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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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간 후 50년이 지나서야 기적처럼 부활해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이 소설의 홍보 문구를 보고 처음에는 '다소 과장 섞인 찬사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체 어떤 소설이길래' 싶었기에 '어디 한 번 보자' 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나도 모르게 빨려들어가듯이 이야기에 몰입했다. 담담하게, 그리고 때로는 휘몰아치듯이 이어지는 이야기에 몇 번씩 답답함에 가슴을 치면서도 자꾸만 '내가 스토너였다면' 하고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사실 <스토너>는 독창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한 남자의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라는 소설의 시작처럼 스토너는 전쟁이라는 혼란 속에서도 일상을 견디어가는 삶을 택해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는' 남자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50년이 지난 뒤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이러한 개략적인 줄거리 때문이 아니다. 스토너라는 한 남자의 모습에서 고독한 인간의 뒷모습이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농사일을 도우며 묵묵히 살아온 스토너는 아버지의 제안으로 농과대학에 진학하나 2학년 때 영문학 개론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급기야 "넌 교육자가 될 사람"이라는 타과 교수의 말을 듣고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길에 들어선다. 그는 결국 아버지의 뒤를 잇는 농부가 아닌 공부를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자의 길로 들어서 한눈팔지 않고 그 길을 걷는다. 공부를 하고, 한 여자의 남편이 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스토너의 삶은 그렇게 특별한 굴곡 없이 '평범하게' 흘러간다. 히스테릭한 아내의 모습에도, 동료 교수와의 트러블에도, 아이와의 관계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어긋나도 스토너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때로는 그 감정을 속으로 삭이며, 때로는 애써 무시하며 살아간다. 타인을 대하는 자신의 서투름을 받아들이고, 때로는 학생들을 향한 애정이나 연구에 대한 열정에 스스로 놀라기도 하지만 그의 인생은 흔들림 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앞날에는 즐겁게 여길 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아도 굳이 기억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던 그의 삶에도 사랑이라는 반짝이는 순간은 찾아온다. 반짝이는 빛이 사라지는 순간, 그의 등은 더욱 굽어들고, 굽어진 몸만큼 그는 내면으로 침잠한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의 삶을 슬프고 불행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어느 정도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라는 작가의 인터뷰처럼 스토너는 종신교수라는 직책도 얻었고, 고독하긴 하지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도 있으며, 삶을 뒤흔든 사랑에도 빠져봤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그의 이야기에 눈물짓는 것은 그가 '슬프고 불행한'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니다. 스토너가 그랬듯 우리의 삶도, 아니 나의 삶도 그렇게 고독하게 흘러가고 있어서였다.

  스토너가 인생의 마지막에 그랬듯 나 또한 책을 놓으며 "넌 무엇을 기대했나?"라고 자문했다. <스토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한다고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책은 아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한바탕 울음을 터트리게, 그리고 조금은 어깨에 힘을 뺄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다. 결국 고독하고 상처받은 우리를 치유해주는 건 사람임을, 문학임을 <스토너>를 통해 다시 한 번 느꼈다. 스토너라는 이름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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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5-01-07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토너처럼 사는거 쉽지 않은 일 아닐까요? 그라는 개인으로 보면 행복했을 것 같은데요. ^^
문학에서 다루기 힘든 저런 삶을 어떤 식으로 그렸을까 궁금해져서 보관함에 가져갑니다. ^^
앗 이매지님 잘 지내셨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이매지 2015-01-07 08:58   좋아요 0 | URL
싫은 소리 들어도 참아내고, 그냥 묵묵히 살아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ㅎㅎ
작가의 말처럼 그는 훌륭한 삶을 살아냈을지도, 행복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담담하게 삶을 그려간다는 점에서 저는 <올리브 키터리지>도 많이 생각나더라구요.
오랜만에 빼꼼히 등장해도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바람돌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무해한모리군 2015-01-07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의지를 가지고 살아낸 모두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매지 2015-01-07 08:58   좋아요 0 | URL
요새 들어 그런 생각이 많이 들더라구요.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요. ㅎㅎ
휘모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딸은 딸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2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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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거서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작품을 묶은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의 두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봄에 나는 없었다>가 자기 자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아니 애써 보려 하지 않는 실체와의 대결이라면 <딸은 딸이다>는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의 미묘한 갈등을 그려낸다. 현실에서도 모녀관계는 미묘하다. '엄마처럼 살기 싫다'는 식의 레퍼토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꾸준히 나오지만, 정작 그러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엄마처럼 사는 딸도 부지기수다. 앙숙처럼 만날 때마다 싸우는 모녀가 있는가 하면, 친구처럼 지내는 모녀도 있다. 부자, 부녀, 모자 관계와 달리 같은 여자이기에 생기는 공감(또는 연대)이 둘 사이에는 존재한다. "아들은 아내를 얻을 때까지만 아들이지만, 딸은 영원히 딸이다"라는 본문 속의 말처럼 말이다.

  남편을 사별하고 딸 세라와 함께 조용히 살아가는 프렌티스. 당찬 딸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딸이 성장함에 따라 혼자 남겨질 자신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는 평범한 사십대다. 그렇게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던 중, 세라가 3주간 여행을 떠나고 프렌티스는 그 사이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리처드와 사랑에 빠져 재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의외로 세라는 리처드와 앙숙처럼 다투고, 프렌티스는 애인과 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하나뿐인 딸을 선택한다. 자신의 사랑을 희생시킨 프렌티스는 그 일을 계기로 전과 달리 향락적인 삶을 살게 되고, 딸 세라에 대해서도 방임에 가까운 태도로 변한다.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린 모녀 관계. 이들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 것일까.

 

  <딸은 딸이다>는 서로를 위한다고 한 행동이 어떻게 모녀 관계를 뒤흔드는가를 보여준다. 엄마의 행복을 위한다면 저 사람은 안 된다고 재혼을 반대하는 딸, 딸과 애인 사이에서 결국 자신을 희생해 재혼을 포기하는 엄마. 어디선가 본 듯한 패턴의 이야기지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이 이런 과오를 저지른 것은 자신을 "진짜 자신보다 더 좋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혈연관계라 할지라도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혹은 정도의 차는 있겠지만 우리는 결국 자신에게 유리한 판단을 내린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고, 다른 누군가를 위해 적절한 조언을 해줬다고 '믿으며'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이기적이다. 여러 선택지 중에 자신이 고른 선택지를 '희생'이라고 포장하며 자위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행동이 어떤 영향을 불러일으켰는지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이들 모녀 또한 그렇다. 엄마의 재혼을 계기로 서로의 마음에 앙금이 생기지만, 이를 화려한 사교생활을 누리는 것으로 가린 채 서로를 존중한다는 미명 하에 방임에 가까운 태도를 취할 뿐이다.   

 

  어떻게 보면 <딸은 딸이다> 또한 <봄에 나는 없었다>처럼 한 개인의 내적 자각과 맥이 닿는다. 화려한 장막이 거둬진 뒤 드러나는 서로를 향한 진심은 <봄에 나는 없었다>의 그녀가 대면한 자신의 민낯처럼 자신의 가슴을 찌른다. <봄에 나는 없었다>가 주인공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어갔다면, <딸은 딸이다>에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게끔 이끌어주는 조언자가 있다. 프렌티스와 세라 모녀를 잘 아는 하녀 이디스, 그리고 세라의 대모이자 유명 심리상담사인 로라가 그런 역할을 한다. 물론 이들이 하는 말을 모녀가 받아들이느냐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조금은 냉소적인 태도를 가진 이들의 대화를 읽으며 모녀 간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애거사 크리스티의 날카로운 시선은 여전했지만, 심리학 이론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등 기존 작품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요소가 배치된 점이 흥미로웠다. 미스 마플이 냉소적으로 변하면 저렇게 될까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로라라는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다. 모녀 간의 감정이라는 미묘한 심리를 풀어가는 전개에 큰 사건은 없었지만, 읽는 내내 긴장하게 됐고, 마지막 장을 읽으며 괜시리 엄마로서의 삶, 딸로서의 삶, 여자로서의 삶 등 다양한 위치로 존재하는 '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휘몰아치는 이야기는 결국 깊은 파장만을 남긴 채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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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5-16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라가 3주간 여행을 떠나고 세라는 그 사이 사랑에 빠져 재혼을 결심한다.→ 재혼을 결심하는 건 세라가 아니라 프렌티스 인것 같은데 오타가 난 것 같군요! ㅎㅎ

이매지 2014-05-16 15:38   좋아요 0 | URL
엇, 정말 그러네요 ㅎㅎㅎ 얼른 수정해야징. 캄사!

다락방 2014-05-16 16:00   좋아요 0 | URL
여튼 제 땡투 받으시고 저에게 맥주 쏘시라능!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이매지 2014-05-19 16:44   좋아요 0 | URL
멸치똥을 빼는 영광과 함께. ㅋㅋㅋ
 
고독한 밤의 코코아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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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봄, '봄이구나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을 솔솔 들게 한 <서른 넘어 함박눈>을 읽은 뒤 새삼 다나베 세이코의 매력에 빠졌다. 이 할머니는 어쩜 이렇게 오글거리지 않는 연애소설을 쓰시지, 싶으며 몇 작품 더 찾아 읽으려 했는데 그새 마음이 난폭하여 '연애는 무슨, 다 미워' 모드가 되어 추리소설만 주구장창 읽어버렸다. 그렇게 여름과 가을이 가고 매일매일 점점 추워지는 어느 날 <고독한 밤의 코코아>로 다나베 세이코가 다시 찾아왔다. 별 생각 없이 가볍게 책장을 넘기다가 어느샌가 빠져들어 마지막 장까지 다 넘어갔는데, 읽고 나니 여자의 마음을 잘 표현한 이 할머니가 더 얄미워졌다. 무려 30년 전(!)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작품.

 

  <고독한 밤의 코코아>에는 총 열두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20~30대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친숙했다. 애인에 대해서 "인생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척하면 착 통하지만 좀더 소중한 것,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하고, 연애에 빠진 동료를 "꽤 훌륭한 취향을 가진 여자였는데 지금은 좀 눈이 뒤집혀버린 느낌"이라며 약간 조롱했지만 정작 자신도 연애를 시작한 뒤 변해버려 "연애라는 건 시작되기 전이 가장 멋진 건지도 모른다"고 씁쓸해하기도 한다. 그가 건넨 따뜻한 말이 만우절 거짓말이 아닌 진심일지 모른다고 설레하기도 하고, 헤어지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자신이 정말 행복했음을, 그 행복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임을 깨닫기도 한다.

 

  사랑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나이가 들면서 이상과 현실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 점도 좋았다. 예를 들어, "헛된 노력일 수도" 있다고 "어쩌면 영원히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끝날 수 있다"고, "결혼도 연애도 못 해보고 싸구려 원고지만 더럽히면서 청춘을 다 날려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월급을 한 푼 두 푼 모아 작가라는 꿈을 향해 가는 모습을 마냥 긍정적으로 그리지 않은 게 좋았다. "나이가 되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이미지를 설계해서 그 이미지에 가까워지도록 자신을 교정하고 수련해야 한다"는 '나이 화장'에 대한 이야기도 한 살 한 살 먹으며 나도 조금씩 생각해오던 문제라서 그런지 남 얘기 같지 않았다.

 

  <고독한 밤의 코코아> 속 여자들을 만나며, 나이는 달라도, 처한 상황은 달라도, 심지어는 시대가 달라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여자의 마음은 변치 않는구나 싶었다. 열두 편의 단편들은 저마다 각각의 색깔을 갖고 있지만, 여느 연애소설처럼 마냥 핑크빛만은 아니라 오글오글한 연애소설은 닭살 돋아 못 읽는 나도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한 맛이 있는, 다나베 세이코의 삶에 대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 대한 연륜이 묻어나는 이야기들. <고독한 밤의 코코아>라는 제목처럼 깊어가는 겨울밤 따뜻한 코코아 한 잔과 함께 읽으면 몸도 마음도 조금은 녹아들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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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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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만들다 보면 정말 좋은 책인데 시기가 맞지 않아, 그 진가가 알려지지 않아 묻혀버리는 책이 있다. 하루에도 몇 십 권의 책이 출간되고, 그보다 더 많은 책들이 사람들의 관심이 닿지 않는 영역으로 옮겨간다. 몇 개월, 몇 년에 걸쳐 만든 책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은 한순간이라 한편으로는 쓸쓸해지고 한편으로는 어떻게 팔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지 하고 씁쓸해진다. 일본 서점에서 선정하는 '서점 대상'도 이런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 아닐까. 독자들에게 선택받지 못한 비운의 걸작(걸작이라니 조금 표현이 과하다 싶지만), 독자들은 잘 모르지만(혹은 아직 진가를 몰라주지만) 내가 정말 아끼는 작품 등의 이유로 선정했을 '서점 대상' 수상작들은 정도의 차는 있지만 대개는 그 선택이 만족스러워 자주 찾아 읽는 편이었다. 이번엔 사전을 만드는 이야기라니 더 기대가 됐다.

 

  300페이지 남짓의 그리 두껍지 않은 <배를 엮다>에는 <대도해>라는 한 권의 사전 편찬을 둘러싼 10년의 세월이 담겨 있다. 만드는 데 시간과 공이 많이 듦에도 큰 매출을 기대할 수 없지만 일단 만들면 누군가 유용하게 사용하는 사전. 사전을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편집자 아라키가 정년을 앞두고 자신의 뒤를 이어 사전을 만들 사람을 찾다가 영업부 사원인 마지메를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어수룩하고 사회성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이름처럼 성실한 마지메는 눈앞의 일을 하나씩 하나씩 묵묵히 해나가며 '언어라는 거대한 바다'를 건넌다. 하지만 이 항해는 마지메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일생을 사전과 함께해온 편집자 아라키와 감수자 마쓰모토, 겉보기에는 가벼워 사전과 잘 맞지 않는 듯한 니시오카, 패션지를 만들다 사전을 만들게 된 기시베, 마지메의 든든한 닻이 되어주는 가구야와 디자이너와 제지사까지 다양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긴 시간 함께 호흡을 맞춰 배를 저어나간다.


  사전 편집과 단행본 편집은 비슷한 면도 다른 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언어'가 중요하고, 묵묵히 나아갈 수밖에 없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배를 엮다> 속 인물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아무리 잡고, 또 잡아도 마치 실체가 없는 것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가는 말을 묵묵히 다듬을 수밖에 없는 과정. 편집이 뭔지 뭣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편집이 단순히 오탈자와 띄어쓰기를 점검하는 과정이 아니라 원문의 의미(혹은 원저작자의 의미)를 최대한 적확하게 전달할 수 있게 돕는 과정이라는 것을, "글씨 크기며 서체며 행간의 여백은 이것으로 좋은가. 도판 위치는 적당한가. 숫자와 기호는 알기 쉬운가. 읽기 쉽고 보기 쉬운" 책으로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책이 하나의 유기체 같다 싶었는데, <배를 엮다>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혼자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배를 저어간다는 점에서 책을 만드는 일, 아니 우리 인생은 긴 항해와도 같은 것일지 모른다. 나야 책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이라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에 더 몰입했지만, 사실 <배를 엮다>는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이도 하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끝이라고 생각한 곳이 다시 시작점이 되어버리는 인생이지만 <배를 엮다>를 읽으며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을 봤을 때처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 그리고 위안을 다시 한 번 얻었다. 사전을 만드는 이야기에만 집중했다면 지루했을지도 모르지만 외골수 같은 마지메가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 사회생활에 대한 고민을 하는 기시베의 고민 등이 잘 어우러져 '말'의 소중함을 아는, '삶'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뜻하게 읽을 수 있을 책이 된 것 같다. 잘 담근 차 한 잔을 마신 기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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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3-06-07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노사이드를 제치고 서점대상을 수상했군요. 제노사이드도 재미있었는데 말이죠. ^^
저도 서점대상 수상 책들은 대부분이 좋더라구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상 있으면 좋을텐데 말이죠.
근데 서점이 모두 없어지고 있으니 힘들려나요?
이매지님 오랫만에 인사드리는데 잘 지내셨죠? ^^

이매지 2013-06-07 11:33   좋아요 0 | URL
전 아직 제노사이드를 못 읽었는데 평이 좋아서 조만간 읽어보려구요. ㅎㅎㅎ
저도 우리나라에도 이런 상이 있으면 좋겠다 싶긴 한데,
우리나라와 일본의 서점 문화가 좀 달라서 애매한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한국은 아무래도 남은 서점이 대부분 대형서점이라 서점 직원 개인의 취향이 상대적으로 덜 반영되는 듯해요.
인터넷 서점 MD들을 대상으로 하자니 수가 많지 않아서 뭔가 공인(?)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구요. ㅎㅎ
아무튼 바람돌이님 오랜만에 인사드리니 반갑네요!
자주 와야지 하면서 바쁘고 게을러서 그만. 흑흑.
 
서른 넘어 함박눈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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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영화도 책도 재미있게 봤는데 어째서인지 다나베 세이코의 다른 소설과는 인연이 없었다. 국내에 번역서가 여러 권 소개되었던 터라 관심만 있다면 빠질 수도 있었겠지만, 건어물녀마냥 건조한 나는 연애소설이라니 어쩐지 간질간질하고 소녀같군 하며 다나베 세이코의 작품과는 자연 멀어졌다. 그러다 서른이 되고 봄바람 불자 <서른 넘어 함박눈>의 분홍분홍한 표지에 마음도 부농부농해져서 오랜만에 다나베 세이코를 만났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에서는 사랑이 시작될 때의 설렘, 사랑이 진행될 때의 열정, 그리고 식어버린 사랑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사랑을 폭넓게 보여준다면 <서른 넘어 함박눈>의 여자들의 모습은 그보다 조금 구깃구깃하다. 여행지에서 멋진 남자에게 "저어…… 실례지만 지금 몇 시예요?" 하고 물으며 다니기도 하고, 룸메이트의 남자가 두고 간 듯한 특대 흰 팬티를 보고 공상을 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그물을 쳐놓고 남자가 걸리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서른이 넘어 한 살씩 나이가 먹어가면서 운명적인 사랑이란 없음을(혹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고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지만, 그래도 내심 우연한 계기로 만난 사람과 사랑에 빠지거나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팟, 하는 계기로 결혼에 골인하기를 꿈꾼다. 

 

  사실 이 책에서 만나는 여자들은 그리 낯설지 않다. 카페 옆자리나 술집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연히 만난 부부의 대화나 옆방에서 들려오는 농밀한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는 이 책 속의 여자들처럼 어느샌가 나도 그녀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30대 여자의 사랑과 인생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와 일본드라마 <결혼하지 않는다結婚しない>를 볼 때처럼 무한공감하며 읽었다. '좋은 사람'이 생기면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지만 등떠밀려서 하고 싶지는 않은, 이왕이면 조건에 맞춰 결혼하기보다는 내 힘으로 사랑을 이뤄가고 싶은, "주위엔 별 볼일 없는 녀석들"뿐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결혼을 할 수 없는 처지라면 못 해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결혼을 하는 쪽이 안정되고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자. <서른 넘어 함박눈>에서 만난 여자들의 모습 속에 나를 슬쩍슬쩍 만나는 것 같아 즐거웠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아, 봄이구나.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슬몃 고개를 들었다. 아아, 봄도, 서른도, 사랑하기 좋은 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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