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은 발표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현대에 와서 대단한 호평을 받는 작품으로 자리매김된 걸작 소설이다. 이 작품을 읽어 본 독자들은 어쩌면 '당대의 혹평'을 재빨리 수긍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품의 기괴한 분위기와 막장으로 흐르는 듯한 온갖 비도덕적 내용들이 소설 속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인간의 격정'을 너무나 독창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달리 견줄 작품을 찾기 어렵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허먼 멜빌의 <모비딕>과 더불어 ‘영문학 3대 비극’으로도 묶인다. 그러나 이 세 작품이 지닌 '인간 본성에 대한 심오한 비극성'이 서로 아무리 상통하는 면이 크다고 하더라도, 이들 작품들은 이야기의 내용이나 주제 자체가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한 데 묶이기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작품처럼 여겨진다.

 

『폭풍의 언덕』은 '운명적으로 엮인 사랑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지속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여러 뛰어난 다른 비극 작품들을 함께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엉뚱하게도(?)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의 모든 요건을 갖춘 가장 짜임새 있는 드라마'라고 극찬한 그 드라마가 도대체 무슨 연유로 『폭풍의 언덕』과 닮을 수 있을까,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언뜻 생각해 보더라도 그들 사이의 공통점이 한둘이 아니다.

 

소포클레스 비극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출생'이 완전히 베일에 싸인 채 버림받은 아이였다가 나중에 양떼를 치는 목자의 손에 의해 길러지는데, 이런 배경은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인 히스클리프의 사정과 너무나 흡사하다. 히스클리프 역시 '자신의 출생'을 전혀 모르는 떠돌이였다. 소설의 주무대인 워더링 하이츠의 큰 주인인 언쇼가 무려 60 마일이나 떨어진 리버풀에 여행을 갔다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와 마주치는 바람에 데려오게 된, 다시 말하자면 '주워 온 아이'였기 때문이다. 히스클리프와 언쇼 가문과의 '운명적인 사슬'은 그렇게 아주 우연한 동기에서 비롯된 셈인데, 이 대목에서 나는 오이디푸스 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아버지와 우연히 마주친 바로 그 '운명의 삼거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오, 삼거리여, 그리고 후미진 골짜기여,
너희들은 내 손에서 내 자신의 피인 내 아버지의
피를 마셨으니, 아마 기억하고 있으리라.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어떤 일을 저질렀으며,
그 뒤 또 이곳에 와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오오, 결혼이여, 결혼이여, 너는 나를 낳고는 다시
네 자식에게 자식들을 낳아줌으로써 아버지와 형제와
아들 사이에, 그리고 신부와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 근친상간의 혈연을 맺어주었으니,
이는 인간들 사이에 일어난 가장 더러운 치욕이로다.

 - 《오이디푸스 왕》1398∼1408행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가운데 히스클리프의 비중이나 역할은 단연 압도적이다. 히스클리프는 언쇼 집안의 또래 아이들인 힌들리 언쇼와 캐서린 언쇼 남매와 함께 자라고, 캐서린 언쇼를 운명적으로 사랑한다. 나중에 캐서린은 이웃마을 대저택에 사는 드러시크로스 집안의 장남인 에드거 린튼과 결혼하고, 히스클리프는 에드거의 여동생인 이사벨라와 결혼하지만, 이사벨라와의 결혼은 정작 자신이 사무치게 사랑하는 연인인 캐서린과의 결혼이 좌절된 데 따른 반발이자 부작용일 뿐이요, 숙명적으로 끈질기게 이어지는 '어긋나는 운명'의 본격적인 서곡일 뿐이다.

 

『오이디푸스 왕』이야기도 꼭 그렇다. 남자 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이 지속적으로 스토리를 지배한다는 점이 너무나 흡사하다. 또한 오이디푸스의 '잘못된 결혼'으로부터 본격화된 비극이 자식대까지 아주 길게 이어진다는 점도 『폭풍의 언덕』을 꼭 닮았다. 오이디푸스 왕과 이오카스테와의 결혼이야말로 단지 우발적으로 일어난 단발적인 사건인 '부친 살해'보다 훨씬 더 지속적이고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잘못된 결혼'으로 태어난 자식들이 서로 뿌리 깊은 증오를 품거나 고결한 희생정신을 발휘하는 점도 닮았다. 오이디푸스 왕의 두 아들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권력 다툼 끝에 서로가 서로를 살해하고, 오이디푸스 왕의 딸인 안티고네는 국법을 어기고 오라비의 장례를 치러주다가 비극적 운명을 맞는다. 그게 바로 소포큭레스의 또다른 비극인 『안티고네』이야기다.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자식들도 오이디푸스의 자식들과 엇비슷한 운명을 걷는다. 히스클리프와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난 허약한 린튼은 아버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강요받는 삶'으로 점철된 끝에 일찍 죽는다. 에드거 린튼과 캐서린 언쇼 사이에서 태어난 캐시('캐서린 린튼'으로 자라서 나중에 '캐서린 히스클리프 부인'이 된다)가 히스클리프의 아들인 린튼과 결혼할 뿐만 아니라, 린튼이 죽고 미망인이 된 이후에도 끝내 외삼촌의 아들인 힌들리 언쇼까지 사랑으로 포용하는 모습은 일견 안티고네의 모습과 닮았다.

 

다른 인물들에 비해 유독 오래 살아남은 히스클리프가 생애 막바지에 '나흘 동안이나 끼니를 굶은 끝에' 스스로 죄 많은 삶을 마감하는 모습에서는 어쩐지 늙은 오이디푸스 왕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제 손으로 제 눈을 멀게 한 끝에 방랑길을 떠나는 모습이 어른거리는 듯하다. 눈먼 오이디푸스가 안티고네의 손에 이끌려 콜로노스에 있는 복수의 여신들, 일명 '자비로운 여신들'의 성역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평화를 얻고 고통스런 삶을 마감하는 이야기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 담겨 있는데, 히스클리프가 죽기 직전 며칠 동안에 보인 모습인, '그의 눈에는 이상하게도 기쁨에 찬 빛이 서려 있었고, 그 때문에 얼굴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던 것과 흡사하다. 히스클리프는 그때 이미 죽기로 작정하고 곡기를 끊기 시작한지 이틀째였다. 그는 곧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젯밤엔 지옥의 문턱까지 갔었어. 오늘은 내 천국이 보이는 곳에 있지만. 난 지금 천국을 눈앞에 보고 있어. 불과 3피트도 떨어져 있지 않아!"(548쪽)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길었다. 애당초 나는 『폭풍의 언덕』을 읽는 동안에 소포클레스의 작품까지 떠올릴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폭풍의 언덕』에서 다뤄지는 사랑과 질투가 끝내 극도의 분노와 뒤섞여 마침내 '광기어린 복수'로 치닫는다는 점에서는 차라리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를 닮은 점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 두 비극에서는 남자 주인공의 얼굴색이 까맣다는 점도 서로 닮았다. 질투심에 사로잡혀 죄 없는 데스데모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오셀로는 무어인 용병대장이었고, 캐서린에 대해 광적으로 집착하다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히스클리프도 '얼굴색이 까무잡잡한 아이'였다.

 

온갖 격정이 광풍처럼 휘몰아친 뒤 마침내 거센 폭풍이 잦아들 무렵, 히스클리프가 자조섞인 투로 소설 끄트머리에서 내뱉는 말인 "초라한 종말이군 그래." 라는 말은 일견 카프카의 소설 『소송』의 결말 부분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초라한 종말이군 그래." 그는 방금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나의 맹렬한 노력이 이렇게 끝장난단 말인가? 두 집을 부숴버리려고 지렛대며 곡괭이를 장만해 놓고 헤라클레스와 같이 괴력을 낼 수 있도록 나 자신을 훈련했건만, 막상 만반의 준비가 되고 내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자 어느 쪽 집에서도 기와 한 장 들어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으니! 나의 숙적들은 나를 넘어뜨리지는 못했어. 이제야 말로 바로 그들의 후손에게 복수를 할 때지. 내 힘으로 할 수 있지. 그리고 아무도 막지 못해. 하지만 그래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난 사람을 때리고 싶지 않아.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귀찮아졌단 말이야! 이렇게 말하니 마치 오직 아량의 미덕을 보이기 위해서 이제까지 애를 써온 것처럼 들리는데, 그와는 거리가 먼 얘기지. 난 그들의 파멸을 즐길 만한 힘도 없어졌고 쓸데없이 남을 파멸시킬 생각도 없어졌단 말이야.(538쪽)

 

 

불과 서른 살에 죽은 에밀리 브론테(1818∼1848)는 여러모로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1775∼1817)과 비교된다. 둘 다 목사의 딸이었고 독신으로 삶을 마감했다는 공통점만 있을 뿐 '그들의 세계'는 사뭇 달랐다. 심지어 그들은 같은 성(性)에 속한 것 같지도 않을 정도다. 어느 비평가의 말대로 "제인에게는 열정이 없지만 브론테는 열정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그만큼 브론테의 소설은 격정적인데, 그녀가 살아생전에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요크셔의 거친 황무지를 그대로 빼닮았다는 생각부터 앞선다. 폭풍이 부는 바람 많은 언덕과 그녀 자신의 가족을 둘러싼 삶 말고는 다른 세계를 거의 경험하지 못했던 그녀는 순전히 '공상의 세계' 속에서 살았던 셈인데, 소설의 분위기도 오스틴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백일몽처럼 환상적이면서도 멜로드라마처럼 처절하고 비극적이다.

 

그러나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이 어딘가 비현실적이고 막장 드라마처럼 읽힌다고 해서 비난받았던 '당대의 혹평'은 브론테가 추구한 '진정성'을 과소평가한 때문이었다.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진실을 탐구하려는 작가의 진지함이야말로 '도덕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뚜렷한 근거는 그녀의 다음 시에서도 발견된다.(에밀리는 언니인 샬럿과 여동생 앤과 함께 필명을 써서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의 시집』을 펴냈다. 『폭풍의 언덕』이 출판되기 1년 전이었다. 후대의 비평가들은 한결같이 '에밀리에게 진정한 시인으로서의 재능이 엿보인다'고 평가했다.)

 

나는 걷노라, 하지만 옛 영웅들의 발걸음이나

높은 도덕의 길,

오랜 과거의 역사가 보여 주는 희미한 형태들,

반쯤 두드러진 얼굴들 사이를 걷는 것은 아니리니.

 

나는 걷노라, 나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ㅡ

또 다른 안내를 택하는 것은 성가신 일인 것을ㅡ

양치식물 계곡에 회색의 양떼들이 풀을 뜯는 곳,

거친 바람이 산허리에 불어 오는 곳.

 

저 외로운 산들은 무엇을 보여 줄 수 있을까?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영광과 슬픔이겠지:

한 인간의 마음에 감정을 일깨우는 대지는

천국과 지옥의 두 세계 가운데 있을 테니.

 

 

그렇다.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세계는 천국과 지옥의 두 세계가 맞닿아 있는 '바람부는 대지 위의 세계'였다. 리버풀에서 집시처럼 떠도는 부랑아로 살던 히스클리프는 어느 날 우연히 '주변에서 두 번째로 멋진' 워더링 하이츠의 저택으로 이끌려 오지만, 거기에서 여섯 살 꼬마 아가씨인 캐서린 언쇼라는 천국과 끊임없이 그를 학대하는 그녀의 오빠 힌들러 언쇼라는 지옥을 만난다. 언제나 거친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언덕 주변의 삶에서 히스클리프에게 유일한 삶의 기쁨은 언제나 다정하고 발랄하고 살갑게 대하는 캐서린뿐이었다.

 

(2012년에 개봉된 『폭풍의 언덕』의 한 장면, 감독: 안드리아 아놀드, 주연: 카야 스코델라리오_캐서린 언쇼)

 

 

친아들 힌들리보다 자신을 더 아껴주던 언쇼 영감이 죽고 나자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잠시 유학을 떠났던 힌들리가 젊은 아내를 데리고 워더링 하이츠로 급작스레 되돌아온 것이다. 히스클리프는 하루 아침에 '헛간에서 지내야 할 정도로' 새로운 포악한 주인인 힌들리로부터 걸핏하면 폭행 당하고 모진 냉대를 받는다. 이때부터 히스클리프에게는 깊은 증오와 복수심이 싹튼다. 게다가 캐서린은 이웃 마을 대저택에 사는 에드거 린튼 도련님에게 '시집갈 마음'이 생긴다. 그녀가 아무리 히스클리프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인 결혼 상대'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좌절한 히스클리프는 갑자기 워더링 하이츠에서 사라지고 만다.

 

3년 만에 다시 폭풍이 부는 언덕을 홀연히 찾아온 히스클리프는 이미 결혼한 캐서린이 살고 있는 드러시크로스의 대저택을 주저없이 찾아간다. 그녀의 남편인 에드거의 존재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는 그들 둘 사이의 대화야말로 앞으로 닥칠 '엄청난 폭풍우와 비극'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일쯤이면 꿈같다는 생각이 들 거야!" 아씨는 외쳤어요. "다시 너를 보고 만지고 이야기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거야. 잔인한 히스클리프! 사실은 이렇게 맞이해 줄 것도 없지. 삼 년 동안이나 자취도, 소식도 없이 내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니!"

 

"네가 나를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널 생각했을 거야!" 그는 중얼거렸어요. "캐시, 네가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리고 저 밑 뜰에서 기다리는 동안 이런 생각을 했지. 아마 놀랄 것이고 기쁜 척하겠지만, 그러는 너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그 뒤에는 힌들리에 대한 원한을 풀고, 그러고는 자살을 해서 법의 신세를 지지 않겠다고 말이야. 그러나 네가 이렇게 반겨줘서 그러한 생각이 내 마음에서 사라져버렸어. ……" (159∼160쪽)

 

 

히스클리프는 어느새 술주정뱅이로 전락한 채 도박에 빠져 지내던 힌들리에게 찾아가 1년치 방세를 미리 건네 주면서 다시 워더링 하이츠에 눌러 앉는다. 사라진 3년 동안에 히스클리프는 사람이 몰라보게 달라졌고 돈도 많이 벌어온 듯했고, 집주인인 힌들리를 제압할 정도로 건장한 모습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히스클리프가 차츰 드러시크로스 저택에 찾아갈 수 있는 어엿한 손님이 되자 엉뚱하게도 에드거의 여동생인 이사벨라 린튼이 걷잡을 수 없이 그에게 빠져든다. 캐서린이 히스클리프의 본심을 꿰뚫어보고 "만약 아가씨가 귀찮다고 생각되면 그는 아가씨를 참새 알처럼 쥐어서 터뜨릴걸. 그가 린튼 집 사람을 사랑할 리 없다는 걸 난 알고 있어." 라고 경고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히스클리프가 성가실 정도로 캐서린을 자주 찾아오고 심지어 자신의 여동생까지 넘보게 되자 에드거는 마침내 폭발한다. 힘으로는 도저히 그를 제압할 수 없게 되자 에드거는 하인들을 시켜 그를 강제로 집밖으로 쫓아내려고 하지만 캐서린이 도리어 나약한 남편의 그런 행동을 비웃고 방해한다.

 

 

"아! 세상에! 옛날 같으면 이 정도 용기로도 기사가 됐을 텐데! 그래요. 우리가 졌어요. 우리가 졌어! 히스클리프는 왕이 생쥐 떼에게 군대를 보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에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을 거예요. 기운 내요. 다치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 같은 사람은 양 새끼가 아니라 젖먹이 토끼 세끼예요." 캐서린 아씨가 소리쳤어요.

 

"이 젖내 나는 겁쟁이를 남편으로 둔 행복을 즐기기를 빌어, 캐시! 당신의 취향을 치하하지. 나보다도 이렇게 침 흘리고 벌벌 떠는 녀석을 좋아하는 취향 말이야! 이런 녀석은 주먹이 아니라 발로 뻥 차줘야 속이 후련하겠는데. 그가 울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무서워서 까무러치려고 하고 있는 거야?"(190쪽)

 

 

대소동 끝에 히스클리프는 드러시크로스 저택을 쫓기듯 도망쳐 나오고, 에드거와 캐서린의 사이는 회복할 수 없는 파탄지경으로 내몰린다. 에드거는 서재에 박혀 지내고 캐서린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 채 사흘씩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단식을 계속했다. 급속도로 쇠약해진 캐서린은 절망적인 발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며 한탄한다.

 

 

"오, 내 몸이 불덩이 같아! 밖으로 나갔으면, 다시 야만에 가까운, 억세고 자유로운 계집아이가 되어 어떠한 상처를 입더라도 미치거나 하지 않고 깔깔 웃을 수 있었으면! 왜 나는 이렇게 달라졌을까? 왜 조금만 뭐라고 해도 내 피는 끓어오를까? 저 언덕 무성한 히스 속에 한번 뛰어들면 틀림없이 정신이 날 텐데. 다시 창을 활짝 열어줘, 빨리.(206쪽)

 

 

그러는 와중에 이사벨라 린튼은 히스클리프와 함께 몰래 마을에서 달아난다. 큰 병을 얻은 끝에 악성 뇌막염까지 시달렸던 캐서린은 에드거의 극진한 보살핌 덕에 간신히 병을 이겨낸다. 달아난지 두 달이 지난 뒤에야 에드거는 여동생으로부터 '용서해 달라'는 짤막한 편지를 받는다. 히스클리프와 결혼했으며 지금은 워더링 하이츠에서 지내고 있다는 말과 함께. 하녀 엘렌에게도 따로 편지가 왔다. 그런데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온 신부가 쓴 편지와는 너무나 딴판이었다. 그녀는 벌써부터 히스클리프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만약에 인간이라면 미친 것인지, 만약 인간이 아니라면 귀신인지? 내가 이렇게 묻는 이유는 말하지 않겠어. 그러나 엘렌이 알고 있다면 대체 내가 결혼한 상대가 무엇인지 설명해 줬으면 해."

 

시집간 이사벨라 아가씨를 만나보러 급히 워더링 하이츠로 찾아간 하녀 넬리(엘렌 딘)은 도리어 히스클리프에게 애원하고 부탁하는 처지가 된다. 제발 더이상 캐서린 아씨를 만나러 드러시크로스 저택으로 넘어오지 말라고. 그러나 에드거를 향한 복수심에 끓어 넘치는 히스클리프를 제지할 방법은 없다. 더구나 캐서린을 다시는 만나지 말라는 경고와 종용을 받자 히스클리프는 도리어 강력하게 반발한다.

 

 

"당신은 그녀가 나를 거의 잊었다고 생각해? 아, 넬리! 그렇지 않다는 건 당신이 알잖아! 린튼을 한 번 생각하는 동안에 나를 천번이나 생각하고 있다는 걸 당신은 잘 알잖아! 내 평생 가장 비참했던 시기엔 나도 캐서린에게 잊혀졌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작년 여름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도 줄곧 그런 생각을 했지. 하지만 이제는 캐서린 자신이 그렇다고 단언하지 않는 한 다시는 그런 무서운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 …… 나의 장래는 단 두 마디면 족할 거야. 죽음과 지옥이라는 두 마디. 캐서린을 잃어버린 뒤의 내 삶이란 지옥일 거야.

 

그러면서도 한때는 어리석게도 캐서린이 나의 애정보다도 에드거 린튼의 애정을 더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 설사 그가 그 빈약한 몸집으로 온 힘을 다해 사랑한대도 그의 팔십 년 동안의 사랑은 내 하루 동안의 사랑에도 미치지 못할 거야. 그리고 캐서린은 나와 마찬가지로 속이 깊은 사람이지. 그러니 그 애정을 에드거가 송두리째 차지한다는 것은 바닷물을 말죽통에 담을 수 있다는 거나 마찬가지야."(243∼244쪽)  

 

 

캐서린을 향한 무서운 집념은 끝내 히스클리프를 폭주하게 만든다. 에드거가 집을 비운 틈을 노려 그는 또다시 캐서린을 찾아가고, 위중한 병세 때문에 더이상 회복될 가망이 없는 그녀를 껴안고 떨어질 줄 모른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눈물로 얼굴을 적시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어느새 에드거가 돌아올 시간이다. "안 돼! 아, 가지 마. 가지 마. 이게 마지막이야. 에드거도 우리를 어쩌지는 못할 거야. 히스클리프, 나는 죽어! 죽는다고!" 라고 외치는 절규 앞에 히스클리프는 다시 그녀를 꼭 껴안고, 그 모습을 본 에드거는 그 불청객에 대한 놀라움과 분노에 휩싸여 덤벼든다. 캐서린은 혼절했다가 간신히 의식을 회복하지만 그날밤 자정 무렵 딸 캐시를 낳다가 숨을 거둔다.


여기까지가 총 34장 가운데 16장까지의 내용이다. 소설 『폭풍의 언덕』은 여주인공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사이에 폭풍처럼 휘몰아친 사랑이 '캐서린의 죽음'으로 모두 마무리되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여운이 많이 남는 얘기가 더욱 길게 남아 있었다. 남은 이야기들은 캐서린이 낳은 딸 캐시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히스클리프의 처절한 사랑과 복수를 향한 뜨거운 정념은 조금도 꺾일 줄 모른다. 에밀리 브론테가 히스클리프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치밀하고도 촘촘하게 그려낼 수 있었는지는 정작 이제부터라고 말할 정도로,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더욱 촘촘해지고 히스클리프는 더욱 뚜렷이 부각될 뿐 조금도 힘을 잃는 법이 없다.

 

그러나 아쉽지만 이쯤에서 이야기를 훨씬 더 줄여야 마땅하지 싶다. 나머지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남편인 히스클리프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 이사벨라는 홀로 아들을 낳아 기르다가 세상을 떠난다. 캐서린이 죽은 뒤 13년쯤 뒤의 일이었다. 캐서린의 오빠인 힌들리 언쇼는 그보다 훨씬 일찍 세상을 떠났다. 캐서린이 죽은지 반 년도 못 되어서였고,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 살에 불과했다. 이제 워더링 하이츠에는 히스클리프와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 언쇼만 남았고, 그 집의 실소유주는 히스클리프였다. 어릴 때부터 제멋대로 거칠게 자라난 헤어튼은 히스클리프한테 딸린 하인 신세나 다름없었다. 식객이던 사람이 마침내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이 된 셈이었다.

 

'언쇼 집안의 아름다운 검은 눈에다 린튼 집안의 고운 살결과 오밀조밀한 생김새와 노란 곱슬머리를 물려받은 정말 예쁜 아가씨' 캐시는 열세 살이 되도록 숲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고, 워더링 하이츠와 히스클리프 씨에 대한 존재조차도 모르고 자란다. 캐서린과 사별한 에드거가 워더링 하이츠 쪽으로는 얼씬도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기간이야말로 워더링 하이츠 주변에 살던 사람들에겐 짧으나마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캐시는 페니스턴 절벽 쪽으로 가보고 싶은 오랜 열망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홀로 그곳으로 다가가다가 우연히 워더링 하이츠에 발을 들여놓고 거기서 자신의 외사촌인 헤어튼을 난생 처음으로 만난다. 그녀는 이제 막 '워더링 하이츠의 거친 바람' 속에 뒤섞인 '처절한 사랑과 뿌리깊은 원한과 복수와 갈등'의 초입에 겨우 첫발을 들여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여동생 이사벨라는 죽기 직전에 홀로 키우던 아들 린튼을 부탁하기 위해 오빠인 에드거에게 편지를 띄우고, 외삼촌인 에드거는 기꺼이 린튼을 떠맡아 드러시크로스 저택으로 데려 오지만, 이내 낌새를 알아차린 히스클리프에게 발각되어 조카를 강제로 빼앗기고 만다. 고종사촌 린튼과 함께 즐거운 나날을 보내리라는 기대에 잔뜩 부풀었던 캐시는 하루 아침에 린튼이 집안에서 사라진 걸 알고 몹시 실망한다.

 

호시탐탐 드러시크로스 대저택마저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궁리를 하던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병약한 아들 린튼을 캐시와 결혼시키기 위해 온갖 간계를 꾸미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병약한 아들 린튼이 자신의 계획이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무서운 협박과 강요를 마다 않는다. 오랜 노력 끝에 그 두 사람을 서로 사귀게 만들고, 결국 워더링 하이츠에 억지로 감금하는 데까지 성공한 히스클리프는 그 둘을 강제로 결혼시킨다. 그러나 병약한 린튼은 결혼하자 말자 이내 세상을 떠난다. 이런 사태에 대비해 변호사를 미리 매수해 둔 히스클리프는 린튼이 죽고 난 이후에도 드러시크로스 저택이 자신에게 귀속되도록 빈틈없이 일을 꾸민다.

 

히스클리프의 아들마저 세상을 떠나자 이제는 젊은이라고는 '언쇼 집안'의 마지막 인물인 헤어튼 언쇼와 '린튼 집안'의 마지막 인물인 캐시밖에 남지 않게 된다. 히스클리프가 그토록 처절하게 사랑했던 캐서린과 사별한 이후 끔찍스러울 정도로 잔혹하게 진행된 히스클리프의 복수가 거의 완성된 셈이었다. 워더링 하이츠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했던 힌들리는 주정뱅이로 전락한 끝에 노름빚으로 재산까지 몽땅 히스클리프에게 빼앗기고 빈털털이로 삶을 마감했고, 캐서린과 결혼한 에드거 역시 딸 캐시를 히스클리프의 아들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온갖 괴로움과 시름을 겪다가 서른아홉 살에 일찍 삶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이다.

 

에드거마저 죽고 그의 딸 캐시를 자신의 며느리로 삼게 되자 그는 곧장 드러시크로스 저택을 '주인 자격'으로 찾아간다. 그 자리에서 그는 넬리에게 다음과 같은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젯밤에 린튼의 무덤을 파고 있는 교회 머슴을 시켜 캐서린의 관 뚜껑에 덮인 흙을 치우게 하고 관을 열어보았다는 것이다!

 

"당신은 참 악독하기도 하군요, 히스클리프! 죽은 이를 괴롭히다니 부끄럽지도 않던가요?" 저는 큰 소리로 말했어요.

 

"난 아무도 괴롭히지 않았어, 넬리. 내 마음이 다소 안정되긴 했지. 이젠 훨씬 더 마음이 편해질 거야. 내가 죽더라도 땅속에 조용히 누워 있게 될 테니까. 그녀를 괴롭혔다고? 천만에! 그녀야말로 십팔 년 동안을 밤낮으로 나를 괴롭혀 왔어. 늘 끊임없이. 그리고 잔인하게. 바로 어젯밤까지도 말이야. 어젯밤에서야 내 마음이 가라앉은 거야. 난 어젯밤, 심장이 멎은 채 차디찬 내 볼을 그녀의 볼에 맞대고 그녀 옆에서 마지막 잠을 자는 꿈을 꾸었지." 하고 그는 말했어요.

 

"그럼 만약 아씨가 썩어 흙이 되어버렸다든가 그보다 더한 상태에 있었더라면 그땐 무슨 꿈을 꾸었을까요? 제가 물었어요.

 

"그녀와 함께 썩어서 더욱더 행복해지는 꿈을 꾸었겠지!" 그는 대답했어요. "넬리는 내가 그따위 변화를 무서워할 줄 알아? 난 그 관 뚜껑을 열 때 이미 그런 변화를 기대했던 거야. 그러나 내가 죽을 때까지 그 변화가 시작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더욱이 그녀의 생기 없는 용모에서 강렬한 인상만 받지 않았던들 그 묘한 감정은 여간해선 가시지 않았을 꺼야. 그건 이상하게 시작됐지. 알다시피 난 그녀가 죽은 뒤로 미치광이처럼 밤낮으로 늘 그녀가 내게 돌아오기를 빌었어. 영혼이라도 돌아오라고 말이야. 난 유령의 존재를 믿어. 유령이라는 게 이 세상에 있을 수 있고 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단 말이야!"(479∼480쪽)

 

 

나는 『폭풍의 언덕』 속에 이처럼 격정적이고도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는 줄은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워더링 하이츠를 배경으로 무척이나 낭만적인 러브 스토리가 끝없이 장대하게 펼쳐지는 줄로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소설의 제목에서 풍기는 낭만적인 느낌과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처녀가 쓴 작품이라는 두 가지 선입견이 어우러져 빚어낸 엄청난 오해와 무지 때문이었다.


세계 10대 소설이라고 해서 누구나 10대 혹은 20대쯤에는 그 작품들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강제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폭풍의 언덕』 같은 야성이 넘실대는 강렬한 소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거센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언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처절하면서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라고 해서 그 소설을 읽는 나이가 반드시 '폭풍의 세월'을 살고 있는 10대나 20대에 한정될 이유도 없다. 이 소설을 10대 혹은 20대의 아주 어린(?) 나이에 읽었더라면 과연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이 소설을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여간 기쁜 게 아니라는 생각부터 앞선다. 그만큼 이 소설은 강력하다. 요크셔의 황량한 언덕 위에 자리잡은 워더링 하이츠에 부는 바람은 지금도 여전히 세차게 불고 있지 싶다. 예전에 에밀리 브론테가 오래도록 홀로 서 있었던 그때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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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블룸이 쓴 『교양인의 책읽기』에서는 에밀리 브론테를 '시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윗 글에서 인용한 에밀리 브론테의 시는 그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시에 뒤이어 나오는 내용 일부를 추가로 덧붙여 본다.

 

팝 발라드 가운데 시적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로 「소란한 무덤The Unquiet Grave」이 있는데, 이는 18세기 후반에 쓴 듯하다.

 

내 사랑이여, 오늘 바람이 불고,

  몇 방울의 비도 내리는구려;

진정한 사랑 외에 내 가진 것이 무엇이겠소,

  차디찬 무덤 속에 그녀가 누워 있으니,

 

내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서는 무엇이든 하겠소.

  그 어떤 젊은 연인보다도;

그녀의 무덤 앞에 앉아 언제까지나 서러워하리오.

  열두 달 하루라도.

 

열두 달 하루가 끝나자

  죽은 자가 말하기 시작했다:

"오 내 무덤 앞에 흐느끼며

  그리하여 날 잠들지 못하게 하는 분은 누군가요?"

 

"내 사랑, 그대 무덤 앞에 앉은 자는 나요.

  그대 잠들지 못하게 하는 자는:

진흙처럼 차가운 그대의 입술로 한 번의 키스를 해 주길 갈망하오.

  그것이 내가 구하는 전부일 테니."

 

"그대 진흙처럼 차가운 내 입술로 한 번의 키스를 받고 싶어하는군요.

  하지만 내 숨결에는 진한 흙 냄새;

내 진흙처럼 차가운 한 번의 키스를 받는다면

  그대의 삶도 오래지 않아 끝나고 말 거예요."

 

"저 건너 아래 초록의 정원,

  사랑, 우리가 걷던 그곳에,

이전에 보았던 그 멋진 꽃도

  시들어 줄기만 남으리니."

 

"줄기가 시들어 마르듯, 내 사랑,

  그렇듯 우리의 심장도 썩어갈 거예요;

그러니 내 사랑, 이제는 단념하세요.

  신이 그대를 부를 때까지."

 

 

이 연인들이 주고받는 냉담한 대화는 가히 필적할 데가 없는 듯하다. 많은 속설에 따르면 사랑의 애도를 일 년 이상 지속하는 일은 위험한 일이라고 한다. 「소란한 무덤」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더욱 강조한다. 일 년에서 하루 더 애도가 계속되자 죽은 연인이 놀라 영면에서 깨어난다. 애인을 읽은 젊은 남자가 자신의 위험을 정확히 안다는 것,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그에게 아무런 환상도 주지 않고 단지 죽음만을 제시하는 것은 일종의 사악한 즐거움이다.

 

어느 편에도 거짓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일 년하고 하루 더 애도하는 것은 산 자에게는 위험이 되고 죽은 자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두 연인 사이의 인식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시가 나타내는 어둡고 무거운 의미는 즐거우면서도 병적인 발라드가 들려주는 육감적 음악과 어느 정도 대립해 있다. "나로 하여금 잠들지 못하게 한다"는 죽은 여인의 불평을 듣는 순간, 독자는 처음으로 충격에 빠진다.

 

또 젊은 남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의 진흙처럼 차가운 한 번의 키스를 갈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 번이나 반복되는 "진흙처럼 차가운 입술의 키스"라는 표헌이 시 전체를 압도하며, 다음 연에서 가장 강력한 감정을 고조시키고 있다.

 

"그대 진흙처럼 차가운  입술로 한 번의 키스를 받고 싶어하는군요.

하지만 내 숨결에는 진한 흙 냄새;

내 진흙처럼 차가운 한 번의 키스를 받는다면

그대의 삶도 오래지 않아 끝나고 말 거예요.

 

우리는 죽은 여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렇게 직접적으로 진실을 토로했는지에 대해 궁금해진다.(149∼152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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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14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 살에 이런 대작을 쓰고 운명을 달리한 에밀리 브론테, 음악의 신동이라 불리우는 모짜르트, 「도덕경」「주역」에 주석을 단 왕필 등을 보면서 짧은 시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운 이들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oren 2018-05-14 15:01   좋아요 1 | URL
에밀리 브론테는 단 한 편의 소설만 남겼는데도 저런 걸작을 남길 정도였으니, 다른 자매들과 더불어 특출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작가임에는 틀림없는 듯합니다. 소설의 내용으로나 더없이 강렬한 필치로 보나 말이죠.. 그런데 까마득한 옛날 사람인 소포클레스는 아흔이 넘도록 장수하고도 수많은 걸작들을 남겼으니 더욱 대단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hnine 2018-05-14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잘은 모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보면 비극이 갖춰야 할 요소에 대해 조목조목 잘 설명이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저도 아직 직접 읽어보진 못했어요). 이상적인 비극이 되기 위한 소재, 플롯, 성격, 주제는 물론이고 어떤 배경을 거쳐 어떻게 주제를 전달하느냐 까지요.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쓴 작가라면 고대 비극, 그것도 유명한 비극 작품과 언뜻언뜻 연상되는 장면이 그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게 무리는 아닐 듯 싶어요. 아마 예리한 독자 눈에만 발견되겠지만요 ^^
그런 이야기로 시작하셔서 그런지, 올려주신 에밀리 브론테의 시를 읽는데 전 또 문득 세익스피어의 소넷이 떠오르네요. 제가 따라쟁이죠? ^^

oren 2018-05-14 15:11   좋아요 0 | URL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주로 고대의 서사시와 비극시를 다루지만, 의외로 현대 사람들의 글쓰기에도 참고할 만한 유익한 내용들이 아주 풍성하게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에밀리 브론테의 시를 읽고 나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떠올리셨다니, hnine 님께서도 예사롭지 않은 시적 감각을 지니신 듯합니다. 저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전부 읽어봤지만, 에밀리 브론테의 시와 닮았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