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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달리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나의 아름다운 정원> <달의 제단> <이현의 연애>로 홀딱 반해버린 심윤경. 과작인 탓에 동화를 제외하고 가장 최근에 쓴 <서라벌 사람들>이 벌써 4년 전 이야기다. 작년 가을 느닷없이 동화 '은지와 호찬이 시리즈'를 냈을 때 인터뷰에서 '새 소설이 출간 임박'했다는 언급이 있어서 언제 나온나 목이 빠져라 기다렸는데, 해를 지나 마하 39의 속도로 <사랑이 달리다>가 찾아왔다. 책을 손에 쥐자마자 심한 독서 침체기 중이었음에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심지어는 걸어다니면서도(!) 홀리듯 읽었다. 일단 책장을 넘기는 순간, 주인공 김혜나와 함께 앞뒤 보지 않고 달릴 수밖에 없는 소설 <사랑이 달리다>이다.
생일이면 아빠가 옷을 차려입고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로 금이야 옥이야 자란 김혜나. 그녀는 맨날 제정신 못 차리고 대형사고만 치는 작은 오빠 김학원, 돈과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큰오빠와 어린 시절부터 아옹다옹 삐걱삐걱했지만 풍족한 환경 탓에 최소한 물질적으로는 아쉬움 없이 살아왔다. 그런 어쨌거나 소소한 사고들이 있었지만 겉으로는 무사평온하게 지낸 그녀가 부모의 이혼(그것도 믿었던 아빠가 젊은 여자와 눈이 맞아버려 새 살림을 차리면서 벌어진)을 경험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아빠에게 재산 분할 소송도 걸지 않고 엄마가 순순히 이혼 도장을 찍으며 아빠의 화수분 같은 재력을 잃게 된 삼남매. 작은 오빠야 전처럼 누군가의 등을 쳐먹으며 살고, 큰오빠야 자기 사업을 한다고 해도 내일모레면 마흔이지만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김혜나는 아빠의 신용카드 유효기간 만료가 가까워짐에 따라 점점 불안해진다. 게다가 동갑내기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까지 나자 김혜나는 비로소 난생처음으로 제 힘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다. 부잣집 철부지딸인 김혜나가 대형 산부인과 보육실 김혜나로 새 지위를 얻으며 벌어지는 일들이 김혜나의 통통 튀는 매력과 함께 그려진다.
'사랑'이 달리다, 라는 제목 때문에 이 책이 단순히 '사랑' 이야기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물론 이 책에 중심에는 사랑이 놓이지만 사랑'만' 다루지는 않는다. <사랑이 달리다>는 어떻게 보면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고, 어떻게 보면 모두가 성공을 외치는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항변이며, 어떻게 보면 귀엽지만 어떻게 보면 막장일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어떤 관점에서 이 책을 읽던지 간에 이 책은 캐릭터가 살아 있는 소설이다. 이런 캐릭터들을 실제로 만날 수 있을까 하며 비현실적인데 싶다가도 어느샌가 아니 뭐 또 이런 사람들이 없으란 법이 어디 있나 싶어지며 친숙하게 다가왔다. 자신을 지탱하던 기반이 무너졌을 때 어떻게든 그것을 다시 붙잡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우왕좌왕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마치 한 편의 희극 같았다. 이야기 초반에 혜나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운전하느냐였다"라고 작은 오빠 학원의 운전실력을 언급하는데, <사랑이 달리다>도 '어디로' 가느냐보다는 '어떻게' 가느냐에 초점이 맞춰졌다. 등장인물 각자의 종착지보다는 그들이 나아가는 방식 자체에 더 주목했고 그랬기에 그 종착지가 다소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수긍할 수 있었다.
다른 인물들이 변모해가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역시 주인공 김혜나가 교주라 해도 믿길 정도로 모든 이에게 칭송받는 산부인과 원장 정욱연과 관계를 쌓아가며 변해가는 모습이 가장 눈에 띄었다. 정욱연과 김혜나의 관계는 한 편의 로맨스 소설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한 편의 성장소설에 가깝게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해 보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본질은 미성숙한 두 남녀가 서로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고 그것을 함께 끌어안고 성장해가는 모습은 꽤 흥미로웠다. 특히 김혜나가 "이상하게 정욱연을 보면 자꾸만 울고 싶었다. 사실 정욱연을 향한 나의 사랑에서 육체적 욕망이 차지하는 비율은 대단히 미미했다. 이렇게 덮칠까, 저렇게 덮칠까 호시탐탐 궁리했지만 그건 욕망 때문이라기보다는 여자가 남자를 또는 남자가 여자를 차지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섹스였기 때문에 나도 그 방법을 한번 고려했을 뿐이고, 정작 그를 마주할 때마다 내가 간절하게 원했던 건 섹스가 아니라 울음이었다"(203쪽) 같이 고백할 때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김혜나가 정욱연을 사랑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이해가 됐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일 거라고, 나의 내면에는 이전까지 살아온 김혜나와는 다른 무언가 괜찮은 것들이 들어 있을 거라고. 우리는 닮은 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있을까. 정욱연의 모습을 누군가와 겹쳐 보다가 어느샌가 정욱연까지도 사랑하게 되버렸다.
<사랑이 달리다>를 구성하는 한 축이 '사랑'(혹은 성장)이라면 다른 한 축은 '돈'이다. 돈으로 표상되는 김혜나 가족의 욕망은 현대사회의 일면을 극대화해서 보여준다. "윤기를 잃어가는 우리의 끝물 젊음처럼, 애초부터 거창하지도 않았던 나의 모든 꿈들은 터벅터벅하게 메말라갔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을 뿐인 우리의 아이도 백팔십도 달라졌다. 그 아이는 자궁에서부터 손익계산서를 들고 튀어나와서 금융인과 법조인과 의사 이외의 직업은 꿈조차 꾸지 않을 것이다. 돈독이 올라서 반질반질해진 내 아이의 모습 앞에서 그대로 폭발했다"(268쪽)라는 말로 대표될 수 있겠지만, 김혜나 가족은 영어유치원이나 입학사정관제 등으로 드러나는 불타는 교육열, '의대 갈 걸'로 표상되는 전문직종에 대한 선망, 돈과 지위를 가진 사람 앞에서 너무나 쉽게 무너져내리는 자존심, 그리고 돈이든 성공이든 조금이라도 더 손에 쥐고 싶어서 아등바등하는 모습 등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이 욕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불안의 변형인 이 욕망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낯선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지 입 안에 씁쓸함이 감돈다. 대체 이렇게 악다구니를 써서 손에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허망함만 남는 것이다.
사랑이건 욕망이건 뭘로 읽던 간에 <사랑이 달리다>는 간만에 심윤경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를 즐겁게 해줬다. 그녀를 이런 작품으로 다시 만나 더없이 기쁘다. 분명 이전 작품과 궤를 달리하는 작품이지만 심윤경이 이런 글도 쓸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하고 놀랐고, 다음에는 또 어떤 작품으로 찾아올까 하는 기대에 부풀었다. "사랑은 비난이나 경멸보다 빨랐다. 심지어 시간보다도 빨랐다. 미래조차 까마득한 저 뒤에 내팽겨쳐버리고, 내 눈먼 사랑은 그저 두 팔을 벌리고 그를 향해 달릴 뿐이었다. 엄마의 말이 옳았다. 혼신을 다한 사랑이란 훈장과도 같은 면이 있었다. 죽을지 살지 모르고 덤벼드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이, 후련함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팔다리가 없어졌거나 눈이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그렇게 몸을 던진 적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그 작은 금속은 영원히 그의 명예다. 훗날 우리가 어떻게 살든, 죽든"(354쪽). 지금 이 순간 마하 40으로 달리고 있을 김혜나와 혜나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달리고 있을 심윤경을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