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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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나 예술이나, 단 한 가지 필수적인 사항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 레프 톨스토이

 

 * * *

 

 톨스토이는 그냥 작가가 아니라 언제나 '러시아의 대문호'라는 특별한 칭호가 따라붙는 작가다. 그가 남긴 대표작은 누가 뭐래도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다. 『전쟁과 평화』는 "지금까지 쓰여진 가장 위대한 장편소설"이라 평가받는다. 그 작품 하나만 하더라도 너무나 스토리가 거대하고 등장 인물들이 방대한 데다가, 인간의 삶을 둘러싼 온갖 다양한 주제들을 너무나 드넓게 포괄하고 있어서 그 스케일만으로도 경이로울 지경인데, 그는 거기에 더해 기어코 『안나 카레니나』라는 불멸의 사랑 이야기마저 창조했다. 두 작품 모두 집필하는 데만 꼬박 대여섯 해씩 걸렸는데, 『안나 카레니나』(1873∼1877년)가 『전쟁과 평화』(1964∼1869년)보다 몇 년 뒤에 쓰였다.

 

『전쟁과 평화』가 주로 '전쟁과 파괴'를 다루고, 『안나 카레니나』가 '유부녀의 잘못된 사랑'을 다룬다고 해서 그 두 작품 사이에 공통점이 아예 없을 순 없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다룬 이야기가 아무리 거창하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을 꿰뚫고 흐르는 작가의 문제 의식은 언제나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와 강렬하게 맞닿아 있고, 그 점은 『안나 카레니나』에서도 전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서 심각하게 숙고하지 않는 인물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물론 그 문제를 두고 가장 고통스럽게 싸웠던 인물은 단연 안나 카레니나였다. 그 반면에 삶 자체를 가장 순수하고도 진지하게 성찰한 인물은 농장을 돌보던 시골 귀족 레빈이었다.

 

 

톨스토이는 스스로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평생 동안 끊임없이 성찰한 인물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톨스토이에 대해 '세계를 움직이는 제1원인을 찾고자 했던 사람'이라고도 평했다. 그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귀족 출신이면서도 평생 자신의 영지인 야스나야 폴랴나에 파묻혀 지냈으며, 저술 활동뿐 아니라 농노 해방과 자선 사업은 물론 교육 문제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작가의 모습이 작품 속에 투영된 인물이 바로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와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레빈이다. 시골 영지 포크로프스코예에 파묻혀 지내는 귀족 레빈이 여름철마다 풀베기에 열정을 쏟는 장면, 애완견과 함께 멧도요를 사냥하는 장면, 모스크바에서의 생활에 대한 강한 반감, 러시아의 농민들에 대한 사랑 등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인간 톨스토이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어떻게 해서 안나 카레니나라는 젊은 귀부인이 겪은 부적절한 사랑, 다시 말하자면 어느 한 순간 느닷없이 빠져들고 만 치명적인 불륜과 그로부터 파생된 온갖 불가피하고 불쾌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문제들, 가령, 남편과의 이혼 문제(이 문제는 안나가 기차에 뛰어드는 순간까지도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양육 문제, 브론스키와의 혼인 문제와 주거 문제, 친인척과 사교계 등에서 맺은 온갖 인간관계 문제 등에 대해 어쩌면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그 자신이 도저히 그런 경험을 했을 리도 없는데?

 

이 소설이 탄생한 데에는 기막힌 우연이 있었다. 작가는 『전쟁과 평화』를 끝낸 뒤 표트르 대제 시대에 관한 역사소설을 쓰고자 자료를 수집하던 어느날 우연히 《툴라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한다.

 

휼륭한 옷차림을 한 신원 불명의 여인이 모스크바ㅡ쿠르스크 선의 야센키 역에 도착하여 선로에 뛰어 들었다. 화물차 7호가 지나갈 때, 그녀는 성호를 긋고 기차 아래로 몸을 던졌고, 그녀의 몸은 두 동강이 났다.

 

그런데 이 기사의 주인공인 안나 피고로바라는 여인은 마침 톨스토이도 알던 여자였다. 그녀는 톨스토이의 이웃 영주 비비코프라는 사람의 내연녀였다. 톨스토이는 심지어 기차역에서 실시된 검시에도 참관했다. 1872년 1월에 발생한 이 사건이 작가의 뇌리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다가 1873년 3월에 우연히 푸슈킨의 『벨킨 이야기』를 다시 읽는 동안에 '점화'되어 '갑자기 너무나 아름답고 강력하게 구체화되어' 소설로 쓰이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정말 생생하고 열정적이고 완벽한 소설입니다. 나는 이 소설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하느님이 내게 건강을 허락하신다면 2주 안에 완성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2주가 아니라 무려 5년에 걸쳐 집필된 소설이 『안나 카레니나』로 탄생했다. 이 소설은 월간 잡지에 첫 연재가 실릴 때부터 엄청난 반향과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왜 아니 그랬겠는가? 심지어 도스토예프스키조차 한 지인의 찬사를 인용하며 당시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소개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것은 전대미문의 걸작입니다. 우리 작가들 가운데 어느 누가 그에 필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소설이 당대의 수많은 논의들을 소설 속 담론으로 끌어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목적, 여성 문제, 노동자 문제, 민중 교육 문제, 유몰론적 철학에 반하는 인상 등으로 인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사실 톨스토이는 작가로서는 아주 드물게 '쇼펜하우어'의 열럴한 찬미자였다. 그는 쇼펜하우어에 대하여 "나는 쇼펜하우어가 인간들 중 가장 천재적인 인물이라 생각하네."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또한 톨스토이의 서재에는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 유일하게 걸려 있었다고 한다. 『전쟁과 평화』에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드물지 않게 드러나 있으며, 『안나 카레니나』에는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 견해들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비판은 '예술적 구조를 결여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안나 카레니나』에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웅장한 테마 두 개가 나란히 전개될 뿐 전체 소설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톨스토이의 대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오히려 나는 건축술에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둥근 천장은 아무도 연결 지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릴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지어졌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그 무엇보다 공들인 부분입니다. 구조의 통일성은 행위와 인물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내적인 연속성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물론 비평가의 지적에도 일리는 있다. 총 8부에 이르는 작품의 구성은 일견 '안나 카레니나의 사랑에 얽힌 테마'와 '레빈의 소박한 전원 생활에 대한 테마'가 뚜렷이 구분된 채 좀처럼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7부에서 안나 카레니나가 기차에 몸을 던지고 난 이후에도 제8부가 다시 길게 이어지는 점은 충분히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할 만하다. 여주인공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이야기'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고 여길 법한데도, '안나의 충격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죽음'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레빈의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소소한 시골 농장에서의 일상' 이야기를 제법 길게 덧붙여 놓음으로서 도리어 소설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제8부는 편집자와의 의견 충돌로 출간 당시에도 잡지에 연재되지 못하고 톨스토이가 자비로 따로 출간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작가를 대신해서 조금이나마 더 해명해 보고 싶다. 사실 『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가 보여준 기법은 이미 찰스 디킨스가 『황폐한 집』에서 일찌감치 미리 선보였던 방식이기도 하다. 『안나 카레니나』만큼 방대한 디킨스의 그 걸작 소설에서 작가는 1인칭 화자의 이야기와 3인칭 작가 시점의 이야기를 계속 교대로 바꾸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여주인공인 에스더가 1인칭 화자인 '나'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두세 장쯤 진행되다가 멈추고 나면, 다음에 이어지는 장에서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가 (비록 시간대는 엇비슷하지만 공간과 등장 인물이 바뀌면서)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식이다. 그런데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맨 처음엔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고, '마치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도무지 인물들 사이의 관계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차츰 그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조금씩 겹치면서 뒤섞이기 시작한다. 등장 인물들도 차츰 가까운 곳에서 스치듯이 지나치며 때로는 직접 서로 맞닥뜨리기 시작한다. 오래도록 평행선을 달리듯 따로 진행되는 두 이야기는 마침내 서로 더이상 피할 여지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완전히 하나로 합류한다.(그 지점은 총 67장으로 구성된 그 방대한 소설이 막바지 클라이막스에 다가설 때쯤인 56장 말미에서야 발견된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또한 '안나의 이야기'와 '레빈의 이야기'가 전혀 상반된 공간에서 서로 전혀 다른 삶을 꾸려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되지만,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 두 주인공들은 차츰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간다는 점에서 디킨스의 소설 전개 방식을 닮았다.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면 브론스키는 좀 더 자주 레빈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 얼마 지나지 않아 스티바(오블론스키)의 권유에 이끌려 안나까지 만나게 된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등장 인물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상황 속으로 떠밀려 가고, 그때마다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판단과 행동을 요구받는다는 점이다. 안나, 브론스키, 카레닌, 레빈, 키티, 스티바, 돌리 등이 한결같이 그런 선택 앞에서 매번 갈등한다. 비단 이들뿐 아니라 소설 속에 아주 잠깐식 등장했다 사라지는 수많은 다른 인물들 또한 끊임없이 '다른 상황'에 부딪히고, 그때마다 다른 판단을 요구받는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러시아를 떠나 이탈리아를 전전할 때 만난 화가 미하일로프는 아마도 그런 측면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는 자신의 그림들을 살피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자신의 작품들을 일일이 설명해 나가는데, '그림이 바뀔 때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갈 만큼의 진폭으로 확연히 달라지는 감상평 때문에 그는 자신의 표정은 물론 자신의 작품과 예술가로서의 재능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과 생각까지도 (짧은 시간 동안에 자주) 근본적으로 뒤바꿔야만 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무리 안간힘을 다하더라도 자신들이 뿌린 선택의 씨앗이 파생시키는 사태의 예기치 못한 진행을 뒤바꾸지는 못한다. 자신들의 삶에 불쑥불쑥 개입하는 거대한 힘과 우연과 비이성은 인간으로서는 차마 거역하기 힘들 만큼 불가항력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안나가 키티의 보호자를 자청하면서 함께 참여했던 무도회 장면부터 그렇다. 브론스키는 키티에게 구애하는 입장이었고, 키티는 브론스키에 이끌려 그보다 훨씬 더 진실한 사랑을 호소하는 청순남 레빈의 청혼까지도 거절한 마당이었지만, 정작 안나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브론스키에게 빠져들고 만다. 그 남자에게 매혹적인 생기로 화답하는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고 당혹해 하면서 황급히 모스크바를 떠난 안나는 자신의 평온한 가정이 있는 페테르부르크로 되돌아 왔다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전에 기차역까지 직접 마중나온 남편의 귀를 보고 느닷없이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고 만다. 남편에 대해 더욱 성실하리라 다짐했던 굳은 각오는 그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영영 다시는 복구되지 않는다.

 

 

 

이처럼 불가항력으로 브론스키에게 매혹되고 마는 안나의 모습은 마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연애의 형이상학'에서 갈파했던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종족에의 의지'를 눈 앞에서 생생히 목도하는 듯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다.

 

마치 그녀의 존재에서 어떤 것이 넘쳐흘러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짝이는 눈빛과 미소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일부러 눈 속의 빛을 꺼 버리긴 했지만, 그 빛은 그녀의 의지에 반해 희미한 미소로 반짝였다.

 

『안나 카레니나』의 시공간은 『전쟁과 평화』보다는 훨씬 단촐한(?) 편이다. 안나와 카레닌과 브론스키가 살았던 페테르부르크, 안나의 오빠이자 브론스키의 친구인 오블론스키 공작 부부가 살았던 모스크바, 레빈이 농장을 가꾸며 살았던 포크로프스코예,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이탈리아를 떠돌며 지내던 안나와 브론스키가 나중에 터잡고 지낸 시골 영지인 보즈드비젠스코예 등이 거의 전부다. 그런데 그들은 러시아의 귀족답게(?) 끊임없이 서로의 삶의 터전을 자주 방문하여 오랫동안 머물며 함께 지낸다. 함께 사냥도 하고, 승마와 산책을 즐기기도 하고, 함께 테니스를 치기도 하고. 함께 만찬을 즐기며 열띤 토론도 벌인다.

 

이 소설의 거의 모든 장면들은 이처럼 등장 인물들 사이의 예정된 방문이 아니면 우연한 부딪힘으로 이뤄져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만남이 단순한 친지 방문이든 정식으로 초대받은 만찬 모임이나 화려한 무도회든, 혹은 우연히 찾아간 음악 연주회나 오페라 극장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그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궁극적으로는 '결혼과 가정'이라는 테두리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이 흔히 가정 소설이라고 불리는 까닭도 오롯이 '사랑 때문에 남편과 아들과 가정까지 다 팽개친' 안나의 이야기만 다루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실 애시당초에 문제가 된 가정은 정작 카레닌 부부가 아니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라는 그 유명한 첫 문장의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 속에 등장하는 문제의 가정은 안나의 오빠인 오블론스키 부부였다. "오블론스키의 집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아내는 남편이 전에 자기 집의 가정교사로 있던 프랑스 여자와 바람이 난 것을 알아차리고, 남편에게 더 이상 한집에서 살 수 없다고 선언했다. …… 아내는 자기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고, 남편은 사흘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가정을 수습하기 위해 안나는 일부러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찾아온다. 오빠의 부탁으로 올케 언니를 설득하기 위해서.

 

안나는 오빠를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왔지만 정작 미남 청년 브론스키부터 먼저 만난다. 그것도 기차역에서, 아주 우연히. 그러고 나서 오빠를 만나고, 올케 언니인 돌리를 설득하고, 페테르부르크로 되돌아 와서는 남편의 귀를 만나고, 외아들 세료자를 만나고, 결국 나중엔 (한때 브론스키를 두고 서로 경쟁 관계였던) 키티와 그녀의 남편인 레빈까지 만난다. 브론스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공작의 딸이자 아름다운 처녀였던 키티에게 청혼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가 유부녀인 안나부터 먼저 만난다. 그 다음으로 키티를 만나고, 친구인 스티바(오블론스키)를 만나고, 저녁 무도회에서 다시 안나를 만나고, 나중엔 안나 카레니나의 남편인 카레닌과도 어쩔 수 없이 자주 맞닥뜨린다.

 

부유한 미남 청년과 아름다운 귀부인 안나 사이에 급작스레 휘몰아친 격정적인 사랑은 평온하기만 하던 두 사람의 삶의 조건들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마냥 우호적이었던 주변의 인간 관계들은 급속도로 붕괴되기 시작하고, 불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그들의 사랑은 온갖 모욕가 냉대와 시련을 불러 일으키지만, 안나와 브론스키는 오로지 그들 사이의 굳건한 사랑에만 의지한 채 모든 걸 희생하면서 꿋꿋하게 버텨 나간다. 심지어 안나는 자신의 불륜을 눈치챈 남편에게 자신의 부정을 먼저 털어 놓고 당당히 이혼을 요구한다. 자신의 인생 역정에 크나큰 흠결이 생긴 카레닌은 파장을 최소화하려 안간힘을 쓰면서 수습에 골몰한다.

 

출중한 능력을 지닌 남편과 함께 사랑스런 아들을 키우며 8년 동안 아무런 문제없이 행복하게 살았던 과거는 어느새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까마득한 딴 세상의 일처럼 변해 버리고, 오로지 브론스키와의 사랑만이 자신의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안나는 낯선 현실에 몹시 당혹해 하지만 결코 비굴해 하지도 않고 회피할 생각도 없다.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한 일들에 대해 어느 누구를 탓하고 나무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녀는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이라도 기꺼이 감내하고 불편한 현실 조건에 맞선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안나 카레니나의 성격을 상징한다. 당대 러시아의 사교계를 빛냈던 사랑스럽기 그지 없던 안나는 그렇게 자신의 새로운 삶을 스스로 선택한다. 알게 모르게 그녀와 비슷한 처지에 빠졌던 수많은 다른 귀부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헤쳐나갔는지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톨스토이가 그려낸 '사랑과 번민과 고통과 기쁨이 함께 뒤섞인 안나의 모습'은 너무나 생생하면서도 현실적이어서, 그녀가 아무리 기를 쓰더라도 도저히 다른 길을 찾아낼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 정도다.

 

안나가 브론스키와의 사랑 때문에 때로는 몹시 행복해 하지만, 도처에 도사린 벅찬 현실적 난관 때문에 늘상 불안정한 삶과 가정(완전히 해체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외관만 유지하는 첫 번째 가정, 아들 양육 문제 때문에 남편과의 이혼을 마무리짓지 못하면서 브론스키와의 정식 결혼조차 이룰 수 없는 두 번째 가정)을 꾸려 나가는 데 비해 레빈의 삶과 가정은 너무나 튼실하면서도 평온하고 이상적이어서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청혼을 거절당했던 레빈과 키티가 오랜 좌절감과 단절을 극복하고 다시 사랑을 되찾고 행복한 결혼에 이르는 모습이나, 신혼 초에 불거지기 마련인 생경한 갈등까지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는 모습들은 흐뭇한 미소를 절로 떠올리게 만든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듯한 안나의 위태롭고도 투쟁적인 삶에 비하면 레빈의 일상들은 얼마나 평화롭고도 자연스러우면서 또한 목가적인가.

 

제인 오스틴의『오만과 편견』이 당대의 인습적인 결혼관이나 편견들에 용감히 맞선 끝에 극적으로 '결혼'에 이르는 주인공들을 묘사했다면, 『안나 카레니나』는 '결혼' 이후에 찾아온 또다른 사랑 때문에 번민하고 좌절하는 기혼녀 안나의 삶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몹시 대조적이다. 또한 안나에게 찾아온 결혼 이후의 사랑이 비자발적이면서도 불가항력적이고 운명적이라는 면에서 똑같은 '불륜 소설'로 분류되는 『마담 보바리』와도 사뭇 대조적이다. 가난한 시골 의사의 아내로서 살아가는 따분한 일상이 지겨워 자발적으로 불장난을 저지른 끝에 스스로 쌓아 올린 과오를 감당하지 못해 음독 자살로 자멸하고 마는 마담 보바리는 안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보바리의 죽음에는 일말의 동정이나 미련도 느껴지지 않지만 안나 카레니나의 죽음엔 왠지 모르게 진한 아쉬움과 묘한 여운이 남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 짤막한 성경 구절 하나가 먼저 제시된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안나를 자살로 몰고 간 것이 결혼 서약을 깨고 간통을 저지른 안나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안나의 죄악'은 스스로 찾아 나선 것도 아니며, 안나와 비슷한 처지면서도 감쪽같이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러시아 사교계의 다른 여성들과도 다른 것이었다. 또한 안나는 솔직하면서도 용기 있고 지성을 갖춘 여성이었다. '불륜을 저지른 죄'에 대해 분명하게 자각했으며 거듭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다. 또한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브론스키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까지도 알았지만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워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브론스키와 동거하면서 '용서받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자신을 느꼈다. 그녀의 궁극적인 죄는 브론스키와의 간통도 아니었고, 카레닌보다 브론스키를 더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하느님보다 브론스키를 더 사랑한 게 궁극적으로 문제였다.

 

'용서받을 수 없을 만큼' 행복했던 그녀는 결국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던 '브론스키와의 사랑'이 흔들리는 걸 느끼면서 절망감을 느낀다. 그리고 하느님을 버리면서까지 기대고 의지했던 브론스키를 도리어 심판하기 위해 '죽음'을 떠올린다. 브론스키가 더 이상 자신의 뜻대로 늘상 자신의 곁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을 해결할 수 없을 바에는 차라리 죽음으로서 브론스키를 벌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마침내 기차에 몸을 던진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문득 소스라치게 놀란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하느님,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하소서!" 라고 회개한다. 브론스키를 사랑한 죄뿐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인 '심판자'의 역할까지 떠맡은 불경죄를 뉘우친 셈이었다. 결국 톨스토이가 소설 앞에 내세운 에피그램은 안나의 죄악에 대한 신의 심판을 빗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버린 안나에 대한 '신의 탄식과 위로'를 담은 것인지도 모른다. '여태껏 꿋꿋하게 잘 살아오지 않았느냐, 심판은 나의 몫이거늘, 너는 왜 용서 대신 심판을 구하고 벌써 때이른 죽음을 맞은 것이냐.'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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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8-10 0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톨스토이도 쇼펜하우어를 좋아했군요. oren님 역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좋아하시는 만큼 인간의 의지의 관점에서 <안나 카레니나>를 해석하셨음을 이번 페이퍼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oren 2018-08-10 12:14   좋아요 1 | URL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일부러 애쓴 흔적도 있는 듯해요. 왜냐하면 안나나 브론스키나 그 어떤 인물들도 사랑 때문에 고뇌하면서도 사랑 너머에 깔려 있는 철학적 문제에 대해셔는 결코 질문을 던지지 않거든요. 톨스토이가 쇼펜하우어로부터 배웠던 ‘사랑의 형이상학‘을 최대한으로 희미하게 드러내는 솜씨야말로 대문호답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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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으로서, 심지어는 가장 중요한 사건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며, 가장 진실한 과업을 중단시키고, 때로 가장 위대한 정신도 흐리게 하며, 외교적 교섭이나 학술연구에 몰두할 때도 체면불구하고 연출하여 장관의 문서철이며 철학자의 원고 속에 연애편지나 머리카락을 끼워넣게 한다. 또 수많은 나날 시끄러운 사건에 가장 악질적으로 사주한 사람이나 동지끼리 맺은 가장 친밀한 사이도 끊어버리고, 견고한 사슬도 풀며, 허다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생명과 건강과 부와 지위와 행복을 빼앗아갈 뿐더러, 정직한 사람을 철면피로 만들고, 충신을 파멸시키려 한다. 이 모든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토록 소란을 피우고 애쓰고 고민하며 불행에 빠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듯 하찮은 일이 그처럼 큰 파문을 일으키며 안정된 생활에 소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인가? - 쇼펜하우어

포스트잇 2018-08-10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으로 갈수록 레빈편은 건너뛰었습니다요..;;;;;;;;
다시한번 읽을 기회가 온다면, 님의 글을 상기하며 읽어볼랍니다^^

oren 2018-08-10 12:24   좋아요 0 | URL
저는 레빈 편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답니다. 때로는 너무 이야기가 길어져서 ‘안나의 이야기‘가 몹시 궁금할 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가 바로 톨스토이의 분신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읽으니까 아주 재미있더라구요. 나중에 다시 읽으실 때는 레빈 이야기도 꼭 빼놓지 말고 마저 읽으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