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뽕짝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 시리즈
3화, 장미빛 스카프 : 세 시에 벨이 울리면......
내 노래방 18번은 장미빛 스카프'였다. 그러니깐 나는 노래방'에서 첫 곡으로 늘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 또한 mr. 방긋'에게서 배웠다. 겉보기에는 새련돼 보이는 여피족( 깍쟁이 )처럼 생긴 미스터 방긋'은 생긴 것과는 달리 모르는 트로트'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트롯 마니아'였던 아버지를 따라 부르다 보니 어느새 " 뽕필 " 을 터득했다. 미스터 방긋 아버지'가 말했다고 한다. " 더 이상, 너에게 가르칠 게 없구나. 뽕짝은 저잣거리 노래가 아니라 시대 정신'이니라. " 반면 히피족'처럼 생긴 미스터 우울 씨'( 나 ) 는 생긴 것과는 달리 고음불가'였다. 미스터 방긋에 내게 말했다. " 노래를 못하면 트로트를 배우도록 해 ! 사회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되니깐 말이야, 친구.
몇몇 스킬만 터득하면 다양한 곡을 습득할 수 있어...... " 그날 이후로 나는 곰 쓸개을 먹고 바늘 방석에서 잠을 잤다. 아침에는 쓸개 저녁에는 바늘, 아침에는 쓸개 저녁에는 바늘, 아침에는 쓸개 저녁에는 바늘....... 어느 날, 미스터 방긋이 말했다. " 이보게, 미스터 우울 씨 ! 더 이상, 자네에게 가르칠 게 없네...... " 나는 그 길로 산을 내려와 서울역 굴다리 교차로 쌍쌍 노래방으로 향했다. 떨리는 손끝으로 번호를 입력하자 연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뽕 맞은 것처럼 마음이 너무 아프게 ! 스승의 말이 생각났다. " 내가 왜 이럴까 / 오지 않을 사람을 / 어디선가 웃으면서 / 와 줄 것만 같은데 / 차라리 그 사람을 / 만나지 않았던들 / 이 고통 이 괴로움 / 나에겐 없을 걸...... "
노래가 끝나자 빵빠레와 함께 태진아 노래방 전속 여성 성우가 내게 외쳤다. " 와우 ! 어디서 쫌 놀아보셨군요 ? " 점수는 98점이었다. 주먹 불끈 쥐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 이후, 장미빛 스카프만 불렀다. 노래방에 가서 한 곡도 뽑지 않은 채 손사래만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적어도 한 곡 정도는 영업 차원에서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생긴 것'은 모던 락'인데 알고보니 뽕짝이네, 라며 놀려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 장미빛 스카프로 다시 태어났다 ! 자신감이 붙자 다른 곡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노래방 삼각편대가 " 장미빛 스카프 - 줄리아 - 비내리는 고모령 " 이었다. 메이저리그 야구 구단 다저스에 커쇼 - 그레인키 - 류현진'이라는 특급 무기가 있다면, 내게는 장 - 줄 - 비'가 있었다.
회사 단합 대회가 있던 날, 흥청망청 취한 동료와 함께 룸살롱'을 찾았다. 회사 법인카드를 가진 김 팀장이 아가씨를 불렀다. 술 마시고 여자와 놀기 좋아해서 풍각쟁이'라고 불리는 직장 상사'였다. 나는 여성 파트너가 필요없다며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김 팀장은 듣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내 파트너는 키가 크고 마른 아가씨였다. 여자는 잘 웃지 않았다. 동료들은 무대에 나가 파트너와 춤을 추면서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누가 큰 소리로 " 어이, 곰곰발 ! 노래 한 곡 해 !! " 라고 외쳤다. 나는 노래방 책을 펼쳐 <장미빛 스카프 > 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이 노래는 등록이 안 된 모양이었다. 내가 당황해서 이러저리 책을 넘기자 파트너가 속삭였다. " 무슨 노래 찾는데 그래요 ? "
내가 장미빛 스카프'라고 말하자, 파트너는 태진아 노래방 책을 펼치지도 않은 채 28번을 눌러 곡을 예약했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옛 애인이 이 노래를 좋아했어요. 노래방 가면 항상 처음 부르는 노래가 이 노래였죠. 그래서 이 노래 번호를 자연스럽게 외우게 되었네요. " 쓸쓸한 목소리였다. 나는 파트너에게 옛 남자와는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으나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묻지 못했다. 그녀의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노래와 건배가 몇 순 돌고 나자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뽕 맞은 것처럼 마음이 너무 아프게 ! 스승의 말이 생각났다.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셋, 둘, 하나 ! " 내가 왜 이럴까 / 오지 않을 사람을....... " 내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취해서 각자 파트너와 뒹굴었으니까.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이 내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내 파트너였다. 그녀는 테이블에 앉아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묻지 않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또한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리라. 룸살롱 파티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 김 팀장이 내게 다가와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 어이, 곰곰발 ! 자네 아주 고고해 ! 여자 끼고 술 마시는 게 역겹지 ? 남들 다 여자 끼고 노는데 혼자서 술 마시면 기분 좋나 ? " 내 파트너는 부르지 않았다 ?!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나는 내내 키 크고 마른 여자와 함께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김 팀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김 팀장은 내 파트너를 부르지 않았다. 룸살롱 주인에게 물어보니, 주인은 어렵게 말을 했다.
" 손님들이 종종 3번 룸에서 유령을 보고는 한답니다. 키 크고 마른 아가씨 아니었습니까 ? 네, 네네. 그렇군요. 향숙이라는 아이였지요. 3년 전에 죽었습니다. 떠나간 남자를 그리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디다. 손님, 혹시 장미빛 스카프'라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나요 ? 아하, 그렇군요. 저희 룸 노래방 기기에는 그 노래가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노래를 부른 손님들이 향숙이를 보았다는 소리가 많아서 그 노래를 뺏거든요. "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주인에게 향숙이를 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냐고 묻자 그는 매우 난처하다는 듯이 말했다. " 손님 ! 3일 후, 새벽 3시에 전화벨이 울릴 겁니다. 절대 그 전화를 받으시면 안 됩니다. 받는 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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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벨 소리에 잠을 깼다. 탁상 시계를 보니 3시였다. 내가 왜 이럴까.... 오지 않을 사람을... 어디선가 웃으면서.... 어두운 방 안에서 실로폰 연주를 바탕으로 한 장미빛 스카프'가 흘러나왔다. 올 것이 온 것이다. 우연히 거리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나를 기억해 주길 바란다. 한동안 열심히 블로그를 하던, 속초에서 질질 짜던, 하지만 지금은 소식이 끓긴, 페루가 고향이라던 한 남자에 대해 ! 그래, 나 장미빛 스카프 부르는 남자'다. 눈 감고, 제대로 느끼면서 부르는, 그런 남자다. 벨은 계속 울렸다.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 더 이상, 벨은 울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잠옷 바람으로 문을 열었다. 검은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 아따, 방에 있었구마 ! 전화 왜 안 받으슈 ? 알라딘에서 택배왔시유 ! 트로트 정치학 맞쥬 ? 여기 싸인 부탁혀유. 지금 시간이 오후 3시인디 아직까정 자고 있슈 ? 커텐 좀 젖히쇼. 으메, 팔자 좋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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