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
-윤동주와 야나기 무네요시의 경우
윤동주의 대학 후배이자 함께 하숙까지 했던 국문학자 고 정병욱 씨의 글 속엔 이런 대목이 있소.
“내가 공부하는 분야가 고전문학이고 앞으로 고전문학사를 써볼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현대문학사도 공부가 진행되는 데까지 정리해보고 싶은 욕심도 버리지 않고 있다. 비록 이러한 나의 지나친 욕심들이 설령 이루어진다손 치더라도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나라사랑> 제23호)
정병욱 씨가 갖고 있던 윤동주의 육필 원고 19편이 아니었던들 민족 문학의 고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음을 가리킴이지요. 이 시집 원고의 보존 경위를 말하는 대목에서 정씨는 또 이렇게 적었소. “동주가 검거된 후 나는 소위 학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라고.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마당이기에 씨는 그 원고를 모친께 이렇게 말하면서 맡겼다 하오. “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이 원고를 간수했다가 조국 해방의 날엔 세상에 알려주십시오”라고.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여 귀가하자 모친께선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두었던 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럽게 내주시면서 기뻐하셨다”고 씨는 적었소.
그러나 진상은 이와는 달랐소. “그건 장롱 속에 감춘 게 아니라 실은 마루 밑에 감추었던 것”(정씨의 누이 정덕희 씨의 증언. 송우혜, <윤동주 평전>)이라고. 그렇다면 정씨는 거짓말을 한 것인가. 이 대목이 제겐 예사롭게 생각되지 않았소. 학병 세대 글쓰기의 한 가지 유형이 거기 살아 숨쉬고 있다고 판단됐기 때문이오. 학병 세대인 정씨에게 마루 밑이란 바로 장롱이며 또 명주 보자기가 아닐 수 없는 것. 그러기에 사실의 증언이란 이 진실의 기록에 비해 실로 미미한 법. 학병 세대 글쓰기를 검토함에 이 점을 놓치면 소중한 많은 것을 잃는 셈이오.
이와 비슷한 경우를 일본 민예관의 창설자이자 조선 민예품을 기리며 광화문을 헐지 말라고 외치기도 하여 한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의 평전(쓰루미 순스케 저)에서도 잠시 엿보았소. 야나기가 만년에 이른 경지는 <미의 법문(法門)>, 곧 <나무아미타불>(1955)에서 찾아진다 하오. 아미타여래의 48원 중 제4원에 씨는 평생을 바쳐온 민예운동과 그 사상을 집약했다 하오. 무유호추(無有好醜)의 원이 그것. 설사 내가 득도했다 해도 세상에 형색이 같지 않고 아름다움과 추함이 있는 한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대원이 그것. 씨의 이러한 경지란 종교일까 또 불교일까. 일본식 관례에 따라 씨의 장례식에서 사용된 계명(戒名)은 불생원석종열(不生院釋宗悅)로 되어 있었소. 민예의 세계가 종교의 경지에 닿아 있는 형국.
한갓 제국주의적 오리엔탈리즘에 중독되어 있으면서 이를 깨닫지 못한 사상이라든가 민예품을 기능 면에서 보지 못한 색맹이라든가 등등 씨에 대한 비판이란 이 ‘미의 법문’ 앞에 서면 얼마나 초라할까. 물론 씨도 인간인지라 인간스런 한계도 있었을 터. 가족의 눈엔 이 점이 잘 띄게 마련. 씨의 장남의 증언엔 이런 것도 있소. “부친의 글을 읽고 사람들이 위대한 스님인가 보다고 여긴다면 이는 큰 착오다”라고. “절이나 신사에 가서도 예배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라고. 만년 병으로 잠 못 이룰 때 염불을 외어보면 어떻겠느냐고 부인이 권하자 “염불 따위가 들을 것 같나”라고 성을 냈다는 것 등등. 아마 사실의 증언이리라. 그럼에도 ‘미의 법문’은 진실하다고 할 수 없을까. 불교나 종교와는 상관없이 씨의 염원은 민예의 세계에 있었으니까. 종교까지도 그 구경적(究竟的) 방편이었으니까.
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