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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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전히 <신참자>를 보기 전에 물밑 작업 차 가가 형사 시리즈를 읽기 시작했지만 <졸업>이나 <잠자는 숲>에서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해 다소 시큰둥해 하며 그냥 시리즈에 대한 반동으로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를 읽기 시작했는데 이게 정말 물건.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에서도 그랬듯이 가가 형사는 비중 있는 조연급으로 등장할 뿐이었지만, 가가 형사라는 캐릭터에 대한 얼개도 앞선 책에 비해서는 제대로 만날 수 있는 작품인 듯 했다. 

  대학 진학을 계기로 홀로 도쿄에 상경해 살아가는 소노코. 별다른 삶의 낙도 없고, 새로운 만남도 없어 이렇게 살다가 적당히 누군가의 소개로 결혼해 그냥그냥 무던하게 살아가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그녀 앞에 예술가를 꿈꾸는 한 남자가 나타난다. 게다가 그 남자가 가난한 예술가가 아닌, 대형 출판사의 사장의 아들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 하지만, 그런 그를 가장 친한 친구에게 소개시켜준 뒤 소노코는 사랑도, 우정도 모두 잃게 된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절망한 여자는 고향에 있는 오빠에게 안부 전화를 걸어 집에 내려가겠노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노라고, 차라리 죽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불길한 전화 이후 고향에 내려오지 않은 여동생이 걱정돼 도쿄에 올라온 오빠는 싸늘하게 죽어 있는 여동생을 발견한다. 정황상 자살로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누구보다 동생의 자살을 믿을 수 없었던 오빠는 자살로 보이게 하는 증거만 남긴 채 모든 물적 증거를 빼돌린 뒤 경찰에 신고한다. 역시나 자살로 판단하는 경찰. 하지만 가가 형사만은 이 사건이 자살이 아닌 살인사건임을 직감하고, 진범을 찾는 오빠와 보이지 않는 대결을 시작한다. 

  제목에서처럼 이 책에서 유력한 범인은 두 명이다. 고향 친구인 가요코냐, 한때 사랑했던 준이치냐. 하지만 둘 중 한 명을 범인으로 찝어내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잘못된 만남'의 가사 같은 스토리를 보완해준 것은 이렇게 꽁꽁 숨겨진 범인의 정체다. 찍어도 확률은 50프로지만, 그 확률을 믿고 그냥 누가 범인이겠거니 하고 여기기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일본에서도 결말 때문에 출판사 측에 출간 당시 엄청난 문의가 들어왔다고 하는데, 그럴 만도 하겠다 싶다. 범인을 드러내주는 단서는 모두 이야기 속에 등장하고, '범인은 바로 너!'의 과정까지 거의 다 이끌어놓고는 결국 범인이 누군지는 공란으로 남겨놓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은 끽해야 다섯 손가락(별 비중 없는 사람까지 꼽는다 해도 열 사람 내외)으로 꼽을 정도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는 점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역량이 드러나는 듯. 

  어떻게든 현장에서 수집한 증거를 토대로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려는 오빠와 남은 증거와 정황적 근거를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가가 형사. 두 사람이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는 과정도 좋았지만, 복수를 막으려는 가가 형사의 따뜻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어쩐지 시큰둥하게 휙휙 보다가 점점 빠져들었던 책. 히가시노 게이고를 끊을 수 없는 건 소재의 독특함이나 못해도 중박이라는 점도 있지만, 가끔씩 이렇게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흡입력이 있어서가 아닐까. 이렇게 되니 시리즈의 다음 이야기인 <내가 그를 죽였다>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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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24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흑~~'옛날에 내가 죽은 집' 보고 소름이 쫙~~
하루종일 소름이 없어지질 않던데...

이매지 2010-06-24 10:09   좋아요 0 | URL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은 한동안 히가시노 게이고를 방치했을 때 나온 작품이라 아직 못 읽어봤어요. 하루종일 소름이 없어지지 않으셨다니 어쩐지 혹 하는데요 :)

전호인 2010-06-24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가 섬뜩합니다.
아유~~! 추워라.
참고로 저는 아닙니다. ㅠㅠ

이매지 2010-06-24 10:08   좋아요 0 | URL
거기도 죽은 여자의 메모에 이니셜 J가 써 있긴 했지만,
전호인의 J는 아니었으니 ㅎㅎㅎ

마노아 2010-06-24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은 용의자 X의 헌신과 백야행만 보았어요. 요거 두 개 빼고는 뭘 제일 추천하고 싶어요?

이매지 2010-06-24 14:29   좋아요 0 | URL
그거 두 개 빼고는 딱 떠오르는 건 <명탐정의 규칙>인데,
이건 추리소설을 평소에 즐겨 읽는 분이어야 즐길 수 있을 것 같으니,
마노아님께는 <방황하는 칼날>을 슬쩍 추천해봅니다 ㅎㅎ

같은하늘 2010-06-24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더운 여름에 읽기에 좋은 책인거죠? 도서관으로~~

이매지 2010-06-24 20:16   좋아요 0 | URL
뭔가 머리를 많이 쓰는 추리소설을 원하신다면 보세요 :)

강래희 2010-06-24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가시노 게이고,, 백야행으로 주목받았죠? 우리나라에서 ㅎㅎ
용의자 X의 헌신 정도?
근데 ,,지금도 사 놓고 안읽은 책이 너무 많아서 ,,
요 아이 카트행은 힘들 듯 ..ㅜㅜ
도서관으로 가야할까봐요 ㅎㅎ

이매지 2010-06-24 23:42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영화의 영향이 컸던 듯.
근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작품을 보면 백야행은 뭔가 별개의 책 같아요.
다른 책들은 굉장히 엔터테인먼트적인 것들이 많다능.
그래서인지 일본에선 드라마나 영화로도 자주 만들어지고 있기도 하구요.
요 아이, 나중에 기회 되면 도서관에서라도 빌려보세요~
 
얼간이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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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김없이 돌아온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이야기. 연작소설이긴 했지만, 사실 초반에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조금은 심심한 구석이 있어서 느릿느릿 읽어갔는데(게다가 이번에는 나만의 느낌인지는 몰라도 첨자로 설명이 올라간 부분이 늘어난 듯) 본격적인 이야기인 <긴 그림자>에서 '역시 미미 여사는 명불허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의 에피소드는 어디까지나 떡밥이었을 뿐. 본격적인 이야기는 뜸을 들인 뒤에 시작되니 초반에 포기 하지 않으면 쏠쏠한 재미가 기다리고 있을 책. 

  과연 왜 '얼간이'라고 하는 건지는 갸웃하지만, 어쩐지 어리숙하면서도 속정 깊은, 헤이시로가 이번에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혼조 후카가와 지역에서 야채 가게 집의 청년이 괴한에게 살해당한다. 이 일로 관리인 규베가 떠나고, 규베를 대신해 젊은 관리인 사키치가 새로 후카가와에 온다. 하지만 사키치가 온 뒤 이상하게도 마을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한 가구씩 이곳을 떠난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헤이시로는 일련의 사건의 배후에 미나토 상회가 있음을 알게 된다. 대체 무엇 때문에 미나토 상회에서는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 

  미미 여사의 다른 에도 이야기도 그랬지만, 이 책도 사건 자체의 매력보다는 등장인물에 더 애정이 갔다. 어딘가 느슨해보이는 헤이시로, 아직은 어리숙한 젊은 관리인 사키치, 겉으로는 마냥 괄괄한 것 같지만 정이 넘치는 과부 오토쿠, 너무나 빼어난 외모 때문에 다른 길로 빠질까 헤이시로의 아내가 양자로 점찍은 조카 유미노스케 등의 캐릭터는 이야기의 재미를 더했다. 특히나 오토쿠라는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는데, 이래저래 새로운 사람들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던 그녀가 사키치를 인정해가는 모습이나 초면에 죽은 남편이 자신을 찾았다는 얘길 꺼내 삐걱거렸던 오쿠메와의 관계가 유머러스하게 그려지는 점이 재미있었다. 또 하나, 아직도 오줌싸개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 유미노스케의 비현실적인 영특함은 같은 시대극인 <샤바케>가 떠오르기도 했다.(물론 <샤바케>의 도련님과 유미노스케는 설정이나 캐릭터 자체가 다르긴 하지만.) 

  시대적인 배경은 한 번도 경험한 적도 없는 에도 시대인데도 어쩐지 미미 여사의 시대물을 읽을 때면 따뜻함이 느껴져서 좋다. 물론 그 시대에도 노름 빚에 딸을 팔아넘기려는 파렴치한 아버지도 있고, 남편과 정을 나눈 여자를 질투해 자신의 딸마저도 험담하는 어머니도 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 책에는 '정'이 흐른다. 지금처럼 남의 집 일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모두가 암묵적으로 비밀(혹은 마을의 구성원)을 지켜주기도 하고, 마치 한 가족처럼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서로 기댈 수 있는 모습. 어쩌면 이제는 그런 모습을 찾기 힘들기 때문에 미미 여사의 시대물에서 그런 정을 찾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추리소설으로서 읽는다면 어딘가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을 작품. 하지만 미미 여사의 에도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이전에 나온 에도 이야기에 비해서도 꽤 괜찮은 듯. 초반의 뱀발 다발 지역을 무사히 넘긴다면 그 뒤로는 술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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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0-06-23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 대문사진이 알바하실때 찍은 사진은 아니죠? ㅎㅎㅎ

왠지 이책은 제목때문에 아직 안샀는데.... 다른 책 다샀으니 마저 사야겠네요. 그런데 미미아줌마 에도이야기는 계속 나올건가봐요?

이매지 2010-06-23 13:10   좋아요 0 | URL
대문 사진은 그저 제가 요즘 무한 애정하는 오리갑님입니다 ㅎㅎㅎ
그냥 조금 특별한 엘지트윈스 팬이예요 ㅎㅎ

어디서 보니까 이 책 후속작도 있다는 걸 보니
미미 여사님의 에도 이야기는 계속되는 듯 싶네요 :)

유부만두 2010-06-23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다 모셔둔 <외딴집> 부터 읽어야 하는데.... 왜 더운 날엔 책 펼치기 어려운 건가요? (절대 엘쥐나 월드컵 때문이 아니라고 박박박 우기는 중입니다)

이매지 2010-06-23 18:20   좋아요 0 | URL
외딴집도 아직 안 보셨군요!ㅎㅎㅎ

그나저나, 정말 엘지나 월드컵 때문이 아닐까요? ㅎ
요새는 잠시 추격쥐 모드에서 다시 연패를 할 듯;;;

같은하늘 2010-06-24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분들이 미미여사의 책에 열광하는데 전 왜 아직 한번도 못 보았을까요? ㅎㅎ
맨날 애들 책만 보고있다는... -.-;;

이매지 2010-06-24 20:17   좋아요 0 | URL
미미 여사의 책은 역시 <이유>나 <모방범>이 최고!
아직 안 읽어보셨다니 어쩐지 부럽기까지 합니다 ㅎㅎ
 
고독의 노랫소리 - 제6회 일본추리서스펜스대상 수상작
텐도 아라타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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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애도하는 사람>을 읽고 텐도 아라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읽어보고 싶었던 <영원의 아이>는 북스피어에서 재출간된다는 말만 있고 도무지 소식이 없어서 일단 쉽게 접할 수 있는 <고독의 노랫소리>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제 북스피어에서 독자교정에 들어가는 걸로 봐서 이제 정말 나오는 듯) 

  '고독의 노랫소리'라는 제목과 걸맞게 이 책은 근본적으로 '고독'을 다루고 있다. 자신의 아내가 되어 완벽한 가정을 만들어갈 여자를 찾기 위해 거리를 헤매는 범인도,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하며 자신만의 음색으로 고독을 전하는 가수 지망생 준페이도,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듯한, 밤에 은은한 불빛이 없으면 잠들지 못하는 여형사 후키도 모두 고독하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이해할 수 없는,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고 해도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회. 이곳에서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고독을 감당한다.

  <애도하는 사람>은 서정적인 면이 강했다면 <고독의 노랫소리>는 확실히 어둡다. 분명 같은 작가의 글인데도 뭔가 빛과 어둠, 양쪽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느낌이 들어 작가의 역량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이 <애도하는 사람>과 <붕대클럽> 이후 세번째로 읽은 텐도 아라타의 작품이었는데, 물론, 각 작품마다 방식은 차이가 있었지만 세 작품 모두 기본적으로 외로움이나 고독, 상처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한다고 해도 그 기반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함이 실려 있어서 좋았다.

  그리 피투성이에 난도질이 등장하는 책을 볼 때도 담담했지만, 이 책을 읽으며 어쩐지 오싹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상황을 유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만들어가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한 사람의 인생관이 다른 사람을, 아니 그보다 사회를 얼마나 흔들어놓을 수 있는 것일까. 자유를 만끽하며 혼자 살아가다가 찾아주는 사람도 없이 사라졌을 그녀들을 생각하니 어쩐지 외로워졌다. 세상은 마냥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님을, 하지만 그 속에도 사랑은 존재함을 이 책은 다소 우회적인 방식으로 보여줬다. 곧 읽을 예정인 <가족 사냥>과 <영원의 아이>에서의 텐도 아라타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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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0-06-17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밖에 읽은게 없어요... 읽는 내내 참 처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작품인데..
'가족사냥'하고 '애도하는 사람'도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겠어요...^^

이매지 2010-06-17 11:36   좋아요 0 | URL
<붕대클럽>을 읽었을 때는 이 작가가 그렇게 마음을 파고들지는 않았었는데, <애도하는 사람>을 읽고 반했어요. <가족 사냥>도 평들이 좋더라구요 :)

같은하늘 2010-06-17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소설은 참 적나라한것 같아요.
그나저나 이매지님 바뀐 이미지가 깜찍하세요. ㅎㅎ

이매지 2010-06-17 20:55   좋아요 0 | URL
정말 엽기라고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책들도 있죠.ㅎㅎ
바뀐 이미지는 요즘 엘지트윈스 팬들의 전폭적 인기를 얻고 있는 오리갑입니다 ㅎ
 
잠자는 숲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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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가 형사 시리즈 첫권인 <졸업>을 다소 시큰둥하게 봤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히가시노 게이고와 함께 하고 있는 가가 형사라는 캐릭터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연달아 시리즈 2권인 <잠자는 숲>을 읽기 시작했다. 여느 시리즈라면 캐릭터의 성장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지만, 독특하게도 가가 형사 시리즈는 장래를 고민하던 대학생 가가에서 훌쩍 뛰어넘어 전직 교사였던 형사 가가의 모습이 등장한다.

  표지의 그림처럼 이 책은 발레와 관련이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발레가 주된 아이템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되지도 않는 몸으로 체육 시간에 발레를 배웠던 악몽은 떠오르다가 슬며시 사라졌다. 유명 발레단에서 우연히 침입한 사람의 머리를 병으로 내려쳐 침입자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정당방위로 보이지만 제대로 된 조사를 위해 사건을 저지른 단원이 경찰에 잡혀간 사이, 잇달아 발레단의 연출가가 독극물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렇게 뒤이어 발레단 내에서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발레단이라는 작은 규모의 사회. 범인은 그 안에 있는 것이 확실하나, 사건의 진상은 흐릿하기만하다. 과연 발레단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발레단같이 비교적 폐쇄적인 집단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추리소설에서 익숙한 구성이다. 잇달아 사건이 벌어진다는 설정도 딱히 매력적인 것은 아니라 <잠자는 숲> 딱히 추리소설로서는 큰 재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추리소설적인 면을 벗어나서 가가 형사 '시리즈'라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어느 정도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다. <졸업>에서 저돌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던 가가는 또 다시 사랑에 빠진다. 이번 경우 또한 꽤 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가가. 형사와 참고인이라는 관계에서 시작되지만, 가가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발레를 열정적으로 대하는 미오에게 조금씩 사랑을 느끼게 되고 이를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과연 이번엔 가가의 사랑이 결실을 맺을 수 있을런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는 편이고, 소재도 나름 다양한 편이지만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는 고만고만한 경우가 많다. 가가 형사 시리즈를 읽으며 그런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는데, 그동안 내가 읽어온 시리즈와는 달리 가가 형사는 메인으로 등장하지만 어딘가 겉도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다. 물론, 대체로 시리즈물이 사건 자체보다는 인물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향이 있기도 하지만 이 책은 너무 캐릭터 쪽으로 치우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자는 숲>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비밀 등 내면에 잠자고 있는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가가 형사의 캐릭터 구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작품. 가가 형사의 애정 전선과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첫사랑에 대한 뒷이야기 등 사적인 면이 더 많이 부각된 듯하다. 가벼운 킬링 타임용으로는 가가 형사 시리즈가 제격이 아닐까 싶다. 뭐 그것도 미덕이라면 미덕이겠지만. 시리즈 덕후인 나는 그저 다음 권인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도 슬쩍 대기시켜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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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 설월화雪月花 살인 게임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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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손가락>이나 <악의>를 보면서 가가 형사 시리즈에 관심이 생겼는데, 가가 형사 시리즈의 가장 최근작인 <신참자>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의 2010년 1위작으로 꼽히자 급 관심. 게다가 현재 일본 드라마로 방영되고 있는 중이라 드라마도 볼겸 겸사 겸사 <졸업>부터 읽기 시작했다. 굳이 작품 순서로 읽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가가 형사의 첫 사건부터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에 다소 돌아가는 방법을 선택.(하기사 뭐 <붉은 손가락>과 <악의>를 벌써 읽어버렸으니 별 의미는 없겠다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이라 그런지 아쉬운 면이 있기는 했지만, 아직은 풋풋한(?) 대학생인 가가 형사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던 작품. 

  대학 졸업을 앞두고 저마다의 장래를 정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는 일곱 명의 친구들. 그 중 한 명이 자신의 집에서 손목을 그어 죽은 채 발견된다. 모든 상황으로 볼 때는 자살로 보였지만, 자살할 아이가 아니었다는 점과 함께 몇몇 의심스러운 상황 때문에 혹시 타살이 아닐까라는 추정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명의 친구가 설월화라는 다도게임 중에 독이 든 차를 마시고 갑자기 죽는다. 둘 다 자살이 아닐까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점점 이 두 친구가 우리 중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슬금슬금 퍼진다. 과연 누가, 무엇 때문에 친구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종종 일본 추리소설에서 일본 문화를 작품에 적용시키는 모습을 보곤 한다. 일단은 낯선 부분이라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문화적인 요소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해서 일단은 흥미를 갖고 읽게 된다. 이 작품 <졸업>에도 그런 요소가 등장하니, 바로 다도와 검도다. 검도야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정도 퍼져 있지만 다도에 대해서는 이전에 다른 소설에서 접한 적은 있지만 아무래도 어렵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그 다도의 게임 중 하나인 설월화라는 것이 주된 트릭으로 등장하니 머리가 지끈. 그저 시간표 트릭을 접할 때처럼 아예 마음을 비우고 읽어버리거나, 아니면 조금 집중해서 트릭을 따라가는 방법 밖에는 없어보였다. 뭐 정신줄을 놓지 않고 차분히 따라간다면 못 따라갈 것도 없는 트릭이었지만, 다도에 낯선 우리에게는 다소 어렵게 다가가지 않을까 싶었다.

  두 개의 사건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두 개의 트릭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두 개의 트릭은 다소 작위적인 느낌이 많아 트릭 자체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트릭 자체보다는 오히려 가가와 그의 친구들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에 더 집중하게 됐다. 가가의 첫사랑인 사토코, 엘리트 코스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도도, 평범한 대학생 커플이라 할 수 있을 와코와 하나에. 이들의 관계를 흔드는 도도의 연인으로 '망설임 공주'였던 쇼코와 검도에 재능이 있었던 나미카의 죽음. 그리고 가가와 친구들의 은사로 정기적으로 다도 모임을 갖는 마사코 선생님 등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쇼코와 나미카의 죽음으로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가가의 추리로 어느 정도 진실이 밝혀지지만, 그렇게 밝혀진 진실이란 그동안의 우정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것이었다. 학생에서 사회인이 되기 위해 겪는 성장통이라 하기엔 너무나 아픈 이야기. <졸업>은 어쩌면 미스터리의 가면을 쓴 청춘성장소설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슬몃 들었다.

  스토리나 트릭 자체는 딱히 확 끌어당기는 매력이 덜했지만, 교사와 경찰 사이에서 고민하는 가가의 모습이나 결국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아버지 때문에 엄마가 떠나버린 아픔에 안정적인 교사를 택하는 모습 등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더불어 어쩐지 가가답다는 생각이 드는 고백도 인상적이었다. 시리즈 두번째 이야기인 <잠자는 숲>에서는 가가의 어떤 면을 만날 수 있을 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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