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을 주제로 한 책 두 권을 7,8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에 올려놓았는데, 거기에 참고가 될만한 기사들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경향신문의 기사는 '통섭'이란 번역어가 에드워드 윌슨이 제안한 원래의 취지보다 과장/왜곡됐다는 최종덕 교수의 지적을 소개하고 있고, 교수신문의 지난 6월 인터뷰 기사에서 재미 철학자 승계호 교수는 통섭이란 것이 좋긴 하지만 엄두도 내기 어려운 것이란 비판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챙겨둘 만한 견해들이다.

경향신문(07. 08. 07) "통섭, 왜곡 번역됐다”…최종덕교수 세미나서 지적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통섭(統攝)’이라는 번역어가 지나치게 과장되고 왜곡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최종덕 상지대 교수(철학)는 지난달 말 ‘한국 의철학회’ 여름 세미나에서 발표한 ‘통섭에 대한 오해’라는 글에서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가 번역한 ‘통섭’이라는 말이 학계의 충분한 성찰적 논의 없이 무분별하게 쓰이고 있다”고 밝혔다.



‘통섭’은 ‘사회생물학’(1975)을 저술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사용한 ‘컨슬리언스(consilience)’를 그의 제자인 최재천 교수가 번역한 말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벽을 허물고 더불어 넘나든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최종덕 교수는 “윌슨이 ‘컨슬리언스’라는 말을 썼을 때에는 실제로는 대등한 통합이 아니라 인문학이 자연과학에 종속되는 일방향적 통합을 의미했다”며 “하지만 이 용어가 최재천 교수에 의해 번역되면서 원저자의 의도와 다른 방식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종덕 교수에 따르면 윌슨은 문화적 진화가 생물학적 진화와 서로 피드백 관계로 상호진화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회학적 현상은 심리학적 현상으로 환원되고, 심리학적 현상은 생물학적 현상으로 환원되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물리학적 현상으로 설명된다는 물리환원주의를 신봉하는 흐름 속에 있다.



하지만 “최재천 교수는 원효의 화쟁사상과 성리학, 최한기의 통섭 등을 거론하며 ‘컨슬리언스’ 개념이 일반인으로 하여금 마치 동등하고 상호적이며 양방향적인 관점의 합일 수준인 양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최종덕 교수는 “만약 최재천 교수가 ‘통섭’을 윌슨처럼 일방향성의 환원적 통합이 아니라 상호적 통합에 있다고 믿는다면 최교수는 ‘컨슬리언스’ 저서의 유명도에 의존하지 말고 최교수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태도를 분명히 한 뒤 ‘통섭’의 의미를 전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최교수의 ‘통섭’은 윌슨의 책을 번역하면서 얻은 결과라서 분명한 표명이 어려울 것으로 추측한다”며 “그럼에도 분명성을 보여야 하는 것은 최교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과 같은 ‘통섭’의 활용이 인문학 정신을 오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종덕 교수는 “최재천 교수와 개인적인 감정은 없지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권위는 윌슨에게서 빌려오면서 그 뜻을 모호하게 사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며 “이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정식 논문을 작성 중이며 최재천 교수와는 언제든 논쟁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손제민기자)

교수신문(07. 06. 11) "서양 흉내만 내면 뭐해, 문제의식이 있어야지”

“반세기 이상 나는 서양철학을 이해하고자 했다.” 승계호 美 텍사스(오스틴)大 석좌교수(74세, 사진)는 ‘나’라는 말 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타자에 기대어 주장하지 않는 노학자의 자신감이랄까. 서울나들이를 마치고 미국으로 가려는 승 교수를 붙잡고 물었다. ‘한국 인문학에 대한 나로서의 의견은 무엇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번 방한에서 한국의 철학자를 두루 만난 승 교수는 정부의 인문학 진흥방안을 들어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거, 그거 그래서는 안돼요.” 그는 단호하게 손사래를 쳤다. “인문학은 문화를 정화하는 일이오. 문화를 정화하는 게 뭐요. 무엇보다 우리말을 정화하는 것에서 출발하지요.” 말 정화를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조차 없는 곳에서 자금이 지원된다고 인문학이 발전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요지다.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인문학 연구 소용없어

“더러워진 우리말”에 대한 그의 강연이 쏟아졌다. “기자 선생, 아(아래아)리나래가 뭔지 아시오” 오리가 많은 강, 압록강. “중국 문자가 들어와서 우리의 원래 말이 더러워졌어요. 뫼란 말이 있는데도 산이라고 씁니다. 원래 백두산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 ‘어제’는 우리말이 있지요. 그럼 ‘내일’은 우리말로 뭐요. 없잖아요. 원래 없었겠어요. 없어 진거요. 사라진 거요. 죽은 거지요.”

일본어나 영어에 대한 생각도 비슷했다. “사회정의를 위해서 일본문화를 떨어내자는 말을 합디다. 正義가 뭐요. 일본에서 받아들인 정의는 천황권위의 질서를 의미하지요. 얼마나 부끄럽소. 사회정의는 공정한 거잖아요. ‘고른 뜻’ 이렇게 쓰면 얼마나 좋소. 뭐 요즘에는 지도자를 리더라고 부릅디다. 그거 독자(reader)잖아요. 외국어조차도 일본을 통해서 이중번역 돼 들어오는 수준인데 어떤 문화가 만들어 질 수 있소. 우리말도 제대로 못쓰면서 인문학연구가 무슨 의미가 있소. 거기에 돈 줘서 문화정화도 제대로 못하면 뭐합니까.”

그는 말을 이었다. “한국 성형수술 기술이 최고지요. 아름답게 하려는 건데 꼭 서양사람 모습으로 얼굴이며 몸을 만들고 있어요. 아름다워지는 것은 본성에서 나와야지, 그러려면 말의 본성이 아름다워져야지요. 한국 인문학은 서양사람 얼굴을 만드는 성형수술 같은 거요.”

방한동안 만났던 한국의 철학자들에 대한 쓴 소리도 이었다. “철학회에서 칸트니 플라톤이니 하도 많이 이야기해서 왜 그런지 물어봤지요. 한 학자가 그런 이름을 따야 권위가 선답디다.” 이 대목에서 그는 껄껄 웃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려고 옛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거죠. 왜 자기 이야기할 시간에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를 합니까. 지금 하는 꼴은 허섭이오.” 10년 전부터 포스트모던 유행이 불었다고 귀뜸했다. “것도 그래. 서양처럼 근대사를 거쳐서 나오는 건데, 한국은 근대 경험이 없잖아. 마치 구교도 없는 곳에서 종교개혁을 한다는 거지요.”

한국의 학자들도 이 문제에 대해 잘 알거라 말했다. 하지만 승 교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더 큰 문제는 학자들이 문제의식이 없어요. 문제의식이 있어야 의제도 설정하고 해결책도 찾을 거 아니오. ‘인문학 위기’가 아니라 본질을 못 찾고 잘못 연구해왔던 거요. 우리 자신의 본체도 깨닫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계적인 연구를 하느냐는 거요. 우리말로 우리 생각을 내뱉을 수도 없는 수준에서 서양철학을 흉내 내면 뭐하나요. 이거 미장문화요. 누가 그랬고 누가 그렇다는 식으로 모방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이오.”

학문에 대한 비판은 생활의식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한국 많이 변했죠. 어리둥절해요. 아파트들 전부 넓게 지어 지냅디다. 그런데 창문만 열어보면 얼마나 더러워요. 그런 더러운 도시 속에 아름다운 아파트는 없지요. 차도 큰 차만 타고 다니더군요. 길은 좁은데 어떻게 그래요. 차에 맞게 길을 어떻게 맞춰요. 길에 맞게 차를 맞춰야지요.”

한국의 대학에서 부는 ‘세계화 바람’에 대해 물었다. “그거 세계화 아니잖아요. 솔직하게 써야지요. 미국화잖아요. 세계화라면서 태국에 관심 있나요. 제 나라 말도 제대로 못 배운 아이들에게 유학 보내고 영어 가르치고, 도대체 무슨 소용이에요.”

‘통섭’, ‘융합’과 같이 학문을 전체적인 지적활동으로 보자는 말에 대해 승 교수는 “좋긴 하고, 학자들이 그런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독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쉽게 말 못하잖아요. 학문 한 가지하기도 힘듭니다. 통섭 학문하는 사람은 천만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할 겁니다. 진짜 그거 하려는 사람은 무서워서 엄두가 안 나는 그런 겁니다. 사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쉽게 말하지요.”

교수는 교수 일만 제대로 하면 돼
학회에서 그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고 했다. “내게 그런 걸 물어요. 교수님은 아직도 평교수입니까라고. 학계에 있는 친구들 말을 들으면 학자들이 교수가 되고 싶어 하고, 그것도 서울대 교수가 되고 싶어 하고, 장관되고, 국무총리되고 이래야 교수 제대로 하는 거고, 그게 소망이래요.”

승 교수는 후예양성을 학자의 최고 덕목으로 쳤다. “후예를 기르는 것은 평교수가 하는 일입니다. 장래의 인물을 기르는 이런 성직이 어디있소. 신문에 논설 쓰고, TV 스타가 되려고 하지 말고 평교수 일을 명예롭게 생각해야 해요. 장래에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의 인생관과 일생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나요. 그런 일을 하는 평교수가 이제 賤職이 돼 버렸어요.” 교직이 성직이라는 말과 함께 이어지는 논란이 노동조합이다. “교수 노조를 반대하지 않아요. 교수들 대우가 시원치 않아서 하는 거니까.” 승 교수는 옷에 낀 먼지를 털어내듯 시원스럽게 말을 떨어내고 간다고 했다. “교수는 진리를 실천하는 거지, 인기에 영합하려면 교수 할 필요 있나. 한 마디만 하지요. 교수는 교수만 제대로 하면 됩니다.”

승 교수는 1995년 한국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참석한 이후 12년 만에 방한했다. 이번에는 가족들과 함께 보름간 서울에서 머물면서 다양한 한국의 철학자들을 만났다고 했다.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놓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상대방이 완전하게 알아들을 때까지, 상대방의 말을 자신이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팽팽하게 대화했다. 영어가 섞여 나오면 우리말로 무슨 의미인지 도리어 물어보고 가능한 우리말을 쓰려고 노력했다. 이면지를 꺼내 그림을 그려 설명하고 상대방 팔을 붙들고 흔들면서 설득했다.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할 때는 흥분에 도취해 체면을 던져두고 일어서서 방방 뛰기를 서슴지 않았다. 젠체하지 않는 모습이 담백해 보였다. 인터뷰를 지켜보던 승 교수의 아내가 걱정했다. 막말해도 되냐고. 승 교수는 웃으며 답했다. “뭐, 내일이면 가는데. 허허.” (박상주 기자)

07. 08. 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