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사랑 이야기>
이런 상투적인 제목의 홍보용 CD가 있었다.
이문세의 노래가 한참 유행할 때였다.
그 때가 언제였는지, 중학교 때였는지 아님 고등학교 때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그 CD가 라디오 드라마 같았고,
성우의 목소리는 아주 인위적이었으며,
대사들은 아주 상투적이고 닭살스러웠다는 기억만이 남는다.

삼성플라자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그 CD는
<태평로 사랑 이야기>라는 타이틀로,
한 남자와 여자가 우연히 만나 커플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라디오 드라마처럼 만들고 그 중간중간에 그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들을 끼어 넣었다.

그걸로 어떻게 홍보를 하냐구?
그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장소가 모두 삼성플라자 안에 있는 식당들, 서점, 음반가게 등이었다.

오늘 아침 출근하는 길에
매일 매일 1년 넘게 보아온 노숙자 아저씨를 보면서
<태평로 노숙자 이야기> 이런 허접한 또는 너무도 현실적인 "제목"이 생각났다.
그 아저씨에 대한 짧은 글을 써보리라 생각했다.

태평로란 어떤 곳인가?
삼성본관, 삼성생명 빌딩, 신한은행 본관이 있는
소위 엘리트 회사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서울역과 시청역은 한 정거장 차이지만,
이 두 역의 분위기는 굉장히 다르다.
서울역에는 노숙자가 셀 수 없이 많지만,
태평로 지하도에는 노숙자가 몇 되지 않는다.

내가 매일 보는 <태평로 노숙자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침 마다 태평로 지하도에서 신문지도 깔지 않고 자고 있다.
서울역의 다른 노숙자들은 두꺼운 라면박스를 몇 겹으로 깔고,
적어도 신문지는 깔고 나름대로 침상의 기본적인 구도를 갖추고 잔다.
요즘엔 이불을 덮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태평로 아저씨는 그냥 맨 바닥에 쪼그려 누워 있다.
그 아저씨는 1년 내내 같은 옷을 입고 있다.
까만 파카에 까만 바지.
쪄 죽을 것 같은 여름에도, 얼어 죽을 것 같은 겨울에도 똑 같은 옷을 입고 있다.
파카 속에는 난닝구 하나 없이 맨 살이 보인다.

8월의 가장 더웠던 날,
버스 정류장까지의 몇 걸음 안 되는 거리를 걸으면서도 숨이 턱턱 막히던 날,
그 아저씨는 파카를 입고 왕뚜껑을 먹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아무런 표정 없이 열심히 왕뚜껑을 먹고 있는데,
그 아저씨를 바라 보는 내가 더 더운 것 같았다.

퇴근할 때도 맨날 그 아저씨를 본다.
그 아저씨는 그냥 천천히 걷고 있다.
머리는 나만큼이나 길고,
검은 머리 반 새치(흰 머리?) 반인 아저씨의 머리는
산발 그 자체이다.

그 아저씨는 하루 종일 뭘 할까?
예전에는 그런 생각도 해 봤는데,
지금은 매일 지나가는 버스를 보는 것처럼
그 아저씨는 내게 익숙한 풍경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아저씨의 하루 일과가 다시금 궁금했다.
그 아저씨는 내가 퇴근할 때 까지 하루 종일 뭘 할까?
그 아저씨는 구걸도 하지 않는다.
다른 노숙자들처럼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시비도 걸지 않는다.

그 아저씨는 무슨 돈으로 왕뚜껑을 먹고
매일 매일의 시간을 견딜 만큼의 식량을 얻을까?
그 아저씨는 덥지 않을까?
그 아저씨는 언제부터 노숙자가 되었을까?
그 아저씨는 가족이 없을까? 등등.

태평로 노숙자는
번듯한 양복을 입은 허울 좋은 회사원들 속에
오늘도 까만 파카를 입고 태평로를 느릿느릿 걷고 있다.

2004년 9월 추석을 앞둔
<태평로 노숙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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