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처갓집에 갔다가 우연히 읽은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장인은 조선일보를 구독하시는지라 내가 가끔 건너가서(아파트 앞동이다) 들여다보는 건 조선일보의 주말판이다. 소설가 김훈과의 장문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안 했던 얘기'만 들어 있는 건 아니지만 신작 소설에 대한 구상은 나로선 처음 접한다(동시대를 다룬 그의 소설에 대한 기대는 http://blog.aladin.co.kr/mramor/1367796 참조). 구체적으로는 내년 겨울에 집필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하니까 그의 '대표작'을 생각보다는 일찍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아래 인터뷰는 <남한산성>을 7-8월의 사회적 독서목록에도 올려놓은지라 '시회적 독서'로 분류한다. 말미에는 후배작가 김연수의 인물평도 붙여놓는다.
조선일보(07. 07. 21) [광일 기자가 만난 사람] 베스트셀러 ‘남한산성’ 소설가 김훈
김훈은 재작년 세금만 8700 만원을 냈다. 소설로 밥 먹는 한국 작가 중 최고 납세자 그룹에 속한다. 약속 장소는 일산에 있는 오피스텔이었다. 김훈은 자전거를 끌고 땀을 흘리며 나타났다. “(이 자전거) 1500만 원짜리야. (기사에) 써도 돼.” 그는 지나치게 솔직했다. 자발적 편집이 필요했다. 3시간 반을 인터뷰하다 다시 옮긴 자리에서 그는 부드러운 사케(청주)를 다소 거칠게 마셨다.
2004년에 인터넷서점 YES24에서 대표작가들 중 ‘지금 노벨문학상을 받을 사람’을 물었다. 1위는 ‘토지’의 박경리였다. ‘앞으로 받을 것 같은 사람’은 1위가 ‘칼의 노래’의 김훈이었다. 요즘 그는 여러 북클럽에서 가장 모시고 싶은 첫 번째 손님이다. 4월 중순에 낸 ‘남한산성’은 갖가지 화제를 뿌리면서 이번 주까지 27만부를 찍었다. 물론 종합 1위다. 현대, 삼성, 금호, 아모레퍼시픽 등등 굴지의 그룹들도 그를 모셔간다. 강의료는 ‘200(만원)안팎’인데, 역사와 김훈에게 배우자는 열풍 같은 것이다. 검사들, 현직 교사들, 대학생들 강의 요청은 수십 개가 쌓여 있고, 틈을 내려고 최선을 다한다. 영화사에서도 3곳에서 접촉이 왔다. TV 드라마 제작사 2곳도 출판사에 의사타진을 했고, 뮤지컬도 2곳에서 오퍼를 넣었다. 심지어 CF 제안도 들어왔다. 요컨대 그는 이 시대 최고 인기작가이고 또한 부자다. 본격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에 한가지 약속을 했다.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안 했던 얘기만 합시다.” “…”
―몇 시에 일어나나?
“7시쯤 일어난다. 술 안 먹으면 6시쯤. 방 청소하고, 옷 입고, 신문 본다.”
―침대에서 자는가?
“장판 방바닥에서 요 깔고 홑이불 덮고 잔다. 나는 어디서든 문 열고 잔다. 문 닫으면 답답하다.”
―해외여행가면 호텔 방문도 열어 놓는가?
“해외여행 별로 안 간다. 작년에 프랑크푸르트에 간 것이 구라파(유럽)에 30년 만에 간 것이다. 나는 비행기도 싫다. 사람 묶어놓고 개밥 주고…. 증오하지. 엄마가 미국에 계셔서 뵈러 갈 때가 있긴 하지만 관광목적으로는 안 간다.”
―신문은 뭘 보는가.
“조선일보와 국민일보다. 내가 국민일보 근무할 때 평생 독자가 됐다.”
―신문은 어떤 면을 주로 보는가.
“뉴스면은 제목만 보고, 사설과 오피니언면을 꼼꼼히 읽는다. 논객들이 미리 설정한 틀 안으로 이 세계를 밀어 넣으려는 안간힘이 보인다. 세상이 그 안으로 들어갈 리가 없는데. 보편적 진리를 말하려는 강박에 빠져서 아무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자들은 이념의 일관성을 과시하기도 해. 이념을 일관되게 해서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나는 그런 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런 논객들을 보면 다 옳아. 틀린 소리 안 해. 그렇지만 세상이 이 지경인 것은 옳은 말이 모자라서 이런 것은 아니란 말이지.”
김훈은 말 밭을 솎아 낸다. 뵈게 나 있는 문장들을 못 참는다. 몇 밤을 공들인 문장도 내 것이 아닌 듯하면 고랑을 뒤엎고 다시 김을 매듯 그 자리에서 버린다. 그래서 더디다. 작가라고 명함 박으면 누군들 안 그럴까 싶지만 그는 참 유난스럽다. 그가 2001년 동인문학상을 받았을 때 심사위원회는 한국 문단에 ‘벼락처럼 내린 축복’이라고 했었다.
―아침은 뭘 먹는가.
“과일, 야채, 된장국, 밥. 마누라가 주는 대로 먹는다. 난 식단과 돈에 대한 권력이 없어.”
―식사 마치면 바로 집필에 들어가나.
“9시쯤 시작되지. 연필 들면 오늘 글이 써지는지 안 써지는지를 알아. 안 되는 날은 종일 앉아 있어도 안 돼. 그런 날은 그냥 나가 놀아. 그러나 아침 9시부터 다음날 새벽2시쯤까지 쓸 때도 있어. 그런데 겨우 5장밖에 안 써지면 환장하지. 그것마저 맘에 안 들어 새벽에 버리기도 해.”
―점심은 어디서 먹나.
“마누라가 집에 있으면 집에 가서 먹고, 외출했으면 근처에서 해결하지. 가장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방법으로 먹어. 김밥과 자장면. 자장면은 인이 박혀서 한동안 안 먹으면 먹고 싶어져. 맛의 근원 정서를 갖고 있어. 그 빌어먹을 찜찜한 게 생각나.”
―술은 무슨 술 먹나.
“소주는 안 먹으려 해. 빚을 내서라도 좋은 술 먹자는 생각이지. 싼 술 먹으면 몸이 부대껴. 요즘 와인을 배웠는데 최근에는 사케로 바꿨어. 와인을 마시면 계통 없이 취해서 너무 로맨틱해져.”
―계통 없이 취한다니?
“술이 뼈 속에 스며 논리의 계통이 무너져. 대신 위스키는 딱, 취하는 계통이 서지. 사케는 양쪽이 다 있어.”
김훈은 성큼성큼 냉장고로 가서 사케 ‘월계관’을 꺼내왔다. 안주는 마른 오징어에 고추장이었다.
―당신은 뭐 하냐고 물으면 ‘논다’고 대답할 때가 많다.
“ ‘논다’는 건 매우 치열한 행위야. 작가에겐 세상을 관찰하는 행위지. 나는 혼자서 잘 놀아. 자전거 타고 나가 바람 쐬고 노을을 본다고. 놀면서 세상을 들여다 보고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구나 하는 것을 알게 돼. 노을이나 바람 속에 있다는 것은 내가 시간 속에 있다는 얘기야. 생애를 스쳐 지나가는 시간을 어떻게 언어로 포착해서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답함이 있는 거지. 결국 할 수 없는 것이고.”
―당신은 세상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쓴다. 감정을 표백해버린, 강시들의 언어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죽고, 통치자로서만 기능한 임금의 언어다. 작가의 매혹적인 오만과 전지전능의 시각에서 나올 수 있는 문장만 쓴다. 유머를 혐오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수다를 떨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어. 나는 내 문장이 뼈만 가지고 있으면 좋겠어. 골격만…. 뼈 안에 모든 정서나 정한(情恨)이 저절로 드러나길 바라는 것이야. 나는 내 문장이, 말하자면, ‘귀족의 문체’를 완성하는 것이길 바래. 유머? 나는 뼈대 안에 유머가 있다고 생각해. 드러나는 것은 물론 아니지. 기자 시절에 배운 스트레이트 문장에 대한 편애와 집착이 있는 것이고.”
―당신은 말과 글을 경멸하면서 말을 하고 글을 쓴다. 말은 ‘쓰레기’고 글은 ‘똥’이다. 그래서 꼭 필요한 만큼만 말하고 나머지는 절대로 내뱉지 않는다. ‘…같은’, ‘…처럼’ 같은 비유법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말과 글을 경멸하면서 말과 글로 먹고 사는 것,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밥벌이의 지겨움’인가.
“나는 말과 글을 불신하는 사람인데, 경멸까지는 아니야. 혐의를 두는 정도지. 그것들이 소통 가능한 것인지 의심해. 객관적 진실에 도달할 도구인지 불신하는 것이지. 그러나 결국 말을 안 하고는 살 수 없으니 신뢰할 수는 없고 말을 끌고 살아가.”
―산성에 갇힌 신하들에게 임금으로부터 적장 칸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글을 쓰라는 명이 떨어진다. 결국 최명길이 그 글을 썼고, 임금은 그 글을 밟고 나가서 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당신은 현실주의자인가. 글을 밟고 지나가 길을 내겠다는 것인데, 그 길은 어디로 뚫려 있는 것인가. 결국 삶을 도모하는 도생(圖生)의 길이 옳은 길인가.
“나는 누구의 편이 아니야. 고립 무원의 성 안에서 양대 담론의 축은 김상헌과 최명길이지. 서로 부딪치고 뒤엉켜 무화(無化)되는 것을 그리려 했던 것이야. 인조가 걸어간 길은 선택해서 간 것이 아니야.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간 것이지. 인조가 서문(西門)에서 삼전도까지 걸어갈 때 비로소 만 백성의 아비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죽더라도 뜻을 남기자는 김상헌과, 임금에게 살길을 열어주려는 최명길, 그들 사이에 임금은 뜻은 양쪽에 다 걸려 있었다. 그러나 대장장이 서날쇠가 결국은 이 땅을 메워간다. 이 작품에서 작가 자신이 가장 많이 투영되어 있는 인간은 임금인가, 최명길인가, 서날쇠인가.
"나는 가령 내가 그 시대에 지식인으로 태어나서 임금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다면 어떤 행동으로 47일을 견뎠을까 생각해봤어. 등에서 진땀이 나고 사지가 떨렸어. 글을 못 쓰겠더라고. 짐작컨대 나는 아무 말도 안 하는 자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내 소설 속에 아무 말도 안 하는 자를 그리려 했는데 그릴 수가 없었어. 입 닥치고 있는 지식인을 그리고 싶었는데 못 썼어. 이 놈이 빠졌으니 이번 소설은 미완성인 것이야.”
―일반 독자들이 가장 많이 거론하고 있는 대목은 김상헌이 강을 건넌 다음 뱃사공의 목을 베는 장면이다. 그리고 김상헌은 눈물을 흘린다. ‘김상헌의 칼이 사공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사공은 얼음 위에 쓰러졌다. 쓰러질 때 사공의 몸은 가볍고 온순했다.’ 독자들은 ‘가볍고 온순했다’에서 전율한다.
“사공은 죽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사람이지. 그러나 김상헌은 그 놈을 살려줄 수가 없는 것이야. 사공을 설치하는 것은 그냥은 못 건너는 강, 그만한 고통을 치러야 하는 강이란 점, 사공을 죽여야 한다는 점 등을 그리려 했던 것이야. 마지막에 ‘눈물’을 넣을까 말까 몇 번 망설였지. 그 놈의 두 글자가 들어가서 이것이 뽕짝이 된 거야. 눈물이 들어가야 인간의 냄새가 나긴 하는데. 그참. 괴로웠어. 그 두 글자가 추잡했어. 써야만 독자가 알아 먹는 것인가. 이상해. 나한테 안 맞는 것 같아. 재판 찍을 때 빼버릴까….”
―당신의 작품들은 놀랍게도 ‘서정적 국가주의’를 호흡하고 있다. 국가주의로만 침투하기 힘들 때는 그곳에 ‘허무’를 함께 섞는다. 당신의 이번 작품도 ‘조국의 성’에 바친다고 했다. 그 조국은 운명론적으로 갈 길이 정해져 있다. 그래서 허무라고 말한다. 흡사 파울로 코엘료가 자주 쓰는 ‘마크툽’이란 아랍어를 떠올리게 한다. ‘어차피 그렇게 되어 있는 일’이란 뜻인데, 그들의 운명은 ‘마크툽’이었는가.
“서문에 ‘조국의 성’이라고 썼는데, 나는 조국이란 단어를 내 평생 처음 쓴 것이야. 내가 감히 쓸 수 없는 단어였어. 내가 조국을 쓴 뜻은 내 역사적 혈연을 말한다기 보다 삶은 영원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야. 삶은 단념하거나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국가도 마찬가지라 생각해. 개인의 윤리와 국가의 윤리는 다른 것이야. 개인은 치욕을 참지 못해 순국선열처럼 자결할 수 있지. 그러나 국가는 그렇게 할 수 없어. 국가는 그런 윤리의 길을 갈 수 없어. 국가가 자멸의 길을 간다면 죄악이지. 국가는 치욕을 걸머지고 살아 남는 것이 도덕이야.”
김훈은 “지금도 무슨 부대라고 얘기하면 절대 안 되는” 곳에서 37개월 군역을 치렀다. 고려대 영문과를 다니다 군대 갔는데 돈이 없어서 복학을 못했다. 그는 휘문고 졸업이다. 그는 “군대 가니까 정말 좋더구만”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말로 군인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육사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것에 실패해서 기자가 됐고, 지금은 작가다. 사적인 이야기로 잠시 화제를 바꿨다.
―키, 몸무게?
“172㎝, 63㎏”
―시력은? 안경은 언제 쓰는가?
“시력도 청력도 나빠. 귀가 안 들려 병원에 갔더니 노화 현상이라면서 못 고친대. 귀가 나빠져도 괜찮아. 듣고 싶은 것도 없고. 그러나 눈이 안보이면 안 되지. 책을 못 읽잖아.”
―영화 볼 때는 안경을 쓰지 않나.
“영화를 안 봐. 내 생애에 지금까지 5개도 안 봤어. 나이 먹고 가려니 컴컴한데 가기 싫고, 냄새 나고, 껌 씹고…. 영화뿐만 아니라 테레비도 안 봐. 뉴스만 봐. 인이 박힌 것이지, 기자질을 많이 해서. 뉴스는 하루만 안 봐도 큰 일이 벌어져 있더군. 나라가 뒤죽박죽이니까 그렇지. 뭔가 무너져 가고 있어. 뉴스 장사 해먹기가 정말 좋은 나라야.”
―삐뚜름하게 모자를 쓰고 다니는 이유는 무엇인가.
“머리카락이 빠져서 그래. 병원 갔더니 직사광선 받지 마라고 하데. 패션이 아니야. 일종의 노인용품인 게지. 겨울에는 안 써.”
김훈과 이야기하면서 자전거를 빼놓을 수는 없다.
―1500만 원짜리 자전거도 있나.
“처음 10만 원짜리는 타다 버렸어. 지금이 네 번째야. 조립품이니까 다국적이지. 내가 원하는 것은 가볍고, 튼튼하고, 고장 안 나고, 세 가지야. 미관은 필요 없어. 4000만 원짜리도 봤어. NASA가 개발한 카본소재로 만든 자전거야. 어떤 놈이 그 자전거를 끌고 왔길래 10분만 타 보자고 해놓고 1시간을 탔지. 진짜 좋더군. NASA는 얼마나 위대해. 나 같은 놈까지 매혹시키니까. ‘남한산성’ 팔아서 그거 살 거야. 귀족 취미라고 비웃는 놈들이 있는데 30년 동안 야근한 끝에 지금 1500만 원짜리 타는데 뭐가 잘못이야.”
―대회에도 나간다는데.
“9월7일부터 8일까지 전남 월출산에서 40㎞코스를 열 번 왕복하는 400㎞ 대회가 열려. 전국 레이서들이 오는데 나도 가서 한판 붙을 거야. 월출산을 넘는 아름다운 코스야. 차밭도 지나고. 꼴등을 하더라도 갈 거야. 지금 체력 강화훈련을 하고 있어. 최소한 20등은 해야 되는데….”
― ‘기록’이 얼마나 되나.
“경기장에서 쟀더니 내리막에서 50㎞가 나오데. 선수들은 평지에서 80㎞쯤 나오고, 나는 평지에서 30㎞수준이야. 그것도 무서워. 30㎞로 10분 이상을 못 달려. 400㎞를 간다면 지구력으로 가는 것인데, 몇 놈 꼬꾸라지겠지. 나중에 스퍼팅해서 따라잡아야지.”
김훈은 자기 이름이 새겨진 원고지에 연필로만 집필한다. 김훈이 팬 사인회를 할 때는 그에게 반한 여성 독자들이 장사진을 친다. 그들 중에는 연필을 선물하는 여성도 많다. 최고급품으로 치는 연필이 독일산 스테드틀러 HB다. 김훈은 자리에 앉자마자 그 연필을 자랑했다. “나 좋아하는 ‘부녀자’가 준 것이야.” 이런 대목에서 그냥 ‘여자’라고 하면 김훈이 아니다.
―방송이든 신문이든 공개 장소에서 대화를 할 때 말을 문어체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족들과도 그런 식으로 대화하는가.
“나는 어문일치에 반대하는 사람이에요. 말과 글은 전혀 다른 것이야. 한글지상주의자들이 한자를 배격하는 것은 야만적 폭거야. 나는 나의 글과 말에 한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다 써.”
―‘비호’를 쓴 소설가이자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김광주 선생이 아버지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무엇인가. 문장인가. 정신인가.
“나는 유산이라고는 숟가락 하나 받은 게 없어. 우리 집에 장안의 글쟁이들이 다 왔어. 그러나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아버지를 묻고 와 그 묘지 값을 못내 13개월 월부로 갚았어. 제대 후(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는데 첫 월급이 2만5000원이야. 아버지가 장흥에 있는 공원묘지에 묻히셨는데, 외판원이 와서 내 봉급에서 묘지 값으로 7000원씩 떼 갔다고. 월부로 다 갚고 나자 그쪽에서 10평 묘지에 대한 문서를 주데. 이제 네 것이다. 그날 산소 가서 소주 먹고 통곡했어. 그런 아버지야. 허랑방탕하고 술을 엄청 먹었지. 상해에서 김구 캠프에서 한 20년 먹고, 광복된 서울에서 먹고, 6·25때 부산 피난 가서 먹고, 수복 후 명동서 박인환과 먹고…. 나는 지금 술 먹는 것도 아니야. 아버지는 동아시아의 격변기를 따라다니며 술 먹었지. 술의 본류를 따라다니며 먹은 것이지.”
―지금도 아버지 편인가.
“지금도.”
김훈의 소설에는 열렬한 팬들이 많다. 반대로 그의 문장에 대해 안티들도 있다. 문체 미학의 매혹이 너무 강렬해서 금세 피로증세를 느낀다는 독자도 있다. 그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목숨 걸고 쓰는데 하루에 원고지 3장 밖에 못 쓰고, 그나마 갖다 버리는데, 그들이 모르겠다면 난들 어쩌겠어. 헤어질 뿐이지. 사실 나는 독자들을 고문하고 싶었어. 잔혹하게 끝까지 고문하자. 희망은 안 보이는데 고문만 하면 결국 나를 이해하게 될 것이란 생각이었어. 한 문장을 쓸 때마다 독자를 고문해서 사지로 몰아넣듯이 했어. 기름 짜는 압유기에 넣어 독자를 짜려고 했어. 그래야 그들이 정신을 차리는 것이지. 그래야 김훈을 욕하더라도 삶과 역사를 생각할 것 아냐.”
그런 김훈의 책상 위에는 천칭저울이 천장으로부터 걸려 있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한의사였는데 물려 받은 것이다. 김훈은 한의사도 소설가도 시대의 중인(中人)계급이라고 생각한다. 중인만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다고 믿는다.
―내년이면 육체적 나이로 ‘환갑’이다. 그러나 당신은 소설을 낼 때마다 ‘나는 신인이다’고 했었다. 이제 세계적으로 이름이 크게 알려지고 있는 마당에 아직도 신인이라고 하겠는가.
“나는 신인으로 살다 죽으려고 해. 신인은 문화의 꽃이지. 전위와 아방가르드라는 점에서. 이류나 삼류더라도 전위가 돼야 해. 그게 안 되면 문학은 망해.”
―대표작을 썼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내년 겨울에 쓰려고 해. 내가 살아온 시대, 아까 말한 희망이 좌절된 시대를 쓰는 것이지. 세상과 부딪쳐 좌충우돌하는 기자를 주인공 삼을 거야. 애인은 도망가고 좌충우돌만 남은 기자. 금방 쓸 수 있을 거야. 당대를 쓰는 것은 소설가로서 치사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어. 우리 청춘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어야지.”
―당신이 살아온 시대의 대부분을 당신은 기자로 살았다. 기자(언론인)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삶은 무엇이 가장 크게 다른가. 글을 써서 먹고 산다는 점 말고.
“작가가 되면 자기가 자기를 통제해. 기자는 육군처럼 삼엄한 기율과 통제가 있잖아. 소설가는 스스로 통제 않으면 날라리 깡패가 되는 것이지. 자기 통제가 어렵고 슬퍼. 나를 통제할 놈은 없고, 대신 욕하고 비판하는 놈은 많아. 그것은 처절하게 외로워. 나는 우리 선배들이 정계, 금융계, 관계로 가는 것 좋다고 생각해. 언론계의 수많은 엘리트가 경륜을 펴고 세상에 발전을 가져오니 좋잖아. 언론계에 뼈를 갈아 바치는 것만이 순수한 언론인이라고는 생각 안 해.
―기자로서의 경력 가운데 한국일보, 시사저널, 국민일보 그리고 한겨레신문으로 옮겨다닌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나는 조직과 후배에 대한 불화가 많았어. 나는 엉기는 것이 싫어. 그들은 자꾸 신문사를 혈연집단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나는 정말 싫었어. 나는 회사를 떠날 때도 앞날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어. 지금도 미래에 대한 공포가 없어. 나의 천부적인 자질이야. 백척간두에 서면 뛰어내리는 거야. 그리고 살아 남아. 나는 낙법을 안다고. 노무현 대통령은 못 뛰어내린 거야. 그래서 지금 저 모양이 된 거지. 1989년12월31일 한국일보에서 나올 때 다시는 언론사에 안 가려고 했어. 80년대를 하도 비굴하게 살았기 때문이지. 굴욕, 치욕, 죄악이 있었지. 90년대 들어 1년을 방랑하니까 쌀이 없어. 그때는 술 많이 먹었어. 남해안을 돌면서 뼈가 삭고 똥물이 나오도록 마셨지.”
김훈은 국가에 감사한다고 했다. 자신의 책을 사고,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교육 받은 독자를 국가가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조국이 수십 년 동안 수백 조의 돈을 투자해서 교육 받은 인간을 만들어 놓았기에 자신이 먹고 산다는 것이다. 국물을 부어주던 단골 어묵집 직원 정혜은 양은 “(김훈 선생이)처음에는 무서웠으나 갈수록 따뜻하고 귀엽다”고 말했다. 김훈은 마지막에 말했다. “ ‘남한산성’에 그 모든 역사의 하중을 걸지 말라고!” 그는 취했다. “민중들이 숫자의 힘으로 덤비면 안돼. 나는 숫자의 힘에 절대 지지 않아. 문체라는 것은 문명을 지배하는 것이야.”
조선일보(07. 07. 21) 소설가 김연수 ‘내가 본 김훈’
그의 작업실 칠판에는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는 말이 적혀 있다. 10년 전쯤, 나는 잡지사 기자, 그는 신문사 기자였을 때 그의 글을 받은 적이 있었다. 책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삼각파도 대처법에 관한 매뉴얼 책을 추천했다. 선원들이 보는 책이었다. 그는 닦고 조이고 기름칠 때,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그의 영혼은 수리공에 가깝다. 공구에 대한 그의 페티시즘적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공구로도, 매뉴얼로도 대처할 수 없는 일에 관해서라면 그의 문장은 그쯤에서 멈춘다.
공구와 매뉴얼이 없다면 아마도 그는 쓰지 못할 것이다. 그건 그가 20여 년 간 몸담았던 직장의 직업윤리였다. 그가 ‘겨우’ 쓰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는 단어의 운용에도 매우 인색한데, 그 역시 공학적으로 한글을 다루기 때문이다. 자음과 모음을 이리저리 연결시켜서 얻어내는 문장이어서 그의 글은 만연체가 불가능하다. 그 글은 또한 언제라도 자음과 모음으로 해체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문장은 허무한 느낌마저 든다. 언젠가 해체될 것을 알면서도 조립해야만 하는 자의 허무다.
조립하고 해체하는 세계 너머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만지는 언어로는 그 세계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 그럴 때 보면 그는 ‘공자(孔子)주의자’다. 매뉴얼대로 공구를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셈이다. 그가 최상의 인간으로 믿고 있는 사람은 육군 대위인데, 그 까닭은 육군 대위야말로 필드 매뉴얼에 가장 근접하게 행동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그에게 육군 대위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음악가다. 그들은 공학적으로 행동한다.
그의 고향은 서울 삼청동이다. 그러므로 그건 사대문 안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 감각이리라. 시정에는 시정을 움직이는 원리가 존재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 원리를 지킬 때, 시정은 즐길 만한 곳이다. 공구와 매뉴얼의 세계를 믿을 때, 그는 세상 안에서 잘 놀 수 있다. 그러니 계속 닦고 조이고 기름쳐야만 하리라. 그래야만 이 세계를 한 번 더 지독하게 긍정하면서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내가 들은 가장 인상적인 말은 “내년 봄까지 술값은 모두 내가 낸다”였다. 어느 해 가을이 한참일 무렵, 들었던 말이다. 적어도 꽃이 필 때까지는 함께 술을 마실 수 있겠구나고 혼자 안도하던 찰나, 그가 덧붙였다. “내년 연말까지는 김연수가 사라.” 다행이다. 그리고 몇 해가 더 흘렀지만, 우린 지금껏 아주 잘 놀고 있다. 술은 거의 대부분 그가 산다. 정말 다행이다.
07. 07. 22.
P.S. 김훈의 오랜 독자로서(내가 기억하는 건 한국일보의 '문학기행'을 연재하던 시절부터의 김훈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풍경과 상처>(문학동네, 1994)와 <남한산성>(학고재, 2007)이다(그 사이에 <자전거여행>이 있다). 나는 <남한산성>을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풍경과 상처>는 여러 권의 책을 사서 여러 번 읽었다. <풍경과 상처>에도 윤선도와 관련하여 남한산성이 언급되는 대목이 한 군데 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쫓겨간 임금이 삼전도로 내려와서 청태종에게 투항하자, 해남에 은거해 있던 윤선도(1587-1671)는 지체없이 배를 내어 섬으로 향했다. 윤선도의 배는 치욕의 육지 맨 끝, 토말(土末)에서 출항했고, 육지의 한복판에서 임금은 치욕을 수용하는 용량을 극대화함으로서(*'극대화함으로써'의 오타이다) 창민과 국토를 겨우겨우 보존했다. 임금이 인욕의 붉은 옷을 걸치고 성문을 나설 때 눈덮인 겨울 산성에 통곡소리 가득했으나, 울기는 쉬운 일이었고 살아남기는 어려운 일이었다."(56쪽)
이 대목을 포함하고 있는 글 '낙원의 치욕'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윤선도는 향년 85세로 부용동 낙서재에서 죽었다. 그는 세 차례에 걸쳐 유배되었다. 그의 유배기간은 모두 20년에 달했고 유배지는 함경도 경원, 혹은 삼수갑산 같은 극지였다. 그는 유배와 유배 사이의 19년을 보길도나 해남에서 은둔했다. 은둔과 은둔 사이사이에 그는 또다시 격렬한 언어를 동원하여 당대현실을 공격했고, 그 결과는 또다른 유배였다. 보길도가 윤선도의 낙원인지, 아니면 함경도 경원과 삼수갑산이 윤선도의 낙원인지 보길도에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당대 현실의 양쪽 극지에 보길도와 삼수갑산이 있다. 보길도에서 삼수갑산의 거리는 멀고 멀다. 그의 낙원은 아마도 그가 한번도 발붙일 수 없었던 '당대 현실' 안에 혹시 있다면 있을 터이었다."(59쪽)
그렇게 적은 김훈 또한 소설가로서 바야흐로 '당대 현실'에 밭을 내딛으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