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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ㅣ 꿈결 클래식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이병진 옮김, 남동훈 그림 / 꿈결 / 2015년 2월
평점 :
드디어 그 유명한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이제야 읽어봤다.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집중해보지는 않아서 그저 하나의 풍자를 위한 단어의 선택인가, 싶은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책을 다 읽고나니 그 느낌이 달라지고 있다. 내게 도련님이라는 호칭에 대한 선입견은 왠지 귀하게만 자라 세상물정 모르고 허투루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가는 철부지 어른을 지칭하는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역시 그와 다르지 않게 천방지축으로 생활하는 청춘이었고. 이 소설의 첫 문장 자체가 "나는 타고난 무모함으로 어린 시절부터 손해만 보고 살았다"이니 도련님이 얼마나 멋대로였을지 짐작이 갔다. 게다가 우리의 도련님은 성격마저 급한 다혈질이라 어떤 돌출행동이 나올지, 어떤 사고를 일으킬지 예측할수가 없다.
이런 도련님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형이 건네 준 돈으로 학교를 다니고 졸업 후 시코쿠 근처의 중학교 수학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도련님의 주된 활약 이야기는 중학교에서 이루어진다.
솔직히 천방지축인 도련님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고 글은 술술 읽혔다. 유명세에 편승해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고전,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다가 왠지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다.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어 술술 읽다보면 또 어느새 나쓰메 소세키가 말하려고 하는 세상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이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어떤 말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치졸한 놈들이다. 자신이 한 일을 말하지 못하겠으면 애당초 하지 말았어야지. 증거를 잡지 못하면 시치미를 뗄 작정으로 뻔뻔스럽게 능청을 떨고 있다. ... 거짓말을 해서 벌을 피할 거면 애당초 장난 같은 건 하지 말아야 한다. 장난에는 벌이 따르는 법이다. 벌이 있기에 장난도 기분 좋게 할 수 있다. 장난만 치고 벌은 싫다는 비열한 근성이 어느 지역에 유행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돈은 빌리지만 갚는 것은 싫다는 놈들은 모두 이런 놈들이 졸업해서 하는 짓이다. 도대체 중학교에는 뭐하러 들어온 것인가. 학교에 들어와 거짓말을 하고 속여서 남 뒤에서 치사하고 건방지게 장난을 치고, 그러다가 졸업이라도 하면 의기양양하게 자신은 엘리트라고 착각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놈들이다."(75-76)
도련님이 부임한 중학교 아이들의 장난을 이야기하면서 도련님 자신의 감정을 쏟아부어내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치졸한 놈들, 거짓말을 하고 속여서 남 뒤에서 치사하고 건방지게 장난을 치다가 졸업이라도 하면 의기양양하게 자신을 엘리트라 착각하는, 말이 통하지 않는 놈들이라고 한다. 그뿐인가. "세상은 희한하다. 맘에 들지 않는 놈이 친절하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나쁜 놈이라니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 .. 조만간 불이 얼어붙고, 돌덩어리가 두부로 바뀔지도 모른다"(110)라고 말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백년전의 세상이 지금의 세상과 그리 달라진 것이 없을까.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에 감탄하면서 한편으로는 좀 씁쓸해지고 만다.
철부지 도련님인줄로만 알았는데 불같은 다혈질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간사한 놈들에게 하늘을 대신해 천벌을 내리고 아무리 교묘한 말로 변명을 하더라도 정의는 용서하지 않는다'며 호통을 친다.(243) 이 정도의 다혈질이라면 좋아할 수 있는 성격 아니겠는가.
세상살이를 하면서 오해도 받고, 모함에도 빠지고 - 나는 누군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나를 벼랑끝에서 밀어내는 짓을 하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데, 언젠가부터 그런 사람을 알게 되었다. 인간적인 관계맺음은 끝낸지 오랬지만 사회적인 관계맺음은 어쩔수가 없어서 자주 마주치는데 교묘하게 나를 괴롭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게끔 만드는 거짓된 말을 흘리고 다니는 것을 알게된 후 정말 미칠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지만 권력을 등에 업은데다가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정말 착하게만 보고 있어서 괜히 성격대로 욱했다가는 온갖 흙탕물을 내가 뒤집어 쓰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묵묵히 지내고 있을뿐이다. 정직하지 못한 그런 사람과 싸움을 해 봐야 내 기분만 더러워질 뿐이니까. 이것을 이미 백여년전에 나쓰메 소세키는 꿰뚫어보고 있었다. "아무튼 좋은 사람은 아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인간은 대나무처럼 올곧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정직한 사람과는 싸움을 해도 기분이 좋다"(158)
도련님의 이야기는 재미있는데다가 이처럼 마음을 깊이 파고드는 문장이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거침없는 도련님의 행동은 어떤면에서는 대리만족같은 통쾌함마저 준다.
그리고 꿈결 클래식에서 출판된 도련님은 주석과 해제가 있어서 좀 더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자의 해제를 상세히 읽어버리면 그의 관점에서 소설을 보게 될 듯 해 해제는 넘겨버렸지만 중간중간 실려있는 사진을 꽤 흥미롭게 봤다. 사진을 보다가 알게되었는데 도련님의 작품 모델이 된 마쓰야마 중학교 교원들의 실존은 놀라웠다. 등장인물의 별명 그대로 사진 속 인물을 설명하고 있으니 괜히 더 뚫어져라 보게 되는데 이것 또한 이 책을 읽은 소소한 재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