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
하라다 히카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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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이 시국이라 일주일에 절반 정도는 도시락을 싸와서 혼밥을 하기 시작했다. 약 15분 정도 여유롭게 도시락을 먹으면서 잠시 마스크를 벗고 여유를 부렸지만 뭔가 좀 심심해서 짧게 볼 만한 드라마가 없을까 찾다가 일본드라마 <오늘 밤은 코노지에서>를 보게 됐다. 20분 남짓 길이라 부담없이 볼 수 있는 이 드라마는 <고독한 미식가> <와카코와 술>처럼 퇴근 후 술 한잔을 즐기는 직장인의 모습을 잘 담고 있었다. 우연한 계기로 코노지(우리로 치면 디귿자 모양 테이블이 있는 술집)에 입문한 주인공이 이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삶에 대해서 배우고, 직장인으로서도 한 뼘 성장해간다는 이야기인데 퇴근 후 한 잔의 술에 피로를 씻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면서 볼 만한 드라마가 아닐까 싶었다. <오늘밤은 코노지에서>를 본 뒤 '얼른 날이 좋아져서 밖에서 술 마시고 들어가고 싶다!'를 외치다가 만나게 된 책이 바로 하라다 히카의 <낮술>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 쇼코 또한 퇴근 후 한 잔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 게 루틴인 평범한 직장인이다. 다만 그 일이라는 것이 9-6 근무가 아니라 밤 근무라 퇴근 후 한잔이 낮술이 되어버린다. 주인이 자리를 비워서 홀로 남겨진 반려견, 아픈 아이, 노모, 혼자 보내는 밤이 적적한 중년 여성 등 다양한 이들의 곁을 지키고 퇴근하고 집에 가면서 마시는 한 잔의 (낮)술. 고정적인 일이 아니고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일이다보니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대부분 하룻밤 짧은 인연에 그치는 사람들의 삶에 잠시 들어가 시간을 함께하며 쇼코는 점점 자신과도 마주해 힘을 얻게 된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라 어떤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하라다 히카의 소설을 읽으며 오래전 하루키의 에세이 제목처럼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통장에 돈이 쌓여야, 값비싼 물건을 사야 행복한 게 아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고단한 하루 끝에 접하는 맛있는 음식, 그리고 거기에 잘 어울리는 술 한 잔(그리고 지금은 좀 힘들지만 좋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면 어느새 하루의 피로가 싹 씻기고 움츠러들었던 가슴도 조금 펴지지 않은가. 책 속에서 쇼코는 혼자서 고기덮밥, 회정식, 우설, 바쿠테, 장어덮밥, 오므라이스, 전갱이튀김 등을 곁들여 한잔 술을 마시며 오늘 하루도 잘 보냈다고, 고생했다고 한 끼 식사로 작은 위로를 찾는 것만 같았다.


맛있는 음식이란 건 정말 근사하다.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포근하게 해주니까. 우리는 부족한 인간이고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분명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그럭저럭 잘해냈다. 그러면 된 것 아닐까. 이후에도 문제는 얼마든지 생기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_247쪽


직장에서 인간관계를 쌓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쇼코의 경우에는 대부분 한 번의 인연으로 그친다. 그래서 가끔 '그 사람은 어떻게 지내려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니, 나 같은 사람을 부르지 않는 게 행복한 일일지도 모르지. 나를 부르지 않는 건 고객이 행복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자. 상대가 잊었더라도 내가 기억하면 되니까.' 쇼코는 지금껏 심야에 자신을 불러준 고독한 사람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45쪽)한다. 하지만 '지킴이'를 부르는 '고독한 사람들'처럼 쇼코 역시 (따뜻한 음식만큼) 사람의 온기를 필요로 한다. 이혼 후 남편과 함께 살던 시부모의 집에 딸을 맡기고 나와 혼자 사는 상황. 아이를 키우기에는 자신보다는 남편 쪽의 환경이 더 좋다고 판단해 혼자 살고 있지만 언젠가 경제적 기반을 다져서 아이와 다시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문 기술도 없고 경단녀 쇼코가 할 만한 일은 그리 많지 않아 일단은 친구를 도와 '지킴이' 일을 하며 길을 찾는 중이다. 어찌 보면 쇼코가 지킴이로 일을 하고 다양한 삶을 접하고 혼밥과 낮술을 즐기는 이 시간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가 마침내 일어나 자신의 길을 찾으려는 힘을 내는 쇼코의 모습 때문에 책을 읽고 나면 역자의 말처럼 쇼코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루도 쇼코도, 우리 모두도 잘 살아냈다.


'나는 살아 있고 건강하다. 기운 내자. 주저앉아 있을 수 없지.' 자, 오늘도 꿋꿋이 살아가자. _208쪽


뱀발.


<낮술>에서 쇼코가 하루를 마무리하는 가게는 모두 진짜 있는 식당이라고 한다. 일본의 한 독자가 이 장소들을 직접 방문해서 쇼코가 먹었던 메뉴들을 먹었다는데 언젠가 상황이 좋아지면 겸사겸사 나도 쇼코의 흔적을 좇아 소중한 한끼를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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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선택한 가족 - 가족의 재구성과 새로운 독립성의 시대
에이미 블랙스톤 지음, 신소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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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어느덧 4년. 법적으로는 7년까지는 신혼으로 인정해주니까 뭐 아직 신혼이라면 신혼이지만 지난 4년 동안 정말 많이 들은 질문 중에 하나가 2세에 대한 것이었다. 살이 좀 찌니까 "뭐 좋은 소식이 없어?"라는 질문이 날아왔고 "손주는 언제쯤 볼 수 있겠니?"라는 부모님의 압박도 있었고, 심지어는 같이 수영하는 어른들이 "그래도 애는 낳아야지~"라는 소리도 했다. "그럴 거면 왜 결혼했어?"라는 질문도 들어봤고 '이기적이다' '철없다'라는 핀잔도 들었다. 심지어는 '안' 낳는 게 아니라 '못' 낳는 게 아니냐는 우회적인 반응도 접한 적이 있다. 요즘은 아이 없이 사는 가족이 늘어 열 가구 중에 여섯 가구 정도는 1~2인 가족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하나는 낳아야지'라는 질문은 꾸준히 받는 것 같다.


아이 낳지 않고 사는 부부를 흔히 '딩크족'이라고 부르는데 맞벌이를 하지 않아도, 부부가 아니어도 '아이 없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고 해서 궁금해서 살펴봤는데 사회학자가 자신의 경험뿐 아니라 70여 명을 인터뷰하고, 700명 이상을 설문조사해서 10년 동안 야무지게 연구한 결과물이 담겨 있었다.


저자는 전통적인 가족상이 아니라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제시하면서 법적으로, 혈연으로 묶여 있지 않아도 서로 의지해간다면, 서로의 삶에 힘이 되어준다면 '가족'이라고 이야기한다. 가족계획의 역사를 다룬 1장과 모성에 대해 이야기한 2장은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실제 '아이 없이 사는 가족'의 이야기가 담긴 3장 이후부터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읽을 수 있었다.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우린 아이 (안) 가져'라는 블로그를 만들었다가 그게 뭐 자랑할 일이라고 블로그에서 얘기하느냐고 주변의 핀잔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무자녀인 사람에게 잔업이나 야근을 부탁하는 게 당연시되는 회사 분위기,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인사말처럼 건네는 자녀 유무에 대한 질문, "그러다 나중에 늙어서 후회해"라며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듣는 오지랖 등 같은 사례를 읽다보면 '미국도 다를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의문이 '정말 나중에 후회하려나'였는데 아이 없이 25년 이상 남편과 따로 또 같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저자의 이야기를 비롯해 중장년 무자녀 가족의 이야기도 담겨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됐다. 


특히 좋았던 챕터는 '나를 위한 선택' '우리는 한 가족' '아이 없는 사람의 삶에도 아이는 존재한다'였는데, 아이 없이 조카 바보로 살아가는 지인들의 모습이나 자기 자식은 없지만 독서교실을 운영해 사회적 양육자로 그들을 키워가는 <어린이라는 세계>를 쓴 김소영 선생님, 그리고 싱글맘 김나영의 신우와 이준이를 자기 자식은 아니지만 마치 친손자처럼 아끼는 가수 양희은, 조카를 입양한 홍석천 등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각자 자기 사정에 맞게 가족의 구성을 선택할 수 있고, 서로 그 선택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메시지가 인상적이었던 책. 단순히 아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에세이나 개별 사례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주제로 묶어서 체계적으로 정리해 사회적인 분석 또한 살펴볼 수 있었던 책. 


'아이 없는 사람은 이기적이다'라는 편견이 있지만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든 아니든 둘 다 어느 정도는 이기적인 선택이고 인생의 우선순위를 지키기 위한 결정일 뿐이라고 짚는 관점도 흥미로웠다. 출산 또한 우리가 살면서 내리는 수많은 '선택'이라고, 그 선택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준다고 논리적으로 이야기해갔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들어가지 않고 동거하며 지내는 가족,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과 함께하는 가족, 실버타운 등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가족 등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가능함을, 그리고 새로운 가족이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의의를 살필 수 있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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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9-10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네요. 가끔 생각났는데, 결혼하셨군요.
축하합니다. 아직 신혼이니까. ㅎ
이 책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이매지 2021-09-11 12:53   좋아요 1 | URL
앗, 스텔라님 오랜만에 왔는데 이렇게 반겨주시니 감사합니다! ㅎㅎ
잘 지내고 계시죠? 이 책 추천추천드려용! ㅎㅎ

카스피 2021-09-11 0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매지님은 서재에서 오랜만에 뵙는것 같군요.ㅎㅎ 저도 서재에 요즘은 드문드문 들어와서 그런지 예전에 자주 찾아주시던 알라디너분들을 못뵈서 좀 거시기 했는데 결혼하셨다니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서재에서 다시 자주 뵙기를 기대합니다^^

이매지 2021-09-11 12:54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오랜만에 뵈어요!
서재 드문드문 들어오시는데 마침 이렇게 만나니 또 반갑네요! ㅎㅎ
요즘에는 블로그를 하느라 책 리뷰를 많이 못 썼는데 어우 오랜만에 리뷰 쓰니까 어색어색하네요~
자주 올 수 있도록 부지런히 읽겠습니당!
 
제가 투명인간인가요? - 남자들은 모르는 직장 내 성차별의 비밀
조앤 리프먼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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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다면 익숙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미국의 이야기지만 한국 사회와도 닮은 부분이 많아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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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서커스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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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2016년 '이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1위, 2015 <주간 분슌>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2016년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3위, 2016 서점 대상 노미네이트 등 2년 연속 미스터리 3관왕을 달성한 요네자와 호노부의 신작 <왕과 서커스>. 사실 앞서 읽었던 <야경>이 재미는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단편보다는 장편을 좋아하는 터라 뭔가 아쉬움이 남았던 터. 그랬기에 장편소설인 <왕과 서커스>가 더 기대됐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2001년 네팔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왕실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집필된 <왕과 서커스>는 때마침 답사차 네팔에 와 있던 다치아라이가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일본인 기자가 네팔 왕실 살인 사건에 접근하기란 녹록지 않은 법. 영리한 요네자와 호노부는 이를 살해당한 정보원 사건에 대한 추적이라는 설정으로 풀어나간다.

  '미스터리' 소설이지만 <왕과 서커스>의 초반부는 '본격 미스터리'라고 보기도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보기도 살짝 애매해서 사실 초반에는 살짝 갸웃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반부를 지나자 숨쉴 새 없이 이야기가 몰아쳤고, 그러면서도 각각의 인물들의 감정도 꽤 꼼꼼하게 그려냈다. 주된 미스터리보다 더 눈에 들어왔던 것은 '기자'로서의 직업윤리에 대한 다치아라이의 고민이었다. 자신이 발디딘 세계와는 전혀 접점이 없는 세계에 대한, 자극적인 이야깃거리에 목말라 하는 대중. 그런 대중의 '알 권리'를 위해서라며 타인의 비극을 파고들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으려는 기자. 네팔에 가서야 이 경계선에 서게 된 다이차라이의 고뇌가 정보원 살해를 추적하는 일보다 더 깊이 있게 담겨 있었다. 

  네팔의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맞물려 이국적인 분위기를 전달해주고, 한 인물이 극한의 상황에 몰렸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지켜보는 재미가 꽤 쏠쏠했던 작품. 간만에 꽤 몰입해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본격 미스터리 소설과는 살짝 거리가 있었던 터라 요네자와 호노부는 이제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 어울리는 작가라기보다는 나오키 상과 더 어울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슬몃 들었다. 읽고 나서 많은 여운이 들었던 작품이지만, 이 정도 작품이면 미스터리 마니아뿐 아니라 대중 소설 독자까지 끌어들이겠다 싶었던 잘 짜여진 오락 소설.

 

* 네팔 정부는 정보를 조금씩 흘리고 있다. 왕궁에서 살인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이 도시의 모두가 알고 있는데, 공식 발표로는 국왕을 포함한 여덟 명의 왕족이 사망했다는 말뿐이다. 그런 점이 애초에 네팔 정부는 왕궁 사건에 대해 아무 발표도 할 생각이 없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제대로 된 설명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부르고 있다. 이런 불신감이 사람들의 불만을 초래하는 게 아닐까? _182쪽

 

* <월간 심층>의 기사는 네팔을 구하지 못한다. 물론 영향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읽겠지. 하지만 제로보다 조금 나은 힘으로 당당하게 구는 것을 성실한 태도라 할 수 있을까?
그렇다, 네팔에 도움이 되니까 말해달라는 접근 방식은 잘못되었다. 내가 라제스와르에게 왕궁 사건의 진상을 듣고, 그것을 일본어 기사로 쓰는 것은 네팔을 위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 잠자코 있을 수는 없었다. 앎은 고귀하다고 믿어왔다. 상관없는 일은 알 필요 없다는 말을 듣고 침묵할 수는 없었다.
"일본어로 쓴 기사가 네팔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긴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말로 써도 진실은 진실, 기록되어야만 합니다."
앎은 손이 닿는 범위에만 있는 게 아니다. 비록 직접적인 관계는 없을지언정 알고자 하는 정신 자체는 옳을 터다. _222쪽

 

* "진실만큼 어이없이 왜곡되는 것도 없지. 그보다 다면적인 것도 없어.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 당신이 전하는 이야기는 그대로 일본인이 네팔에 품는 인상이 돼. 여기서 내가 국왕이 자살했다고 말하면 당신네 나라 사람들은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겠지. 나중에 진실이 유포된다 해도 그걸 읽고 첫인상을 바꿀 사람이 얼마나 될까?" _223쪽

 

* "분명 신념을 가진 자는 아름다워. 믿는 길에 몸을 던지는 이의 삶은 처연하지. 하지만 도둑에게는 도둑의 신념이, 사기꾼에게는 사기꾼의 신념이 있다. 신념을 갖는 것과 그것이 옳고 그름은 별개야." _225쪽

 

* "자기가 처할 일 없는 참극은 더없이 자극적인 오락이야.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 끔찍한 영상을 보거나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말하겠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그런 오락인 거야." _228쪽

 

* 기자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이 중립이라고 주장할 때, 기자는 덫에 빠진다. 모든 사건에서 모든 이들의 주장을 제한 없이 다루기란 불가능하고,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기자는 항상 취사선택을 한다. 누군가의 주장을 글로 씀으로써 다른 누군가의 주장을 무시한다. 그 과정이 지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선택으로 기자의 견식이 드러난다. 주관으로 선택하면서 중립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_4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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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에 대해 착각하는 것들 테드북스 TED Books 3
해나 프라이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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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강연을 책으로 만날 수 있는 테드북스. 얇은 두께에 비해서 내용은 꽤 알차서 론칭 때부터 한 권씩 챙겨 읽고 있다. 독특한 건축물의 사진을 보는 재미가 쏠쏠한 <미래의 건축>이나 피해자의 입장이 아닌 가해자 가족의 관점에서 테러리스트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 <테러리스트의 아들>도 물론 흥미로웠지만, 테드북스 세번째 이야기인 <우리가 사랑에 대해 착각하는 것들>은 제목부터 구미가 당겼다. '사람'이 아닌 '사랑'에 대해 착각하는 것들이라니, 대체 '수학'으로 어떻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거지?

삼십대 이후, 미혼 친구들과 모이는 자리에서는 이 책의 띠지 문안과 같은 멘트, 그러니까 "괜찮은 남자는 다 어디로 간 걸까?"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다. 뭐 거기에 곁들여서 '내가 만난 찌질남' 사연도 끊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번 생에 연애는 글렀나봐 …' 하며 자포자기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난제 앞에 무너지고 있는 수많은 미혼들을 위한 '궁극의 사랑 방정식'을 만나고자 책을 폈다.


 

내 나이 이제 삼십대에 접어들고 보니, 실제로 연애 시장에 남아 있는 아름답고 지적인 싱글 여성의 수와 잘생기고 괜찮은 싱글 남성의 수 사이에는 상당한 불균형이 있는 듯하다.이 점을 깨달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며, “괜찮은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라는 한탄은 이제 뉴욕뿐만 아니라 런던이나 상하이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러나 이러한 불균형은 도저히 수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양쪽의 숫자가 같아야 하지 않을까? _107쪽

 


이 지구상에 있는 70억 명의 사람 중에서, 아니 한국에 사는 5천만 명의 사람 중에서 내 짝은 어디 있는 걸까. 저자는 '배커스의 공식'을 통해 우리가 연애 상대를 찾을 확률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한다. 배커스라는 수학자가 사용한 공식에 따르면 그가 데이트하고 싶어할 여성은(여성의 의견은 일단 배제하고) 전 세계에 단 26명(!!!)이라고 한다. 아니 전 세계에 70억 명이나 사람이 있는데 그중에서 단 26명이라니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해나 프라이 또한 배커스의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고 하면서 좀 더 너그러운 태도로 이 공식을 적용하자고, 데이트 상대를 고를 때 온갖 종류의 필수 조건과 절대 불가 조건을 내세우면서 확률을 줄이지 말자고 하며 계속해서 논지를 전개해간다.

 

 

나는 수학자로서 인간 행동의 패턴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수학을 통해 거의 모든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심지어 사랑처럼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대상까지도. _7쪽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해나 프라이는 사랑의 영역 또한 다른 생활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패턴'이 지배함을 보여주지만,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팁을 제시해주기도 하는 등 은근 실용적이었다. 아무래도 '데이터' 측면에서 연구자에게 유용할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에 대한 예시가 자주 등장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다양한 소개팅앱이 인기인 만큼 유용하게 써먹을 팁도 많을 듯하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최대한 외모가 비슷하지만 아주 살짝 덜 매력적인 친구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더 매력적인 사람으로 비칠 것이라고, 어떤 경우든 누군가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다가가는 편이 낫다고, 외모의 단점(그러니까 불룩하게 튀어나온 배나 대머리처럼)을 가리려고 하기보다는 설령 누군가는 싫어하더라도 드러냄으로 자신을 차별화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식이다. 어찌 보면 당연히 보이는 말이지만 이런 얘기를 수학적 근거를 들어 보여주니 괜히 더 믿음이 간달까.

 

 

다행히도 인생의 수많은 다른 일들처럼, 평생 성관계를 맺은 상대의 수에서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에서 데이트 상대를 선택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사랑에서도 무수히 많은 패턴이 발견된다. 이러한 패턴은 사랑의 속성처럼 제멋대로 휘어지거나 방향을 바꾸는가 하면 뒤틀리거나 진화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패턴을 특유의 방법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수학이다. _9쪽

 


어떤 상대를 만날 것인지부터 어떤 상대와 결혼을 결심할 것인지, 그리고 성공적으로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부부간의 관계가 삐걱일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등등 사랑의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수학을 통해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다루면서 수학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매력적인 책. 제 짝을 찾아 헤매고 있는 분들에게도 권하고 싶지만 빅데이터나 응용수학에 관심 있는 분들도 흥미로워할 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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