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花樣年華) - [할인행사]
왕가위 감독, 양조위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화양연화> 이후로 4년만에 그 유명한 왕가위가 <2046>을 들고 나타났다.

<화양연화>를 열렬히 사랑했던 만큼,
그 처절한 느림의 미학에 흐느꼈던 만큼,
<2046> 개봉을 기다리며
코아 아트홀에서 <화양연화> 특별상영까지 보며,
왕가위의 새로운 작품 <2046>을 영접하는 정성 어린 마음의 자세를 갖추었다.

개봉관에서의 마지막 상영일인 오늘,
드디어 <2046>을 봤다.
그리고 실망했다.

소설 제목이 생각난다.
<나는 결혼했다 섹스했다 그리고 절망했다>

<2046>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2046>을 봤다.
그리고 절망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아마도 이 영화가 내겐 왕가위의 마지막 영화가 되겠구나.

하나 궁금한 게 있다.
영화평론가나 기자들은 거물들의 작품은 살살 건드려야 하나?
거물들의 영화 보고 건방진 평 쓰면 다신 기사 못 쓰나?

한국 최고의 영화잡지,씨네 21 리뷰의 제목.
<왕가위의 화려하고 비장한 ‘오페라’>

이 리뷰를 쓴 기자에게 묻고 싶다.
무명 감독이 만든 영화였다면 제목을 어떻게 쓸래?
아마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화양연화를 말아 먹는 후일담>.

영화를 보고 이렇게 짜증이 난건,
<2002 로스트 메모리즈>를 보고 처음이다.
물론 영화는 개인적인 취향이니,
<2046>에 대한 나의 불쾌함은 철저하게 사적이고 개별적인 반응이다.

<2046>을 보고 감동했다는 사람도 많고,
왕가위 스타일의 결정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가 끝났을 때,
내 옆에서 영화를 본 여자 두 명이 용감하게도 크게 말했다.
" 짜증나."

아....그 말 내가 먼저 하고 싶었는데...

장이모의 <연인>,
왕가위의 <2046>,
모두 자신의 스타일에 너무도 집착한 안이한 결과의 산물이다.

장이모와 왕가위,
두 거물의 작품을 연달아 보면서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늙을수록 저렇게 고집만 세지면 어쩌나....
자신의 스타일만 고집하면 어쩌나....
귀를 틀어 막고, 고개를 돌리지 않고, 스스로의 세계에만 침잠해 있으면 어쩌나....
나중에 할머니가 되어서 잘 안 들리면 보청기라도 끼어야겠다.

<2046>을 보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불쾌한 감정을 느끼는 건,
숨막힐 것 같은 왕가위의 과도한 스타일 집착증 때문만이 아니다.

영화 속 주인공 차우(양조위)의 사랑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에 역겨움을 느낀다.

잊지 못하는 단 한 사람,
기억 속의 단 한 사람,
그 사람을 잊지 못해
캄보디아, 싱가폴, 홍콩을 헤매고 다니며 온갖 방황을 다한다.
<화양연화>에서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했던 차우는
아주 위악적이고 섹스를 밝히는 인간으로 변신한다.

다 좋다.
사랑하는 사람 못 잊으면,
이 세상 견딜 수 없을 만큼 무료하고 답답하면 그럴 수도 있다.
인간 하나 망가지는 것 처럼 쉬운 일도 또 없다.

내가 화나는 건,
'오직 하나의 사랑'을 부르짖는 주인공들의 이중적인 태도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상처를 받으면 아파한다.
그 누구라도,
어떤 작은 식물 하나라도....

주인공 차우.
그의 아픔을 이해한다.
망가지고자 하는,
사랑을 믿지 않고자 하는,
기억 속에 침잠하고자 하는
다른 대상과 타협할 수 없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왜 다른 존재에게 그토록 고통을 주는가?

영화 속 주인공 차우의 사랑에 대한 이중적 잣대는 이 세상 어디에나 널부러져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비굴할 만큼 사랑을 구걸하고,
그 여자를 잊지 못해 기억 속에 침잠하고,
자신을 망가뜨리며 시간의 흐름에 묻혀 버리려 하고....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다른 사람도 자기 떄문에 그토록 아플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거 아닐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한테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면서,
섹스의 대상인 여자에게는 철저하게 잔인한 남자.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순하고 헌신적인 남자가 되어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서,
외로움을 잊기 위해 만나는 섹스의 대상에게는 철저하게 냉정한 남자. 마음만은 빌려주지 못한다며 큰소리 치는 남자.

정말이지 역겹다.


영화 속 바이링(장쯔이)에게 차우는 철저하게 냉정하다.
그리고 잔인하다.

바이링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면서,
하룻밤만 같이 있어 달라는 바이링에게
이 세상에 빌려 줄 수 없는 게 단 한가지 있는데,
그것이 마음이라며,
혼자서 눈물 흘리는 바이링을 홀로 남겨두고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간다.

차우가 고통스러운 만큼,
바이링도 고통스럽다.
오랜 세월 동안....

이 세상에 단 하나 빌려줄 수 없는 게 마음이고,
그렇게 한 사람에 대한 순정으로 가득 찼으면
바이링이랑 매일 밤 섹스는 왜 그렇게 미친듯이 하는지?

사랑하는 여자와 즐기는 여자가 따로 있는 것에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차우의 뻔뻔함.
그러면서 "유일한 사랑"을 부르짖는 그 위선적인 태도.
이토록 이기적인 자세가 '순애보'로 미화될 수 있을까?


차우는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남자가 아니다.

남자들이 흔히 하는 착각.

저 여자는 원래 노는 여자니까 나랑 좀 논다고 해서 별 다른 생각 안 하겠지...
그 여자는 그냥 같이 즐겼던 여자일 뿐이야...등등

애완동물에게도 감정이 있다.
주인이 자신을 버리면 밥도 먹지 않는다.
심지어 식물에게도 감정이 있다.
애정을 받지 못하면 금방 시들어 버린다.
하물며 사람에게....

숭고한 사랑의 대상과
즐거움을 위한 섹스의 대상을 구분해 놓고
섹스의 대상에게 감정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남자.


자신의 고통은 너무 아파서 술 마시고 노름하고 난리를 치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섹스의 대상에게는
마음을 줄 수 없다고 큰 소리 치는 남자.

이런 이중적인 자세가,
당당하기까지 한 그 이중적인 자세가
참을 수 없게 역겹다.

그래서 나는....
<2046>을 보고 한없이 실망했다.

왕가위도 사랑에 관한 이중적 잣대를 가진 남자 아닐까?

수선이의 도서관

www.kleinsu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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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05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시원해라!^^

릴케 현상 2004-11-11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안 봤지만 수선님의 얘기에 동감이 가는 바가 많네요.

바다를찾아서 2006-06-27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화양연화 너무 좋아하는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