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인 2 뱀파이어 삼부작
기예르모 델 토로 외 지음, 조영학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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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날씨가 더워지니 그에 비례해 추리, 스릴러에 대한 애정이 샘솟는 것 같다. 뭐 마땅한 책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던 찰나 눈에 들어온 <스트레인>. <판의 미로>나 <오퍼나지-비밀의 계단>을 워낙 재미있게 봐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소설은 과연 어떤 느낌을 안겨줄까라는 생각을 하며 읽기 시작했다.
 
  비행기 한 대가 JFK 공항에 착륙한다. 하지만 착륙 후 통신이 두절되고, 비행기는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는다. 고장이나 테러의 가능성을 생각했던 공항 직원들. 하지만 정작 문이 열린 비행기 안에서 승객 전원이 죽은 채로 발견된다. 이에 출동한 미 연방 질병관리센터의 에프 굿웨더. 그는 사건을 조사하면 조사할 수록 이상한 점 밖에 없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러던 중 네 명의 생존자가 발견되고 그들은 격리수용된다. 하지만 첫째날 밤. 부검실의 시체들이 하나둘 깨어나 저마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찾아가고 그렇게 도시는 뱀파이어에 감염되기 시작한다. 엄청난 속도로 퍼져가는 뱀파이어. 그들을 막기 위해 에프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하필이면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읽기에 집중할 수 없는 평일에 읽기 시작해서 근 며칠을 이 책에 빠져서 지냈다. ‘주말에 읽었더라면 더 빠져들었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읽는 동안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영화감독이라 그런지, 아니면 영화화를 염두해두고 만든 것인지 책을 읽으면서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뱀파이어라는 소재는 영화나 책을 통해 끊임없이 변주되어 왔다. 마치 이 책 속에서 아무리 없애도 끈질기게 나타나는 ‘언데드’처럼 말이다. 흔히 사람들이 뱀파이어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은 ‘십자가, 마늘, 성수’ 혹은 목에 남겨진 이빨 자국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책 속에서는 기존에 뱀파이어를 퇴치하기 위해 사용했던 물건들은 아무런 효용이 없고, 오직 햇빛과 은으로 만든 못만이 그들을 파괴할 수 있는 것으로 등장한다. 게다가 목에 뚜렷한 이빨 자국을 남기며 피를 빨아 먹는 것이 아닌 촉수를 통해 목에는 잘 보이지 않는, 그저 실같은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마치 귀소본능처럼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의 곁으로 돌아가 결국 그들을 뱀파이어로 만들어버린다는 설정은 어찌보면 굉장히 잔인하다. 사랑했던 사람을 어쩔 수 없는 힘 때문에 파괴하는 뱀파이어. 그들에게는 미안함이나 자괴감 같은 인간다움은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끊임없이 피를 갈구하는 목마름만 있을 뿐. 사랑했던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뱀파이어로 만들어버리는 과정은 공포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슬프기까지 했다.

  주말에 이 책을 읽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책이 완결되기 전에 읽은 것을 후회하게 됐다. 뒷북을 칠지언정 3부작이 끝나고 읽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왕 읽었으니 2010년에 출간 예정인 2부 <추락>과 2011년에 출간될 3부 <영원한 밤>을 애타게 기다려야할 것 같다. 뱀파이어가 끊임없이 피를 갈구하듯 독자를 이 책의 포로로 만든 작가의 재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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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9-07-01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더 공포스러웠다구요^^

이매지 2009-07-01 15:06   좋아요 0 | URL
낯선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공격하는 뱀파이어의 모습.
섬뜩하면서도 안타까웠어요.

카스피 2009-07-02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더 인간스럽지 않나요.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것이 본능일것 같은데요^^;;

이매지 2009-07-02 13:29   좋아요 0 | URL
글쎄요. 저 같으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뱀파이어로 만들며 파괴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카스피님 말씀처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것이 본능이겠지만요~

보석 2009-07-02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만 넣어두고 구입하지 않았는데 이매지님 글을 보니 고민...내용은 궁금하지만 3부작이라니! 어떻게 기다리라고!!

이매지 2009-07-02 17:37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어떻게 기다리라고!!
문제는 저 감독이 일이 많아서 과연 출간예정에 맞춰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라능;
 
편집된 죽음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8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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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쯤 새 작품이 나오나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온 '블랙 펜 클럽'. 오랜 침묵을 깨고 드디어 새 책이 출간됐다. 오랜 기다려왔던 터라 이왕이면 두툼한 책을 기대했는데 실망스럽게도 얇은 분량이라 아쉬웠다. 그래도 얇긴 했지만 <편집된 죽음>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표지에 혹해 얼른 읽기 시작했다.

  추남에 가까운 외모에 어디 있어도 존재감이 없는 영국에서 출판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에드워드 램, 그리고 호남형 외모에 어딜가나 눈에 띄는 니콜라 파브리. 어린 시절 알렉산드리아에서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난다. 알렉산드리아에 총영사의 아들로 온 니콜라와 에드워드는 얼핏 보기엔 공통점이 없어 친해질 리 없었지만 에드워드가 친구들과 함께 발행하는 문예지에 관심이 있던 니콜라가 접근해 둘의 질긴 악연은 시작된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엉망인 원고를 에드워드가 손봐 문예지에 실어줬기에 언제나 니콜라보다 자신이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에드워드. 하지만 첫사랑인 야스미나의 죽음 이후 에드워드는 뭔가 빠진 것처럼 그림자 같은 삶을 살아가고 창작에 대한 그의 재능도 꺼져버린다. 한편, 파일럿으로, 외교관으로 승승장구하던 니콜라는 소설가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빛과 어둠처럼 정반대의 삶을 사는 두 사람. 수십년 동안 자신을 무시해온 니콜라의 태도와 오만한 모습을 늘 참으며 때를 기다려온 에드워드. 마침내 니콜라가 공쿠르 상 수상으로 작가로서의 정점에 오르자 그동안 준비해온 복수를 시작한다.  

  추리소설을 생각하고 읽었는데, 읽고 나니 추리소설이라는 생각보다는 심리 스릴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한 사람의 심리가 치부까지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분량도 그리 많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에드워드의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질투와 복수심이 느껴져 오싹해졌다. 누군가를 파멸시키기 위해 완벽하게 조작된 사건. 그리고 파국으로 치닫는 한 사람의 삶. 치밀하게 짜여진 복수극의 대단원을 읽으며 복수를 소재로 한 책의 완결판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말에서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는 생각도 약간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이 책의 결말이야말로 에드워드의 복수의 마침표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에는 약간 늘어지는 것 같았지만 조금 지나니 내가 책장을 넘기는 건지, 책장이 저절로 넘어가는 건지 모를 정도로 에드워드의 이야기에 매료됐다. 

  읽고 나서 역자 후기를 보고 알았는데 이 책은 1994년에 출간된 <표절>의 개정판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표절>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역시나 절판된 걸 아쉬워하는 독자들의 아쉬움 내지 이 재미있는 책을 자기만 알고 있다는 안도가 담긴 리뷰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제목과 새로운 표지로 이렇게 다시 나온 덕분에 그동안 이 작품의 진가를 몰랐던 나같은 독자들도 함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니 다행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올 여름에 누가 추리소설 좀 추천해달라고 하면 주저없이 추천할 책이 한 권은 생긴 것 같아 기쁘다.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복수를 꿈꾸지만 정작 복수의 통쾌한(?) 순간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괜히 복수할 꺼라고 칼을 갈며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기보다는 이 책에서 에드워드를 통해 대신 복수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덧) 작가는 로맹 가리의 죽음에서 이 책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니, 이 책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의 책과 함께 읽는 것도 재미를 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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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고에 저택 살인사건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한희선 옮김 / 시공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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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각관, 시계관, 암흑관 등 소위 '관 시리즈'로 유명한 아야츠지 유키토의 작품으로 다른 리뷰를 보면서 꽤 평이 갈렸던지라 궁금했고 무엇보다 네이버 '일본 미스터리 문학 즐기기' 카페에서 2008년 탑 10에 꼽힌 작품이라 '얼른 읽어야지'라고 생각만 하다가 이제사 책을 펴게 됐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똑같이 갇힌 공간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다룬 신본격 추리소설인 <월광 게임-Y의 비극 '88>을 읽었던지라 재미가 반감됐지만, 비슷한 소재를 어떻게 풀어갔는지 비교하며 읽을 수 있어서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조용한 시골로 함께 휴가를 온 극단 '암색텐트'의 단원들. 모처럼 신선한 공기를 쐬며 평온한 휴가를 보낸 것도 잠시. 도쿄로 돌아가는 길에 버스가 고장나고 조금만 걸으면 민가가 나온다는 버스 기사의 말에 걷기 시작하지만 눈보라를 만나 조난당한 위기에 처한다. 그런 그들의 눈 앞에 갑자기 나타난 '키리고에 저택' 잠시 눈을 피할 요량으로 신세를 지지만 눈은 좀체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소 무뚝뚝하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이 있는 키리고에 저택이었지만, 무엇보다 맛있는 식사와 엄청난 소장품에 매료되고 만다. 눈을 피해 잠시 머물 요량으로 있었지만 눈은 그치지 않고 하염없이 쏟아진다. 그렇게 점점 외부와 단절되는 그들. 그리고 첫 번째 시체가 발견된다. 모두가 오르골에서 들었던 '비'라는 동요에 맞춰 만들어진 살해 현장. 뒤이어 '비'의 2절, 3절에 맞게 사람들이 하나씩 살해된다. 

  갇힌 공간에서 노래에 맞게 한 명씩 죽어간다는 설정은 얼핏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비슷해보인다. 책에서도 언급됐지만, 갇힌 공간에서의 살인은 타겟으로 삼은 피해자가 도망갈 수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한 명씩 줄어갈 때마다 용의자가 되는 사람이 줄어들고 범인 또한 도망갈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 요컨대 '양날의 검'이라 할 수 있는 설정인데 아야츠지 유키토는 이 이 검을 그만의 방식으로 잘 다루고 있었다. 독자의 허를 찌르는 범인의 존재라던지,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게 하는 식은 아니었지만,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두꺼운 책을 지루하지 않게 읽어갈 수 있게 해줬다. 

  손님이 찾아오면 집이 저절로 움직인다는 다소 미신같은 이야기. 도착한 날 집을 둘러보다가 소장품에서 저마다의 이름을 딴 물건을 하나씩 발견하는 단원들은 그 물건이 부서지면 다음 날 차가운 시체로 발견된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오싹한 우연은 사건이 이어질수록 그들을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 이야기는 다른 장소가 아닌 오직 '키리고에 저택'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로 점점 진행된다.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곳에 있는 소장품까지 모두 비밀을 안고 조용히 기도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키리고에 저택. 범인은 왜, 이곳에서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비뚤어진 탐미주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얼핏 김동인의 '광염소나타' 같은 작품이 떠올랐다. 평범한 사회질서를 깨가면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예술'보다는 '광기'에 가깝다. 범인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새삼 인간의 광기가 그 어떤 것보다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에 치를 떨게 되었다. 

  제법 두꺼운 책이라 꽤 오래걸리겠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는데 하룻밤만에 뚝딱 읽을 정도로 술술 넘어갔다. 다만 초반에는 일본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엄청나게 쏟아져서 별 배경지식이 없는 나로써는 다소 패닉 상태에 빠질 뻔 했다. (사실 별다른 지식이 없어도 이해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괜히 모르는 단어들이 쏟아지니 부담스러웠다랄까) 표지에 그려진 저택의 모습처럼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을 한 키리고에 저택. 그 곳에서 벌어지는 잔혹하면서도 기묘한 이야기들에 평소 '관 시리즈'를 좋아한 독자뿐 아니란 신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 모두 매료되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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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 게임 - Y의 비극 '88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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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3대 추리소설이라는 수식어를 꼭 붙지 않아도 보기 드물게 내가 몇 번이나 읽었던 엘러리 퀸의 <Y의 비극>. 때문에 <월광 게임 - Y의 비극 '88>이라는 제목의 이 책을 처음 봤을 때도 이거 뭐 엘러리 퀸에 대한 오마주인가라는 생각에 혹했다. 이 책 이후에 출간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외딴 섬 퍼즐>이나 <하얀 토끼가 도망간다> 등의 책도 꽤 괜찮은 평들이 있어서 관심이 갔는데 이왕이면 순서대로 읽자는 생각에 뒤늦게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데뷔작인 이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11살 때부터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13살 때 엘러리 퀸의 <네덜란드 구두의 비밀>에 감명을 받아 본격 미스터리의 매력에 사로잡혔다는 역자의 말처럼 저자가 엘러리 퀸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월광 게임>의 내용에서도 엘러리 퀸에 대한 이야기는 몇 번이나 언급되고, Y의 비극이라는 부제 역시 엘러리 퀸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국내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았지만 엘러리 퀸을 모방해 국명 시리즈도 발표했다고 하니 저자의 엘러리 퀸에 대한, 그리고 본격 미스터리에 대한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자의 이름과 동일한 주인공이 책에 등장하는 것도 엘러리 퀸과 비슷한 듯)

  여느 데뷔작이 그렇듯이 이 책은 다른 추리소설과 비교해봤을 때 강도가 상당히 약한 편이다. 우연히 함께 캠핑을 하게 된 사람들, 그리고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갖히게 된 상황. 그 속에서 한 명씩 한 명씩 죽어간다는 설정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류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대학생들이 주인공이라 그런지 이 책의 분위기는 그렇게 어둡지 않다. 자고 일어나면 한 명씩 한 명씩 죽어가는 상황이지만 그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는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 누구도 믿지 못하고 각자 두려움에 떠는 것이 아니고, 서로를 의심하긴 하지만 결국 힘을 합쳐 위기를 이겨내는 모습이 독특했다. 주위를 둘러싼 어두움 속에서도 약하지만 작은 불빛을 내고 있다랄까. 개인적으로는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는 좀 더 밀어붙여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쉽기도 했지만, 오히려 느슨한 전개때문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솔까말 이 정도 임팩트라면 란포 상 수상에 실패한 것도 이해가 간다)

  엘러리 퀸처럼 독자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있지만, 사실 이 대결은 상당히 불공평하다. 일본과 한국이라는 어쩔 수 없는 장벽때문인데, 공감할 수 없는 이런 트릭이 이 책의 재미를 반감시킨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도전장을 내밀고 있지만 이미 도전장을 받는 순간 평범한 한국 독자는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랄까. 뭐 책에 나와있는대로 다잉 메시지란게 자의적으로 자기가 가장 마음에 드는 흥미로운 해석을 남한테 강요하는 거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번 책에서는 이래저래 신본격 추리소설 작가라는 명성을 맛만 본 정도라 몇 권의 책을 더 읽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리소설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독자라도 약간 미스터리한 성격이 가미된 청춘소설을 읽는다는 생각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은 책이었다. 엘러리 퀸을, 그리고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슬쩍 슬쩍 언급되는 미스터리에 대한 이야기나 책들이 덕심을 살짝 충족시켜줄 책이 아닐까 싶었다. 이어질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도 일단 읽어보고 다시 판단해야겠다. 생각보다는 밋밋했던 아리스가와 아리스와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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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의 론도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1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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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작가에 별로 끌리지 않는 제목이라 어쩌면 놓칠 수도 있었던 책인데, 일본 미스터리 문학 즐기기 카페에서 2008년 탑 10에 꼽혔던 작품이라는 점때문에 반쯤은 낚여서 읽게 된 책이다. 서술트릭이 등장하는 책이라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읽었지만 정말 의외의 부분에서 함정을 파놓은 작가의 솜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돌고 도는 이야기가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아 버렸다. 

  추리 작가를 지망하는 야마모토 야스오는 월간추리 신인상을 목표로 꾸준히 습작을 한다. 하지만 '이거다!'싶은 작품을 쓰지 못한 채 지지부진 세월만 보내고 점점 궁지로 몰리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야마모토 야스오는 <환상의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이라면 신인상 수상은 가능하겠다 싶을 정도로 완성도 있는 작품을 쓴다. 하지만 친구인 기도는 야스오의 원고를 읽어보고 워드로 작업을 해주겠다며 가져갔다가 이를 분실하고 만다. 원고를 분실해 망연자실한 야스오. 그리고 얼마 뒤 신인상 수상작을 발표하는 페이지에서 자신의 작품과 똑같은 제목인 <환상의 여인>이라는 작품이 다른 작가의 이름으로 수상한 것을 보게 된다. 이에 세상에 수상자의 도작 사실을 알리려고 애쓰는 야스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고, 결국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복수를 하기로 결심하는데...

  <환상의 여인>이라는 한 편의 소설을 놓고 원작자와 도작자가 쫓고 쫓기는 싸움을 하는 이 작품의 구성은 원작자와 도작자 두 사람의 관점이 번갈아가면서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독자도 모르는 사이에 설치된 작가의 덫. 무심코 지나버린 부분이 밝혀질 때 독자는 절로 망연자실하게 된다. 애써 신경을 곤두세우고 읽었던 보람도 없이 보기좋게 속아넘어간 것이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속고 난 뒤에도 '대체 내가 왜 이걸 못 알아차렸을까'라는 자책이 들었다. (하기사 이런 트릭을 알아내는 독자는 정말 눈썰미가 대단한거겠지만.)

  실제로 작가가 '에도가와 란포상'에 응시했다가 낙선한 작품이라 끝까지 읽고나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모호해진다. 도착 시리즈는 곧 출간될 <도착의 사각>, <도착의 귀결>까지 총 3권인데, 나머지 두 권도 이정도 퀄리티만 갖춰준다면 오리하라 이치라는 작가를 꽤 믿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재미만을 추구한 작품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의 소유물을 서슴없이 빼앗을 수 있는 인간의 어두운 부분이 잘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읽고 다른 서술 트릭의 책은 뭐 없을까 찾는 이들에겐 <벚꽃-> 그 이상의 충격을 안겨다주지 않을까 싶었다. 곧 출간될 도착 시리즈로 다시 만날 오리하라 이치의 솜씨가 기다려진다. 부디 다음에는 그의 서술트릭을 간파할 수 있기를!


덧) 추리소설가가 등장해서 그런지 내용 중에 꽤 많은 추리소설이 언급된다. 윌리엄 아이리쉬의 <환상의 여인>을 비롯해서 스탠리 엘린의 <결단의 시간>, 시가모토 고이치의 <백색의 잔상>, 하라 료의 <내가 죽인 소녀>, 사사키 조의 <에트로프발 긴급전> 등 아직 읽지 못한 책(혹은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책)들이 많아서 대체 어느 정도의 솜씨를 가진 작품이기에 이 작품을 꺾었을까 싶어졌다. 언젠가 기회가 닿아서 꼭 읽어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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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09-03-24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를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도 이 책이 끌리는 걸 보면 리뷰가 좋아서인 듯 해요... ^^;;

이매지 2009-03-24 22:05   좋아요 0 | URL
제가 표현력이 떨어져서 어떻게 썰을 잘 못 풀겠더라구요 :)
직접 읽고 확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