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서의 괴로움

 

 

 

 

 

- 다치바나 다카시의 고양이 빌딩 내 서재 모습

 

 

제목이 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저 ) 이라길래 長 : 길 장' 을 써서 長書로 지레짐작을 한 후,  長 = 多 로 이해했는데 알고 보니 藏 : 감출 장' 을 써서 藏書였다. 사전 뜻풀이에 의하면 " 책을 간직하여 둠 " 이라고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 글 제목으로 '短 : 짧을 단' 을 써서 < 短書의 괴로움 > 이라 미리 정해 두었다. 저자 오카자키 다케시가 모은 長書 30,000권에 비하면 내가 죽을 둥 살 둥 바둥거리며 모은 3,000권은 새 발의 피요, 그야말로 短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제목을 고치려다가 나름 재치 있는 언어 유희'라 생각해서 그대로 두었다.  내가 그동안 보관했던 책을 대충 셈하니 3000권 정도 되었다.  5단짜리 싸구려 책장 하나에 책을 200권 정도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면 5단 책장 15개가 필요한 분량이었다. 

 

■ 30,000권을 보유했다고 고백한 다케시'도 엄격하게 말하자면 아마츄어다. 책 분량이 어마무시한 장서가'는 자신이 보유한 책이 몇 권인지도 모른다. 장서가 이노우에 히사시가 책을 기증하기 위해 책을 내놓았는데 무려 13만 권이었다. 그가 한 말이 걸작이다. " 모두 해서 몇 권이나 있는지는 나도 몰랐어요. 그냥 3만 권쯤 있지 않을까 했는데...... 비극입니다. ( 웃음 ) " 만약에 누군가가 자신을 엄청난 책을 보유한 장서가라며 보관 중인 책이 13만 2천 4백 7십 2권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 보면 된다.

 

책 쌓기 신공을 펼쳐서 책장 하나에 300권을 간신히 보관한다고 해도 책장 10개가 필요한 분량이다. 하지만 내 방은 방문과 창문이 있는 벽을 각각 제외하면 앞쪽 벽과 오른쪽 벽에 책장을 4개씩, 총 8개를 붙여 놓으면 꽉 차는 공간이었다.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책장은 총 5개였다. 보르네오산 통나무 책장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모두 사람들이 이사를 갈 때 버린 책장을 주워 왔다.  그 흔하고 흔한 싸구려 pb재질로 만든 5단짜리 책장 되시것다.   나는 어떻게 조해서든 책장 다섯 개 안에 3000권을 장서해야 했다.  이래저래 과포화 상태'였다.  꾀죄죄죄죄한 방구석에다 책 3000권을 장서한다는 것은 주제 파악도 못하고 카드를 남발한 가난한 쇼핑중독자가 처한 곤경과 비슷했다. 

 

한번은 책장 칸막이가 책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늘어지는 바람에 책이 땅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진 적도 있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을 깬 나는 책을 향해 육두문자를 써가며 질책했다. " 야, 이 새끼들아 ! 주인이 잠을 잘 때는 조용히 해라잉 ? 다음에 또 책잡히는 짓 했다가는 그때는 진짜 책 잡는 날 온다잉 ? 마지막 경고다 ! " 그때 그 소란에 대해 콩트 형식으로 쓴 글이 있다. 링크를 걸어둔다.

 

■ http://blog.aladin.co.kr/749915104/6911556 : 원목과 톱밥이 서로 싸운다

 

이처럼 3000권만 돼도 은근히 스트레스를 " 이빠이 " 받아서 책으로부터 " 빠이빠이 " 를 하고 싶은데 < 장서의 괴로움 > 을 쓴 작가 오카자키 다케시'는 무려 30,000권이나 된다고 하니 그 심정은 오죽할까 ?  5단짜리 책장으로 따지자면 책장만 150개가 집구석에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책장 150개를 성인 남성 150명으로 교체해 보자. 집에 다 큰 남자가 150명 있다고 생각해 보라 ! 그가 보유한 長書(장서) 규모에 비하면 나는 말 그대로 短書(단서)'에 불과했다. 처음에 " 집에 쌓아둔 책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 는 책 내용을 얼핏 들었을 때 다치바나 다카시'가 이 책을 쓴 줄 알았다. 책이 많아서 결국에는 따로 " 고양이 빌딩 " 을 지어 책을 보관했던 유명한 작가였으니 말이다.

 

출판 대국답게 일본에는 다카시나 다케시 같은 장서가가 많은 모양이다. 장서의 괴로움에 대해서는 장정일도 고충을 토로한 적 있다. 설핏 듣기로는 엄청난 분량의 책을 내다 팔았다고 ! 나도 책 - 다이어트를 감행한 적이 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고 엉뚱한 곳에서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돌아온 날, 방에 널브러져 나뒹구는 책을 보자 갑자기 뚜껑이 열렸다. 처음에는 헌책방에 보낼 책을 추리기 위해 데스노트를 만들려고 쉰들러 리스트를 작성하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누구는 살려주고 누구는 죽인단 말인가. 이게 무슨 개똥 같은 짓인가 ! 결국에는 헌책방 아저씨를 불러서 무작위로 책장 두 개를 도려냈다. 책과 함께 책장도 처분했다. 책은 먼지를 풀풀 날리며 거칠게 저항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책인감 없는 주인의 책 잡는 날에 살아남은 책은 한동안 책잡히는 짓은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당시에는 책을 없앴다는 기쁨보다 책장을 없앴다는 기쁨이 컸다.  공사판에서 나뒹구는 널판때기'를 모아 톱밥 분쇄기에 넣어 본드로 떡반죽을 만든 후 프레스 기계로 압축해서 만든 것 위에 나무 무늬 장판으로 도배를 한 게 5단짜리 pb재질 책장이었다. 나는 다짐했다. 앞으로는 사람들이 이사갈 때마다 버리고 간 싸구려 5단 책장이 아닌, 진짜 나이테'가 보이는 근사한 원목으로 만든 책장'을 장만하리라. 책을 팔고 남은 돈이 생기자 나는 그 돈으로 술을 마셨다. 친구와 어울리며 노래방도 갔다. 장미빛 스카프를 불렀다, 줄리아'도 불렀다. 그리고 여자 앞에서 엄지손가락을 올려세우며 " 특급 사랑이야 ~ " 를 외쳤다 ( F.O = fade out ) 

 

내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그 이후는 생각이 안난다. 눈을 뜨자 나는 내 방에 누워 있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고 했던가 ! 책장 두 개가 있던 자리에 장판이 눌린 자국을 보자 마음이 짠했다. 내 주머니엔 동전 몇 개와 구겨진 지폐 몇 장이 전부였다. 마치 심청이가 임당수에 몸을 던진 대가로 받은 돈으로 흥청망청 논 아비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눈물이 아.... 앞을 가렸다(는 거짓말이지만...)  " 책장이란 새끼가 그깟 책 무게도 견디지 못하고 8월 엿가락처럼 축 늘어져 ? 그게 무슨 나무'냐. "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책 70권 정도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겁다는 사실을 말이다. 톱밥으로 만든 널판때기'가 10년을 버티기엔 등골이 휘어질 수밖에 없는 무게라는 사실을.

 

그 후, 책장을 다시 주섬주섬 하나 둘 얻게 되었다. 이번에도 누가 이사 갈 때 버리고 간 5단짜리 책장이었다. ( 책 판 돈으로 다시 책을 샀는지 아니면 책장을 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 이제는 철이 들었는지 오리지날 나이테에 대한 미련을 버렸고 싸구려 5단 책장에게 나이테 흉내나 내는 널판때기라는 비난도 버렸다. 생각해 보라. 당신은 타인의 무게를 오롯이 감당할 용기가 있나 ?  믹서기 속 토마토처럼 갈리는 아픔을 견딘 끝에 책장으로 태어나 평생 동안 등골이 휘어지는 고통을 견디며 책을 위해 묵묵히 자기 등골을 내어준 5단 책장은 얼마나 이타적인가 !  싸구려 5단 책장이 걸어온 삶은 마치 길거리 생활을 청산하고 기술을 배워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노숙자의 재활 의지처럼 보여서 마음이 아팠다. ( 됐고 ! ) 지금은 간추리고 간추린 결과  대략 책 1,700권;이 여섯 개의 책장에 분산 수용되어 있다.  나는 미리 쓰는 유언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 ...... 끝으로 책장은 제재소로 보내 책장이 아닌 장식장으로 리폼해 주십시요. 리폼 비용은 책을 판 비용으로 지불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동안 책을 위해 묵묵히 자기 등골을 내어준 놈들입니다. 여섯 놈 모두 주인에게 버려진 놈들이니 각별히 인테리어에 신경을 써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살면서 상처가 많았던 놈들이니 날카로운 쇠못 대신 둥근 나무못을 사용해 주십시요. 책을 찬양하는 놈은 수없이 봤으나 정작 책장을 찬양한 놈은 아무도 없더군요. 박근혜를 찬양하는 놈은 많으나 박근혜 때문에 고통받는 가난한 민중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는 현실과 다르지 않아 쓸쓸하더군요. 마지막으로 책장에게 한마디 하렵니다.  낡은 책장이여,  다음 생은 장식장으로 태어나 가볍게 살아라. 등골 휘지 마라. 건투를 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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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름은초록 2014-08-18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이 깊으신 분이군요, 곰곰발님. 젊은 나이에 이런 유언을 남기다니.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4-08-19 18:21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인간에 대한 정은 없습니다. 사물에 대한 정이 있을 뿐...
아무래도 패티시즘 같습니다. ㅎㅎ

말리 2014-08-18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이란 그림책이 있어요. 책이 현관문까지 막아버리자 구청에 가서 미련없이 집째로 기부했답니다. 도서관이 되었지요. 친구집에 얹혀 살며 매일 도서관을 다니는 행복한 삶을 살았대나. 책은 감추지 말고 공공으로 ^^. 도서관에 가면 책같지 않은 책이 너무 많아 시간 낭비할때가 많은데요. 장서가들이 개인 도서관을 열면 참 좋을것 같아요. 누구누구 도서관하면 허튼책 하나 없이 딱 골라져 있을테니까요. 전 옛날에 책 다 버리고 걍 빌려보며 삽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8-19 18:23   좋아요 0 | URL
도서관 가면 하도 많은 책이 있다 보니 그냥 서서 이것저것 고르다 보면 시간이 다 가더라고요. 너무 많아도 탈입니다. 옛날에 살던 집이 도서관하고 걸어서 5분 거리여서 주말에는 항상 도서관을 가고는 했어요. 책은 안 읽고 도서관 가면 죽돌이들 있는데 그들과 벤치에 앉아서 잡담하는 게 재미있더라고요..ㅎㅎㅎ

마태우스 2014-08-18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천권이라, 저는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권수네요. 전 천권을 넘긴 적이 없어요. 근데 신기한 건 저 역시 아내와 싸운 날, 처음으로 책 방출을 했다는 거죠. 님과 공통점이 있다니 반갑습니다. 간만에 들어왔더니 님의 주옥같은 글들이 저를 반겨주네요...^^감사

곰곰생각하는발 2014-08-19 18:27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 님 오셨군요. 계산 편하게 하려고 3천이지, 이 숫자엔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수 + 헌책방에 판 책 수 를 종합해서 내린 추론이니 3천을 한번에 보관했던 적은 없습니다. 2천 넘으면 팔고 다시 넘으면 팔고 그랬습니다. 하여튼 스트레스 받고 오는 날, 책 잔뜩 있ㄴ느 거 보면 전 이상하게 화가 나더라고요. ㅎㅎㅎㅎ. 하여튼 마태우스 님과 공통점ㅁ이 있다는 게 반갑습니다. ( 잉꼬부부인 줄 알았더니 싸우시기도 하시는군요 ? ㅎㅎ )

라로 2014-08-19 0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튼 곰발님은 언어의 마술사! 혼자 머리 끄덕이다, 크크 웃다가 했더니 제 앞에 큐빅에 앉은 사람이(저희 사무실 큐빅이 낮아서 이마가 보여요,,ㅠㅠ 옆 사무실 큐빅은 높은데;;;ㅠㅠ) 절 넘겨다 보네요. 일이 저렇게 재밌을까? 하는 눈빛이 아니라 저 여자가 오늘 이상하네 하는;;;;;;

곰곰생각하는발 2014-08-19 18:28   좋아요 0 | URL
아니, 이게 누굽니까. 아롬 님 아니십니까, 특별 인사 올립니다 ! 아마 직장에서 웃으면 사람들이 뻘짓하느라 웃는구나 할 겁니다. 누가 요즘 직장이 재미있어서 웃나요.. ㅎㅎㅎㅎㅎㅎㅎ.

todd 2014-08-20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렇게 많은 책을 읽으시니 좋은 글이 나오는가 봅니다.. ㅎㅎㅎㅎ 저는 예전에 큰맘먹고 벽 하나 크기에 맞춰 합판 책장 하나 맞췄었는데 어머니가 자꾸 책 앞 공간에 다른 잡스런 물건을 보관하시는 바람에..;; 책을 보려면 일단 그 물건을 꺼내고 봐야하는 불편함을 겪고 있습니다. ㅎㅎ 페루애님도 절대 이책만은 안판다 이런책 있으신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8-20 10:32   좋아요 0 | URL
오, 당연히 있죠 ! 엘리어트 카네티가 쓴 < 구제된 혀 > 라는 책이 있씁니다. 이거 헌책방에서 2000원인가 샀는데 이 책은 개인적으로 아끼는 책입니다. 절판된 책은 이상하게 절판된 순간 빛나는 구석이 있더군요..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