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팀의 한 선배가 회사를 떠난다.
저녁에는 환송회가 있을 예정이다.

요즘 가뜩이나 팀 분위기도 안 좋았는데,
날씨도 흐린 것이 구질구질 하고,
금요일이라 부담도 없고,
항상 그렇듯이 다른 사람이 회사를 그만 둔다고 하면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슬쩍 떠올리는 사람들의 특성상
오늘밤은 결코 가볍지 않은 술자리가 될 것이며, 전사자가 속출할 확률이 높다.
특히, 오늘의 주인공은 업혀갈 가능성이 크다.

오늘 회사를 떠나는 선배는 나랑 같은 대학을 나왔다.
얼마 전 한 리크루트 회사의 이직률 조사 결과를 보니
주요(?) 대학 중 서강대가 이직률이 가장 높다고 한다.
얼마나 신뢰성 있는 조사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세 번째 회사에 다니고 있고
선배는 오늘 세 번째 회사로 출근하기 위해 회사를 떠난다.

설렁설렁 다닐 수 있는 문과대를 졸업한 나와 달리,
선배는 빡센 화학과를 졸업했다.
서강대가 흔히 서강고등학교라 불리는데,
설렁설렁하게 졸업할 수 있는(그래도 다른 학교 보다는 훨 빡빡하지만) 문과대와 달리,
이공계는 정말 고등학교 같다.
토요일에 실험을 일상다반사로 하며, 애들은 학교에 살다시피 한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 전에 잠깐 운동장에서 몸을 푸는 고딩들 처럼
저녁을 먹으면 우유팩 차기를 한다.
(물론 허접한 차림으로 우유팩을 차는 사람들은 대부분 복학생들이다.)
선배는 대학원도 나왔으니까,고등학교를 6년 더 다닌 샘이다.

선배는 참 끼가 많은 사람이다.
노래방에 가면 혼자 마이크를 먹다시피 노래를 한다.
정말 노래를 잘한다. 특히 발라드에 강하다.
기타도 잘 치는데 팀 야유회 갔을 때 기타를 들고 와서,
90년대 초 엠티 분위기를 연출했다.
사진도 잘 찍는다. 매뉴얼 기능 빵빵한 디카를 하나 사사 매일 들고 다닌다.
디카 동호회 같은데도 자주 사진을 올린다.
가끔은 점심시간에 덕수궁에 가서 사진을 찍고 오기도 한다.

선배는 참 술을 좋아한다.
술 마실 사람이 없으면 혼자 가서도 술을 마신다.
분위기도 좋아해서 바에서 술 마시는걸 좋아한다.
여자도 은근히 좋아하는 것 같다.
밝힌다기 보다는 그냥 편하게 앉아서 농담 따먹기 하는 걸 좋아한다.
조용조용하게 얘기하는걸 좋아한다.
선배는 쇼핑을 좋아한다.
백화점도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남자들과 달리 온라인 쇼핑을 좋아한다.
옥션 같은데 자주 들어가고, 간간히 소품들을 산다.
몇 번씩이나 옥션에서 소포가 배달되는 걸 봤다.
시계, 명함첩, 운동기구 이런 잔잔한 물건들이다.

선배와 16개월 동안 앞뒤로 앉아서 근무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선배와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작년 겨울에 한번 껄끄러운 일이 있었는데
그 다음부터 서로 조심하며 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선배가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끔씩은 선배를 의식적으로 피하기도 했다.

선배가 회사를 그만 둔다는 소식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다.
" 성대리 안테나가 왜 이리 느려요?" 하며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선배가 밉기도 했고 서운하기도 했다.
벌써 3주 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선배가 회사를 떠난다.
추석 전 선배에게 인수인계를 받았다.
PC에 있던 폴더들을 통째로 넘겨 주었다.
거래선들에게 메일을 보내서 retire announcement를 하고,
Susan Sung을 소개했다.
거래선들은 그 동안 고마웠다는 짤막한 답장을 보냄과 동시에,
Susan에게는 인사 메일을 보내고, 선적 일정을 챙기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일상적으로 돌아간다.
나는 정신 없이 수많은 메일들에 채이면서, 답장을 한다.
" Happy to work with you".

오늘 회사를 떠나는 선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너무 상투적인 말이지만
꼭 행복하라고.....

선배는 30대 후반의 다른 남자들과 달리
여리고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다.
감정 기복도 커서 곧잘 우울해 지기도 한다.
언젠가 선배가 건축가나 교수가 되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아니면 작곡가?
어쨌든 선배는 텁텁한 조직 보다는 자유로운 일, 뭔가를 create하는 일이 잘 어울릴 것 같다.
사진을 찍는 것 처럼....
선배가 가는 회사가 좀 설렁서렁, 헐렁헐렁 했으면 좋겠다.

Go Go J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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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4-10-01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적추적 비도 내리는데 우울하게 술 퍼마시는 자리가 아니라 새길 찾아 떠나는 분 축하해 주는 들뜬 자리를 가지시길 빕니다. 라고 말하면 아직 "사회물"을 제대로 먹어보지 않은 학생의 눈높이에서나 나올 수 있는 말일까요. 비오는 날 오전내내 들떠 있었으니 비도 그쳐가겠다, 대강 마음 가다듬어야겠어요.

아, 늦게나마 다시 인사드립니다. 매너, 대중입니다. 반가워요. 숨책, 리더스가이드, 그리고 이곳까지. 각종 리뷰와 리스트 섭렵하셔서 사랑받는 서재 꾸미시길 빌어요. ^_^o-

22zero 2004-10-10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사람 일까 궁금했는데....^^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