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내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1월 - 회사원이 되다.
꿈도 두려움도 컸던 어설픈 새내기.
날짜까지 기억한다. 1월 13일.
신입사원 선서를 시작으로 한달 넘는 합숙을 시작하다.
새벽 부터 일어나 구보를 하고,
산을 넘고 얼음판을 구르며 극기훈련을 하고,
나도 모르게 사가를 흥얼거리며 샤워를 하다.

2월 - 대학 졸업. 뭐 졸업식이라는 의례였을 뿐이지만....
필름 한통이 넘는 사진들, 졸업장 한장으로
학생 딱지를 떼다.

3월 - 해외영업팀에 배치되다.
조직 생활의 본격적인 시작.
모든게....만만치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1997년.
난 소설을 단 한 권도 읽지 못했다.

왜냐구?

시간이 없어서?
- 물론 아니다. 신입사원이 바빠야 얼마나 바쁘겠냐.

책을 아예 안 읽었냐구?
- 아니다. 억수로 많은 책들을 읽었다.

무슨 책들을 읽었냐구?
- <마피아 경영학>, <로마인 이야기>, 이문열의 <삼국지>등등.
지금의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영악한' 책들을 읽었다.

그럼 왜 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았냐구?
- 소설을 읽다가 비장한 현실로 복귀하는 것이 두려웠다.
소설이 너무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특히, 우울하고 퇴폐적인 소설은 읽을 수가 없었다.
소설과 현실의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 삼국지는 소설이 아니냐구? 내겐 처세/실용 도서로 분류된다.)
난, 조직 생활에 적응하려고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했다.
나의 최선이란....
건조한 인간이 되려는 처절한 노력.
그렇지 않고는 너무 힘들었다.

<마피아 경영학>.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비장한 각오를 했다.
성공하는 사회인이 되리라....
('스물셋의 사랑 마흔 아홉의 성공' 이런 책도 읽었다.
작년에 서재 정리하다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버렸다.)

줄까지 그으면서 읽었다.
" 물고기는 입을 벌려서 죽는다."
" 적을 처치하려면 확실히 죽여라." 등등....

그래서 성공한 사회인이 되었는가?
- 회사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회사원인지 모른다.
내 또래 회사원 여자들에게서 느껴지는 도시적이고 사무적인
분위기가 내겐 느껴지지 않나 보다.
출장 갈 때 비행기에서 옆에 앉은 사람들이 항상 묻는다.
" 음악하는 분이세요?"
- <마피아 경영학>을 줄을 그으며 읽던 야심만만한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지금 소설 나부랭이를 끼고 다니는 비주류 회사원이 되었다.
- 두번이나 회사를 그만 뒀다.
그리고....다른 대안이 없어서 수평 이동을 하며,
회사원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가끔씩 친구들은 빈정거리며 말한다.
"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문화를 비교하는 책을 한권 쓰지 그래?"
얄미운 것들.

1997년.
난 단 한권의 소설도 읽지 않았다.

지금 나는 주로 소설을 읽는다.
가끔 너무 말랑말랑한 책들만 읽는게 아니냐는 비난을 받는다.
사회과학 서적도 좀 읽고, 경영서도 좀 읽고 하라고....

얼마 전 서점에서 보니
<타고난 성격으로 승부하라> 뭐 이런 책이 있던데,
제목 참 맘에 든다.

내게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단거리 달리기에서 우승하려고
너무 가혹한 노력을 했다.

이제 내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고 싶지 않다.
좀 뒤져도 좋으니까,
내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싶다.
몸에 꽉 끼는 체형보정 속옷을 입고 날씬함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토실토실한 살집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씩 웃고 싶다.

누구나 하나쯤은 소명이 있겠지.
피튀기면서 조직에서 앞서가지 않아도,
나에겐 다른 뭔가가 있겠지.
그렇게 믿고 싶다.
아니 그냥 사이비 종교를 믿듯이 그냥 콱 믿어버리련다.

요즘 회사에서 진짜 스트레스 많이 받았다.
앞서 가지 못해서 안달이 났었다.
오늘...그런 내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항상 내게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대해주는 K 선배.
오늘 내게 말했다.
" 성대리, 좀 설렁설렁해요. 펑크 좀 내고 하면 어때요?"

고마운 K선배.

소설을 한 권도 읽지 못했던 97년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려 한다.
좀 돌아가도 상관 없다.

난 워낙 길눈이 어두워서
초행 길을 운전할 때면,
택시 기사들에게 10번도 넘게 길을 물어서 내릴 때면 목이 쉬려 한다.
매번 길을 잃으면서 깨달은게 있다.
아무리 돌아돌아 가도 결국은 목적지에 도착한다.

천천히 가자, 천천히!
뒤에 차들이 빵빵거리든 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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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벌식자판 2004-11-10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재밌게 읽었습니다.

마치 시를 읽는 것 같았어요. 술술술술 잘 읽히네요.

저도 님 같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회 생활을 했으면 하네요.
헐 헐 헐 그나저나 빨리 취업을 해야 되는데..... (^_^)a

97년 캬~~~
97년에 저는 초코파이 속에 숨은 참맛을 깨닫기(?) 위해
봉사하러 갔었지요. 벌써 7년이...

kleinsusun 2004-11-10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7년 캬~~~ 제 나이가 넘 많나요? ㅋㅋ

세벌식 자판님의 서재에 방문했더니, 만화책들이 많이 있네요.

신 천하무적 홍대리 오늘 주문하기로 결정. 재미있죠? 기대 만빵!

세벌식자판 2004-11-10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책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이렇게 반가울 수가... ^^;

그거 아세요?

www.khan.co.kr ----> 인터넷 경향신문인데요.

첫화면에서... 왼쪽 위를 보면 [경향신문][언바세바] 가 있는데... 경향신문 클릭

왼쪽편 중간을 보면 [연재만화] 가 있습니다 연재만화 클릭...

다시 오른쪽을 보면 연재만화를 선택하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태평천하 홍대리]가 있습니다. ^^;

일주일에 한 번씩 올라오는데... 그래도 보면 재밌습니다.

거기에 연재 되는 만화중에 [습지 생태 보고서]도 참 재밌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_^)

세벌식자판 2004-11-10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자주 놀러오겠습니다. 히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