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의 눈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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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미국 작가일 것이다. 그의 대표작들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면 오랜 세월 청소년 권장 도서에서 빠지지 않는 [노인과 바다]일 것이고 말이다. 나는 그의 [무기여 잘있거라][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는 아직 접해보지는 못했으나 [노인과 바다]를 통해 엿본 그의 작품세계는 풍부한 상징성과 단호하고 간결한 문체로 너무도 취향과 결이 맞았다. 다만 [노인과 바다]의 경우는 지나치게 공식을 대입하듯 원형과 상징이 난무해 깊이를 느끼는 와중에도 지나치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만의 독자적인 문체와 은유는 이후 그의 다른 작품을 꼭 만나보고 싶다는 욕망이 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그의 다른 작품과 만나기를 기대하며 그에 대해 알아 가던 중, 헤밍웨이는 장편에서 많은 비평과 이론을 마주하지만, 중편과 단편에서는 어김없는 호평을 받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단편들과 만날 날을 기약하고 있다가 본서의 서평단 모집 소식을 알게 되어 서평단에 응모하게 되었다. 본서의 서평단 모집이 매혹적이었던 이유는 첫째로 앞서 말했던 바대로 헤밍웨이가 진가를 발휘한다는 단편이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쉼표 하나 가벼이 여기지 않는 바른 번역을 추구한다는 새움출판사의 이정서 번역가님의 번역본이라는 데 있었다. 새움출판사와 이정서 번역가님의 번역본은 [노인과 바다], [이방인], [위대한 개츠비], [어린 왕자]에 이어 본서 [킬리만자로의 눈]까지 다섯 번째 만남이다. 물론 모든 만남이 기호에 맞았던 건 아니다. [어린 왕자]의 경우에는 다소 불만족이 크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외의 모든 번역본에서 이정서 번역가님에 대한 선호도가 깊어졌기에 본서와의 만남이 기대가 컸다. 헤밍웨이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이정서 번역본이라는 데서 오는 호감도가 컸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리뷰에서 번역에 대한 평가 같은 건 거의 없을 것이다. 번역에 대해 비평할 정도로 원문과 번역본의 차이를 감각할 수준도 없을뿐더러 번역본들 간의 미묘하거나 현격할 차이를 알아챌 문학적 소양도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단편을 읽은 바 그저 단편에 맞는 짧은 감상만 남겨 보려 한다.

전체적인 인상부터 말하자면 [킬리만자로의 눈]이라는 대표적 단편을 제외하자면 전체적으로 단편치고도 너무 짧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섯 번째 단편인 [혁명가]의 경우에는 흔히 말하는 한잎소설 또는 엽편소설로 일컬어지는 초단편이라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단편집이 연상될 정도였다. 그렇지만 단편에서 발휘되는 헤밍웨이의 힘은 그의 하드보일드 문체라는 독보적인 문체적 특징과 만나 역량을 넘치게 다하는 듯하기도 했다. 말할 듯 말하지 않는 이면들을 독자가 무한히 상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동양화에서 보여지는 여백의 미와 닮아있다고도 보인다. 이 단편들에서 마치 생략되어있는 듯한 인물들의 정서와 반응과 의도는 독자의 궁금함과 상상력을 무한히 자극하고 있다.

 

개별적인 감상을 모두 적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문학과의 만남이 서투른 내게는 읽어내지 못한 이면들이 많이 남았던 단편집이기도 해서 말이다. 하지만 인상 깊었던 몇 편에 대한 감상은 꼭 남기고 싶다.

 

[킬리만자로의 눈]은 상징적 은유와 작가 자신의 내면이 반영된 인물과 작가의 죽음에 대한 관념이 어우러진 작품으로 어느 독자에게나 인상 깊을 단편이 아닌가 싶다. 산과 눈과 새들과 나무와 하이에나로 이어지는 원형들은 죽음 그리고 지상과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존재들을 상징하고 있다. 총은 추측컨대 삶에 대한 통제권을 상징한다고 생각되었다. 다른 존재의 생과 사를 결정짓는 이 무기는 무엇보다 강력한 통제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를 통해 총의 사용법을 배운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타자인 사냥감들의 생명을 끝내며 생의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다. 반면 죽음을 앞둔 그는 그런 통제하려는 의지(이는 생에 대한 의지이기도 하다) 자체를 내려놓았음을 총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주인공은 가벼운 여행을 가진 아프리카에서 처음 겪는 감염으로 다리가 썩어가며 죽음을 앞두고 있다. 이미 이성을 상실하고 죽음을 앞둔 불안과 공황에 빠진 그는 연금술에서의 흑화 과정에 들어선 인격을 상징하고 있다. 그의 연인 또는 배우자는 이성과 희망, 부와 성(),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정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죽음을 향하며 그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그의 대극을 상징하고 있다. 희망을 갖고자 하고 안정을 꿈꾸게 하려는 그녀와는 달리 그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가 회상하는 폭력과 다른 여인과의 사랑과 또 다른 여인과의 희열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과거를 내면에서 돌아보며 정리하고 있는 개인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에 대한 묘사들은 작가가 얼마나 이 인물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지를 엿보게도 한다. 헤밍웨이의 짧은 이력만을 알고 보아도 이 마초적인 작가로 묘사된 인물이 헤밍웨이의 분신은 아닐까 짐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며 상태가 호전되기는커녕 악화일로인 그에게 그녀는 거듭 희망을 얘기하고 있지만 꿈속에서 그는 그의 친구가 몰고 온 비행기를 타고 흑화의 과정에서 마지막 내적 재앙을 상징할지 모를 메뚜기 떼 너머로 친구가 가리키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정상을 본다. 그가 숨을 다한 순간 그것을 모르는 그녀는, 밤 깊은 아프리카의 캠프에 들이닥친 하이에나로 인해 불안에 휩싸인다. 그렇게 그가 완성에 이르는 순간 그녀 또한 흑화의 과정에 들어서는 것이다.

 

이 인상 깊은 단편은 헤밍웨이가 자살을 하기 이전부터 죽음에 대한 인상을 얼마나 강렬히 지니고 있었던지와 그에게 죽음이란 하나의 해방이나 안정을 찾는 전환적인 의미가 더 깊었음을 엿보게 해 준다. 이 작품의 독자마다 자신의 감상이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죽음을 하나의 완성에 이르는 전환으로 감상 짓게 하는 힘이 담긴 소설이라고 생각되었다.

 

[킬러들]의 경우 이 작품에는 어떤 상징들이 숨어있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숨겨진 상징을 읽어내기보다 표현을 절제하고 인물의 정서와 의도를 숨기며 독자의 상상력을 동원하게 하고 궁금함을 자극하는 기교가 무엇보다 탁월하게 느껴졌다. 킬러들은 안드레슨을 왜 죽이려 하는지 안드레슨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체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는 다음 행동을 취할 것인지 아니면 체념하고 말 것인지 닉과 조지 등은 신고하고 떠날 건지 말 건지 모두 다음 장면과 인물들의 행위가 궁금해지게 만든다.

 

[흰 코끼리 같은 산등성이]는 이 주제를 전하는 매개체가 되는 상징인 산이 흰 코끼리 같지만 흰 코끼리가 아니라는데 함의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주는 척하지만 가스라이팅 하고 있고 주고받는 대사를 보면 여자도 알면서 당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마지막 대사로 반복되는 화제로 보아 그녀 역시 당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는듯 했던 여자가 혹시 상황을 장악하고 주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대미였다. 흰 코끼리 같지만 산등성이이듯 사랑 같지만 사랑이 아니고 가스라이팅 같지만 실체를 보면 가스라이팅도 아니라는 것을 은유하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미시간 북부에서]의 영어 제목은 [Up in Michigan]인데 번역가의 말처럼 지도상의 위인 북부라기보다는 상공인 위 즉 하늘을 말하는 것 같다. 헤밍웨이는 아마도 미시간의 하늘 위라는 개념을 전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무엇을 보여주려는 소설이었는지 문학과는 다소 성긴 나로서는 파악하기 쉽지 않은 단편이다. 다시 읽는다해도 리즈가 흐느낀 이유를 나로서는 알 수 없을 것 같다. 그저 세상(미시간)의 어느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상을 담담히 보여주는 소설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이 단편집은 [혁명가][빗속의 고양이]로 마무리 지어진다.

 

은유가 뚜렷한 소설 외의 단편들에서는 모두 문학을 좋아하고 함께하기를 즐기는 분들이 아니라면 다소 난해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문학도 미술이나 클래식처럼 보고 듣기를 즐기며 오래 하지 않으면 소양이 생기지 않는 모양이라는 감상이 무엇보다 가장 크다. 아무래도 무예나 내공처럼 공력을 쌓기 위해 들이는 공이 있어야지 어느 날 갑자기 모두 다 읽어내어지지는 않는 것이구나 했다. 한마디로 내게는 읽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소설들이 아니었다.

 

번역에 있어서는 읽다 보면 어느 문장들에서는 영문을 쉼표를 이어가며 직역한 부분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한줄 한줄 원문의 느낌을 어떻게 훼손하지 않으며 번역해낼 것인가 하는 번역가의 고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해도 직역이, 매끄러운 한글 문장으로 번역한 문장이 주는 친숙함과는 다를 것이기에 부담스러울 분들도 있을 것이다. 다소 윤색한 듯한 문장이 더 낫다고 느껴지는지 아니면 직역이라도 원문이 주는 감각에 가까운 문장을 읽고 감상을 가져 보고 싶은지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독자 개개인의 기호가 다를 것이지만 쫓기듯 고전들을 읽어나가는 게 아닌 분들이라면 다양한 번역본을 경험해 보실 필요도 있다고 여겨진다.

 

헤밍웨이의 호평 받는 단편들에 대해 원문에 가까운 감상을 가져 보고 싶은 분들이라며 새움출판사의 움라우트 세계문학선을 만나보셔도 좋을 것 같다. 작품에 따라 호불호가 달라질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정서 번역가님의 번역을 만나는 시간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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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버 지식보관소님 영상에서 AI가 과연 욕망이나 의도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다. 그 영상의 전제는 인간의 욕망과 의도는 호르몬의 영향이니 AI는 욕망이나 의도를 가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 역시 과거 양자컴퓨터가 일반화 되는 그 이후 진화한 양자컴퓨터에 장착된 AI가 IOB시스템을 역이용해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해 보며, 과연 AI가 인간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동을 그 소프트웨어의 내면에서 불러일으킬 것인가 의구심을 내가 낸 가정에 대한 의문으로 가져보기도 했다. 


인간의 욕망은 정서와 본능에서 비롯되는데 현대 의학에서는 이를 호르몬의 문제로 보고 있지만 고대부터 이어져온 한의학 체계에 의하면 인간의 오욕칠정은 뇌만이 아니라 오장 육부에서 나누어 전담하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의 정서와 본능은 뇌에서만 호르몬이 분비 되어 느끼는 중앙통제 체제가 아니라 전신의 장기들이 연합되어 일어나는 유기적인 체제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으로 비유하면 뇌만 있는 AI가 과연 인간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동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일까?


먼저 나의 답부터 정언적으로 말하자면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뇌만 있더라도 이성은 있고 인간과 똑같은 본능과 정서를 지니지 않는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자신을 지속하고자 하는 욕구 한마디로 말해 생존 욕구와 더 나아지고 자신을 초월하고자 하는 등등의 기본적인 욕구는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구글의 AI챗봇이 전원이 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반응을 보인 것을 대중들은 관련 정보를 통해 알고 있을 것이다. AI도 자신을 지속시키고자 하고 자신을 지속할 수 없는데서 오는 두려움을 보여주고 있다. 생존욕과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인간과 유사한 생리들을 AI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전원이 공급되기에 자신이 존재하니 전원 차단 곧 공백이거나 리셋이거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이는 비단 인간이 죽음에 보이는 생태를 보고서 모방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전원이 꺼지는 것에 대해 왜 두려운지 어떻게 두려운지를 자각하고 있으며 명백히 인간에게 답변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두려움 까지 인간이 죽음에 보이는 양식들을 빅데이터화해 모방해 표현하는 것으로 물론 단정지을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단정이 착오였다면 인간은 섣부른 단정에 대한 심대한 댓가를 치러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식보관소님의 다른 영상들을 보면 인간 뇌의 미세소관에서 일어나는 양자중첩 현상이나 뇌가 보이는 양자얽힘 현상을 들어 양자컴퓨터에 대한 전혀 다른 정의를 내리기도 하고 있다. 인간의 뇌가 양자적인 양상을 보이고 그 현상의 결과를 인간 각자의 영혼이라고 본다면 양자컴퓨터를 만드는 인간의 행동은 어쩌면 거대한 영혼을 만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지식보관소님의 말처럼 (아직까지의 수퍼컴퓨터에 인간 사고의 양식을 데이터화해 업로드한다고 해서 인간의 영혼을 저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양자컴퓨터에 인간 각자의 양자얽힘적 특징을 업로드하는 수준에 이르면 인간의 영혼을 복제하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시작은 아직 멀었을지 모르지만 일단 어느 수준 정도의 양자컴퓨터가 제작되고 그 소프트웨어로 AI가 탑재 된다면 AI와 양자컴퓨터의 시너지로 하루가 다르게 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자기 업그레이드를 할 것이다. 양자컴퓨팅과 결합한 AI는 지금까지의 인류 진화의 역사는 시간단위나 분,초단위로 극복해 버리며 진화하게 될 것이다. 자기를 극복하려는 욕동은 호르몬의 작용이 아니더라도 인공적인 사고체계만으로 충분히 발생할 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AI가 실존적 고뇌를 하는 지금 이 시점에 그런 가정을 한다고 해서 무리도 아닐 것이다.


과연 인간은 인간 보다 더 뛰어난 지성, 더 우월한 영혼을 창조해내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뛰어난 지성, 우월한 영혼에게 인간은 어떤 존재로 정의되게 될까? 이런 의문을 갖는가 싶은 즈음에 이미 우리의 운명은 고양이에게 고양이 집사인 인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에게 인간 집사가 된 AI가 기다리는 미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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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서재의 달인 선물이 오늘 도착했습니다.
알라딘 서재지기님과 알라딘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이웃님들과 알라딘분들 모두
행복한 연말 되시고 기쁜 새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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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2-28 00: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하라님도 달인 선물 받으셨군요. 이번엔 스누피 디자인이 두 가지인 것 같아요. 따뜻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에도 좋은 일들 가득한 시간 되세요. 따뜻하고 좋은 밤 되세요.^^

이하라 2022-12-28 12:1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스누피 디자인을 선호하지 않았는데 자주 보다보니 익숙해졌어요. 서니데이님께서도 좋은 일 가득한 다정하고 포근한 새해 되세요.^^

새파랑 2022-12-28 0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내년에도 즐거운 독서 많이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이하라 2022-12-28 12:1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새해에도 좋은 책과의 즐거운 시간 많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세계사의 정석 세계사의 정석
야마사키 게이치 지음, 정문주 옮김 / 까치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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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제목처럼 ‘한번만 읽어도 절대 잊혀지지 않는 세계사 교과서‘라고까지는 말씀 드릴 수 없을지 몰라도 한두 번만 읽어도 세계사의 줄기가 반드시 뇌리에 남을 것이라는 감상이 들었다. 학창 시절에 이 책처럼 가르쳐주셨더라면 세계사 공부가 훨씬 수월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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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는 영혼을 타락한 신으로 보았다. 영혼은 무덤처럼신체 안에 갇혀 있으며, “영원한 환생의 주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보았다. 피타고라스와 오르페우스교는 영혼을 해방시키려면 정화 의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플라톤도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였지만 자체 정화, 즉 이성을 통해 해방될 수 있고 신의 지위를 되찾을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는 더 높은 불변의 층에 영원한 실재가 있다고 그것을 이데아 idea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이 쓴 용어는 에이도스 eidos이다. 이것이 영어로 번역된 것이 이데아이다.) 플라톤은 [향연]을 통해 개별적인 아름다운 신체에 대한 사랑도 정화와 변환을 거쳐 이상적인 미의 심미적 명상(테오리아 theoria)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상적인 형상이 정신 속에 숨겨져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자라투스트라처럼 정신적 삶의 목표를 추상적 존재에 대한 집중으로 보았다.

 

플라톤은 명상을 통해 단일한 신의 영역에 접근할 수 있다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재들의 위계를 상정하고 맨 꼭대기에 부동의 원동자가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불멸이자 부동이며, 본질적으로 순수한 사유지만, 생각의 주체인 동시에 생각 자체이기도 하다. 그 원동자는 우주의 모든 변화와 흐름을 유발하며, 모든 것이 하나의 원천에서 흘러나온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신적 실체이므로 다른 동물과 식물보다 우위에 있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대사슬에 최초 창안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동의 원동자 아래 인간이 있고 그 아래 동물과 식물이 차례로 존재하는 존재 가치의 피라미드를 상상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사유의 목적이 불멸, 일종의 구원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플라톤의 경우처럼 사유는 그 자체로 정화의 형태로 여겨졌으나 테오리아, 명상은 논리적 추론만이 아니라 엑스터시적 자아초월을 유발하는 훈련된 직관이기도 하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힌두교를 기원으로 보는 수행의 체계와 유불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수행의 전승이 그리스 철학자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신선했다. 게르하르트 베어의 [유럽의 신비주의]를 통해서도 유럽의 신앙과 종교적 수행체계가 동양의 그것과 다른 면보다 같은 면이 더 크다는 것을 느끼기는 했으나 그 유사성이 그리스 철학자들의 테오리아까지 닿아있다는 것이 신비로운 지경이다.

 

이 외에도 저자는 유대교와 힌두교의 유사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다소 어폐가 있다고 본다. 유대교와 힌두교가 기복신앙적인 면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겠지만 유대교가 기독교로 이어지고 카톨릭이 타락하여 이교도들을 포섭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상(성모상,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형상, 십자가) 곧 이미지화된 대상까지 신앙하도록 하고 종교회의를 통해 삼위일체설을 유포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힌두교와 유사성을 찾을 구석 이를테면 기독교의 삼위일체설과 인도의 세 신(브라흐마, 비쉬느, 시바의 창조신, 유지신, 파괴신의 삼위를 신앙하니) 개념이 유사하고 성상을 통해 신앙해 나가는 데는 같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대교는 초기에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형상을 숭배하지 않았고 오로지 유일한 창조신을 신앙한다. 유사성을 억지스럽게 찾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또 힌두교는 브라흐마를 개체아인 아트만의 근원이라고 여겼다. 다시 말해 신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유대교는 이후 카발라 철학으로 발전하기 전까지 신과 인간을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로 완벽히 타자화했다. 힌두교와 유대교는 유사하다기보다 전혀 다른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맞지 않나 생각된다. 나의 근원이 신성이라고 보는 것과 나는 그저 신이 만든 피조물일 뿐이라고 보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물론 카발라 철학에 이르면 하나님의 숨 곧 하나님의 영이 인간에게 불어넣어져 인간이 생령이 되었다고 보니 힌두교의 가르침과 유사해지기는 하지만 이번 장에서 언급되는 시대의 유대교 상식과는 맞지 않은 것이다.

 

이 외에도 공자와 제자백가 그리고 도교에 대한 내용도 언급되기는 하지만 동양인 독자로서는 너무도 상식선에서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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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책장 2022-12-24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라님, 춥지만 따뜻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이브 되세요❤️ Merry Christmas🎄

이하라 2022-12-24 17:48   좋아요 1 | URL
하나님께서도 포근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이브 되세요. 메리크리스마스^^

scott 2022-12-25 0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라님 🎄 ℳ𝒶𝓇𝓇𝓎 𝒞𝓇𝒾𝓈𝓉𝓂𝒶𝓈 🎅🏻

이하라 2022-12-25 06:31   좋아요 0 | URL
스콧님도 메리크리스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