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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언어 - 더없이 꼼꼼하고 너무나 사적인 무라카미 하루키어 500
나카무라 구니오 지음, 도젠 히로코 엮음, 이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10월
평점 :
"얼마나 좋아?" "봄날의 곰만큼 좋아" (280, 노르웨이의 숲 인용)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이 인용문이 딱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루키 원더랜드에 대한 선망이 없었음에도 하루키 월드에서 한바탕 놀고난 느낌이 딱 그렇다. 봄날의 곰만큼 좋다.
첫장을 펼치면서 우와~ 하는 감탄사로 시작을 했고, 하루키의 키워드가 지나고 가나다순으로 된 하루키의 언어를 읽으며 내가 읽은 에세이들과 몇 권 되지 않는 소설과 그에 대한 정보가 마구 뒤섞이며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과 또 새로 알게 된 많은 이야기들에 재미있어하며 읽었다. 아담한 사이즈는 맘에 드는데 생각외로 엄청난 두께감을 주고 있지만 막상 다 읽고 나면 왠지 아쉬움이 느껴진다. 이미 많은 이야기를 읽었지만 아직 모자란듯한 느낌이랄까?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 책을 쓴 나카무라 구니오의 후기 - 맺음말 혹은 마침 있는 재료로 만든 스파게티 같은 나의 중얼거림,까지 읽고 이 아쉬운 마음을 하루키 따라하기로 달래봤다. 물론 밥을 먹을 때가 되기도 했지만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정리해야할 때가 되기도 했고 그래서 정말 온갖 채소와 고구마, 두부까지 넣어 파스타를 만들어먹었다. 하루키가 학창시절 자주 그랬다고 한 것처럼 삶은 스파게티면에 그 모든 것을 다 쓸어넣어 만들었는데 의외로 맛있다. 아, 나도 이러다가 하루키언이 되어버리는 건가?
이 책은 체계적으로 만든 백과사전이 아니기에 중간중간 약간의 중복된 이야기가 나오고 이야기를 하다 만 듯한 느낌도 있지만 그래도 꽤 만족스럽다. 아니, 사실 스파게티에 대한 이야기도 ㅅ 항목을 찾아보면 있을 것 같지만 하루키가 만들어 먹은 스파게티는 ㅁ 항목에 있다. '마침 있는 재료로 만든 스파게티'가 소제목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빵가게 재습격에 대한 이야기를 분명 앞에서 읽었는데 왜 뒤에 또 나오지? 하다가 그때야 맥도날드와 빵가게 재습격의 중복된 내용을 알아챈 것이다. 그리고 하루키라면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재즈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텐데 정보가 너무 약한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이야기하다가는 끝이 없을 듯 하지만.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잘못알고 있는 듯 하다. 이 책은 하루키에 대한 백과사전이 아니라 하루키의 언어,인 것이다. 그래서 그가 쓴 글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글에 나온 은유에 대한 것 주인공들, 작가들, 그의 언어로 번역한 책들...
이 책을 읽고나면, 아니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뭔가 나눈다는 것이 맞는 것 같진 않지만 에세이를 주로 읽었던 나는 이제 소설을 읽어야 할 때가 되었다, 라는 그러니까 소설파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니 그냥 쉽게 그의 소설들을 읽고 싶어졌다 라고 하면 될 것을.
좀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본다면. 책의 외형에 대한 것은 별로 언급을 하지 않는데 이 책은 600쪽이 넘는 분량때문에 당연한 선택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끈제본으로 되어있다. 편집도 마음에 들고 끈제본도 다 마음에 든다. 몇날며칠을 야금야금 읽고난 후 꽂아두려고 보니 책의 형태가 약간 무너져서 속이 좀 쓰렸는데 책을 들고 몇번 맞춰보려고 하니 얼추 처음의 형태로 되돌아가서 만족스럽다.
책을 읽으며 하루키에 대한 것을 의외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또 책을 읽다보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물론 그의 소설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들어봤던 소설과 소설 속 주인공들이 낯설지 않아서 재미있었고 또 전혀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 책을 읽는데 큰 무리는 없다. 그러니 하루키의 팬이라면 즐겁게, 하루키를 모른다 하더라도 그냥 한번쯤 쓱 하고 읽어봐도 흥미로운 책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그 자신의 세계관이 있듯이, 이 책이 하루키의 전부가 되지는 않겠지만 하루키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벽'을 모티브로 한 하루키의 명연설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 크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혀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항상 그 알 편에 서겠습니다"(276, 벽과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