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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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박한 표지때문에 왠지 끌리지 않아 읽기를 꺼렸는데, 정작 책을 다 읽고 나니, 책의 표지처럼 '하얀' 눈이 생각이 났다. 사실 이 책보다 스콧 스미스의 <폐허>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왕이면 데뷔작부터 읽어보고 싶어서(그래봤자 달랑 2권의 책을 썼을 뿐이지만) <심플 플랜>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500페이지가 넘는 녹록치 않은 분량이었지만,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 구성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읽어갈 수 있었다.

  매년 연례행사처럼 형과 함께 부모님의 묘를 방문하는 행크. 형과 형의 친구인 루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던 중 우연히 추락한 비행기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갔다가 4백40만 달러를 발견하게 된다. 변변한 직장이 없는 실업자 상태의 형과 루는 그 어느 때보다 그 돈이 간절히 필요한 상황. 이에 행크는 일단 돈을 챙겨서 있다가 안전해질 때쯤 삼등분을 해서 새 삶을 시작하자는 계획을 세운다. 뭐 하나 잘못될 것이 없어보였던 간단한 계획은 시간이 지나면서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던 행크의 삶은 주체할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전부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은 눈여겨봤는데, 어쩌다보니 이 책으로 첫 만남을 가졌다. 이 책 자체가 굉장히 인상적이라 다른 라인업에 대한 호기심도 들었지만, '헐리우드식 스릴러'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이 책은 '스릴러'라는 생각이 그다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한번도 자신이 사람을 죽일 것이라고 상상조차 못 했던 평범한 중산층 가장이 하나의 사건으로, 하나의 계기로 어떻게 무너져가는지 보여주는 '심리극'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처음에 추락한 비행기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비행기 안에 들어가기를 꺼려 겁을 냈던 주인공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가고, 급기야는 마지막에는 '괴물'이라는 말까지 듣기에 이른다. 하지만 사백사십만 달러라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엄청난 액수의 돈은 평범한 인물을 차츰 좀먹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행운'이라고 생각했지만,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이 행운은 행운이 아닌 '재앙'에 가까웠다. 누군가 알아채지 않을까 끊임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혹시 공범이 불지 않을까 끊임없이 경계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미없이 숱한 피를 흘리고 만다. 하지만 사백사십만 달러라는 돈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과연 그렇게 굴러들어온 기회를 던져버릴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나 또한 행크처럼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짓을 저지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절로 오싹해졌다. 

  심플 플랜의 구성은 지극히 간단하다. 여기 돈이 있다, 아무도 모른다, 적당한 때를 봐서 삼등분으로 나눈 뒤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이런 간단한 계획은 내리막에서 눈덩이가 구르며 점점 커지듯 예측할 수 없이 커져만 간다. 잇달아 일어나는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바라보며 분명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음을, 한 번 시작된 일은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굴러간다는 것을 느꼈다. 또 하나. 인간이라는 존재 또한 좀체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심플 플랜> 이후로 후속작인 <폐허>가 나오기까지 무려 1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폐허>를 읽고나면 그의 작품을 언제쯤 다시 읽을 수 있을 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허>도 얼른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만큼 <심플 플랜>에서 작가의 역량에 충분히 매료됐기 때문이 아닐까? 일단 영화로 만들어진 <심플 플랜>을 보며 감상을 곱씹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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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박지현 옮김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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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어느 정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진 것인지 1위 작품 뿐만 아니라 순위권에 올랐던 작품이 속속 출간되고 있는 듯하다. 2006년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과 1위를 놓고 다투었다는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도 그런 경우다.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이시모치 아사미의 작품인데 전혀 기대 없어 읽어서 그런지 간만에 정말 이야기에 푹 빠져서 잠자는 것을 미뤄가며 읽어갔다. 

  대학교 경음악부에서 유독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알코올중독분과회'를 만들어 함께 부어라 마셔라 하며 우정을 쌓는다. 하지만 졸업 후 각자 다른 곳에서 저마다의 길을 가게 된다. 그리고 꽤 오랫만에 이들은 알코올중도분과회의 멤버인 안도의 주최로 안도의 형의 고급 펜션에 모여 동창회를 연다. 무엇 하나 고급스럽지 않은 물건이 없는 장소. 마치 중세의 성 같은 이 장소에서 후시미는 아끼는 후배 니이야마를 죽이기 위해 만발의 계획을 세운다. 완벽하게 밀실 살인을 했다고 생각하는 후시미. 친구들은 모두 니이야마가 그저 푹 잠들어 있다고 생각할 뿐 니이야마가 죽어 있을 것이라는 '비일상적'인 생각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흘러가고 불안해지는 친구들. 어떻게든 문이 열리는 시간을 늦추려는 후시미. 그리고 이 상황에 의문을 품고 자신만의 추리를 시작하는 유코. 그들의 숨막히는 두뇌 대결이 시작된다. 

  발달한 과학수사 탓에 점점 본격 미스터리가 설 자리가 줄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보니 이런 식으로도 만들어낼 수 있구나라는 놀라움이 들었다. 부유한 동네에 위치한 고급 펜션. 마음만 먹으면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있고, 문을 부수거나 창문을 깰 수도 있지만 이 책 속의 주인공들은 차마 이웃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못해, 어디서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문짝을 부수지 못해 밀실 상태를 유지시킨다. 도시 속에 있지만 외딴 섬에 있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을 만들어낸 것을 보며 저자의 착안에 감탄했다. 

  오랫만에 본격 미스터리를 만났다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오랫만에 읽는 '도서 추리소설'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범인의 정체가 누군인지 밝혀내는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범인이 누군지를 보여주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가는 범인의 심리 상태나 범인의 정체에 도전하는 인물을 통해 긴장감을 이끄는 도서 추리소설. 이 책 속에서는 겉으로 보기엔 차갑지만 가슴은 뜨거운 후시미와 겉으로 보기엔 후시미와 비슷하게 차가워 보이지만, 실은 속마음도 차가운 유카. 닫힌 문을 두고 이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대결을 시작한다. 니이야마의 죽음을 단순히 사고사로 만들기 위해 후시미가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트릭을 하나씩 하나씩 부수며 후시미를 긴장시키는 유카. 대학 시절 핑크빛 로맨스가 있을 뻔한 관계였던지라 뭔가 껄끄러움이 있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팽팽함이 넘쳤다.   

  책 속에서 유카는 결국 후시미의 모든 것(심지어 동기까지)을 파악해 자신이 후시미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지적인 면에서는 우수한 유카에게는 인간다움이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끌리지 않았다. 애초에 후시미가 니이야마를 살해한 동기도 뭐랄까 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물론, 그보다도 더 하찮은 이유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만) 그런 동기로 범행을 저지른 후시미보다 후시미의 범행을 속속들이 까발리는 유카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에 뭔가 미심쩍은 것이 있으면 남들은 신경 쓰지 않고 어떻게든 그 궁금증을 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미, 감성보다는 이성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하는 냉혹한 성격 등등 유카는 예쁘장한 얼굴을 한 추리 로봇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도 유카는 다른 추리소설에도 등장한다고 하는데, 일단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이시모치 아사미가 마음에 들어서 다른 작품도 읽게 될 것 같다.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수상작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수상작인 <용의자 x의 헌신>보다 더 재미있게 읽었다. 낯선 작가라 다음 작품은 한참 있어야 만날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찾아보니 저자의 다른 작품인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도 얼마 전 출간됐고, <달의 문>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이시모치 아사미의 진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다소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왜 이제야 만나게 됐을까라는 아쉬움이 들었을 정도로 반가웠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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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자살 노트를 쓰는 살인자,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2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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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코넬리. 스릴러 좀 읽는다는 이들의 리뷰에서 몇 번이나 만난 이름이었지만, 정작 내가 그의 책을 집어들게 된 것은 브론테님의 '코넬리를 읽는 여름밤'이라는 제목의 페이퍼를 보고나서였다. 코넬리에 대한 애정이 팍팍 느껴지는 그 페이퍼를 보고 나는 '이제 정말 코넬리를 읽을 때가 왔구나'라고 절로 생각하게 됐고, 그 덕에 무더운 여름에 어울리는 작가 코넬리와 만났다. (물론 미스터리/스릴러는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 읽어도 진리다.)

  지역 신문사에서 '죽음' 담당으로 일하고 있는 잭 매커보이. 어느 날, 자신의 쌍둥이 형이자 경찰인 숀이 차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얼마 전 있었던 참혹한 살인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의외였던 형의 자살. 잭은 형의 죽음에서 모티브를 얻어 경찰관 자살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고, 이내 다른 지역의 경찰관들의 자살 가운데 몇몇 이상한 사례를 발견한다. 자신의 형처럼 참혹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그 사건에 얽매였던 경찰관들이 비슷한 방법으로 자살을 했고, 유서로는 에드거 앨런포의 시구를 하나씩 남겼다는 것. 형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살해'당한 것임을 알게된 잭. 특종을 쫓아, 형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쫓아 조사를 시작하고 우여곡절 끝에 FBI의 수사에 참여하게 된다. 일명 '시인'이라고 이름 붙인 범인. 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긴장감 넘치는 조사가 시작된다.  

  긴장감 있게 진행되는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매력은 주인공인 잭 매커보이다. 빼어난 경찰도, FBI도, 그렇다고 탐정도 아닌 일개 신문기자인 그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시인'의 범행에 대해 가장 먼저 눈치를 챈다. 하지만 이런 관찰력이나 추론력만이 그의 매력은 아니다.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날카로운 관찰력과 직관을 가진 그였지만, FBI 요원인 레이철과 사랑에 빠지는 모습은 은근 귀엽게 느껴졌고, 툭툭 던지는 (약간은 신경질 적인) 특유의 유머도 매력적이었다. 가지고 다니며 읽기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로 두꺼운 책이었지만, 그럼에도 근 며칠 출퇴근 시간을 쪼개 이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이 책, 그리고 잭 매커보이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캐릭터의 매력 뿐 아니라 에드거 앨런 포의 시구를 남기는 범인의 정체도 매력있었다. 이런 류의 소설에서 독자는 반전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나 또한 반전을 기대하면서 읽어가다가 너무 빤하게 범인처럼 보이는 인물이 있어서 '진짜 이 사람이 진범이면 엄청 시시하겠다' 싶었는데, 정작 알고보니 진범은 예상하지 못했던 다른 인물이라 놀랐다. 한편으로는 아무 개연성이 없게 느껴졌던 인물이라 저자가 반전을 의도하고 일부러 만들어 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다. (내가 못 알아챘다고 투정하는 게 아니다.)

  매력적인 주인공, 그리고 독특한 범행을 저지르는 범인. 이 때문에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인지 <시인>의 7년 뒤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시인의 계곡>이 곧 한국에도 출간된다고 한다. 아쉽게도 잭 매커보이는 등장하지 않는 것 같지만 시인의 타깃으로 지목된 레이철과 해리 보슈 시리즈의 해리 보슈와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의 계곡>이 해리 보슈 시리즈의 열 번째라고 하는데, 앞으로 이 시리즈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어쨌거나, 코넬리를 읽는 여름날, 그 어느 때보다 스릴 넘치는 시원함을 맛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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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8-16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브론테님의 페이퍼를 보고 코넬리를 읽게 됐죠.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읽었었답니다. 마지막이 살짝 헐리우드 영화같아서 저도 별 다섯개까지는 못주겠어요. ㅎㅎ

이매지 2009-08-16 23:0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마지막이 좀 헐라우드 영화 같은 느낌이 들었죠. 그거만 아니었으면 정말 별 다섯인데. 아쉽아쉽.

... 2009-08-16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요, 지금 그 죽음담당 기자였던 잭 매커보이와 FBI요원 레이첼 월링이 12년 만에 다시 만나는 마이클 코넬리의 신작 The Scarecrow를 막 읽기 시작했어요, 이거 다 읽고 코넬리 페이퍼 2탄 들어갑니다, 음하하.

저도 그 마지막이 좀 작위적이어서, 이게 영화제작을 염두에 둔 것인지 아니면 다음 시리즈를 예고하는 것인지 아리까리 하긴 했었어요. 저는 지금까진 링컨차가 제일 재미있었는데,이매지님도 어서 링컨차를 읽어보세요.

이매지 2009-08-16 23:09   좋아요 0 | URL
오오오. 12년 만의 재회라니!! 페이퍼 2탄 기대하겠어요! ㅎㅎ

링컨차가 젤 재미있으셨다니 얼른 링컨차도 읽어봐야겠군요. 그것도 두께가 후덜덜;; 그나저나 결말은 결국 시인이 돌아오는 에피소드가 있는 걸 보면 다음 시리즈를 위한 카드로 빼놓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랬어요 :)

다락방 2009-08-17 08:29   좋아요 0 | URL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옷 12년만에 재회라구요? 기대되잖아욧!! >.<
 
천사의 나이프 밀리언셀러 클럽 98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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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이런저런 작품들을 읽어왔는데, 그 가운데 익숙한 소재를 꼽아보라면 이 책의 소재이기도 한 '소년법'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14세 미만의 아이들은 갱생의 여지가 있으므로 '처벌'을 하기 보다는 '교화'를 한다는 요지의 소년법.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삶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일면 소년법은 타당해보이지만, 자신의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 범인이 단지 14살 미만이라는 이유로 미미한 처벌을 받을 뿐이라는 것은 부당해보인다. 이 책은 그런 부당함에 대해, 그리고 청소년 범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작은 커피숍을 하며 평범한 생활을 했던 히야마. 그의 인생은 3년 전 아내가 살해당하며 뒤흔들린다. 14살 미만의 아이들이 강도짓을 하러 들어온 집에서 무참히 살해당한 아내. 하지만 아이들의 소년법의 적용을 받아 보호감찰 정도의 처분을 받은 채 사건은 마무리된다. 사건 후 TV에서 할 수만 있다면 내 손으로 범인을 죽이고 싶다고 말하는 히야마. 하지만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며, 아이가 점점 커가며 가까스로 (겉으로 보기엔)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가 누린 이런 평화도 잠시. 3년 전 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이었던 소년이 히야마의 가게 근처에서 살해당한다. 이에 히야마는 이 아이들이 그동안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한 마음에 아이들의 행방을 쫓기 시작하고, 공교롭게도 남은 아이들의 신변도 위험해지기 시작한다. 

  느닷없는 사고로 갓난쟁이 아이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 아내. 당연하게도 아내를 잃은 남편은 범인에 대해 증오를 품는다. 하지만 정작 그 아이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아내의 목숨보다 아이들의 앞으로의 삶이 중요시되는 법 앞에 남은 가족은 분개한다. 이 책은 그런 남은 자의 분노와 사법체계의 모순을 날카로운 시선과 따뜻한 가슴으로 보여준다. 데뷔작으로 에도가와 란포상을 거머쥔 무서운 신인답게 이 책은 데뷔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 있었다. 후반부의 애써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려고 끼워넣은 듯한 부분이 있어서 아쉽긴 했지만 정교한 복선, 세밀한 감정 표현, 그리고 주제 의식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완성도 있는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청소년 범죄에 대해서도 단호한 처벌을 내려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읽어가면서 처벌 이후의(혹은 그들이 말하는 '갱생' 이후의) 아이들의 태도에 화가 났다. 그들에게 있어서 '갱생'은 어떤 의미인 것인지, 단순히 보호 시설에서 머무는 것이 그들의 '갱생'을 돕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했다. 가해자의 인권과 피해자의 인권 사이에서 당연하게 보호되어야 할 피해자의 인권이 짓밟히고 가해자는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살아 있다는 이유로 인권을 보호받는 모습 또한 씁쓸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 좀더 피해자의 마음을 위한 것일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도 다시 한 번 하게 됐다. 

  제법 두꺼웠지만 빼어난 작품이라면 늘 그렇듯이 손에 착 감겨서 술술 넘어갔다. 하지만 페이지가 점점 넘어갈 수록, 점점 히야마가 아내를 죽인 아이들에 대해 알아갈 수록, 그리고 아내에 대해 알아갈 수록 가슴 한 켠이 묵직해졌다. 데뷔작이라 그런지 약간 힘이 들어간 부분이 아쉬웠지만 다음에는 좀더 힘을 뺐지만 기량만은 여전한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추리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라도 한 번쯤 이 책을 읽고 '법'에 대해 고민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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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8-13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쉽지 않은 주제네요. 딱히 누구편을 들기 어려운... 이런 어려운 주제를 어떻게 풀어놨을지 급 궁금해져요. ^^

이매지 2009-08-13 00:52   좋아요 0 | URL
이게 옳다 이게 그르다 판단하지 않고 한 발짝 물러선 게 마음에 들었어요.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딱히 누구 편을 들기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물론 저는 피해자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카스피 2009-08-13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소년 범죄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있네요.과연 판단력이 미숙한 청소년들의 범죄에 대해 그 아이들의 죄를 어떻게 물을것인가와 피해를 받은 피해자및 그 가족에 대한 보상을 어떤식으로 해줄거냐가 관건인데,청소년 범죄의 경우 우리도 일본처럼 그냥 소년원이나 보호 감찰로 끝나는 경우가 대다수인것 같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가해자의 인권보다는 피해자의 인권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중의 하나인데 이런 청소년 범죄는 처벌 연령대를 낮추고 피해자에 대한 민사적 보상을 철저히 시행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단지 청소년이라고 나이가 어리다고 관용을 베플기 보다는 일벌 백계의 처벌이 필요하다고 여기지네요.

이매지 2009-08-13 09:45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의 경우도 청소년의 경우에는 처벌이 가벼운 편이죠. 게다가 흉악범죄를 저지른 범인도 얼굴을 꽁꽁 가리고 이름도 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구요. 일본의 경우에는 성인에 대해서는 정보를 공개하는 데 말이죠.

저도 카스피님처럼 청소년 범죄의 처벌 연령대가 더 낮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린 애가 잘못할 수도 있지 하고 용서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릴 때부터 법과 사회질서가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처벌이 가벼운 것도 범죄율이 늘어나는 데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사형도 좀 집행을 하고 그래야 함 -ㅅ-
 
행방불명자 오리하라 이치의 ○○자 시리즈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기희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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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까지 크게 유명하지 않은(혹은 많은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가의 작품은 선뜻 읽기가 겁이 난다. 이 작품의 저자인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의 론도>를 읽을 때도 망설이다가 일본 미스터리 문학 즐기기 카페의 2008 top 10 목록에 있는 걸 보고 호기심이 동해서 읽고는 반해버렸다. 당연히 새로 번역되어 나온 <행방불명자>도 보관함으로 고고씽. 처음에는 어버버하다가 마지막에는 앞으로 다시 돌아가 확인하게 만드는 저자 특유의 서술트릭에 또 한 번 빠져들었다. 
 
  사람이 띄엄띄엄 살고 있는 늪지 마을. 이곳에서 한 가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마치 이제 갓 식사를 하려고 했던 것처럼 정갈하게 준비가 되어 있고, 예기치 못한 범죄가 일어났던 것 같은 혼란스러움도 없이 그들은 갑자기 사라진다. 르포라이터인 이가라시 미도리는 이 사건에 흥미를 느껴 사라진 일가의 행방을 쫓기 시작한다. 한편, 지하철에서 치한으로 오해받은 무명작가 '나'는 어떻게든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자신을 치한으로 몬 남자를 미행한다. 그리고 우연찮게 그 사람이 밤늦게 귀가하는 여성들을 습격한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이를 자신의 작품의 소재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미행을 계속한다. 전혀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사건. 그 실상은 무엇일까?

  이런 식의 구조(전혀 다른 사건이 교차되는 방식)의 추리소설들이 그러하듯이 이 책 또한 별개의 사건으로 보였던 사건들이 결국 하나의 큰 틀을 형성하고, 두 사건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만날 때 사건의 진상은 밝혀진다. 하지만 정작 진상이 밝혀진 뒤에도 한동안 멍 때리면서 앞 페이지를 주섬주섬 다시 읽고, 복잡해진 머릿속의 퍼즐을 하나씩 하나씩 정렬해야 했다. 중반 이후까지 몰아온 기세에 비해 후반 마무리를 마치 휘몰아치듯 전개시켜서 더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물론 그 휘몰아치는 듯한 엔딩이 이 책의 클라이맥스였지만)

  서술트릭만 본다면 어버버할 수 있지만 그 외의 요소들은 <도착의 론도>만큼의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기껏 밝혀진 진실은 너무 진부했고, 트릭 또한 그리 큰 충격을 남기지 못했다. 이 책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고 있는 구로누마(검은 늪)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늪 속에 잠겨 있는 오물들이 부패되어 서서히 떠오른다는 느낌. 그런 찝찝함이 느껴졌던 작품이었다. 다소 실망스럽긴 했지만, 오리하라 이치는 이 책 외에도 **자 시리즈를 썼다고 하니 기회가 닿으면(혹 관심이 더 식기 전에) 한 번 더 그의 작품을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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