冊 과 젯소
태양이 부른 << 눈, 코, 입 >> 이란 노래는 한자가 섞이지 않은 순우리말로 구성된 제목'이다. 한자가 도입되기 전부터 사용된 말'이니 아주 오래된 말이다. 상상력을 동원해서 통일 삼국시대 사람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21세기에 도착한다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는 외국어처럼 들린 것이 분명하다. 하물며 요즘 노래'는 말해서 무엇하랴. 하지만 다른 노래는 몰라도 태양의 < 눈, 코, 입 > 은 그럭저럭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사대주의에 젖은 사람들이 천한 것들이나 사용하는 언문'을 한자'로 교체해서 그들만의 교양어로 부르곤 했지만 눈, 코, 입 따위'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가만 보면 신체 부위를 지시하는 단어는 1음절로 이루어진 순우리말이 많다. 눈, 코, 귀, 입, 손, 발, 털, 피, 살, 뼈......
이 단어들은 낭만적 서정 따위로 미화된 치장을 거부한다. 치장은 제거하고 본래 가지고 있는 기능에 집중한 간결한 바우하우스 디자인 미학을 보는 것 같다. 이 간결미'는 불필요한 것을 모두 제거한 결과'다. 그래서 한 글자로 이루어진 순우리말을 볼 때는 숭고한 생각'이 든다. 천 년을 산 고목'이나 천 년을 견딘 건축물을 볼 때 느끼게 되는 숭고와 불필요한 수사를 버린 간결한 문장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담백한 맛이라고 할까. 요즘이야 먹고 사는 문제를 떠나서 영양 과잉'을 걱정하는 시대'이지만 그 옛날에는 단순하게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으니 신체 부위의 결손은 곧 죽음'을 의미하지 않았을까 ? 농경사회였으니 팔이 없으면, 다리가 없으면, 눈이 없으면 살기 힘든 시대였다.
그렇기에 사랑'이라는 단어는 2음절이지만 손과 발은 1음절'이 아니었을까 ? 그 시절, 사랑 따위는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는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에 생각해 볼 달달한 문제'였으니 관념적 허세'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사랑 밖에 난 몰라, 라고 했다가는...... 따귀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자고이래로 사랑 이야기'를 다룬 문학은 배부른 서양 귀족이나 조선 양반들이 이룩한 장르가 아니었느냔 말이다. 이처럼 1음절로 이루어진 순우리말'은 매우 중요한 단어'일 가능성이 높다. 옛 사람들이 신성한 동물'이라고 생각했던 단군신화 속 짐승 이름을 봐도 그렇다. < 곰 > 은 2음절이 아니라 1음절이다. 누군가는 이런 말대꾸를 할지도 모른다. " 그렇다면 호랑이는 왜 3음절이오, 말해 보시오 ! "
그래서 준비했다. 호랑이는 순우리말이 아니다. 호랑이는 범 호虎와 이리 랑狼이 결합된 말이다. 순우리말은 < 범 > 이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성 동물이 아니더라도 짐승을 지시하는 순우리말은 1음절'이 많다. 닭, 소, 개 따위를 봐도 알 수 있다. 옛 사람들은 " 숨탄것( 숨을 받은 것 ) " 이라 하여 소중한 존재'로 인식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 여담이지만 닭, 소, 개 하니 느닷없이 박근혜 대통령 각하 님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됐고 ! 물론 이 모든 가설은 내 머릿속에서만 일사천리'로 정리된 관념'이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된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은 그저 " 곰곰생각하는발 씨의 < 머릿속천둥 > 가설 " 이라고만 해 둡시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내가 마치 한글 순혈주의자' 같지만
개인적으로 한글이 무결점 체계'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한자의 개입'에 대해 거부감이 없다. 한글을 빛내기 위해 한자'를 폄하할 생각이 없다는 소리'다. < 책 > 을 의미하는 순우리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은 冊 : 책 책'이라는 한자'로 구성된 단어'다. 이 상형문자'가 마음에 든다. 그래서 책'이라는 글자보다는 冊이라고 쓰고 싶다. 설령 책'을 대체할 수 있는 멋진 순우리말'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 상형 " 을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흉내, 시늉'일 테니 冊은 책등을 흉내 낸 것이다. 책장에 책을 꽂을 대 보이는 부분이 바로 책등'인데 사철방식으로 만들어진 책의 껍데기를 뜯어내면 책등이 꼭 冊 모양처럼 생겼고, 책장에 꽂힌 책들을 닮았다. 그래서 冊이라는 한자를 보면 책과 함께 책장이 떠오른다.
기막힌 언어의 시늉이 아닌가 ! 누군가 < 책 > 은 잊기 위해서 읽는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라임을 염두(잊다와 읽다의 형태적 유사성)에 둔 재치 있는 입심'이라고 생각했으나 돌이켜보면 독서 행위는 결국 잘 잊어야지 잘 읽을 수 있다. 모순이요 역설처럼 느껴지지만 진실에 가깝다. 젯소(gesso)라는 흰 물감이 있다. 본격적으로 색깔 물감을 칠하기 전에 바르는 물감이다. 바르는 이유는 표면을 매끄럽게 해 줄뿐 아니라 색깔 물감의 접착력을 높여주고 본래 물감 혹은 페인트'가 가지고 있는 색을 더 선명하게 재현할 수 있기 때문에 젯소'를 바른다. 그래서 이름 없는 아마추어 화가였으며 극장 간판쟁이'였던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항상 젯소를 바르고 시작했다. 젯소는 그러니깐, 음.... 벽에 도배를 하기 전에 바르는 신문지 같은 역할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잘 읽기 위해 잘 잊어야 한다는 소리는 머릿속에다 젯소를 바르는 것과 같다. 누군가는 어차피 잊어버릴 것, 뭣하러 책을 읽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독서 행위'는 중금속 같아서 체내에서 항문 밖으로 배설되지 않고 무의식 속에 남는다. 먹은 음식이 피와 살이 되듯이 말이다. 이 망각은 곧 그 사람의 생각(사상)을 세우는 든든한 기둥이 되리라. 아니면......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