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동물이다. 하지만 그냥 걸어 다니지 않는다. 만약에 그랬다면 우리는 맹수 같은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체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생태계의 최고의 포식자로 자리매김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달리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기나긴 진화 과정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른 동물들처럼 먹고 사는 본능에만 몰두했다면 결코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동물 분류학상 영장류(靈長類, Primates)에 속한다. 영장류 중에서도 고릴라, 침팬지 같은 유인원(類人猿, anthropoid)들이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신체적인 특징 때문에 흔히 ‘털 없는 원숭이, 걸어 다니는 원숭이 혹은 요리하는 원숭이’로 불러졌다. 한마디로 원숭이의 본능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떤 동물일까? 21세기 레이첼 카슨으로 불리는 한스 홈스는『인간생태보고서』에서 매우 흥미롭게 이 문제를 관찰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에 나와 있듯 ‘먹고, 싸우고, 사랑하는 일에 관한 동물학적 관찰기’라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동물생태학을 찬찬히 읽어보면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오직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하고 말한다고 하지만 다른 동물들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본능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책을 통해 몇 가지 능력을 살펴보면 먼저 ‘있으나마 한 털가죽’을 이야기하고 있다. 보통 “왜 털가죽이 없을까?”라고 고민한다. 그러나 저자는 “왜 인간의 털가죽은 쥐 한 마리의 체면도 가려주지 못할 만큼 그 크기가 줄어들었을까?”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직립보행에 따른 뇌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카락은 방열의 역할을 한다. 반면에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몇몇 신체 부위에 있어 남자의 성모가 많은 이유는 ‘성(性)선택’에 따른 것이라는 견해다. 다윈의 적자생존에 의하면 수공작의 꼬리는 화려하기만 할 뿐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 선택에 따르면 수공작의 아름다운 꼬리는 번식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뇌다. 인간의 뇌는 20%의 열량을 소비한다. 그래서 동물의 뇌보다 훨씬 강력하다. 그렇다고 뇌의 크기가 지능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뇌의 크기가 크다고 해서 지능이 높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뇌 또한 진화의 산물이며 뇌의 크기가 컸던 이유에 대해 저자는 마키아벨리적인 이론, 먹이 찾기 이론, 인지적 지도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뇌가 독특한 것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뇌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남성이냐 여성이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가령 지성을 담당하는 ‘회질과 백질’에 있어 남성이 뇌의 전 영역에 고루 분포된 반면에 여성은 전두엽이 많이 관장한다.
세 번째로 오감이다. 시각을 보면 파리의 눈이 초당 200개의 서로 다른 영상을 처리할 때 인간의 눈은 초당 20개 정도다. 또한 쌍안으로 이루어진 덕분에 인간은 120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입체적으로 지각한다. 그러나 동물은 눈이 얼굴이 전면에 딸려 있어 306도에 가까운 경계용 지각이다. 청각에 있어 동물들이 소리를 듣고 눈을 통한 정밀 탐색이 이루어지는 반면에 인간은 소리를 눈의 길잡이로 삼는다. 화학적 지각이라고 불리는 미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이 있다. 또 하나 제6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예지몽, 독심술, 예언 같은 것이다.
네 번째는 식성이다. 인간은 두 가지 점에서 다른 잡식성 동물과 다르다. 첫째 인간은 대부분의 먹이가 뜨거운 상태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을 ‘요리하는 원숭이’로 부르는 이유다. 인류의 제 1호 시간 절약용 주방기기였던 불을 사용하면서 인간은 먹을수 있는 것을 가공했다. 뿐만 아니라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수를 늘렸다는 것이 대단한 전환이었다. 둘째 인간은 적정한 양보다 많이 먹는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비만이 없는데 인간에게는 고칼로리에 대한 생물학적인 비용과 노력이 미미했다. 그런가하면 ‘반(反)굶주림 상태’에서도 나타난다.
다섯 번째 의사도통이다. 동물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를 충족해야 한다. 첫째, 단어들이 자의적인 기호들이어야 한다. 둘째, 단어들을 통사론적 순서대로 배열해야 한다. 셋째, 신조어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작은 단위들이 합해져서 큰 단위군(群)들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 실재하지 않는 대상이나 일어난 적 없는 사건들에 관하여 추상적으로 뇌까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태계 충격’이라는 불편한 사실이다. 동물들이 본능에 따라 자원을 통제하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통제하면서 영역을 확대해왔고 개체 수를 증가시켰다. 이로 인해 생태계의 가하는 충격은 나쁘다. 딱따구리는 나무를 쪼개면서도, 나무를 쪼개는 기술을 개량하거나 다양화하지 않았다. 또한 비버들은 나무를 베면서도 다른 동물들이 사는 곳으로 던지지 않았다. 오직 인간만이 생태계를 파괴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거꾸로 자연의 재앙이 인간을 압박하면서 저자의 지적대로 ‘고독감’이 생겨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인간을 재발견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동물적 자아를 규정함으로써 자연 세계 안에서의 내 정체성’이 분명해지기를 희망하는 저자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매우 희귀한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뉘우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다른 동물들에게 없는 ‘도덕적 책임’이 우리의 미래를 동물들과 상생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데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