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은 벨기에 출신 아멜리 노통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소설이다.읽으면서 때때로 통쾌하고,때때로 부끄럽고, 책을 덮을 때 까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멜리 노통이 그 수직적이고 위계질서가 군대 보다 더 철저한 일본 대기업에서 도대체 어떻게 버텼을까?
(작가에게 모든 체험은 글쓰기의 소재가 된다.일본 회사에서 화장실 청소를 한 그 굴욕과 수치심은 이런 훌륭한 소설을 탄생시켰다.)

일본 대기업에 비하면 한국 대기업은 대단히 유연한 편이다.
(한국 대기업이 유연하고 자유롭다는 말이 아니라, 일본에 비해
그나마 낫다는 말이다.)

일본에 출장을 가서 일본 회사의 회의실에 들어가면, 그 무거운 공기에 일단 주눅이 든다.아직도 여직원들은 유니폼을 입은 경우가 많다. 손님에게 음료수를 갖다 주는 여직원은 생글생글 웃으며 거의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그럴 때 나는 곤란함을 느낀다.

아멜리 노통은 외교관인 아버지와 덕분에 일본,중국,보르네오,라오스 등 아시아에서 자라났다.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을 고향 같이 느낀 아멜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대기업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때의 체험으로 이 소설 <두려움과 떨림>이 세상에 나왔다.

아멜리는 통렬하게 일본 사회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은 일본 여자들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 아멜리의 동정심과 연민은 조소와 빈정거림과 뒤섞여 있다.)

아니, 일본 여성에게 찬사를 보내야-그래야 한다-하는 이유는 그녀가 자살하지 않기 때문이다.코흘리개 유년 시절부터 그녀의 꿈과 이상을 가로막는 음모가 시작된다.그녀의 뇌 속에 석고 반죽이 부어진다.<스물다섯 살에도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부끄러워해야 할거야>,<웃으면 너는 품위를 잃게 돼>,<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면 저속한 거야>.<몸에 털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네 입으로 말하면 천박한 거야>,<남자애가 사람들 앞에서 뺨에 뽀뽀를 하면 너는 창녀야>,<음식을 먹는 게 즐겁다면 넌 돼지야>,<잠자는 게 좋으면 넌 굼벵이야>.만약 이런 원칙 때문에 사람이 주눅들지 않는다면,그것은 본질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p73)

일본 여성에게 찬사를 보내야 한다.
왜? 자살하니 않으니까.

이 페이지를 읽으면서 아멜리에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은 일본 여자에게만 찬사를 보내면 안된다고....
수많은 아시아 여자들이 더 심한 음모 속에서 자라난다고...

아멜리는 정말 예리하다.아멜리는 일본 여자들에게 가해지는 "제약"을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최고 성능의 카메라 처럼 모두 포착해 냈다.

 

내가 결코 너의 의무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열거할 수는 없을 거야,왜냐하면,넌 인생에서 단 한 순간도 이런 의무로 부터 자유로운 때가 없을 테니까.예를 들어,방광의 압박을 덜어 줘야 하는 보잘것없는 필요 때문에 화장실에 혼자 있을 때조차 네 시냇물에서 졸졸졸 나는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하게 신경 써야 하는 의무가 있어.그러니 넌 쉴새없이 물을 내려야 할 거야.(p75)

화장실에서 쉴새 없이 물을 내리는 것 만큼 일본 여자들에게 가해지는 "조신함의 제약"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예가 또 있을까?

미국에 어학연수를 갔을 때,
일본여자애들하고 어울려 다닌 적이 있었다.
(난 일본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참 많았다. 영어,독일어를 잘하고 유럽애들하고 어울려 다니는 나를 부러워 했다. 내가 멋있어 보인다나? 일본 애들이랑 마녀의 도시 Salem에 여행도 갔었다.마녀사냥을 당한 불쌍한 여자들의 혼이 떠도는 곳...)

그 여자애들하고 쇼핑을 하다가 백화점 화장실에 다함께 간 적이 있었다. 바로 옆 화장실에 들어간 일본애가 쉴새 없이 물을 내렸다.
자기가 내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려고....
나는 그 때 혼란스러웠다.
일본애들이 오버를 하며 아까운 물을 낭비하는 걸까,
아니명 한국 애들이 교양 없고 무식한걸까?

공항이나 글래스 타워 같은 빌딩 화장실에 가면
"에티켓 벨"이 있는 데가 있다.
에티켓 벨을 누르면, 뭐 새소리, 시냇물 소리 이런게 난다.
그런데 있어도 이거 누르는 사람 거의 없고,
누르면 전원이 연결 안되었는지 밧데리가 없는지
기능이 안되는 경우도 많다.

일본에서 수많은 빌딩에 가보았지만,
"에티켓 벨"은 보지 못했다.
그러면 아직도 일본 여자들은 쉴새 없이 물을 내리는 모양이다.

아멜리는 물을 쉴새 없이 내리는 일본 여자들의 행동을 하나의 단적인 예로 들어, 그들에게 가해진 제약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이제 하려고 하는 얘기를 네가 이해했으면 해서 그런 예를 드는 거야.네 존재에서 그만큼 은밀하고 별것 아닌 부분까지 지시에 따르게 된다면, 네 삶의 핵심적인 순간들에 가해질 제약은 당연히 얼마나 클지 한번 상상해 봐.
배가 고프다고?먹는 둥 마는 둥 해.길에서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네 몸매를 쳐다보는 - 그들은 그러지 않을거야-모습을 보고 흐뭇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집이 있는게 수치스러우니까 날씬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야.(p75)

그렇다. 하나 하나, 그 모든 은밀한 순간에서 까지 제약을 무의식중에 따르다 보면, 삶의 핵심적인 순간에서 자유의지로 결정을 하기란 쉽지 않다.아멜리는 일본에서 이런 모순을 읽었다.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소설 제목만 보면,언뜻 연애소설 같다.
이 소설의 제목 <두려움과 떨림>은 과거 일본 황실의 의전에, 천황을 알현할 때는 <두려움과 떨림>의 심정을 느껴야 한다는 규정에서 빌려온거다.

이 소설을 프랑스나 벨기에 사람들이 읽으면 참 통렬하면서 시원하고 재미있을 것 같다.
그런데 너무도 비슷한 일본의 상황을 읽어내는 나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얄밉도록 예리한 아밀리 노통.
대단한 작가다. 언젠가 나도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수선이의 도서관

www.kleinsu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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