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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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로 풀이하면 정신이나 몸이 지친 힘든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한병철의『피로사회』를 읽으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책은 제목에 나와 있듯 피로 의 원인에 대해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피로란 프로메테우스의 간(肝)이 당하는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벌(罰)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힌다. 이런 프로메테우스는 니체가 말한 ‘주권적 인간’에 가깝다. 그럼에도 저자는 프로메테우스를 ‘자기 착취의 주체’라고 재해석하면서 엄청난 피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성찰하고 있다.

 

저자는 프로메테우스의 ‘긍정성의 과잉’을 문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긍정성의 과잉이 피로라는 질병을 일으키는 것일까? 저자는 이 책의 시작을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고 하는 주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피로를 질병의 매커니즘으로 진단하고 있다. 질병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전염성 질병이며 다른 하나는 경색성 질병이다. 전염성 질병이 박테리아적 혹은 바이러스적이라면 경색성 질병은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 같은 신경증적이다. 전염성 질병은 면역학적인 공격과 방어를 최우선으로 한다. 하지만 경색성 질병은 면역학적인 처방으로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면역학의 근본 원리는 간단하다. 타자성과 이질성에 부정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타자성과 이질성은 곧 제거의 대상이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하려고 하는 부정 분자’이다. 그래서 자아는 ‘타자의 부정성을 부정함으로써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다. 면역학적 예방법이 다름 아닌 ‘부정성의 변증법’을 따른다. 그러나신경성 질병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비면역학적이다. 과잉으로 인한 소진, 피로, 질식이라는 비면학적인 시스템에서 저항력을 강화시키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긍정성의 과잉에는 부정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신경성 질병은 ‘긍정성의 변증법’을 따른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에서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런 질병들이 시대와 불가분의 관계에서 파악된다는 것이다. 즉 지난 세기는 면역학의 패러다임으로 푸코의 규율사회가 맹목적이었다. 정신병자, 감옥,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금지, 규율, 강제, 타자에 대한 거부 등등 부정성의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 성과사회다.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성과사회에서는 능력, 자기 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등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긍정성의 과잉이라는 성과사회의 질병을 면역학의 패러다임으로 치료하는 것은 시대착오에 불과하다.

 

우리는 규율사회에서 면역 주체 혹은 복종적 주체가 된다. 면역 주체에게는 ‘~해서는 안 된다.’가 지배적인 조동사다. 물론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과사회에서 성과주체가 된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답게 무한정 ‘할 수 있음’이 지배적인 조동사다. 겉만 보면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은 부정성에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으며 결과적으로 ‘활동과잉’이라는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능력의 긍정성이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성과사회의 새로운 인간형인 성과주체를 노동만 하는 동물로 규정한다. 노동만 하는 동물은 복종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가 된다. 그러나 성과 과잉을 위해 ‘강제하는 자유 혹은 자유로운 강제’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영혼을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역설적 자유로 인해 노동만 하는 동물은 자기 자신을 착취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노동만 하는 동물은 착취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그래서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인 우울, 피로, 소진이라는 자폐적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긍정성의 과잉에 따라 영혼이 경색되거나 탈진되고 나면 피로는 폭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자신의 괴물 이미지를 더욱 강화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사회가 우울한 까닭은 피로가 극대화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사회는 좋은 삶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생존을 위한 멀티스태킹을 강요한다. 이것은 마치 수렵자유구역의 동물과 같다. 동물은 생존을 위해 지속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노동만 하는 인간은 전혀 동물적이지 않다. 동물은 노동의 과잉이 없는 대신에 느긋함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거꾸로다. 벌거벗은 노동에 대해 벌거벗은 생명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호모 사케르’가 되고 만다. 더구나 성과사회에서 호모 사케르는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특성이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죽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한병철의『피로사회』는 ‘우울증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대한’ 효과적인 피로회복제여서 주목할 만하다. 약학적인 도핑적 피로는 성능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할 뿐 생명 활동으로 환원하지 못한다. 이것은 자아의 잉여와 반복에서 비롯되는 ‘자아 피로’에 불과하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치유적 피로’는 차원이 다르다. 치유적 피로는 한트케가 말한 ‘눈 밝은 피로’다. 눈 밝은 피로는 영감을 주는 피로다. 즉 자아 피로가 탈진의 피로이며 긍정적 힘의 피로라고 한다면 치유적 피로는 근본적 피로이며 부정적 힘의 피로, 무위의 피로다. 부정적 힘의 피로는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말한다. 만약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오늘날 우리는 피로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나 피로한 상태여서 불안하다. 이런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는 법을 달리해야 한다. 바로 저자가 제시하는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색적 삶은 곧 실천적 삶이 될 것이다. 가령, 피로가 직사각형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직사가형의 넓이를 계산하는 방법으로 피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로가 도덕적 직사각형이라고 한다면 계산만으로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보다는 사색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머뭇거리는 능력’, ‘분노하는 법’, ‘깊은 심심함’그리고 ‘돌이켜 생각하기’는 활동적 삶을 비판하고 치유하는 실천적 지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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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2008 노벨문학상 수상자 르 클레지오는 “상을 받는 것은 시간을 얻는 걸 의미하며, 글을 계속 쓰고자 하는 욕망을 주기도 한다. 작가는 읽혀지기 위해 어떤 반응을 얻기 위해 글을 쓴다. 상을 받는 것은 그런 반응 중 하나”라고 말했다. 작가들에게 노벨문학상은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예전에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이제 모든 길은 돈으로 통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돈의 즐거움이 아니다. 르 클레지오가 말했듯 작품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얻는 것이며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깊은 성찰을 하면서 열정적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은 공감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다.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우리의 가슴은 두려움과 설렘의 도가니가 된다. 남들처럼 하루 24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들은 어떻게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말한 고전은 단순히 오랜 시간을 기준으로 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실존적 고통을 좀 더 어떻게 표상하는 것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생소한 작가들뿐만 아니라 생소한 작품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삶과 작품을 보면서 열광한다. 시공(時空)에 가로막혀 난해하고 현대적(現代的)이지 않겠지만 이런 불편함에도 적어도 한번쯤은 읽어봐야 한다. 하지만 마음에 새겨둘 수 있는 애정과는 달리 습관적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의 목록을 올릴 뿐이다.

 

그런데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를 엮은『16인의 반란자들』은 이런 갈증을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인식의 폭을 넓혀 주고 있다. 하나, 시간이 나올 때마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호텔 인터뷰가 아닌 점. 둘, 강렬한 소설을 쓰는 작가들의 삶을 흑백 사진과 함께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학이 아닌 다른 어떤 이유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공통감각이 놀랍게도 반란이라는 점. 노벨문학상 작가들을 반란자라고 해서 그런지 이 책에는 어떤 불온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노벨문학상이 반란을 갈망해왔는지 모를 정도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문학에 대한 집념과 글을 계속 쓰고자 하는 내밀한 욕망이 촘촘하게 스며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 노벨문학상 작가들의 정체성 즉, 반란자라는 기묘한 통증에 공감하게 된다. 부조리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언어를 다루는 작가에게는 방관할 수 없는 문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주제 사라마구의『수도원의 비망록』에 나오는 ‘블리문다’(타인의 내부를 꿰뚫어보는 능력을 지닌 인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뇌의 흔적이 아무런 여과 없이 드러난 그들의 흑백 사진에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문학적인 본능으로 충만한 사소한 표정이 담겨져 있었다. 그래서 흑백 사진을 한순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영혼의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었다.

 

노벨문학상 작가들이라 그들의 반란이 부드러운 싸움이겠지, 혹은 좀 더 격하게 이데올로기적이겠지 한다면 반란자의 열정이 희석되고 말 것이다. 반란자에게 현실의 귀환은 살아있는 생(生)의 과정이다. 이것은 주제 사라마구가 말한 것처럼 “삼라만상에는 거의 자라지 않는 나무도 있는데, 그건 그 나무가 이질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아, 그렇다고 해서 ‘세퀘이아’가 ‘올리브나무’보다 낫다는 건 아니오. 그 반대도 아니고.”였다. 돌이켜 보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우리는 가면 같은 존재여서 가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그래서 연극인 다리오 포는 “풍자는 권력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고 하면서 대중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웃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같은 맥락으로 반란자는 현실의 빈틈을 파고드는 존재다. 노예제도의 모순을 바라보는 토니 모리슨은 자연적인 아닌 이익을 구하는 자들에 의해 형성된 인종주의에 반대한다. 그리고 문화혁명의 희생자 가오싱젠은 정치권력에 맞서 내적으로 공고한 존재를 역설하면서 "어떤 이즘이 없이 산다는 것, 그게 바로 나의 저항의 형태이다.”라고 말했다. 콜롬비아의 평화를 위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나는 항상 서명자보다는 음모자였소.”라고 하면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종교적 통합주의에 맞서는 V. S. 네이폴은 내세에 대하여 “나는 종교인이 아니오. 내 삶은 글을 쓸 뿐, 그게 다요. 쓰는 게 종교요. 그게 존재할 수 있는 종교들 중에서 가장 높은 종교요.”라고 말했다.

 

반란자들이 지속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 중에는『양철북』의 귄터 그라스에서 보듯 ‘치명적인 트라우마’의 역설을 빼 놓을 수 없다. 과거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되돌아온다고 했던 귄터 그라스는 나치 친위대라는 수치스러운 과거를 인정하면서 민족의 양심이 고통을 당했다. 그의 고백은 자신이 반파시스트주의자라는 침묵을 깨트리는 것은 아니라 “나에게 적은 관념적인 이데아에 불과하다.”는 항변이었다. 이와는 달리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임레 케르테스는『운명 없는 인간들』에서 아우슈비츠에서 ‘딴은 행복했다.’고 말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홀로코스트에서 오는 정체성이었다. 즉 ‘이는 고통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지요. 살다 보면 그 이상은 위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그런 순간들로, 그럴 때에 나오는 모든 긍정적인 자극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오히려 거대한 평온함과 안도감이 들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은 닫혀 있는 진실을 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근거로 하여 저자는 수상자들의 삶과 작품 세계에 굴절된 내적인 저항을 ‘반란자’라고 결정했다고 했다. 반란자는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진실’이라는 정신적인 것을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만남, 어느 것 하나 값지지 않은 게 없었다.’고 느꼈다. 그들에게 이쪽/저쪽의 경계는 무의미했다. 그들의 실존적 진실은 ‘다른 쪽’을 보는 것이다. 다른 쪽은 도리스 레싱이 지적했듯 사상이 닫힌 시스템이 마음에 안 들어서 지속적으로 나의 이데아들을 새롭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러한 새로운 이데아에서 우리는 고통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담담하게 표현할 수 있는 무섭도록 솔직한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수상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작가라는 관찰자의 시각’을 알게 되었다. 바로 문학적인 본능이었다.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의 소리 없는 고통에서 자극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는『히로시마 노트』에서 ‘존재에 대한 도덕적 의미’를 말했는데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오르한 파묵은『이스탄불』고 했다. 문학에는 인종적인 순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데릭 월콧은 “아무것도 쓰여 지지 않은 백지 앞에 앉을 때마다, 누구든 과거를 비우고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 중요해요.”라고 말했다.『순간』에서 현재성 즉 살아 있는 ‘어떤 순간’을 표현했던 비슬라바 쉼보르스카는 “모든 사물은 적어도 여섯 개의 시각, 다시 말해 네 방향과 위아래 두 방향에서 볼 수”있다고 말하면서 ‘세세한 것들에 주목하라.’고 하였다.

 

『16인의 반란자들』이 노벨문학상 작가들과 대화한 내용인 탓에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들의 대화는 앞서 말한 ‘반란자’라는 이미지로 중첩된다. 그러면 앞으로 반란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것은 문학의 운명과 같은 수레바퀴다. 문학이 죽었다고 걱정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문학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문학에 대한 정도의 시각으로 문학 자체에 대한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텅 빈 실체에 불과하다. 오히려 문학은 위대한 삶의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이 위대한 것은 결코 환영(幻影)이 아니다. 시인 페소아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잘난 체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것임을

넌 알아야 해.

알면 알수록 그건 아주 사소한 것임을

넌 알아야 해.

달은 세상의 모든 호수를 비춘다는 것을

그래서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들, 즉 반란자들은 앞으로도 영혼을 잃어버린 삶을 비출 것이다. 그들은 가오싱젠이 말한 것처럼 ‘문학은 인간이 의미하는 것을 심오하게 일깨워 주는 도구’를 가지고 삶에 대한 고통을 휴머니즘으로 뒤바꿔놓는다. 이 책을 읽으며 반란자들에게서 달(月)을 보게 되는 것은 가장 밝은 상상력이 아닐까? 정말로 우리는 달이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그래서 더욱 위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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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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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2008 노벨문학상 수상자 르 클레지오는 “상을 받는 것은 시간을 얻는 걸 의미하며, 글을 계속 쓰고자 하는 욕망을 주기도 한다. 작가는 읽혀지기 위해 어떤 반응을 얻기 위해 글을 쓴다. 상을 받는 것은 그런 반응 중 하나”라고 말했다. 작가들에게 노벨문학상은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예전에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이제 모든 길은 돈으로 통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돈의 즐거움이 아니다. 르 클레지오가 말했듯 작품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얻는 것이며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깊은 성찰을 하면서 열정적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은 공감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다.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우리의 가슴은 두려움과 설렘의 도가니가 된다. 남들처럼 하루 24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들은 어떻게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말한 고전은 단순히 오랜 시간을 기준으로 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실존적 고통을 좀 더 어떻게 표상하는 것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생소한 작가들뿐만 아니라 생소한 작품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삶과 작품을 보면서 열광한다. 시공(時空)에 가로막혀 난해하고 현대적(現代的)이지 않겠지만 이런 불편함에도 적어도 한번쯤은 읽어봐야 한다. 하지만 마음에 새겨둘 수 있는 애정과는 달리 습관적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의 목록을 올릴 뿐이다.

 

 

그런데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를 엮은『16인의 반란자들』은 이런 갈증을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인식의 폭을 넓혀 주고 있다. 하나, 시간이 나올 때마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호텔 인터뷰가 아닌 점. 둘, 강렬한 소설을 쓰는 작가들의 삶을 흑백 사진과 함께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학이 아닌 다른 어떤 이유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공통감각이 놀랍게도 반란이라는 점. 노벨문학상 작가들을 반란자라고 해서 그런지 이 책에는 어떤 불온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노벨문학상이 반란을 갈망해왔는지 모를 정도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문학에 대한 집념과 글을 계속 쓰고자 하는 내밀한 욕망이 촘촘하게 스며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 노벨문학상 작가들의 정체성 즉, 반란자라는 기묘한 통증에 공감하게 된다. 부조리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언어를 다루는 작가에게는 방관할 수 없는 문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주제 사라마구의『수도원의 비망록』에 나오는 ‘블리문다’(타인의 내부를 꿰뚫어보는 능력을 지닌 인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뇌의 흔적이 아무런 여과 없이 드러난 그들의 흑백 사진에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문학적인 본능으로 충만한 사소한 표정이 담겨져 있었다. 그래서 흑백 사진을 한순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영혼의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었다.

 

 

노벨문학상 작가들이라 그들의 반란이 부드러운 싸움이겠지, 혹은 좀 더 격하게 이데올로기적이겠지 한다면 반란자의 열정이 희석되고 말 것이다. 반란자에게 현실의 귀환은 살아있는 생(生)의 과정이다. 이것은 주제 사라마구가 말한 것처럼 “삼라만상에는 거의 자라지 않는 나무도 있는데, 그건 그 나무가 이질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아, 그렇다고 해서 ‘세퀘이아’가 ‘올리브나무’보다 낫다는 건 아니오. 그 반대도 아니고.”였다. 돌이켜 보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우리는 가면 같은 존재여서 가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그래서 연극인 다리오 포는 “풍자는 권력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고 하면서 대중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웃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같은 맥락으로 반란자는 현실의 빈틈을 파고드는 존재다. 노예제도의 모순을 바라보는 토니 모리슨은 자연적인 아닌 이익을 구하는 자들에 의해 형성된 인종주의에 반대한다. 그리고 문화혁명의 희생자 가오싱젠은 정치권력에 맞서 내적으로 공고한 존재를 역설하면서 "어떤 이즘이 없이 산다는 것, 그게 바로 나의 저항의 형태이다.”라고 말했다. 콜롬비아의 평화를 위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나는 항상 서명자보다는 음모자였소.”라고 하면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종교적 통합주의에 맞서는 V. S. 네이폴은 내세에 대하여 “나는 종교인이 아니오. 내 삶은 글을 쓸 뿐, 그게 다요. 쓰는 게 종교요. 그게 존재할 수 있는 종교들 중에서 가장 높은 종교요.”라고 말했다.

 

 

반란자들이 지속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 중에는『양철북』의 귄터 그라스에서 보듯 ‘치명적인 트라우마’의 역설을 빼 놓을 수 없다. 과거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되돌아온다고 했던 귄터 그라스는 나치 친위대라는 수치스러운 과거를 인정하면서 민족의 양심이 고통을 당했다. 그의 고백은 자신이 반파시스트주의자라는 침묵을 깨트리는 것은 아니라 “나에게 적은 관념적인 이데아에 불과하다.”는 항변이었다. 이와는 달리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임레 케르테스는『운명 없는 인간들』에서 아우슈비츠에서 ‘딴은 행복했다.’고 말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홀로코스트에서 오는 정체성이었다. 즉 ‘이는 고통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지요. 살다 보면 그 이상은 위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그런 순간들로, 그럴 때에 나오는 모든 긍정적인 자극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오히려 거대한 평온함과 안도감이 들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은 닫혀 있는 진실을 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근거로 하여 저자는 수상자들의 삶과 작품 세계에 굴절된 내적인 저항을 ‘반란자’라고 결정했다고 했다. 반란자는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진실’이라는 정신적인 것을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만남, 어느 것 하나 값지지 않은 게 없었다.’고 느꼈다. 그들에게 이쪽/저쪽의 경계는 무의미했다. 그들의 실존적 진실은 ‘다른 쪽’을 보는 것이다. 다른 쪽은 도리스 레싱이 지적했듯 사상이 닫힌 시스템이 마음에 안 들어서 지속적으로 나의 이데아들을 새롭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러한 새로운 이데아에서 우리는 고통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담담하게 표현할 수 있는 무섭도록 솔직한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수상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작가라는 관찰자의 시각’을 알게 되었다. 바로 문학적인 본능이었다.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의 소리 없는 고통에서 자극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는『히로시마 노트』에서 ‘존재에 대한 도덕적 의미’를 말했는데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오르한 파묵은『이스탄불』고 했다. 문학에는 인종적인 순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데릭 월콧은 “아무것도 쓰여 지지 않은 백지 앞에 앉을 때마다, 누구든 과거를 비우고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 중요해요.”라고 말했다.『순간』에서 현재성 즉 살아 있는 ‘어떤 순간’을 표현했던 비슬라바 쉼보르스카는 “모든 사물은 적어도 여섯 개의 시각, 다시 말해 네 방향과 위아래 두 방향에서 볼 수”있다고 말하면서 ‘세세한 것들에 주목하라.’고 하였다.

 

 

『16인의 반란자들』이 노벨문학상 작가들과 대화한 내용인 탓에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들의 대화는 앞서 말한 ‘반란자’라는 이미지로 중첩된다. 그러면 앞으로 반란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것은 문학의 운명과 같은 수레바퀴다. 문학이 죽었다고 걱정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문학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문학에 대한 정도의 시각으로 문학 자체에 대한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텅 빈 실체에 불과하다. 오히려 문학은 위대한 삶의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이 위대한 것은 결코 환영(幻影)이 아니다. 시인 페소아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잘난 체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것임을

넌 알아야 해.

알면 알수록 그건 아주 사소한 것임을

넌 알아야 해.

달은 세상의 모든 호수를 비춘다는 것을

그래서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들, 즉 반란자들은 앞으로도 영혼을 잃어버린 삶을 비출 것이다. 그들은 가오싱젠이 말한 것처럼 ‘문학은 인간이 의미하는 것을 심오하게 일깨워 주는 도구’를 가지고 삶에 대한 고통을 휴머니즘으로 뒤바꿔놓는다. 이 책을 읽으며 반란자들에게서 달(月)을 보게 되는 것은 가장 밝은 상상력이 아닐까? 정말로 우리는 달이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그래서 더욱 위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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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문학 멘토링 - 문학의 비밀을 푸는 18개의 놀라운 열쇠
정여울 지음 / 이순(웅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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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멘토링! 왠지 낯설다. 자기 계발에 관한 이런 저런 멘토에 귀가 닳은 것인가? 아니면 우리 시대 문학에서 실용성을 찾기 힘들다는 편견 때문일까? 그럼에도 저자는 명성에 걸맞게 낯설다는 장벽을 아주 가볍게 넘어서고 있다. 저자는『정여울의 문학 멘토링』에서 문학의 비밀을 어렵지 않게 풀고 있다. 어렵지 않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고 읽기가 수월하다는 것이다. 저자 말대로 이 책은 문학 참고서도 아니며 문학 이론서도 아니다. 오히려 문학 참고서와 문학 이론서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 위치에서 문학과 친구가 되는 법을 유려한 필치로 멘토링하고 있다.

 

저자에게 문학이 영혼의 피난처가 된 것은 다름 아닌 ‘문학의 힘’ 이 거부할 수 없는 매혹 덩어리이며 삶을 보다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무한경쟁의 시대에 문학은 살아남기 위한 스킬, 스펙도 아니다. 우리가 성공하기 위해서 흑백(黑白)이 분명해야 한다. 흑백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예/ 아니오’를 요구한다. 이러한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정답’(正答)이 바람직한 기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행복은 흑백이라는 단색(單色)이 아니다. 행복은 자유라는 다채로움에 있다. 문학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비밀 일기가 되는 것은 그만큼 삶의 진실을 잘 보여주는 덕분이다.

 

우리는 문학과 동행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문학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그것은 문학과 ‘1대 1’의 만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은 우리가 영혼의 성장을 위해 반드시 섭취해야 할 ‘정신적 비타민’이다. 그래서 만남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문학 속에 숨겨진 각종 ‘코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문학이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며 멋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기법이나 내용에 관한 것을 아는 것은 친구가 되기 좋은 방법이다.

 

가령, 문학의 기법에 있어 패러디를 ‘모방’이라는 ‘보수적 충동’과 ‘차이’라는 ‘변화의 충동’으로 접근하고 있다. 모든 창조에는 원칙적으로 모방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즉 창작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으로부터 아직 없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 기법으로서의 패러디가 예술 작품의 창조적 원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패러디를 위한 패러디’가 아니라 ‘패러디를 통해 무엇을 창조하는가.’에 있다는 것이 궁극적이다.

 

또한, 시점의 문제에 있어 창작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해석’의 문제라는 것, 창조의 도구에 있어 은유가 ‘언어의 비료’라고 한다면 상징은 ‘문학의 보물 창고’라는 것, 반어법(verbal irony), 즉 아이러니는 단지 말 꾸밈이나 기교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로 태어나 무한한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본성이라는 것, 은밀한 풍자 혹은 우화라고 하는 알레고리는 말할 수 있는 것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문학의 마술적 에너지라는 것이다.

 

문학의 내용에 있어서는 확연히 분리된 두 세계를 이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캐릭터인 트릭스터(trickster)는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에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신비로운 생의 가치가 존재함을 일깨우는 존재라는 것, 문학 작품에서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 착한 주인공)을 방해하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 악한 주인공)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한계를 실험하는 리트머스지라는 것, 기억은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한 자기 정체성의 표현 도구를 넘어,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윤리적 이정표라는 것, 인간의 생명과 생존 그 자체의 강력한 은유인 음식은 우리에게 사랑이자 사람, 그리고 삶 그 자체라는 것, 외부세계에서는 허구지만 마음속에는 진실인 환상성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힘이며, ‘얼마나 재미있는 환상을 창조할 것인가’ 보다는 그 환상의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트라우마(trauma)는 어떤가?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지만 아름다운 문학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 통과의례를 겪어 낸 영웅의 제 1요건은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것,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모험은 ‘~하지 마라'(Don't)가 아니라 ‘한 번 해보자'(Let' do it!)라는 것, 오만한 인간에 대한 자연의 징벌쯤으로 여기는 대재앙이 사실은 현재의 소중함,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의 소중함이라는 것, 문학의 영원한 테마인 사랑은 희망이나 보답을 향한 열정이 아니라, 이 세상에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부신 기적을 느낄 줄 아는 지혜라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문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문학을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저자의 섬세한 통찰력을 깨닫게 된다. 문학은 아이러니하게도 단순히 문학 작품을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또 다른 얼굴은 세상의 모든 생물, 세상의 모든 사물과 교감하게 해주는 살아 있는 백과사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백과사전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 떠나는 끝없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문학이 이 정도로 비밀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 우리는 문학의 힘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문학은 최고의 멘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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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시대 -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제자백가의 귀환 1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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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諸子百家)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학자가 있다. 바로 우리 시대의 인문학자 강신주다. 일찍이 그는 인간의 본성을 ‘벌너러빌리티(vulnerability)’, 즉 ‘상처받기 쉬움’이라고 했다. 그래서 참다운 인문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상처가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생겨난다고 하면 우리는 참다운 인문정신을 통해 현실의 맨얼굴을 올바르게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왜 제자백가에서 치유의 가능성을 발견할 것일까? 제자백가라고 한다면 춘추전국시대(春秋全國時代)의 사상가들이거나 서양철학에 맞서는 동양 인문정신쯤 간과하는 현실에서 오히려 저자는 <제자백가의 귀환>을 총 12권으로 기획하면서 강한 지적 희열을 역설하고 있다. 제자백가는 패권을 다투는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전쟁과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사랑과 평화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하면서 찬란한 사유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즉 ‘제자백가의 사상이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시도한 결과’이며 그들의 생생한 통찰력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이 되지 않았던가?

이번에 나온『철학의 시대』는 시리즈 1권이다. 간단하게 보면 제자백가를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저자의 깊은 사유가 돋보인다. 기존의 방식이 한 갈래의 직선의 논리였다면 저자의 방식은 여러 갈래의 곡선의 논리다. 전자가 단편적이고 구조적인 사실을 전달한다면 후자는 사상적이고 문화적 맥락으로 역사와 소통하는 것이다. 곡선의 논리에 따라 우리가 어떤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어떻게 그런 사실이 생겨났는지? 주관적으로 확인이 가능해야 한다.

저자는 곡선의 논리, 즉 ‘우회로’를 선택하면서 제자백가를 둘러싼 임의적 해석에 대한 허(虛)를 파고든다. 만약 저자의 학문적 열정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런 기회마저 없었을 것이다. 가령, 위민(爲民)의 실체다. 위민은 ‘백성(百姓)을 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백성은 성씨(姓氏)를 가진 지배계층이었다. 반면에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피지배계층이었다. 결국 저자에 따르면 위민이란 ‘귀족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속적으로 옹호하는데 이용한 수사학에 불과했던 것’이며 민중의 삶 자체를 배려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위민을 놓고 두 가지 정치체계가 있는데 ‘동’(同)과 ‘화’(和)다. 동이 군주 일인 지배체계라고 하면 화는 군신 상호 견제 체제를 말한다. 공자는 화의 논리를 토대로 자신의 사유를 펼쳤는데 화의 논리에 반대하고 동의 논리를 추종하는 사상가를 ‘소인’(小人)이라고 폄하하였다. 공자는 군주와 기득권 세력 사이의 분권 체계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 모델이었다. 그러니 관중(管仲)과 같은 동을 지향했던 현실주의적 사상가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제자백가라는 분류의 계보학이다. 흔히 유가, 묵가, 도가, 법가라는 학파 구분은 제자백가들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漢) 제국의 역사가들에 이루어졌다. 한 제국 초기에는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하여 태평성태를 이루었는데 공신 관료나 제후들은 자신들의 지방분권적 이념을 도가 사상으로 정당화했다. 당시의 도가사상은 ‘황로사상’(黃老思想)을 말하는데 중국의 전설적인 임금인 황제(黃帝)와 도가 사상의 창시자 노자(老子)를 말한다. 특히 노자의 무위(无爲)는 최고 통치자가 관료나 제후들에게 자율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무제(武帝)는 동중서의「천인삼책(天人三策)」이라는 상소문을 통해 중앙집권 정책을 정당화한다. 중앙집권 정책은 유위(有爲)을 말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제는 유가들을 기용하였고 결과적으로 무제의 개혁 정책이 승리하면서 유가는 중국 역사의 중심부에 들어서게 되었다. 즉 진(秦)나라 여불위의『여씨춘추』에서는 노자의 사상이 제1의 철학으로 등장한다. 한나라 사마천의 『사기』, 즉 사마담이 제가백가를 논한 「태사공자서·논육가요지」에서는 유가가 ‘학설은 없지만 요점이 적고 수고스럽지만 효과는 적다.’고 한 반면에 도가는 ‘학설은 간단하여 적용하기 쉽고, 일은 적지만 효과는 크다.’고 했다.

사마담은「논육가요지」을 통해 유가보다는 도가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하지만 사마천은 달랐다. 표면적으로 사마담의 견해를 따르는 것 같지만『사기』의 편재를 보면 그 속내를 알 수 있다. 노자를「노자한비열전」에서 다루고 있는 것과 달리 공자는「공자세가」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공자를 ‘최고의 성인’이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반고의 『한서』「예문지」에서 유가의 학설은 ‘다양한 학설들 중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렇듯 『사기』와『한서』의 제자백가를 분류하는 방법 ‘유가 학파’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데 문제는『회남자』와 달리 역사성이나 사상성이 배제된 ‘구조적인 접근법’이라는 것이다.

『철학의 시대』를 읽으면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모든 것은 제대로 된 배경하에 두어야만 이해될 수 있는 법’을 새삼 확인했다. 공자는『시경』300여 편에 사악함이 없다고 했다. 낯 뜨거운 남녀 간의 애정사가 실린 것을 보고도 그랬다는 것은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공자는 이것을 군주와 신하 사이의 메타포로 해석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하에 제가백가의 사상을 유가, 묵가, 도가 등으로 압축하는 것은 단지 명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관중의 사상, 공자의 사상, 맹자의 사상’등으로 제자백가의 사상을 각각 ‘고유명사’로 이해하길 바란다. 이것이 제가백가가 객관성이 아닌 주관성으로 귀환하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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