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
하버드 철학 리뷰 편집부 엮음, 강유원.최봉실 옮김 / 돌베개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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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버드대 최고의 명강의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마이클 샌덜의『정의란 무엇인가』가 화제의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정의가 무뎌진 한국사회에서 ‘정의’를 둘러싼 정의(定義)는 뭘까< 라는 호기심이 적지 않은 탓이다. 어느 정도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다. 정의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해서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정의에 관심이 많다고 해서 ‘철학’을 좋아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인문학의 위기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며 그 중심에 철학에 대한 무관심은 안타깝게도 오랜 관행이 되었다.


그래서『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를 읽으면서 당혹감에 휩싸였다. 말 그대로 철학이 맨얼굴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앞서 말한『정의란 무엇인가]는 화장(化粧)을 한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즉 ‘인터뷰에서 제기된 물음은 단순히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함이라는 행우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러한 물음은 철학 분야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를 관통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알렉산더 네하마스의 말처럼 “철학자들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그들을 읽고 나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옴베르트 에코, 존 롤스, 마이클 샌덜을 비롯하여 14명의 철학자들이 나온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이 ‘사변적 형이상학’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들은 치열하게 철학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가령,『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쓴 리처드 로티는 ‘형이상학 이후의 문학’을 향하고 있다. 시적인 문화 혹은 형이상학 이후의 문학이란 ‘종교나 형이상학에 공통적인 명령문이 사라져버린 것’을 말한다. 그래서 ‘시적인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인간을 신이나 실재의 본질에 책임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생활-세계를 창조하는 존재로 사유’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알렉산더 네하마스는『삶의 방식』에서 ‘소크라테스적 삶의 방식’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소크라테스적 삶의 방식이란 삶에는 오직 한 가지 방식이 있고, 그 방식을 안다는 것은 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네하마스는 삶에는 수많은 방식이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에게 있어 전기적 사건들은 그의 사유에 있어 최소한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즉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하는 기획이란 당신의 철학적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지, 당신에게 아이가 몇 명인지, 무슨 옷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한편『정의론』으로 유명한 존 롤스는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을 주장했다. 이는 ‘무지의 베일’ 뒤에 사람들이 처했을 때의 사유 실험이다. 다시 말하면 ‘그 장막 뒤에서 사람들은 각각의 개인을 만드는 모든 것, 즉 부, 나이, 재능, 인종, 좋은 삶과 같은 어떠한 개념에 대한 지식들도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하이 맨스월드는 반대하고 있다. 이유인즉 우리가 알아야 하는 지식을 빼앗는 다는 점에서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버드대 강의에 불러일으킨 마이클 샌덜은 이 책에서도 정의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그는 ‘정부는 그 자체가 선’(good-in-itself)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존 롤스와 칸트의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개인의 자유권에 호의적이긴 하지만 사회가 있기 때문에 자기정의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의 자유주의는 ‘인간을 자신만의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존중하기 때문에, 좋은 삶에 대한 경쟁적인 개념들에 대해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밖에도 힐러리 퍼트넘의 ‘내재적 실재론’을 보면 몇몇 경험적 진술은 입증되지 못한다고 해도 참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모든 사실 진술을 규정할 수 있는 단일한 어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실용주의적 실재론’이다. 그는 단일한 어휘 대신에 가치 판단, 사실 묘사, 언어적 관습은 모두가 ‘상호침투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윌러드 콰인은『말과 대상』에서 ‘번역 불확정성 원리’를 전개했다. 그는 ‘어떤 두 언어 사이를 번역하는 것에는 많은 방식이 있는데, 각각의 방식은 잠재적으로 이용 가능한 모든 증거와 합치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의 인식이 ‘믿음의 그물’을 구성한다고 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철학하는 삶, 즉 학문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것은 마치 피터 웅어가 최악으로 치달은 아프리카 참사 같은 상황에서 하루에 몇 시간씩 형이상학에 대한 작업을 선택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학을 부활하기 위해서는 철학의 이론적인 측면과 실천적인 측면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좋은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존 듀이가『철학의 재구성』에서 말한 것처럼‘철학이 철학의 문제들을 다루는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철학자들이 인간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발전시킨 방법이 될 때’ 철학이 소생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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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09-14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롤스와 마이클 샌델이 주장하는 정의의 차이점을 알기 위해서
요즘 읽고 있는데... 아직은 철학이란게 저에는 그리 쉽게 와닿지 않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ㅋ
 
의심에 대한 옹호 -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 산책자 에쎄 시리즈 7
안톤 지더벨트.피터 버거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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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생각이 살아있는 활동이라고 한다면 생각하는 나가 존재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말을 충분히 의심해보면 그가 말한 생각은 진리(眞理)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진리만큼 탐구하고 싶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만한 것이 있으면 모두 제거하고 출발할 것이다. 그렇게 했음에도 만약 나에게 남은 게 있다면 그것은 진리일 것이다”고 말했다. 이렇듯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의심하는 과정이 ‘방법적 회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의심이 악용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믿음은 얼마든지 의심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을 연거푸 의심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심과 믿음의 문제에 대해 피터 버거와 안톤 지더벨트는『의심에 대한 옹호』에서 탁월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는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系譜學)’이다. 저자들이 데카르트의 철학을 주목하는 이유는 근대성이라는 획기적인 사고(思考)의 전환에 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근대성의 특징을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하나는 다원화(多元化)이며 나머지 하나는 상대화(相對化)이다. 다원화는 계몽주의의 전통인 세속화의 반대다. 쉽게 말하자면 다원화는 선택이며 세속화는 운명이다. 아르놀트 겔렌에 따르면 선택은 전경(foreground)과 배경(background)로 나뉜다. 전경이 선택이 가능한 삶의 영역인 반면에 배경은 선택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경에서 배경으로 된다면 ‘제도화’라고 하며 그 반대 현상이 ‘탈제도화’가 된다. 따라서 근대성은 탈제도화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상대화는 절대화의 반대다. 알프레트 슈츠는 절대화를 ‘당연시 되는 세계’이며 이는 ‘내적 제도화의 결과’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며 타인과 상호작용을 했을 때 상대화는 관용을 촉진시킨다. 한편 상대화는 ‘설득력 구조’를 가변적으로 만든다. 뿐만 아니라 상대화가 변증법으로 진행되면서 오히려 수많은 선택의 자유에서 도피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사르트르는 ‘자기기만’을 지적하고 있다. 즉 “내가 진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진리가 나를 선택했다. 그것이 나를 이끌었으며,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고 자신의 선택을 위장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들은 근대성을 두루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근대성을 ‘주관성의 귀환’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화가 심화될수록 우려할 만한 상황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을 니체는 “불신의 기술”이라고 불렀다. 세상에는 사실이 있고 확실은 사실을 찾아낸다면 객관성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곧 ‘2차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실에 대해 의심하고, 의심에 대해 또 의심한다면 객관적인 사실은 불가능해진다. 상대주의자들에 따르면 ‘서로 다른 서술이 있고, 그런 서술은 모두 옳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밀 뒤르켐이 “사회적 사실(thing)은 사물로 보라”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상대주의의 인식론적 결합에 때문에 근본주의가 복원되고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근본주의는 ‘반동적인 현상’이며 ‘현대적 현상’이다. 보수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주의는 전통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전통주의가 전통을 당연시하는 태도이며 근본주의는 그런 당연함이 흔들리거나 상실할 때 출현한다. 근본주의는 ‘재정복 모델’과 ‘하위문화 모델’ 방식으로 상대주의에 대응한다. 재정복이란 스페인이 이슬람 지배에서 벗어나 다시 기독교 국가로 돌아갈 때 쓰여던 용어였다. 그리고 하위문화는 ‘미시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상대주의가 ‘의심을 과대화’는 것이라면 근본주의는 ‘의심의 과소화’에 있다.


우리는 상대주의와 근본주의의 입장을 살피면서 의심과 확실성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로베르트 무질이 “진리의 목소리는 의심 섞인 낮은 톤이다”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객관적으로 삶은 삼단논법으로 합리적이다. 그러나 삶에서 낮은 톤을 없애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그만큼 삶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며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의심과 불확실성은 의심할 수 있는 진리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는데 있다. 카스텔리오는 성서의「전도서」 3장 2절을 패러디하면서 “의심할 때가 있고 믿을 때가 있다. 알 때가 있고 모를 때가 있다”고 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모름을 앎의 피할 수 없는 준비단계로 보았다. 그리고 의심도 믿음의 준비단계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의심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면서 우리의 의심을 한층 증폭시킨다. 이러한 주된 이유는 인지적으로는 불확실성한데 도덕적으로는 상당한 확실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의심은 판단을 유보한다. 섣부른 결정이나 사전 결정에 대한 완충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의심이 의심받아야 할 때가 된다고 저자들은 충고했다. 만약 이 시점에서 무한한 의심을 하게 된다면 ‘뷔리당의 당나귀’가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의심에 대한 의심은 절망으로 빠져들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심의 나쁜 영향으로 절망하는 우리를 구원하는 데 있어 도덕적 확실성이 일정 역할을 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우리가 도덕적 존재라는 것이다. 도덕적 존재를 다루는 분야를 ‘철학적 인류학’이라고 부른다. 철학적 인류학은 인간 조건의 구성 요소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먼저 ‘제도의 필수성’을 말하고 있다. 가령, 교통 신호를 준수하는 것은 생물학적 행동이 아니다. 그 보다는 학습된 행동이며 제도적 행동이다. 또 하나는 인간은 말하고 소통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이 ‘중용의 힘’을 역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대주의든 근본주의든 어느 것 하나만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상대주의는 ‘공연한 의심’을 근본주의는 ‘맹목적인 믿음’을 남용하게 된다. 그러나 중용의 힘은 탁월하다. 지나친 믿음이나 의심으로 빠지지 않도록 조절해준다. 그래서 일까? 괴테는 “의심하지 않는다면, 어찌 확신을 얻을 때의 기쁨이 있으랴?”고 말했는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부조리한 진리나 현실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다면 불행 그 자체다. 거꾸로 의심에 대한 옹호는 자유정신, 비판적인 지성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건전한 의심’이라는 것이다. 건전한 의심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며 보편성을 추구한다. 다시 말하면 건전한 의심은 휴머니즘에 근거한다고 저저들은 주장하고 있다. 또한 휴머니즘을 근거로 하여 ‘핵심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을 구별하라고 했다. 즉 핵심적인 것은 양보하지 않고 부수적인 것의 의견 충돌은 열린 태도로 접근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건전한 의심은 ‘의심과 믿음 사이의 중용을 위한 행동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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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한 다스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문화인류학, 개정판 지식여행자 7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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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의『수도원의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아무도 그런 말은 한 적은 없다네. 성경의 그 어디에도 그런 말은 적혀 있지 않아. 다만 하느님은 왼손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한 번 생각해 보았던 것뿐일세. 하느님은 항상 오른손을 쓰시고 오른편에만 앉아하시니까 말이야.(…)이는 누구도 하느님의 왼편에는 앉아 있지 않아. 그곳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자. 그러니까 하느님은 왼손잡이라고 할 수 밖에.(…)하느님에게는 왼손이 없어.”

정말로 하느님은 왼손이 없는 걸까? 그러나 굳이 하느님이 아니더라도 아주 가까이 우리들의 왼손을 바라보면 황량함을 느낄 수 있다. 왼손의 처지가 곤란하다. 오른손잡이에게 왼손의 쓸모는 매우 미미하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주눅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 눈에 쉽게 발견되지는 않지만 왼손은 분명 우리 몸의 일부이다. 좋든 싫든 오른손은 왼손과 한 평생을 같이해야 한다. 만약 왼손이 없다고 상상한다면 얼마나 위험한가를 금방 알 수 있다. 스스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퍼트리면서 얼마든지 악마(?)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돌이켜 보면 우리 삶에 있어 악마 혹은 악녀는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는 요네하라 마리가『마녀의 한 다스』에서 지적 했듯 악녀는 ‘마음가짐이 나쁜 여자가 아니라 용모가 미운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녀는 미녀에 에게 질투가 심하여 결국 ‘달갑지 않은 친절로 전화(轉化)’되었다고 했다. 악녀가 좋다고 따라다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모두가 도망가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악녀의 편에 선다는 저자의 표현대로 ‘이단’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감수해야 한다. 이단을 숫자로 나타내보면 이 책의 제목과 같은 ‘마녀 한 다스’가 된다.

보통 한 다스라고 한다면 ‘12’개가 된다. 12라는 숫자가 물건의 단위를 넘어 생활 속에서 상징하는 것은 아주 긍정적이며 밝은 색깔을 나타낸다. 12는 행운의 숫자이며 예수가 태어난 것도 12월이다. 이와는 달리 마녀의 한 다스라고 한다면 ‘13’개가 된다. 13이라는 숫자는 어둠 그 자체이다. 교수대의 층계가 13개가 되고 예수를 배신한 사람은 13번째 제자였다. 그런데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좋은 숫자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13은 좋은 숫자일까? 나쁜 숫자일까? 또 하나 질문을 던지면 ‘좋은 혹은 나쁜’ 이라는 절대적 가치는 있는 것일까?

요네하라 마리는『마녀의 한 다스』라는 에세이를 통해서 ‘절대’라는 묵직한 고민을 소박하게 풀어내고 있다. 저자가 동시통역사라는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동시통역사여서 이 나라 저 나라를 몸소 겪은 것이 저자에게는 아주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큰 힘 덕분에 ‘다른 사람의 말을 다른 사람의 귀로 듣고 다른 사람의 입이 되어 전하는 즐거움’ 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즐거움이 웃음으로 끝나지 않고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 나아가 우리의 마음에 대해 뭔가를 되새길 수 있게 했다. 그중에서도 어느 문화권에서 ‘절대적’으로 여겨졌던 것이 다른 문화의 가치관에 비추는 순간 ‘맥없이’ 무너져 간다는 것을 속속들이 들춰냈다. 결국 저자의 스승이었던 나카자와 선생이 ‘절대 절대 외치지만, 인간사에 절대라는 것은 절대로 없어’라는 기묘한 명언은 터무니없고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책의 ‘마녀 한 다스’라는 제목은 심상치 않다. 동시통역사인 저자 자신이 곧 마녀 한 다스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마녀라고 해서 지금까지의 정의를 공격하는 어떠한 폭력이거나 위협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전체주의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전체주의적 사고를 싫어하는 이유는 세상과 소통하기를 단절하기 때문이다. 단절은 곧 이성과 감성의 틀에 갇히는 것이다. 저자에게는 이러한 우물 안 개구리는 ‘나쁜 마녀’일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저자는 세상과 단절 없이 자유자재로 글을 쓰고 있다.

세상의 부조리를 바라보는 저자의 생각은「천동설의 맹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 한마디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이다. 천동설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자기와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천동설이 언제나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생명체의 자기보존 본능은 오랜 자연의 법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천동설의 맹점은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만큼 상대방의 입장에서라는 타인에 대한 배려는 매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러한 한계에 대해 저자는 ‘차라리 상대방이 스스로 말하게 한 후 거기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취하는 편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조언해주고 있다.

그리고 인생의 매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비극이 희극으로 바뀌는 순간」에서 들려주고 있다. 살다보면 뜻밖의 사태로 인해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이럴 때 저자는 ‘나무를 보고 숲을 보라’고 당부했다. 궁지에 몰릴수록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삶의 공허함을 바꾸기만 해도 행복은 얼마든지 회복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3자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단순한 방법은 정신 건강에 아주 좋았다. 병든 가슴을 치유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지만 제3자의 눈은 돈을 한 푼도 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상과의 거리를 코앞에서 한순간에 휙 늘이는 방법, 바로 그 낙차로 인해 생기는 웃음’이 진정한 행복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단지 불편을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을 즐긴다는 발상은 참으로 재미있고 신선했다.

이렇듯 이문화(異文化)에 대한 애정과 사려깊은 눈길이 담뿍 담긴 이 책은 저자 말대로 ‘즐거움의 발견이요, 패턴화된 뇌세포에 대한 자극’이었다. 서로 다른 두 언어의 문화적 경계를 넘나들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저널리스트 고종석의 표현대로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 하나의 매력이다. 또 하나의 매력은 저자가 동시통역사를 하면서 깨달은 삶의 진실이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저자의 새로운 눈을 통해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며 앞서 말했듯이 ‘절대 절대는 없다’는 것이다.

일찍이 생텍쥐페리는『어린왕자』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각각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아주 짧은 순간에도 마음속에는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과 같은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마녀의 한 다스』를 읽어보면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이 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은「맹꽁이들」에서 나오는데 ‘좁은 시야, 오만한 강요, 무지하고 자만에 가득 찬 독선, 다른 문화나 역사적 배경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결여된 상상력을 가진 소유자’들이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 자신이 ‘맹꽁이들’과 같은 존재라는 것은 뜨끔하다. 그 순간 우리 삶이 비극에서 희극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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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키워드 한국문화 6
최기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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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고향>에서 울려 퍼졌던 귀곡성(鬼哭聲)은 여전히 온 몸을 전율하게 한다. 한국인에게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은 오랜 트라우마다. 그래서 공포물이라는 장르에서『장화홍련전』 같은 버전이 어김없이 귀신으로 들락날락하고 있다. 지금은 너무나 지나치게 잔인할 정도로 육체적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기숙의 『처녀귀신』은 ‘정서적 공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에 따르면 그것은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였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귀신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귀신은 ‘경이원지(敬而遠之)’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좀 더 말하자면 ‘형상으로서의 귀신은 부정되었지만, 원리와 존재로서의 귀신은 인정되었던 것’이다. 일찍이 주희는『중용』에서 귀(鬼)와 신(神)을 구별했다. 즉, 귀의 속성은 음(陰)으로서 돌아가고 물러나며 소멸하고 죽는 것이다. 또한 가을과 겨울처럼 머물러 있고 조용하며 안으로 수렴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신의 속성은 양(陽)으로서 흩어지고 펼쳐지고 쉬고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봄과 여름처럼 생동적이고 표현적이며 움직이고 밖으로 발산하는 성질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리학적 개념에서 귀신은 음양의 두 기(氣)를 바탕으로 천지만물을 변화시키는 이(理)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귀신을 인간의 사후적 존재로 여겼다. 무엇보다도 누구나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귀신은 이승에 미련을 가진 자를 말하며 한이 깊어서 도저히 현실을 떠날 수 없는 자만이 귀신이 되는 것이었다. 즉, ‘귀신은 생과 사의 경계에 있다. 그(녀)는 자연사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현실에서 추방된 존재인 동시에, 죽음의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는 방랑자다. 이승에서의 생명이 멈춘 뒤에도 귀신으로서의 생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연장되는 삶이란, 차라리 저주받은 삶’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유교문화에서 귀신이 등장한다는 것은 반사회적이다. 삶과 죽음은 완전히 다른 세계이며 서로 넘나들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귀신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전복한다. 누구라도 귀신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귀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냉정하고 잔혹한 현실이 만들어낸 가학적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귀신, 특히 처녀귀신이 비운의 주인공이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귀신의 대부분이 순탄한 죽음을 맞지 못한 원귀(寃鬼)다. 그리고 원귀의 대부분이 처녀귀신인 것은 ‘남신여귀(男神女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남자 귀신인 남신은 ‘죽어서도 존경을 받으며 현실을 통제하는 파수꾼’이었다. 반면에 여자 귀신인 여귀는 ‘구천을 떠도는 한(恨) 많은 난민’이었다.

일찍이 『여성, 문화,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남성은 문화, 여성은 자연’이라고 했다. 남성이 사회적으로 정교화된 제도 내에서 거둔 성취에 의해 정의되는 한 남성은 남성이 만든 인간 경험체계의 아주 뛰어난 참여자다. 그래서 남성의 세계는 문화라는 것이다. 반면 여성은 공식적인 사회질서 체계와는 무관한 듯 보이는 삶을 영위한다. 그녀의 지위는 생애 주기에서의 위치, 생물학적 기능 그리고 특히 남성에 대한 성적인 또는 생물학적인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 ‘처녀귀신’이 될 수밖에 없는 조선시대 여성의 불행한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는 귀신이 ‘당대 사회의 건강성을 반영하는 지표’라고 했다. 귀신은 단순히 사신(死神)이 아니었다. 그 보다는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어 현실로 찾아온 상담 신청자’라고 했다. 그래서 귀신이야기가 타인에게는 공포물이지만 당사자의 관점에서는 비극이 되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었다. 귀신이라는 공포가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의 이면에는 사회적 모순이라는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귀신은 이것을 온 몸으로 고백하면서 동시에 비판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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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탄생 - 모성, 여성, 그리고 가족의 기원과 진화 사이언스 클래식 15
세라 블래퍼 허디 지음, 황희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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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선택은 좋은 습관일까? 나쁜 습관일까? 진화의 관점에서 적자생존은 허버트 스펜서가 말한 대로 “최고의, 그리고 가장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자의 생존”을 의미했다. 이를 다윈은 당시의 환경에 가장 잘 적응된 개체들이 살아남아 번식하며, 자신이 소유한 속성들을 미래세대에게 전수한다고 했다. 겉만 보면 자연선택은 좋은 습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자연주의적 오류에 불과하다. 즉, 자연의 세계에서 미래세대에게 전수한다는 것은 ‘수컷 간의 경쟁’을 의미했다. 이와는 달리 암컷은 다산(多産)의 연옥, 모성과 동일시되었다.

그래서 세라 블래퍼 허디는『어머니의 탄생(Mother Nature)』에서 자연선택을 ‘나쁜 습관을 노부인’이라고 했다. 이것이 결국 이 책의 제목인 Mother Nature(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어머니 대자연) 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남성은 생산하며 여성은 재생산 할 뿐’이라는 스펜서식의 정당화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여성이 어머니가 된다는 모성이라는 본질주의는 시몬드 드 보부아르가『제2의 성』에서 지적했듯 ‘그녀는 자궁이고 난소다. 그녀는 암컷’이었다.

생물학적으로 모성은 임신과 출산을 말한다. 그러나 부모투자와 성선택에서 보면 모성은 양육으로 확대된다. 자식의 생존 가능성을 위해 부모투자는 불평등하다. 수컷에 비해 암컷이 더 많은 투자를 하게 된다. 그리고 적게 투자하는 수컷은 암컷과 짝짓기를 하기 위해 경쟁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쟁에서 수컷은 암컷 및 새끼를 희생한다. 반면에 암컷은 자기희생을 한다. 그래서 모성하면 좋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 보편적인 진리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 모성에 대해 매우 놀랍고도 불편한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들에게 순수하고 희생적인 이미지인 모성이 정작 자연세계에서 매우 드문 현상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랑구르원숭이를 관찰한 것을 토대로 하여 이를 보여주고 있다. 랑구르의 수컷은 영아 살해를 하며 암컷은 자신의 새끼를 죽인 바로 그 수컷과 함께 번식한다. 이러한 랑구르의 성선택은 한 종의 집단선택의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개체선택을 한다는 것인데 암컷의 짝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이제까지 암컷의 짝 선택은 모성의 이미지였다. 모성은 생명우선론(pro-life)이다. 하지만 암컷의 야망이라고 한다면 선택우선론(pro-choice)이다. 암컷의 번식 성공은 태어나는 새끼의 수가 아니다. 그 보다는 얼마나 많이 살아남아 스스로 번식할 수 있는 데 있다. 그리고 암컷의 모성이든 야망이든 성(性)은 더 이상 운명이 아니다. 암컷의 진짜 운명은 다름 아닌 수유(授乳)라는 것이다. 오직 수유만이 암컷의 성 특징적이다.

암컷은 수유를 통해 두 가지 호르몬으로 영향을 받는다. 하나는 프로락틴이다. 프로락틴은 스트레스 호르몬 혹은 부모 역할 호르몬으로 불린다. 다른 하나는 옥시토신이다. 옥시토신은 어미와 자식 간의 만족감을 형성한다. 그런데 암컷의 수유는 단순히 생리적인 것은 아니다. 암컷의 수유 효과는 사회적 관계를 촉진시킨다. 결국 수유는 ‘사회적이고 지능적인 동물들의 진화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동정심의 능력을 진화시킨 모든 개체들의 운명을 형성’했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그러면 모성은 본능일까? 아닐까? 본능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떤 생물학 기초도 갖지 않는 ‘증여된 선물’일까? 일찍이 스티븐 핑커는『빈 서판』에서 인간은 본성은 백지(白紙)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 본성이라는 종이는 단 한 번도 백지였던 적이 없다’고 했던 해밀턴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다시 말하면 ‘각인된 백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볼비의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에인즈워스의 ‘낯선 상황 실험’을 통해 확고해졌다. 낯선 상황에서 아기들은 ‘불안/양가적, 불안/회피’ 그리고 불안 애착으로 불리는 ‘무질서/혼란’을 겪는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모성은 지뢰밭이라고 했다. 첫째 모성은 자기희생적적이라는 통념적인 기대와 항상 부합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모성의 행동은 논쟁거리다. 만약 모성이 에로틱한 성적 감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면 비난받기 일쑤다. 하지만 저자는 모성과 성성(sexuality)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즉‘성애 행위 동안 발생하는 다양한 오르가슴 수축을 모성적인 것으로 서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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