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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을 읽으며 "열정"과 "치정"의 차이를 생각했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은 자신의 경험을 쓴 아주 자전적인 소설이다.소설의 형식을 빌린 "자기 고백"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한 남자를 끔찍히도 사랑하는 한 여자의 고백이다.
그 남자를 향한 열정, 그 남자를 향한 갈망은 '나'의 모든 것이다.
아주 솔직하고, 직설적이고, 충격적이기까지 한 표현들로 가득 차 있다.
- 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 사람의 전화말고 다른 미래란 내게 없었다.(p12)
-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지니고 있기 위해 다음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았다.(p17)
- 차라리 밤에 강도라도 들어와 나를 죽여주었으면 싶었다.(p49)
- 어느날 밤, 에이즈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내게 그거라도 남겨놓았는지 모르쟎아.'(p51)
( 에이즈라도 흔적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나'의 고백을 읽다가 나는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정말 충격적이다.'나'에게 그의 부재는 죽음인 것이다.)
-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어떤 영화를 볼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p58)
- 나는 그 사람의 모국어를 배우고 싶어했었다.그 사람이 마신 술잔도 닦지 않은 채로 보관하고 있다.(p72)
신문 사회면에는 매일 치정으로 인한 살인사건이 토막기사로 난다.
변심한 애인을 칼로 찔러 죽인 남자,
변심한 애인 뿐 아니라 여자의 새로운 애인까지 죽여버린 남자,
자신을 떠난 남자의 통화기록을 뽑아서 남자의 새로운 애인을 괴롭히는 여자,
실연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의 자살 소식,
사랑하는 사람을 감금하고 미저리 역할을 하는 납치극,
분노한 배우자가 자신을 배신한 상대방과 그 애인을 간통으로 고소하는 일기예보 처럼 매일 나오는 기사들.....
두줄 세줄 짜리 기사의 주인공들도
아니 에르노 처럼 다스리지 못하는 감정의 질주,
상대방을 향한 너무도 강한 욕망과 집착으로 죽을것만 같은 광기와 고독, 외로움을 겪었을 것이다.
하루에도 몇백번씩 질투로 정신을 잃고,
하루에도 몇백번씩 기다림에 지쳐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고,
하루에도 몇백번씩 자신의 외로움에 분노하고,
하루에도 몇백번씩 잊는다고, 다 끝났다고 말하면서도
기다리던 전화 한통에 달려 나가고 마는 치사하기까지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을 하고,
아무것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먹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폐인 생활을 했을 것이다.
두줄 짜리 치정극의 주인공들에게도 모두 사연이 있다.
그러면....
그러면 왜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을 향한 아니 에르노의 사랑은 "열정"이 되고, 그 체험의 고백은 훌륭한 문학작품이 되고, 베스트셀러까지 되어 엄청난 인세까지 챙기는데,
왜 두줄짜리 기사의 주인공들은 모두 감옥으로 가는가?
"열정"과 "치정"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아니 에르노의 그 처절한 사랑을 "열정"이라 말할 수 있는건,
에르노는 그 사람으로 인한 "열정"으로 자신을 세상과 더욱 굳게 결속시키고, 그 시간 속에서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p72)
삶의 극한까지 치달은 사랑의 고통은 에르노를 성숙시켰고,
에르노는 그 고통의 시간들을 사랑했다.
그 열정은 에르노의 삶을 단단한 것으로 만들었고,
그 열정의 에너지는 발화하여 창조의 원동력이 되었다.
두줄짜리 기사의 주인공들은?
치정극의 주인공들은 그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어 발화시키지 못했다. 그 고통으로 자신의 삶을 단단하게 하지 못하고,
물이 100도가 되어 끓을 때 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한참 뜨거운 98도에서 폭력적인 방법으로 상황을 종료시켰다.
에르노는 자신에게 열정의 시간을 준 그 남자에게 감사했고,
치정극의 주인공들은 자신을 떠난 상대방을 증오했다.
열정의 주인공은 남들과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산 자신의 체험에 감사하며,
치정의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를 붙잡지 못할 바에야 송두리째 날려 버리고 싶어한다.
만약 누가 나에게 에르노와 같은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겠다.
"No."
난 그렇게 죽을 것 같은 사랑을 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사랑을 하고 싶지 않다.
난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변함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 또한 나의 존재 자체에 신뢰감을 가지고 불안해 하지 않기를 바란다.
서로에게 안식이 되어 주는 사랑.
좀 뜨뜨 미지근해도 좋다.
난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지치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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