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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재판 -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 ㅣ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2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여기, 한때 연극배우였지만 내연녀와 그의 남편을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한 혐의로 법정에 선 무라타라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내연녀를 위해 사체유기를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자백하지만 그 외 혐의에 대해서는 완강히 부인한다. 하지만 과거 공금을 유용하고, 친구에게 사기를 치는 등 '정직'과는 거리가 먼, 어두운 삶을 살아온 무라타에게 상황은 불리하게 흘러간다. 모두가 무라타의 유죄를 확신하는 가운데, 그의 담당 변호사 햐쿠타니만은 그를 믿고 거침없는 변론을 시작한다. 과연 무라타는 자신의 주장처럼 살인자가 아닌 것일까?
<파계 재판>은 전체 이야기가 법정에서 진행되는 독특한 소설이다. 어느 한쪽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제3자인 법정 기자의 관점에서 서술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객관성 또한 유지한다. 당사자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지만 외부인 가운데 누구보다 사건을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는 화자를 앞세움으로써 작가는 독자를 순식간에 법정의 방청석으로 불러들인다. 마치 신문에 실린 재판 관련 기사를 읽듯 구경하듯 들여다봤다가 팽팽하게 진행되는 공방에 이내 자리를 뜰 수 없게 된다. 겉으로는 너무나 빤해 보여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는 사건. 하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사건은 더이상 흔히 일어나는 치정 사건을 넘어서 사회와 사투를 벌인 한 인간의 드라마로 나아간다.
"재판을 연극에 비유한다면 그것은 각본도, 연습도 없는 즉흥극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움직일지도 알 수 없다. 나 역시 하나의 사건을 심리하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조명의 방향이 바뀌어 때로는 핵심과는 별 상관없는, 하지만 인간 관찰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실로 흥미로운 문제를 부각시키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 바 있다"라는 말처럼, 본질적으로 <파계 재판>은 '인간 관찰'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흥미로운 작품이다. 사실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법정 서술이 1차적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만 '보이는 것' 이면에 숨겨왔던 비밀이 드러날 때 이야기는 (기존의 흐름과는 방향이 틀어질지는 몰라도) 본격적으로 흥미로워지기 때문이다. 무라타라는 인물뿐만이 아니라 그에 대해 증언하는 주변인들, 그를 변호하는 햐쿠타니 등 법정에 서는 다양한 인물들의 내면이 제3자의 시선에서 꼼꼼히 그려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계 재판>은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와 연관성이 있다. 겉으로 볼 때는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교사인 우시마쓰. 그는 "설령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결코 백정이라고 고백하지 마라. 한때의 분노나 비애로 이 훈계를 잊으면 그때는 사회에서 버려지는 거라 생각해라"라는 아버지의 훈계를 가슴에 새기고 자신이 백정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또 숨기려 한다. 자신이 신평민이라는 것을 망각할 수 있다면, 차라리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고뇌에 휩싸이는 <파계>의 주인공 우시마쓰와 <파계 재판>의 무라타는 걸어온 삶의 모습은 다를지 몰라도 결국에는 같은 선상에 놓인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야만 하는 삶. 이렇게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비단 이들만이 아닐 것이다. 보이지 않는 편견이라는 시선에 얽매여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의 삶. 더이상의 신분제가 없다는 사회지만 과연 모두가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일까.
독학으로 사법고시를 치르는 심정으로 형법과 형사소송법을 공부하고, 매일 재판을 방청하러 다녔다는 작가의 열정 때문일까. <파계 재판>은 비전문가가 쓴 법정물임에도 불구하고 작가 스스로 법정을 체화했기 때문인지 전혀 겉도는 느낌이 없이 서술된다. 이후 작가가 특별 변호사로 선임되어 실제 법정에도 섰다는 <파계 재판> 이후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만큼 그의 작품이 전문성을 지녔다는 의미이리라. 50년도 지난 작품이지만 세월을 뛰어넘는 메시지를 지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 책. 법정물이라는 형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편견'에 대한 고찰 또한 인상적인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