게 바뀐 탓에, 북플 기능을 잘 쓰지 않는 분들이 알게 모르게 자꾸만 뒷전으로 밀려나는 듯한 느낌도 들고요. 알라딘의 정책이 그러하니, 그저 그려려니 합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4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알라딘에서 소통하게되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늘건강하시고 즐거운 성탄절 되십시오!

    oren 2018-12-25 14:05   좋아요 1 | URL
    제가 카알벨루치 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요.
    아무쪼록 카알벨루치 님께서도 즐거운 성탄절과 연말 보내시길요.^^
     

     

     

    테디(2003.10.1∼2017.9.30)

     

    테디를 보낸지도 어언 1년 하고도 두 달이 지났다. 오늘 문득 그 녀석이 사무치게 그리워 또다시 사진을 들춰봤다. 십수 년 동안 내가 찍은 사진들 가운데 오로지 테디의 모습만을 찾아 모든 사진 폴더를 다 뒤지기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맨 처음 뒤진 때는 테디가 죽은 바로 그날, 따사로운 가을 오후였다. 그날 저녁 예약 시각에 맞춰 화장하기로 했고, 그 때 모니터에 띄울 '영정 사진'이 필요하다고 했다.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어미곁을 떠나 우리집으로 입양된 테디는 꼬박 14년을 우리와 함께 살다 떠났다. 죽을 때까지 크게 앓은 적도 없을 만큼 내내 건강했지만, 죽기 일주일 전쯤에 심장이 마비되어 졸도한 적은 있었다. 거실에서 쓰러진 그날 저녁에 곧바로 돌연사 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거실에서 쓰러져 버둥거리다가 의식조차 희미해진 테디를 부여 안은 채 아내는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동네 동물병원을 알아보느라 핸드폰을 든 손이 너무 와들거려서 검색할 단어조차 두드릴 형편이 안 됐다. 이미 똥오줌까지 싸면서 정신이 가물거리는 녀석을 데리고 뛰다시피 동물병원으로 가는 동안에 갑자기 녀석이 다시 정신을 차렸고, 품에서 내려 놓으니 어그적거리면서 제 발로 멀쩡히 걷는 게 아닌가.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맙던지.

     

    온갖 검사를 다 하고 약까지 타 왔지만 걱정이 태산이었다. 심장이 안 좋다고 했다. 죽기 전까지 일주일 동안은 호흡할 때 힘겨운 모습을 자주 보였다. 14년 동안 오로지 '테디와 함께' 살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던 아내는 테디가 죽기 하루 전날 친구들과의 약속 때 통음을 했다. 집에서 10분 거리도 안 되는 곳에서 초저녁부터 술을 마셨는데도, 9시도 안 된 시각에 전화를 걸어 보니 이미 집까지 걸어올 수 없을 정도로 만취 상태로 곤죽이 되어 있었다.

     

    집에서 나홀로 테디를 돌보다가 아내를 데리러 집을 나섰다. 아내의 전화기를 바꿔들고 통화한 아내 친구의 말인 즉슨, 저녁 내내 아내는 "테디 없이 어떻게 살라고..." 라는 말만 수없이 되뇌이면서 연신 눈물 범벅으로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아내를 만나 집까지 데려 오는 동안에도 아내는 몇 번이고 공원의 턱끝마다 주저 않아 '테디 없인 못 살아'를 반복하며 슬퍼했다. 몇 번씩이나 토하는 바람에 등을 두드려주기도 바쁠 정도였다. 테디는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아내가 이렇게나 괴로워 하다니, 앞으로 어쩌면 좋을까' 싶은 생각 뿐이었다. 막막했다.

     

    아내를 부축해서 간신히 집으로 들어왔지만, 환자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 있을 뿐이었다. 그날 저녁 내내 호흡에 힘들어 하던 테디와 과음 탓에 술병이 날 정도로 몹시 괴로워 하는 아내는 둘 다 힘에 겨워 서로를 돌 볼 힘조차 없었다. 아내는 입밖으로 '테디야, 테디야'를 연신 내뱉지만, 그뿐이었다. 거실 바닥에 퍼져 엎드려 숙취로 끙끙 앓았다. 그토록 아내를 따르던 테디 또한 '엄마의 이상한 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볼 뿐, 아내에게 다가설 기운도 없이 색색거리기만 했다. 그런 두 환자를 바라보는 나는 그저 '테디야, 많이 아파? 제발 아프지 마' 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지켜보다가 나도 잠에 들었다. 당장에 큰 일은 없으리라 믿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곤하게 늦잠을 잤다. 열시쯤이나 됐을까, 아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깨웠다. "여보, 테디가 또 이상한 거 같아." 일어나 보니 테디는 첫 번째 심장 마비때 보이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그때보다 '훨씬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다는 느낌'만 다를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게 끝일 듯했다.

     

    딸까지 깨웠다. 테디와의 마지막 이별이 목전이었다. 녀석은 엄마 품에 안겨서 잠이 들듯이 차분하면서도 고요하게 호흡을 가라앉혔다. 그 시간이 무려 15분에서 20분쯤 지속되는 듯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녀석의 눈은 한 번도 엄마의 눈을 떠나지 않았다. 그토록 발랄하던 녀석이 이토록 고요하게 우리와 작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엄마, 아빠, 언니의 눈물 젖은 눈으로 건네는 수많은 작별 인사를 한번이라도 더 듣고 떠나겠다는 듯이, 녀석은 아주 오래도록 미세한 호흡을 멈출 줄 모르고 이어 나갔다. 그리곤 멎었다.

     

     

     

    2007_08_01, 다섯 살 때, 사람의 나이로는 스무 살쯤 될 터이지만, 테디의 겉모습은 어린 개구장이일 뿐이다.

     

     

    2011_02_08, 둘째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천연덕스레 중간에 끼어들어 '앨범 구경' 중이다.

     

     

    2011_02_08, 거실 바닥이 매끄러운 게 테디에겐 늘 불편했다. 그래서 늘 미안했다.

     

     

    2011_03_29, 따사로운 봄 햇살을 즐기는 테디

     

     

    2011_04_25, 이 녀석은 엄마가 외출하고 없을 땐 어김없이 내 방문을 긁는다. "아저씨, 뭐해?"

     

     

    2013_11_23, 아침 햇살이 따사로운 늦가을 어느 날, 어김없이 양지바른 데를 골라 햇살을 즐기고 있다.

     

     

    2013_11_23, (비록 테디는 안 보이지만) 녀석이 주로 머무는 거실, 테디가 없는 지금과 그때는 얼마나 다른가.

     

     

    테디가 떠난 빈 자리는 생각보다 너무나 컸다. 테디가 죽은 날, 오후 늦게 학교 기숙사에서 집으로 돌아온 아들 녀석은 체온이 다 빠져나간 테디를 말없이 쓰다듬고 나더니, 자기 방에 홀로 틀어박혀 눈이 벌개지도록 울었다. 테디가 엄마 다음으로 좋아했던 게 오빠였고, 아들 녀석도 테디를 몹시 사랑했다. 테디가 일통을 저지른 게 발각되어 엄마나 아빠한테 꾸중을 듣고 혼이 나면, 녀석은 어김없이 오빠 품으로 기어들어가 다음날 아침끼지 나올 줄을 모를 정도였다.

     

    테디가 죽고 난 뒤 아내의 슬픔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처음엔 아파트 주변의 공원을 나서는 것조차 겁낼 정도였다. 14년 동안 사귀었던 애완견 부모들을 마주칠 때마다 눈물부터 왈칵 쏟아냈다. 그런 현상이 몇 달씩이나 지속되었다. 전화 통화를 할 때에도 '테디 얘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쏟았다. 몇 달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테디의 무덤'을 찾았고, 그때마다 눈물을 바가지로 쏟았다. 1년이 다 되도록 테디를 잃은 슬픔은 누그러질 기색조차 안 보일 정도였다. 적어도 '3년은 간다더라'는 말을 위안 삼아 내뱉았다.

     

    그동안 여러 차례 또다른 강아지를 키워 볼까 고심했지만, 테디를 잃은 트라우마 때문에 도저히 다시 시작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나중에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나면 그 때 다시 생각해 볼까, 지금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옆에서 보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지 싶었다. 나도 아내와 함께 테디를 묻은 '호숫가 양지 바른 무덤'을 자주 찾지만, 아내에 비하면 나의 감정은 목석이나 다름없다. 아내는 거길 찾을 때마다 온갖 종류의 꽃잎을 따다 주거나, 꽃이 시든 계절이 되면 나뭇가지에 매달린 이쁜 열매라도 기어코 따다가 얹어 준다. 빈손으로 가는 법이 없다. 지난 겨울엔 눈이 잔뜩 쌓인 날에 테디한테 찾아갔다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눈을 감고도 찾아낼 만한 위치인데도, 눈을 파헤쳤더니 표식으로 얹어 놓은 돌맹이가 나타나지 않아 한참이나 헤맸다는 것이다.

     

    이런 아내의 모습을 너무나 자주 지켜 보고 나니,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 과연 얼마만큼 클 것인가를 희미하게나마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실상은 그저 말 뿐이다. 그런 경험을 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그런 아픔이 결코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경험해 보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살아서 오래도록 함께 했던 존재를 영원히 상실하는 아픔과 슬픔은 나이가 들수록 무뎌질 법도 하다. 몽테뉴가 『수상록』의 마지막에 특별히 배치했던 <경험에 대하여>에서 말했던 것처럼, 삶은 갑자기 죽음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차츰 옮겨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얼마만큼 살고 나면 생명체는 그만큼 살아 있는 부분이 줄어 들고, 죽어 가는 부분이 그만큼 커진다는 얘기다. 그러니 살 만큼 살다가 따사로운 가을날 아침에 아내와 함께 '산책'까지 마무리하고, 북어포를 섞어 넣은 특식까지 실컷 배불리 먹고 난 뒤, 고통없이 깔끔하게 가족들과 기나긴 이별의 시간을 차분히 함께 한 끝에 고요히 죽음으로 옮겨 간 테디는 정말로 행복한 녀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삶의 에너지를 실컷 분출해 보기도 전에 갑작스레 맞는 죽음은 얼마나 사람들을 미치도록 만드는가. 우리에게 초월주의 철학자이자 유니테리언 목사로만 알려진 랄프 왈도 에머슨 같은 젊잖은(?) 사람도 '상실의 고통' 때문에 광기어린 행동을 보인 적이 있었다. 너무나 젊고 아름다운 아내와 신혼의 단꿈에 젖어 행복을 만끽하기도 전에 아내가 급작스레 병사하고 나자, 사무치는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아내의 무덤'을 파헤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폭풍의 언덕』에서 사랑하는 애인을 향한 광풍 같은 열정과 집착을 보여준 히스클리프도 마찬가지였다. 여주인공 캐서린이 신분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딴 남자와 결혼하지만, 두 사람의 열정적인 사랑은 조금도 식지 않는다. 캐서린이야말로 히스클리프에겐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였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캐서린이 병들어 죽자 더욱 거세진다. 히스클리프는 복수에 불타고, 캐서린을 향한 광적인 집착 때문에 결국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두껑까지 열어젖힌다. 한창 불타올라야 할 생의 에너지가 급작스럽게 중단되면서 초래되는 생명의 반발력이 그만큼 강렬했던 셈이다.

     

    창졸간에 사랑하는 젊은 아들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또한 얼마나 가슴 시린가. 한껏 피어보지도 못한 채 한 순간에 폭삭 스러져 땅 속에 묻히고 만 아들의 무덤을 찾는 부모의 가눌 수 없는 슬픔을 그 누가 감히 짐작이라도 해볼 수 있을까. 그런 일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다만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슬픔을 가슴 서늘할 정도로 아름답게 표현한 문학 작품을 통해서나마, 가까스로.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들도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러시아의 한 벽촌에 조그만 마을 공동묘지가 있다. 러시아의 거의 모든 공동묘지가 다 그렇듯이, 이 공동묘지도 서글픈 모습을 하고 있다. 공동묘지를 에워싼 도랑은 오래전부터 잡초로 뒤덮였다. 잿빛 나무십자가들은 옆으로 기울어진 채 예전에 한번 페인트칠을 했던 십자가 지붕 밑에서 썩어가고 있다. 돌비석들은 마치 누군가가 밑에서 떠밀어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씩 제자리에서 벗어나 있다. …… 그러나 그 무덤들 가운데 사람의 손길도 닿지 않고 동물의 발에도 짓밟히지 않은 무덤이 하나 있다. 그저 새들만이 그 위에 앉아서 노래를 부를 뿐이다. 철책이 무덤을 둘러싸고 있고, 어린 전나무 두 그루가 양쪽 끝에 심겨 있다. 이 무덤에 예브게니 바자로프가 묻혀 있다.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서 이미 노쇠한 부부가 자주 이 무덤을 찾아오곤 한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온다. 울타리에 가까이 다가가서는 무릎을 꿇고 쓰러져 오랫동안 서럽게 울면서 말 못하는 비석을 빤히 바라본다. 그 비석 아래 그들의 아들이 누워 있다. 그들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면서 비석에 앉은 먼지를 털고 전나무 가지를 다듬어주다가 다시 기도를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거기에 있으면, 아들에게 더 가까이 있고, 아들과 관련된 추억에 더 가까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정말로 그들의 기도, 그들의 눈물이 헛된 것일까? 정말로 사랑, 그 성스럽고 헌신적인 사랑이 무력한 것일까? 오, 아니다! …… 그것들은 영원한 화해와 무궁한 생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 (315∼316쪽)

     

     -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이런 모든 경우를 두루 헤아려 보면, 테디는 살아 있는 동안에 온갖 누릴 거 실컷 누리고 떠난 행복한 녀석이 틀림없다. 더군다나 늙어 죽을 때까지도 병치레는 좀처럼 겪지 않았고. 그러니 이제는 테디를 잃은 슬픔보다 그 녀석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순간들을 차분히 추억할 때도 되었다. 나보다 수십 배나 더 많은 시간을 테디와 함께 보냈던 사람은 언제나 '테디 엄마'로 불렸던 아내다. 그녀의 슬픔은 나보다 수십 배, 혹은 수백 배나 큰 게 틀림없다. 그렇지만 테디 엄마도 오랫동안 테디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 만큼, 이제는 테디를 아름답게 추억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아내는 아직까지도 내가 이토록 담담하게 테디에 대한 추억담을 길게 쓰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할런지도 모르겠다. 테디에겐 테디 엄마가 세상의 거의 전부였고, 그런 테디와 다시는 영영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그 녀석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겪는 아픔이고 슬픔이며, 그 아픈 상처가 다 아물기에는 아직도 시간이 충분히 흐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쓰기 시작한 글이 어느새 너무 길어졌다. 이쯤에서 가만히 테디를 다시 떠나 보내야겠다. 그 녀석과 헤어지는 마당에, 쓸데없는 줄 알면서도 괜한 부탁 하나 해보고 싶다.

     

    "테디야, 제발 꿈속에서라도 자주 나타나 주렴. 네가 너무 보고 싶구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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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선 2018-12-11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 2018-12-11 05: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외국 생활을 하던 몇년을 제외하고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반려견과 떨어져 생활해본 적이 없답니다.
    이별도 몇번 경험했고요.
    글을 어찌나 구체적으로 섬세하게 잘 쓰셨는지 마치 제가 키우던 테디를 보낸 것 같은 심정이 되어 읽었습니다.
    사진 속의 테디, 너무나 사랑스럽고 착해보여요.

    oren 2018-12-11 12:21   좋아요 1 | URL
    저희는 반려견을 딱 한 번 키워보고도 사별의 슬픔이 너무 커서 다시 키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데, hnine 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몇 번씩이나 겪으셨다니, 그런 멘탈이 너무 부럽습니다.^^

    사실, 테디를 보내고 나서 몇 차례나 ‘다시 키워 볼 생각‘을 안 햇던 건 아닌데, 아직까지는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한때는 아들 녀석이 ‘주인 잃은 강아지‘를 길거리에서 발견해서 꼭두새벽에 집으로 데려온 적도 있었고요. 엄마가 너무 크게 상심하는 걸 보고 꾀를 낸 셈인데, 우여곡절 끝에 결국 주인을 찾아주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테디는 겉모습은 몹시 착해 보이지만, 주인 말고는 그 누구도 함부로 만져볼 수도 없을 만큼 성격이 까칠한 녀석이었어요. 오로지 주인에게만 사랑받고 싶어 했던 녀석이었지요.^^

    겨울호랑이 2018-12-11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께서 지금도 테디를 이처럼 잊지 못하고 계신 것을 보니, 테디가 얼마나 사랑받고 지냈는지 알겠습니다. oren님 마음이 잘 전해졌으리라 생각합니다...

    oren 2018-12-11 12:35   좋아요 1 | URL
    저희 가족들도 테디를 사랑했지만, 테디가 가족들한테 보여준 사랑과 놀라운 충성심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죠. 아내와 둘이서 함께 산책을 나갔다가 어느 한 사람이 잠깐씩 다른 일이라도 볼라치면, 테디는 결사적으로 그 자리에서 버티면서 도통 움직이질 않아서, 그때문에 자주 곤란을 겪을 지경이었죠.^^

    qualia 2018-12-11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좀 엉뚱한 생각입니다만, 가희(개)들도 인간처럼 말을 할 수 있는 때가 오리라 봅니다. 그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터무니없는 공상이나 SF가 아닙니다. 현재 개의 진화 단계는 인간처럼 음을 또박또박 끊어서 발음할 수 있는 성대 구조가 아니죠. 해서 개가 주인인 인간한테 아무리 말을 하고 싶어도 왈왈, 멍멍, 우우우~ 하는 소리밖에 내지 못하게 돼 있죠. 한데 인간의 도움을 받는다면 개도 말할 수 있는 단계까지 진화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유전자 조작이나 다른 뭐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반영된 끔찍한 시나리오말고요. 개뿐만 아니라 다른 애완동물들, 반려동물들도 인간의 말을 이해하고 할 수 있는 때가 아주 먼 원미래지만 오리라 확신합니다. 주인님, 제가 주인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나요? 왈왈, 멍멍, 우우우~ 제가 주인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인님은 절대 모르실 겁니다. 왈왈, 멍멍, 우우우~

    oren 2018-12-11 12:46   좋아요 1 | URL
    개들이 생각보다 영리해서 자주 들려주는 몇 가지 말들은 꽤나 정확하게 이해하더라고요. 가령, ˝테디, 산책?˝ 하면 금세 ‘아이, 좋아라~‘ 하고 깡총깡총 뛰어다니고, ˝아저씨도 같이?˝ 라고 한 마디 덧붙이면, 제가 따라 나설 때까지 졸라대면서 몹시 완강하게 버티는데, 이 정도는 아주 약과지요. 청각과 후각은 그토록 발달된 녀석이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인 ‘인간의 언어‘를 조금도 구사할 줄 모른다는 건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긴 한데, 그래도 말 한 마디 못하는 동물이 보여주는 ‘주인에 대한 무한대의 충성심‘만큼은 사람도 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책에 얽힌 에피소드와 프란츠 베르펠에 대하여...

     

     

    어떤 여성이 탁월한 미모와 재능을 타고난 덕분에 당대의 저명한 여러 인물들과 폭넓은 교제를 갖는다는 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한 그녀가 뛰어난 미술가들의 영혼을 뒤흔든 끝에 세기적인 명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녀가 단지 몇몇 유명한 그림에 등장하는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당대를 주름잡았던 세계적인 음악가와 건축가와 문학가와도 두루 함께 살아 보기도 했다면? 그것도 세 번에 걸친 정식 결혼을 통해서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싶지만,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는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던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알마 말러였다. 그녀가 미술 작품의 실제 모델이라고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와 오스카 코코슈카의 그림 <바람의 신부>였다. 우선, <바람의 신부>라는 유명한 그림부터 간단히 살펴 보자. 그녀의 '바람 같은 삶'이야말로 '바람'과는 결코 떼어놓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바람의 신부> 혹은 <폭풍우>, 1914년. (출처 : 위키백과)

     

     

    폭풍처럼 강렬한 사랑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의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화가로 특유의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표현주의 미술을 선보였다. 《바람의 신부》 혹은 《폭풍우》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이 작품에서 코코슈카는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감정을 거친 붓 터치와 차고 어두운 색채에 실어 화폭에 담았다.

    이 작품이 유독 격정적으로 읽히는 것은 그림 속의 연인이 바로 화가 자신과 그가 열렬히 사랑했던 알마 쉰들러를 모델로 하였기 때문이다. 알마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 에밀 야곱 쉰들러의 딸로 미술과 음악을 공부하였으며, 타고난 미모와 지성으로 뭇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스물두 살 꽃 다운 나이에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를 만나 결혼하였고, 말러가 사망한 이후에는 바우하우스를 창설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하였으며, 다시 작가 프란츠 베르펠의 아내가 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 역시 한 때 이 여인과 연인관계였다.  

     - 네이버 지식백과, <바람의 신부> 

     

     

    알마 말러(Alma Mahler: 1879-1964)

     

     

    그렇다. 알마 말러는 화가의 딸이자 작곡가의 아내였다. 자신의 직업 또한 '작곡가'였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음악도시 빈을 대표하는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명성을 떨친 천재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가 그의 첫 남편이었다.

    그녀의 이름 뒤에 말러라는 성이 따라붙지 않았을 때, 그녀의 이름은 알마 쉰들러였다. 그녀는 1879년 당대의 저명한 화가였던 에밀 야콥 쉰들러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말러와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공연 감독 막스 부어카르트, 작곡가 알렉산더 쳄린스키, 그리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염문설을 뿌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 가운데 클림트는 알마 쉰들러의 첫 키스를 차지한 남자로 알려졌고, 그 덕분에 그녀는 (뜻밖이면서도 영광스럽게)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에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예를 차지할 수 있었다.

     

     The Kiss (Lovers), 1907–1908.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출처 : 위키백과)

    알마 쉰들러는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한 여러 남성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1902년 3월 9일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한다. 무려 20살의 나이차를 극복한 결혼이었다. 결혼 후 그녀는 작곡가의 꿈을 접고 두 딸의 어머니로 살아가지만, 첫 딸이 죽자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깊은 관계에 빠진다. 말러도 이 사실을 알고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쓴다. '천인 교양곡'으로도 불리는 교향곡 8번은 바로 그 무렵에 그녀를 위해 쓰여진 곡이었다.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구스타프 말러가 죽자, 알마 말러는 발터 그로피우스와 두 번째로 결혼하지만 첫 남편과 사별한지 한참이나 뜸을 들인 후였다. 그로피우스와 재혼하기 전까지 연인 관계로 지낸 또다른 남자가 오스카 코코슈카였다. 이 화가는 알마 말러가 건축가와 재혼한 이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그녀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알마와 헤어지자 코코슈카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자진해서 입대했고, 이내 전쟁터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되돌아 온다. 사랑의 아픔을 잊기 위해 군대에 갔다가 몸까지 다친 셈이었다. 그는 옛 사랑을 잊지 못해 '알마를 닮은 인형'을 제작해서 함께 생활할 정도로 알마 말러에게 집착을 보였다. 심지어 오페라 공연을 갈 때에도 그 인형의 자리를 예약할 정도였다니 그의 집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만하다. 그는 그녀에게 아주 많은 편지를 썼는데, 70번째 생일날에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사랑하는 나의 알마! 당신은 아직도 나의 길들지 않은 야생동물이오.

    당신의 생일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덧없는 달력의 시간에 나를 묶어놓지 말라'고 하오. 대신 시인을 찾아요.
    그래서 우리가 함께 무엇을 했으며 서로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후세에 우리들의 살아있는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그에게 이야기를 전해 줘요. 우리가 서로에게 불어넣은 그 뜨거운 열정과 비교되는 사랑은 없었으니까.

    당신의 오스카.

    ps : 코코슈카의 가슴은 당신을 용서하기에."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

     

    그토록 끈질겼던 코코슈카의 구애를 뿌리치고 1915년에 시작된 두 번째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로피우스의 잦은 해외 출장과 새로 태어난 아들의 '친부 논란'등이 문제였다. 그때 친부 논란을 일으킨 남자가 바로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프란츠 베르펠이었다. 그는 이미 공공연히 알마의 애인으로 소문나 있었다고 한다. 결국 두 번째 결혼 생활을 청산한 알마는 무려 10년 동안 베르펠과 동거하다가, 1929년에 이르러 그와 정식으로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린 뒤에는 그가 죽을 때까지 내내 함께 한다. 유태인이었던 부부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다녔고, 알마는 남편과 함께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낸다.

     

    프란츠 베르펠(1890∼1945년)

     

     

    여담이지만, 몇 년 전에 나는 그림을 통해서나마 알마 말러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소장되어 있는 벨베데레 궁전에 갔을 때였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때 이후로 나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녀와 입을 맞추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빈을 떠날 때 마침 클림트의 <키스>가 그려진 날렵한 커피잔이 눈에 띄었고, 지금까지도 매번 그때 집어 든 그 커피잔으로 커피를 마시기 때문이다.

     

     

    벨베데레 궁전(출처 : 위키 백과)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 <유디트> 말고도 에곤 실레의 걸작 <죽음과 소녀>, <포옹>등이 소장되어 있다.

    비록 <바람의 신부>는 없지만 오스카 코코슈카의 다른 작품들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키스> 속의 그 여자가 '말러의 부인'이었다는 얘기는 어디선가 얼핏 들었던 것 같지만, 그녀가 코코슈카의 그림 <바람의 신부>의 주인공일 줄은 미처 몰랐다. 더군다나 어떤 책에서 우연히 발견한, 내게는 몹시 낯선 이름의 소설가에 불과했던 프란츠 베르펠이라는 사람이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인 줄은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평생 동안 무려 30번씩이나 읽었다는 바로 그 소설가 말이다. 이 모든 일들이 '빈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이해해야 옳을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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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돼지 2018-11-29 1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란츠 베르펠 같은 작가를 알게되는 경우가 바로 책을 읽는 묘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서로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되면 무슨 큰 비밀을 알아낸 것 처럼 마음이 막 설레이기도 합니다.
    공연히 무릎을 탁 치면서 감탄하기도 하고 말이죠 ㅎㅎ

    oren 2018-11-29 13:00   좋아요 1 | URL
    프란츠 베르펠이 알마 말러의 세 번째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 사람이 갑자기 전혀 낯설지 않은 인물처럼 느껴지더군요. 그가 평생 동안 그토록 자주 읽었다는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라는 소설에 대해서도, 알마 말러와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더군다나 그 작품의 주인공의 아내가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니 더더욱 그랬겠다 싶더군요.^^

    카알벨루치 2018-11-29 13:02   좋아요 0 | URL
    이런 귀한 작가를 또 알게되면 또 다른 세계가 저에게 열려지는 것이니 얼마나 환상적인지요! 오렌님 덕분입니다 ㅎ

    oren 2018-11-29 13:05   좋아요 1 | URL
    일종의 ‘간통 같은 독서‘라고나 할까요? ㅎㅎ
    http://blog.aladin.co.kr/oren/7172342

    카알벨루치 2018-11-29 13:06   좋아요 1 | URL
    오렌님 표현이 급진적입니다요 ㅎㅎ

    카알벨루치 2018-11-29 12: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란츠 베르펠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해요~ㅎ

    oren 2018-11-29 13:01   좋아요 1 | URL
    네.. 이번에 알고 보니 여러모로 관심이 가는 작가더라고요.^^
     

     

    사람들이 아주 우연한 기회에 스치듯 마주친 '책에 관한 에피소드' 때문에 기어이 그 책을 읽는 경우는 얼마나 자주 있을까? 나로서는 그런 경우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하지만 그런 인연 덕분에 읽은 책들은 보통스러운(?) 다른 책들보다 훨씬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다. 그런 인연이 그만큼 각별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 인연으로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단테의 『신곡』이다. 나는 그 책을 읽기 전까지는 도무지 언제쯤이나 그런 책을 읽게 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 우연히 영화관에서 마주친 '자막' 한 줄이 나를 어디엔가 단단히 옭아매는 듯한 느낌을 받고 나자 사정이 달라졌다. 나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이 솟구쳤던 것이다. 『버킷 리스트』라는 영화를 볼 때였다.

     

    주인공인 카터(모건 프리먼)는 갑작스레 찾아온 병 때문에 입원한 어느 날, 대학 신입생이던 시절 철학 교수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보고 싶은 것들을 적은 ‘버킷 리스트’를 만들라고 했던 일을 떠올린다. 그리고 같은 병실을 쓰게 된 에드워드(잭 니콜슨)와 함께 병원을 뛰쳐나간 두 사람은 그 '리스트'를 직접 행동으로 옮긴다. 카터는 비록 자동차 정비공 신분이었지만 독서광이었던 덕분에 아주 박식했다. TV 퀴즈 프로그램에 나오는 별의별 문제들을 식은 죽 먹기로 척척 알아맞힌다. 정확히 어떤 장면에서였는지는 지금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가 어느 순간 불쑥 친구인 에드워드에게 농담삼아 던지는 말 하나가 내 가슴에 콕 박힐 때가 있었다.

     

    "그래도 죽기 전에 단테의 『신곡』은 읽어봐야 할 거 아냐?"

     

    그 영화를 보고 난 후에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결국 단테의 『신곡』을 읽게 되었다. 그 책을 읽기 전에 난생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갔을 땐 피렌체에 있는 '단테의 생가'를 들른 적이 있었다. 그럴 때조차 단테의 책을 읽어보리라는 다짐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영화 속에 나오는 배우의 대사 하나가 그토록 놀라운 힘을 발휘할 줄은 몰랐다.

     

    영화와 책이 강하게 결부된 두 번째 경우는 2004년에 개봉했던 <투모로우>라는 영화를 볼 때였다. 그 영화에서는 두 청춘남녀가 도서관에 갖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한참이나 이어진다. 갑자기 뉴욕항이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기상이변이 닥쳐 온 도시가 통째로 마비되기 때문이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두 사람은 도서관에 꽃힌 무수한 책들을 불태우면서 추위를 견딘다. 그때 여주인공 역을 맡았던 에미 로섬이 남자친구한테 건네는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다음 대사는 물론 정확한 게 아니다. 내게 남아 있는 기억을 대충 되살려본 것뿐이다.)

     

    "아무리 춥다 해도, 니체의 책까지 불태울 순 없어."

     

    나는 그 영화를 볼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니체의 책들은 제대로 읽어본 게 거의 없었다. 물론 그 후로도 오랫동안 니체의 책들은 읽지 못했다. 아니, 읽고 싶어도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내겐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중에 니체의 책들을 단단히 붙잡고 읽게 된 계기는 물론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알게 된 때문이었다. 그러나 니체의 책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에미 로섬이 뉴욕의 어느 도서관 서가에서 땔감으로 쓰기 위해 빼들었다가 '인류의 양심상' 도저히 그 책들을 불태울 수 없어 도로 제자리에 꽂는 장면을 늘상 함께 떠올리곤 한다.

     

    세 번째로 생각나는 책은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이다. 내가 이런 희귀한 책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맨처음으로 알게 된 건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을 때였다. 그 책 속에는 온갖 시인과 철학자와 역사가들이 남긴 인용문이 무수히 많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유독 관심을 끄는 인물은 단연 루크레티우스였다. 그 시인만큼 '사물의 본성'을 제대로 간파하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몽테뉴를 만날 때만 하더라도 루크레티우스의 책은 국내에서는 언감생심 번역될 생각조차 없을 무렵이었다. 내가 몽테뉴를 처음 만난 건 1980년대 초반이었고,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그로부터 물경 30년이나 지난 2012년에야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몽테뉴의 소개 덕분에 그 책을 정말 각별한 심정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 책을 읽고 나서 『몽테뉴 수상록』에 인용된 루크레티우스의 문장들까지도 다시 찾아볼 정도였다. (다시 만나고 거듭 만나면서 더 자세히 알게 된 고대의 시인 이야기)

     

    네 번째로 꺼내 들고 싶은 책은 토마스 만의 자전적 소설인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다. 내가 이 책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처음으로 발견한 건 『평생 독서 계획』이라는 책에서였다. 그 작품이 도대체 얼마나 재미있길래 그 소섫을 무려 30번씩이나 읽는 소설가가 있단 말인가 싶었던 것이다. 나는 만의 소설을 그토록 많이 읽은 소설가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그 소설가가 읽었다는 그 '횟수' 만큼은 또렷이 기억해 두었다. 그만큼 내게는 '횟수가 주는 인상'에 꽉 붙들렸던 셈이다. 물론 그 뒤로 내가 토마스 만의 소설 가운데 가장 먼저 찾아 읽은 소설은 결국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었다. 토마스 만이 쓴 뛰어난 단편들이 많았음에도 나는 기어코 다른 책에서 읽은 '에피소드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셈이다.(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_뤼벡과 그 밖의 도시들)

     

     

    좋은 책은 좋은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는 과정에서 그 책을 잘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가 없으면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갖게 된다. 이것을 보여주는 좋은 에피소드가 있다.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은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라는 장편소설을 너무 좋아하여 평생 30번 가량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그 소설을 읽은 것은 죽기 한 달 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0번이라는 횟수가 아니라 죽기 한 달 전의 경황없는 상황에서도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베르펠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만의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으리라.(476쪽)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 독서 계획』, <역자 후기> 중에서

     

     

    내가 『평생 독서 계획』에 대해 리뷰를 썼던 게 벌써 8년 전의 일이다.(고전을 읽어라. 그전에 패디먼을 먼저 만나보라.)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도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30번씩이나 읽은 소설가의 이름을 여태껏 한 번도 자세히 뒤져볼 생각을 갖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오늘, 우연히, 혹시나 싶어, 검색창에 그 소설가의 이름을 넣어 봤더니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가 쓴 소설 몇 권이 우리말로도 버젓이 번역되어 나와 있을 정도로 그는 아주 유명한 소설가였다!(더군다나 그가 생전에 거쳐갔던 여러 도시들 가운데 내게도 무척이나 인상적인 도시들도 적지 않았다. 프라하, 함부르크, 라이프치히, 빈 등등.)

     

    그런데 독일에서도 유난히 큰 도시였던 뤼벡을 (몇년 전 자동차를 빌려 타고 마음 내키는 대로 쏘다녔던 '독일 일주 여행'에서) 깜빡 빼놓고 지나친 일은 지금 생각해도 몹시 후회스럽다.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주무대가 바로 뤼벡이고, 토마스 만의 고향도 바로 그곳이라는 사실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결코 그런 멍청한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끝으로,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죽을 때까지 즐겨 읽었던 바로 그 소설가를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프란츠 베르펠

     

    1890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난 베르펠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함부르크의 운송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베르펠은 얼마 뒤 라이프치히의 한 출판사에 들어간다.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는 틈틈이 시 창작에 매진하여 1912년부터 1915년까지 3년 사이에 『세상 친구』, 『우리는』, 『서로』 등 세 권의 시집을 펴내는데, 탁월한 표현주의 시인의 출현이라는 평을 얻는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베르펠을 ‘다음 세대’를 이끌 위대한 시인으로 일컫기도 했다. 베르펠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첫 소설은 『베르디. 오페라 소설』(1924)이다. 음악가 베르디에 대한 깊은 존경과 사랑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오페라 역사상 위대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오델로」가 작곡된 과정을 담고 있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 알마 말러와 결혼하여 오스트리아 빈에서 거주하고 있던 베르펠은 1938년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도피했고, 1940년 도보로 피레네 산맥을 넘은 뒤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전까지 장편소설 『고등학교 동창회』(1928), 『바바라 혹은 깊은 신앙』(1929), 『나폴리의 형제자매』(1931), 『무사 닥에서의 사십 일간』(1933), 『예레미아. 주님의 목소리를 들으라』(1937), 『횡령된 천국』(1939) 등을 펴냈다. 희곡 작가로도 명성이 높아 1944년에 발표한 『야코봅스키와 대령』은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옅푸른색 잉크로 쓴 여자 글씨』(1941)는 남프랑스에서 쓰기 시작해 망명지인 미국에서 완성, 발표한 작품이다. 또 다른 대표작 『베르나데트의 노래』(1941)는 배우 제니퍼 존스의 출연으로 영화화되면서 널리 알려졌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1945년 세상을 떠났다.(알라딘 작가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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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람처럼 살았던 <바람의 신부>, 알마 말러
      from Value Investing 2018-11-29 01:28 
      어떤 여성이 탁월한 미모와 재능을 타고난 덕분에 당대의 저명한 여러 인물들과 폭넓은 교제를 갖는다는 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한 그녀가 뛰어난 미술가들의 영혼을 뒤흔든 끝에 세기적인 명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녀가 단지 몇몇 유명한 그림에 등장하는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당대를 주름잡았던 세계적인 음악가와 건축가와 문학가와도 두루 함께 살아 보기도 했다면? 그것도 세 번에 걸친 정식 결혼을 통해서라면?
     
     
    붉은돼지 2018-11-29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곡도 니체도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도 부덴브로크가도 읽지 못했습니다..ㅜㅜ
    다만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두 번 읽은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 듯합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쩌다 보니 마의 산을 두 이나 읽었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ㅜㅡㅜ
    다른 것은 몰라도 나중에 시간이 나면, 지금도 뭐 바쁜 것은 아닙니다만.... 신곡은 한번 찬찬히 읽어보고 싶습니다.

    oren 2018-11-29 12:38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책과 맺는 묘한 인연을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이 읽은 책들과 내가 읽은 책들이 상당 부분 겹치는 경우는 별로 없을 듯해요. 그래도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두 번씩이나 읽으셨다니,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동질감이 느껴지네요. 단테의 <신곡>도 때가 되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래요.^^ 너무 서두를 건 없을 것 같고요. 죽기 전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엄청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책 이야기>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외

     

    페크 님의 글에 적극 공감합니다. 드라마든, 영화든, 책이든, 음악이든, 반복해서 보거나 들을수록 더 자세히 알게 되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는 일견 너무나 당연한 얘기 같지만, 유독 책의 경우에는 반복해서 읽는 경우가 그리 흔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교과서를 열심히 반복해서 읽는 경우가 아니라면요.)

     

    왜 그런가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쉽게 생각하자면 '한 번도 제대로 읽지 못한 책들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어서 빨리 다른 책을 펼쳐 봐야지 하는 생각을 품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그런데 책을 아주 많이 읽은 사람들이나 소설가 혹은 문학평론가들은 뜻밖에도 '반복해서 읽는 독서'에 대해서 너무나 자주 강조하고 있어서 깜짝깜짝 놀랄 때도 많더군요.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해서 저도 언젠가는 꼭 한 번 글로 써봐야지 하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는데, 페크 님의 글 때문에 오래도록 묵혀 두고 있었던 그 생각이 다시금 꿈틀거리네요.

     

    저 또한 반복해서 읽은 책들이라고 해봐야 손으로 겨우 꼽을 정도로 빈약한 터여서, 제 경험담을 담은 글을 쓸 형편이 되지 못하는 게 안타깝네요. 그 대신, 여태까지 책을 읽다가 우연히 마주쳤던 '반복해서 읽는 독서'에 관한 잊을 수 없는 문장들만이라도 몇몇 찾아서 인용문으로 덧붙여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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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독서란 독자를 가르친다기보다 그들의 머리를 도리어 산만하게 만든다. 덮어 놓고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몇몇 좋은 저자의 책을 골라 읽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

     - 톨스토이

     

     

     

    좋은 책은 좋은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잘 알 수 없듯이 책도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는 과정에서 그 책을 잘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가 없으면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갖게 된다. 이것을 보여주는 좋은 에피소드가 있다.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은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라는 장편소설을 너무 좋아하여 평생 30번 가량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로 그 소설을 읽은 것은 죽기 한 달 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0번이라는 횟수가 아니라 죽기 한 달 전의 경황없는 상황에서도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베르펠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만의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으리라.(476쪽)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 독서 계획』, <역자 후기> 중에서

     

     

     

    나보코프가 말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사람은 책을 읽을 수 없다. 다시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좋은 독자, 일류 독자,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독자는 재독자(再讀者)다."(『문학 강의』 이 말은 어떤 책이든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읽을 때' 비로소 '한 장의 그림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책 전체를 바라보며 문장 하나하나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는 뜻이다. 『롤리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이 독서법을 권한다.(545쪽)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옮긴이의 말> 중에서 

     

     

    따라서 『롤리타』는 최소한 두 번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한 번은 험버트의 목소리로, 다른 한 번은 나보코프의 목소리로. 실제로 나보코프는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소설은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아니면 읽고 읽고 또 읽든가요." 그것이 소설을 읽는 두 가지 방법이고 『롤리타』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 한 번 더 읽어보자.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535쪽)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해설_시적 에로티시즘과 심미적 희열의 세계> 중에서 

     

     

     

    윌리엄 해즐릿이 말한 것처럼 오래된 작품들을 다시 읽는 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즐거움이면서 독자 자신의 열망 깊은 곳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 나는 디킨스의 『픽위크 페이퍼즈』를 일 년에 두 번씩 읽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권의 책이 닳아 없어지기도 했다. 그게 도피라면 난 기꺼이 그 도피에 참여하리라. 비록 『픽위크 페이퍼즈』에 등장하는 누구도 내게 동일화의 즐거움을 주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훌륭한 단편은 반복해서 여러 번 읽을수록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93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소설을 처음 읽으면 단순한 즐거움을 느끼지만 『위대한 유산』이나 『파르마의 수도원』 같은 작품을 다시 읽게 되면 전혀 다른, 혹은 보다 나은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 전에는 불가능했던 전망 속으로 들어서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즐거움은 첫 번째 독서보다 더 다양하고 계몽적인 요소가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도 어떻게, 왜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새로운 인식이다. 무엇이든 한 번 더 본 것에 다가가기가 쉽다.

     

    누구나 젊은 날 열정적으로 반복해서 책을 읽고, 소설 속의 마음에 드는 인물과 동질성을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은 그러한 동일화의 즐거움이 나이에 관계없이 독서라는 경험의 합법적 일부라고 앞서 내 경험을 통해 이야기했다. 그러한 즐거움이 비록 중년 이후에는 단순한 것에서 감상적인 것으로 될지라도 말이다.(296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독자로서 내 경험에 따르면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첫 번째 독서 어딘가에서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다시 읽었을 때 그 의미를 재조립할 수 있었다. 웨스트의 『미스 론리하트』는 그 멋진 부패함에 이끌려 읽자마자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다시 읽었을 때는 우러르고 사모하는 마음에 이해를 덧붙일 수 있었다.

     

    반면 『49호 품목의 경매』를 처음 읽었을 때 분노 자체였다. 그러나 두 번째 읽으면서 순식간에 그것에 사로잡혔는데 그 감정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런고로 나는 독자들이 이 작품을 두 번 정도는 읽었으면 한다. 처음 짜증나게 했던 것이 '놀라움'이 된다.(326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나는 문학 비평을 비방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사실 작가로서는 비평의 부재에 직면하는 것보다 더 고약한 일도 없다. 내가 말하는 비평은 명상으로서의 비평, 분석으로서의 문학 비평이다. 논하고 싶은 책을 여러 번 읽을 줄 아는 문학 비평(좋은 음악을 끝없이 반복해서 듣듯, 훌륭한 소설 역시 반복해서 읽히도록 만들어졌다.), 시사성의 무자비한 괘종시계에 귀 기울이는 일 없이, 일 년 전, 삼십 년 전, 삼백 년 전에 탄생한 작품들을 논할 줄 아는 문학 비평, 어떤 작품의 독창성을 파악하여 이를 역사의 기억 속에 기록하고자 하는 문학 비평 말이다. 그런 명상이 소설의 역사를 수반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도스토옙스키, 조이스, 프루스트 등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이 없으면 모든 작품이 자의적인 판단에 내맡겨지고 신속히 잊혀 버린다.(38쪽)

     

     -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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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크pek0501 2018-11-24 11: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먼댓글 해 주셔서 먼저 감사드립니다.

    재독에 관한 글이 이렇게 많군요. 어떻게 이런 글을 다 모아 놓으셨는지 존경스럽습니다. 물론 독서광이어야 가능한 일일 테지요.
    덕분에 흥미롭게 읽었어요.
    저도 재독한 경험이 있긴 하지만 앞으로 더 많이 재독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편소설을 일곱 번까지 읽어 본 것이 제 최고 기록입니다. 밑줄을 친 글을 여러 번 읽는 취미가 있을 뿐, 책 전체를 다 읽은 건
    몇 권밖에 되지 않아요. 맘에 드는 책은 1년 뒤에 다시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서울에 오늘 첫눈이 왔어요. 사진을 올렸으니 감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oren 2018-11-24 14:52   좋아요 5 | URL
    재독에 관한 글을 따로 모아둔 게 아니어서, 어젯밤에 이 구절들을 찾느라 시간이 꽤나 걸리더라구요. 특히나 밀란 쿤데라의 문장 ˝좋은 음악을 끝없이 반복해서 듣듯, 훌륭한 소설 역시 반복해서 읽히도록 만들어졌다.˝ 라는 글은 예전에도 한번 생각나서 일부러 찾으려다가 실패했었는데, 이번에 페크 님의 글 덕분에 기어이 찾아 냈고요.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읽기』에는 ‘반복 독서‘를 워낙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어서,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훑어보느라 시간이 정말 많이 걸리더군요.^^

    그런데 페크 님은 단편소설을 무려 일곱 번까지 읽으셨다니, 이미 ‘반복 독서의 묘미‘를 깊이 체험하신 듯싶네요. 저는 한 번 읽고 나서 손아귀에 꽉 붙잡히지 않는다는 느낌이 드는 책들은 ‘필사를 하면서‘ 다시 읽는 고약한 습관이 있답니다. 그게 소설이든 수필이든 역사책이든 상관없이요. 그런 버릇을 들이다 보니, 그렇게 책을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처음에는 어렴풋했지만) 나중에 확연하게 눈에 들어오는 부분들이 정말 많더라구요. 물론 다른 책들을 읽을 욕심 때문에 ‘두 번째로 읽으면서 주요 대목을 필사하는 작업‘을 건너뛴 책들도 많았지만, 다시 읽으면서 필사한 책들은 결국 제게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책이 되더군요.(예전에 이런 내용에 대해 쓴 글도 있었고요. http://blog.aladin.co.kr/oren/8201971)

    제가 반복 독서의 묘미를 가장 최근에 맛 본 경험은 뜻밖에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었답니다. 그 책에 등장하는 영웅들이 워낙 많기도 하고, 수많은 국가와 도시와 지명과 강과 산들이 무수히 등장하기 때문에 맨 처음 읽을 땐 사건의 윤곽을 붙잡는 것조차 힘들 때도 있었는데, 그 방대한 책을 다 읽고 나자, 다시금 그 책 속으로 풍덩 빠져들고 싶은 열망이 생기더라구요. 그 속에 담긴 게 아무튼 어마무지하다는 걸 느꼈으니까요. 곧바로 두 번째로 읽기 시작하자마자 많은 것들이 진짜로 새롭게 드러나더라고요. 숱한 영웅들이 처음 읽을 땐 정말 따로따로 조각난 듯이 움직였는데, 두 번째로 읽기 시작하자 그 수많은 영웅들이 마치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여기저기서 함께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흥분되더라고요. 역사가이기 전에 철학자로 더 유명했던 플루타르코스의 진면목도 그때 뚜렷이 더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고요. 나중에 필사를 하는 동안에 그 인물들에 얽힌 ‘유명한 그림들‘까지 찾아 보고 나니까, 그 책이 얼마나 많은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뿌리깊이 스며 들어 있는가도 알게 되고요.

    그런데 나보코프의 놀라운 작품인 『롤리타』와 같은 경우는, 그 책을 금방 읽고 나서 ‘이건 한번 읽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작품이야‘ 라고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기어코 그 책을 다시 붙잡지 못하고 다른 책으로 옮겨 간 아픈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네요. 그래서 그 책에 대해서는 ‘어떤 글‘도 도저히 쓰지 못하겠더라구요. 고작 한 번밖에 안 읽었는데 제가 무얼 끄적거릴 수 있었겠어요. 아무튼 ‘반복 독서‘만큼 권장할 만한 독서법도 드문 듯해요.^^

    목나무 2018-11-24 1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 같은 경우는 발췌독도 하고 훑어보기식 독서도 하지만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면 몇 번을 다시 읽더라구요.
    어서 새로운 책을 빨리 만나기 위해 재독을 거의 안해본 저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올려주신 글 보니 반복해서 읽는 게 오히려 제대로 된 독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페이퍼 잘 보고 갑니다. ^^

    oren 2018-11-24 14:55   좋아요 4 | URL
    저는 눈으로만 읽는 반복 독서를 일부러, 그것도 의식적으로 헀던 경우는 아주 드물었던 듯해요. 한번 읽고 나서 ‘이 책 속에는 너무나 풍성한 보물들이 가득하구나. 그런데 나는 고작 그 책 속에서 무얼 얼마나 건졌지?‘ 라는 생각이 드는 책들은 두 번째로 읽으면서, 웬만하면 필사를 하기 시작하게 되더라구요.(‘둔필승총(鈍筆勝聰)이라는 말도 있고, 나중에 얼른 다시 찾아보기 위해서라도 ‘메모‘는 꼭 필요하니까요.) <일리아스>, <오딧세이아>,<변신이야기>도 그랬고,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몽테뉴 수상록>, <도덕감정론>,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등과 같은 철학책에 대해서도 그랬었고요. 그게 나중에는 결국 소설이나 에세이로까지 번져나가더라구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돈키호테>, <마의 산> 등과 같은 방대한 소설들도 그렇게 해서 필사를 하면서 두 번씩은 읽었더랬지요. 그런데 ‘이 책은 분명 다시 읽으면서 필사까지 해 보고 싶어.‘ 했다가도, 잠시 방심하면서 다른 책들을 붙잡는 순간, 그 의지가 순식간에 물러지는 걸 여러 번 경험하기도 했어요. 나보코프의 『롤리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같은 작품이 특히 생각이 나네요. 어차피 그런 작품들은 나중에 꼭 다시 읽게 되리라는 확신이 있긴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