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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ㅣ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새벽 4시였다. 예전에 나의 알람은 새벽 5시에 울렸다. 새벽 5시는 깜깜한 창문 밖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잠자던 태양이 이제 막 일어나는 시간과 같다는 오랜 생각때문이었다. 더구나 4자에 대한 트라우마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는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그리고는 2009~2010년 사이에 하루키 신드룸을 일으킨 장편소설 [1Q84](전 3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1Q84](1,2권)을 읽고 이것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속편 [1Q84](3권)이 나왔다. 하지만 [1Q84](전 3권)을 다 읽고 다시 한 번 같은 고민을 해봤다. 얼마든지[1Q84](4권)이 가능했다. 새벽 4시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그의[1Q84](전4권)은 우연한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1Q84](전 3권)의 시가 여행은 놀랍게도 직선적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1Q84](전 3권)이라는 제목을 보면서 조지 오웰의 [1984]를 쉽게 떠올렸다. 조지오웰이 1949년 디스토피아 소설인 [1984]를 발표했다. 조지 오웰에게 시간은 직선적이었다. 이로 인해 [1Q84](전 3권)도 그럴 것이라고 짐작했다. 시간에 있어 직선의 형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미래고 다른 하나는 과거다.[1Q84](전 3권)에서 전공투가 나오고 옴진리교 종교 집단이 나온다. 이것을 보면 이 소설의 세계는 과거다. 하지만 밤하늘에 달이 두 개 떠 있다는 대목에서 시간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때로는 현실일 수도 있고 때로는 미래일 수도 있다. 그래서[1Q84](전 3권)의 시간은 이 소설에 나오는 덴고의 말처럼 꽈배기 도넛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덴고 이외에도 아오마메가 나온다. 아오마메는 청부살인을 하는 비즈니스 우먼이다. 그녀는 세상을 자기 멋대로 사는 남자들을 살해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개미처럼 일만 하다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죽고 만다. 그들에게 편한 죽음은 용서할 수 없으나 어디까지나 타살의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했다. 이런 그녀가 선구라는 종교 집단의 리더를 살해하고 나서 어떤 운명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 뿐만이 아니라 덴고도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덴고는 후키에리의 [공기 번데기]를 새로 쓰면서 평범하지 않는 일에 휘말리게 된다. 즉 그들은 1984년을 살면서 어느 순간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데 다름 아닌 1Q84였다.1Q84에서 Q는 quetion마크인데 이 소설에서는 리틀 피플이 나오고 달이 두 개 뜬다는 의문과 만나게 된다. 이 세계에서는 '내가 이상해진 건지, 아니면 세계가 이상해진 건지' 혼란스럽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세계의 중심(重心)이 가벼워진 것일까? 즉 어디까지가 현실 세계이고 어디서부터가 가상의 세계인지 알 수 없게 되었을까? 아오마메와 덴고가 살던 1984년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주님의 왕국'이었다. 주님의 왕국은 '우리의 수 많은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삶에 당신의 축복을 주시옵소서. 아멘'이라는 구원의 왕국이다. 하지만 구원의 왕국을 거꾸로 말하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다면 가상의 세계인 1Q84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1Q84는 [공기 번데기]에 나오는 리틀 피플이 말하는 것처럼 마더와 도터의 왕국이다. 사람들에게 마더와 도터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다. 다만 도터는 어디까지나 마더의 마음의 그림자다. 결국 마더와 도터가 되면서 달이 두 개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도터가 된다는 것은 다름아닌 '자기가 상실'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일까? 달이 두 개가 되는 1Q84의 왕국은 우울하다. 리틀 피플이 예전과 달리 표면화된다는 것은 그만큼 1984년의 현실이 남긴 상처였다. 모든 것이 상실되고 있는 참다한 상황에서 1984와 1Q84은 겉모습만 다를 뿐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1Q84에서 아오마메가 덴고가 리틀 피플을 지각하고자 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또 다른 구원의 메시지였으며 결국에는 '사랑'을 찾아야 하는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만약 이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은 싸구려 연극에 지나지 않다고 저자가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84에서는 어떠한 구원도 없다. 하지만 1Q84에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가치가 있었다.
하루키는 [1Q84](전 3권)에서 아오마메와 덴고의 사랑과 함께 1984년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이[1Q84](전 3권) 에서 서로의 손을 잡은 것은 단순한 포옹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느끼는 온기였다. 우리가 온기를 잃어버린다면 이 세상은 정말이지 1Q84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이 세상이 위험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자기 자신 이하로 떨어지는 것도 안 된다. [1Q84] (3권)가 끝나는 대목에서 우리는 1984년이 아닌 오늘을 사는 진정한 삶의 자세를 깨달을 수 있다. 즉 '이 세계는 나름의 수 많은 수수께끼와 모순으로 가득차 있을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알 지 못하는 수 많은 어두운 길을 우리는 앞으로 수 없이 더듬어 가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기꺼이 받아들이자. 나는 이곳에서 이제 어디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벽 4시 달, 여전히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