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생태보고서 - 먹고, 싸우고, 사랑하는 일에 관한 동물학적 관찰기
한나 홈스 지음, 박종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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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동물이다. 하지만 그냥 걸어 다니지 않는다. 만약에 그랬다면 우리는 맹수 같은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체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생태계의 최고의 포식자로 자리매김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달리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기나긴 진화 과정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른 동물들처럼 먹고 사는 본능에만 몰두했다면 결코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동물 분류학상 영장류(靈長類, Primates)에 속한다. 영장류 중에서도 고릴라, 침팬지 같은 유인원(類人猿, anthropoid)들이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신체적인 특징 때문에 흔히 ‘털 없는 원숭이, 걸어 다니는 원숭이 혹은 요리하는 원숭이’로 불러졌다. 한마디로 원숭이의 본능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떤 동물일까? 21세기 레이첼 카슨으로 불리는 한스 홈스는『인간생태보고서』에서 매우 흥미롭게 이 문제를 관찰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에 나와 있듯 ‘먹고, 싸우고, 사랑하는 일에 관한 동물학적 관찰기’라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동물생태학을 찬찬히 읽어보면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오직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하고 말한다고 하지만 다른 동물들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본능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책을 통해 몇 가지 능력을 살펴보면 먼저 ‘있으나마 한 털가죽’을 이야기하고 있다. 보통 “왜 털가죽이 없을까?”라고 고민한다. 그러나 저자는 “왜 인간의 털가죽은 쥐 한 마리의 체면도 가려주지 못할 만큼 그 크기가 줄어들었을까?”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직립보행에 따른 뇌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카락은 방열의 역할을 한다. 반면에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몇몇 신체 부위에 있어 남자의 성모가 많은 이유는 ‘성(性)선택’에 따른 것이라는 견해다. 다윈의 적자생존에 의하면 수공작의 꼬리는 화려하기만 할 뿐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 선택에 따르면 수공작의 아름다운 꼬리는 번식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뇌다. 인간의 뇌는 20%의 열량을 소비한다. 그래서 동물의 뇌보다 훨씬 강력하다. 그렇다고 뇌의 크기가 지능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뇌의 크기가 크다고 해서 지능이 높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뇌 또한 진화의 산물이며 뇌의 크기가 컸던 이유에 대해 저자는 마키아벨리적인 이론, 먹이 찾기 이론, 인지적 지도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뇌가 독특한 것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뇌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남성이냐 여성이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가령 지성을 담당하는 ‘회질과 백질’에 있어 남성이 뇌의 전 영역에 고루 분포된 반면에 여성은 전두엽이 많이 관장한다.

 



세 번째로 오감이다. 시각을 보면 파리의 눈이 초당 200개의 서로 다른 영상을 처리할 때 인간의 눈은 초당 20개 정도다. 또한 쌍안으로 이루어진 덕분에 인간은 120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입체적으로 지각한다. 그러나 동물은 눈이 얼굴이 전면에 딸려 있어 306도에 가까운 경계용 지각이다. 청각에 있어 동물들이 소리를 듣고 눈을 통한 정밀 탐색이 이루어지는 반면에 인간은 소리를 눈의 길잡이로 삼는다. 화학적 지각이라고 불리는 미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이 있다. 또 하나 제6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예지몽, 독심술, 예언 같은 것이다.

 



네 번째는 식성이다. 인간은 두 가지 점에서 다른 잡식성 동물과 다르다. 첫째 인간은 대부분의 먹이가 뜨거운 상태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을 ‘요리하는 원숭이’로 부르는 이유다. 인류의 제 1호 시간 절약용 주방기기였던 불을 사용하면서 인간은 먹을수 있는 것을 가공했다. 뿐만 아니라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수를 늘렸다는 것이 대단한 전환이었다. 둘째 인간은 적정한 양보다 많이 먹는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비만이 없는데 인간에게는 고칼로리에 대한 생물학적인 비용과 노력이 미미했다. 그런가하면 ‘반(反)굶주림 상태’에서도 나타난다.

 



다섯 번째 의사도통이다. 동물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를 충족해야 한다. 첫째, 단어들이 자의적인 기호들이어야 한다. 둘째, 단어들을 통사론적 순서대로 배열해야 한다. 셋째, 신조어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작은 단위들이 합해져서 큰 단위군(群)들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 실재하지 않는 대상이나 일어난 적 없는 사건들에 관하여 추상적으로 뇌까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태계 충격’이라는 불편한 사실이다. 동물들이 본능에 따라 자원을 통제하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통제하면서 영역을 확대해왔고 개체 수를 증가시켰다. 이로 인해 생태계의 가하는 충격은 나쁘다. 딱따구리는 나무를 쪼개면서도, 나무를 쪼개는 기술을 개량하거나 다양화하지 않았다. 또한 비버들은 나무를 베면서도 다른 동물들이 사는 곳으로 던지지 않았다. 오직 인간만이 생태계를 파괴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거꾸로 자연의 재앙이 인간을 압박하면서 저자의 지적대로 ‘고독감’이 생겨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인간을 재발견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동물적 자아를 규정함으로써 자연 세계 안에서의 내 정체성’이 분명해지기를 희망하는 저자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매우 희귀한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뉘우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다른 동물들에게 없는 ‘도덕적 책임’이 우리의 미래를 동물들과 상생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데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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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의 시선 - 예견하는 신화, 질주하는 과학, 성찰하는 철학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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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메두사의 시선』의 저자인 김용석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철학자인 그가 다름 아닌 철학 에세이를 쓴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그것은 말 그대로 편견이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저자의 개성적인 사유 방법을 깨닫게 된다. 저자 말대로 철학 에세이는 지식으로 쓰는 글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식의 나열이라고 한다면 자기 성찰은 곤란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신화-과학-철학을 연계하는 저자의 글쓰기는 앞서 말했듯이 독특했다. 같은 지식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 지식을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생각하는 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사건의 역사가 아닌 ‘상상력의 역사’라고 말했던 저자의 명랑함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러면 이 책의 제목인‘메두사의 시선’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과학자의 시선’이다. 저자에 따르면 메두사의 눈초리는 이중적이다. 즉 변화하는 것들의 뒤에 숨어 있는 불변의 법칙을 붙잡아 두는 과학의 시선인 반면에 그런 과업에 몰두하는 과학자에게‘업보’로 돌아갈 시선이다. 이로 인해 메두사의 시선은 과학 활동의 원천이며‘과학적 패러다임은 메두사의 시선이 화석화된 법칙의 체계’가 되는 것이다.

프리고진이 갈릴레오에 대한 지지를 “지구가 수정 구슬로 바뀐 뒤에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메두사의 눈초리에 의하여 다이아몬드의 조각상으로 변화될지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메두사의 시선에 붙잡힌 자연법칙의 조각상이란 단순해야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또한 메두사의 시선이 확장되면 진리의 빛이 대통합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대통합은 ‘모든 것을 하나로’라는 단순함과 ‘모든 것이 함께 조화로운’이라는 아름다움에 더해 ‘전체’가 ‘여기 있다’는 장엄함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의 사유는 엉뚱하다. 그렇다고 해서 엉뚱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엉뚱함이 제기하는 의혹에서 무엇보다도 ‘충분한 논증’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저자에 따르면 충분한 논증이야말로 철학자가 보통 사람과 다른 존재의 이유가 된다. 가령,「피그말리온의 타자성」를 보면 자신이 조각한 여인의 상(像)이 제 아내가 되기를 바라는 피그말리온이 나온다. 그런데 저자는 피그말리온이 지독한 이기주의자 혹은 자기중심주의자가 아닌가? 라고 반문했다. 이러한 까닭에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 탓이다. 진화의 종점이 인간이라고 했을 때 저자가 우려하고 바는 타자에 대한 불필요성에 있다. 인간이 근원적인 자기반성과 변화를 하기 위해서는 타자와 만나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또 하나, 저자의 놀라운 탐색을「디오니소스와 포도주의 인식론」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니체도 그랬지만 우리가 디오니소스를 이해하는 한계는 주신(酒神)만을 다루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포도주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예리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찰스 다윈은 인간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인간의 문화적 특성을 세 가지로 활동을 들었다. 즉 술 빚기, 빵 굽기, 글쓰기이다. 이들의 특징은 자연적이지 않으며 발효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포도주는 포도와는 달리 문화이며 이것이 곧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일찍이 몽테뉴는“우리가 가장 모르는 것을 가장 잘 믿는다"고 했다. 이는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주목하게 된다. 즉 한때는 네 발로, 한때는 세 발로, 한때는 두 발로 걸으며, 일반적인 법칙과는 반대로 발이 많을수록 약한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정작 어린 아이도 풀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스핑크스의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시선에서 깨닫는 것은 바로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보다 잘 알기 위해서는 ‘과학적관심과 신화적 은유를 철학적 성찰에 연계’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 책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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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2010-03-24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음 두 가지 수학진리를 대한수학회의 부당업무 관련 죄인, combacsa(그네고치기), melotopia(snowall), Pomp On Math & Puzzle(박부성) 등은 권위만을 앞세워 부인하는 잘못을 범하였던 것이다.
첫째, 다음 세 가지 공식들은 모든 피타고라스 수를 구할 수 있다.
X=(2AB)^(1/2)+A, Y=(2AB)^(1/2)+B, Z=(2AB)^(1/2)+A+B.
상기 공식은 c^2=A=Z-Y, 2d^2=B=Z-X 일 때 X=2cd+c^2, Y=2cd+2d^2, Z=2cd+c^2+2d^2 같이 된다.
위 공식은 c+d=r 일 때 X=r^2-d^2, Y=2rd, Z=r^2+d^2 같은 기존 공식이 된다.
둘째, [2^{(n-1)/n}+……+2^(2/n)+2^(1/n)](자연수)^{(n-2)/n} 과 (자연수)/(무리수) 는 항상 무리수가 된다.
최미나 010-7919-8020.
 
교양의 탄생 - 유럽을 만든 인문정신
이광주 지음 / 한길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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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달린 디트리히 슈바니트의『교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즉 ‘교양은 인간의 상호 이해를 즐겁게 해주는 의사소통의 양식이다. 요컨대 교양은 정신의 몸, 그리고 문화가 함께 하나의 인격체가 되는 형식이며, 다른 사람들의 거울 속에 자기를 비추어보는 형식’이라고 했다.

살다보면 종종 무례한 사람들로 인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상식이라고는 없는 그들과 의사소통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사람들이 일으키는 마찰력은 결국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세대 간의 불협화음은 치명적이다. 한마디로 교양은 무용지물이다. 교양을 단순한 앎 정도로만 가볍게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우리는 교양이라는 그럴듯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광주의『교양의 탄생』은 대단히 흥미롭다. 이 책은 교양인이 고전에 밝은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보다는 ‘경작(cultura)’에 대한 식견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키케로가 말한 ‘교양이 정신의 육성(cultura animi)’에서 비롯된 것으로 ‘교양인은 농민이 밭을 갈 듯 도처에 삶의 푸르름을, 교양의 토포스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교양의 토포스를 박하다식하게 두루 살피면서 우리들을 교양의 역사로 안내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20세기에 이르는 동안 교양의 개념을 꺼내 놓는다. 그래서 우리는 교양인의 어제와 오늘에 관해서 풍부한 교양을 쌓는 지적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교양인의 고전적 초상은 고대 그리스에서 등장하는 데 바로 ‘파우스트’였다. 끊임없이 묻고 탐색하는 인간이었다. 로마에 이르면 ‘후마니타스’였다. 파우스트와 후마니타스는 문자의 문화 대신 소리의 문화가 우세했던 시대의 교양인이었다. 그들은 아고라와 같은 광장에서 담론적, 사교적 교양인이었다. 이들의 차이점을 보면 파우스트가 관조적 교양인 반면에 후마니타스는 실천적 교양인이었다.

중세에 이르러 궁정 문화가 싹트면서 귀부인의 사교 문화가 발달했다. 이것이 바로 그랑 다메(귀부인)이다. “사랑은 12세기의 발명이다”라는 프랑스 샤를 세뇨보스의 말처럼 ‘기사와 귀부인의 만남이 낳은 여성에 대한 섬세한 마음가짐과 여성을 고귀한 존재로 받들고 사랑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높인 궁정풍 사랑(armour courtois)'였다. 이러한 궁정풍 사랑은 16~17세기 살롱 문화를 낳았다. 살롱 문화에서 프랑스는 오네톰을, 영국은 젠틀맨이라는 사교적 교양인이 탄생하였다.

한편으로 살롱문화가 발달한 시기의 유렵은 아카데미의 시기였다. 이로 인해 백과전서적 교양인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18세기 과학 혁명을 통해 ‘유용성은 이제 신사 교양인의 세계에서 키워드’가 되었다. 이전에 과학(science)은 ‘값싼 요리의 지식(세네카)’, ‘내가 이 반지에 관해 갖고 있는 지식(세익스피어)’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베이컨이 주장했던 유용성이 학문의 중심이 되면서 과학은 전문적인 지식인, 전문적인 대학(大學)을 발전시켰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전통적 교양지상주의에서 전문성으로 변화되어 온 교양인을 이해할 수있게 된다. 더불어 대학이 전문화된 계기를 알 수 있다. 오늘날 대학의 전문주의에 안타까움은 18세기『백과전서』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보편적 지식은 이미 인간의 범위를 벗어났다’에 드러났다. 저자 또한 이 책을 통해 대학의 전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아널드의 교양(liberal)’을 재조명하고 있다. 아널드는『교양과 무질서』에서 ‘교양이 생각하는 완성이란 개인이 고립되고 있는 한 불가능하다.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 손을 잡고 완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사람들이 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고 했다. 이러한 아널드의 주장에 대해 저자는 ‘사회적인 교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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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 사유와 삶의 지평
김기현 지음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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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형(妹兄)과 매형(梅兄)의 차이는 무엇일까? 시집간 손위 누이의 남편을 매형(妹兄)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긋남이 없다. 하지만 매형(梅兄)은 사뭇 다르다. 사람이 아닌 매화(梅) 앞에서 매형(梅兄)을 부르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희극적인 소리라고 여길 만하다. 하지만 예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더 많이 감동을 받고 사유하게 한다. 사람마다 그 표현법이 다르겠지만 퇴계 이황(李滉)은 매화를 보면서 몰아일체(沒我一體)했다. 그래서 매형(梅兄)이라고 불렀으며 그런 매형과 함께 시를 주고받았다.

퇴계 이황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선 성리학의 거장이다. 좀 더 가깝게 이야기하자면 선비다. 선비는 조선시대 관료이며 지식인이다. 조선시대의 문화가 유학(儒學)을 실천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선비는 유학의 인문학적 소양을 습득해야 했다. 선비에게 사서오경과 제자백가를 빼 놓을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선비의 세계를 탐색하는 것은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말한 사체(四體)와 거리가 멀다. 즉 온몸으로 인식하고(體認), 온몸으로 성찰하고(體察), 온몸으로 시험하고(體驗), 온몸으로 실천(體行)하는 것이다.

김기현은『선비』에서 앞서 말한 온몸의 지식인이 다름 아닌 선비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선비의 학문은 입신양명(立身揚名)임을 다시금 각인시켜 주고 있다. 이는『효경』에 나와 있듯 자아를 확립하여 진리와 도의를 행함으로써 이름을 후세에 날린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한 진리와 도의는 선비의 표상이며 자존심이었다. 이로 인해 관직명에 집착하여 입신출세(立身出世)라는 수단으로 보는 것은 선비에 대한 편견에 지나지 않다.

이 책의 내용은「자연」,「인간」,「사회」,「죽음과 삶」이라는 네 부분을 주제로 하여 선비의 사상을 온몸으로 조명하고 있다. 첫째,「자연」에서는 자연의 섭리를 원형이정(元亨利貞)으로 보고 있다. 이것과 다른 개념은 생장쇠멸(生長衰滅)이다. 전자가 유기체적 존재론적이라면 후자는 기계적 개체주의적 사고다. 이것은 자연의 본성과 연결되는데 퇴계의 비유를 빌려보면 “마치 한 조각의 달이 강과 바다, 그리고 술잔 속에도 둘 비치는 것”이다. 이는 개개의 사물들은 그 안에 자연의 섭리를 갖는 다는 점에서 원형이정은 보편자, 생장쇠멸은 개별자가 되는 까닭이다.

둘째,「인간」에서는『맹자』가 말한 대장부(大丈夫)를 다루고 있다. 대장부에게 대의명분(大義名分)은 위대한 힘이다. 이는 죽음의 위협에 맞서 삶을 완성시켜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에 있어 순교나 은둔이라는 소극적인 행적을 두고 의로움을 잃어버렸다고 비난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맹자』의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외로움 또한 내가 원하는 바지만, 두 가지를 다 취할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하겠다.”에서 찾을 수 있다.

셋째,「사회」에 있어 조선의 신분 사회에서 화해와 조화의 이념이 허위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음양학에 있어 양존음비(陽尊陰卑), 양선음후(陽先陰後)처럼 인간관계도 상하(上下), 귀천(貴賤), 장유(長幼)라는 불평등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음양학이 대립이 아니라 상생이라고 했을 때 인간관계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사회에서 인간관계가 계산적인 이성(理性)이 아니라 서로 교감하고 생동하는 정(情)이라는 것이다.『주역전의』에 따르면 “모든 일이 다 그러하다. 그러므로 교감 속에 형통의 이치가 있는 것”이다.

넷째,「죽음과 삶」에서는 소크라테스와 조광조를 비교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육체의 감옥으로 해방되는 것이며 저승으로 가는 행복한 여행이었다. 반면에 조광조의 죽음은 위대한 재생이었다. 이 책에 따르면 ‘그는 “죽어서도 썩지 않는” 도덕생명의 씨앗’이었다. 그리하여 ‘후세의 사람들은 저 씨앗을 각자 자기의 것으로 받아 키워 역시 자타의 삶을 완성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생(新生), 곧 시(始)의 뿌리가 될 종(終)’이었다.

오늘날 유교는 저자 말대로 ‘사람 잡아먹는 전통’으로 전락하고 있다. 서구적인 문명이 화려해서 좋은 것이라면 유교적인 전통은 초라해서 나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유교의 형식주의와 번문욕례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겉치레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비의 정신까지 추방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이 책에서 보듯 선비는 단순한 자아가 아니라 역사적 자아를 궁극적으로 실천했다. 선비는 매형(梅兄)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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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역설 - 과소비사회의 소비심리를 분석한 미래사회 전망 보고서
질 리포베츠키 지음, 정미애 옮김 / 알마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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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물질적 성공만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A. J. 크로닌의『성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처음에는 일 년에 1000파운드만 벌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만한 수입이 들어오자 곧 희망 금액을 두 배로 올리고 그 숫자를 최대치로 잡았다. 그러나 그 최대치에 도달하고서도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높여 나갔다. 가지면 더 갖고 싶었다. 그리고 그대로 갔다면, 그는 결국 파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그(앤드루)처럼 우리는 물질적 성공만으로 행복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물질적 성공으로 자신의 사회적 가치를 과시할수록 이러한 기댓값은 최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댓값이 끝이 없다는 것이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돈이 있는데도 역설적으로 그가 불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질 리포베츠키는『행복의 역설』에서 흥미롭게도 과소비사회를 분석하면서 현대인의 불행에 접근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소비주의 3단계를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즉 생산과 대중 마케팅의 1단계, 대중소비사회의 2단계 그리고 과소비사회의 3단계다. 특히 2단계인 대중소비사회는 물질적 안락함으로 인해 풍요로운 사회이며 욕망의 사회였다. 결과적으로 욕망이 양적으로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3단계는 비소비사회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대중소비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아무래도 소비사회를 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의 단순한 생각과 달리 과소비사회를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상품과 불가분의 관계며 결국에는 소비하게 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저자는 3단계에서는 우리가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소비자 즉 ‘소비주체(consommacteur)'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개인의 사회적, 경제적 정체성이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창조적 소비, 감정적 소비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소비사회라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비록 질적으로 소비패턴이 변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행복의 추구에 대한 또 다른 갈등이 있다. 이것이 곧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행복의 역설’이다. 저자는 5가지 패러다임을 통해 과소비사회의 심리를조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페니아(Penia)다. 소비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욕구를 자극하는데 그런 만큼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인한 절망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디오니소스다. 쾌락도시에서는 안락함과 풍요로움의 디오니소스다. 그러나 과소비사회에서는 유희-축제의 가치 기준이 확산되며 사실상 완전히 반디오니소스(anti-dionysiaque)다. 즉 개인이 디오니소tm적인 게 아니라, 개인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공동체를 도구화하며서 디오니소스적인 분위기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슈퍼맨이다. 실적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잠재력이 주요 결정 요소가 되었다. 완벽에 대한 집착이다.

네 번째는 네메시스다. 과소비사회는 투명한 사회다. 모두 보여주고 모두 말하고 모두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 개인의 사적 영역의 마지막 힘이 바로 질투심이다. 풍요로운 사회일수록 질투가 더 심하며 ‘모방의 지옥’에 따라 행복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호모 펠릭스다. 대중 미학의 소비시대에서 파괴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책임감있는 소비자가 필요하다. 또한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미시 유토피아시대다. 개인의 자아도취에 따른 지혜조차 즉흥성과 감정이라는 ‘가벼운 지혜’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를 역설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즉 정복과 위험에 대한 열정이 높은 사회라는 것이다. 행복의 보편화 현상과 위험한 행동의 증가가 함께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3단계의 과소비사회에서 개인의 위치는 역동적이며 초개인주의다. 그래서 단순하게 소비재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복을 정복하면서 재창조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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