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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피로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로 풀이하면 정신이나 몸이 지친 힘든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한병철의『피로사회』를 읽으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책은 제목에 나와 있듯 피로 의 원인에 대해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피로란 프로메테우스의 간(肝)이 당하는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벌(罰)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힌다. 이런 프로메테우스는 니체가 말한 ‘주권적 인간’에 가깝다. 그럼에도 저자는 프로메테우스를 ‘자기 착취의 주체’라고 재해석하면서 엄청난 피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성찰하고 있다.
저자는 프로메테우스의 ‘긍정성의 과잉’을 문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긍정성의 과잉이 피로라는 질병을 일으키는 것일까? 저자는 이 책의 시작을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고 하는 주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피로를 질병의 매커니즘으로 진단하고 있다. 질병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전염성 질병이며 다른 하나는 경색성 질병이다. 전염성 질병이 박테리아적 혹은 바이러스적이라면 경색성 질병은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 같은 신경증적이다. 전염성 질병은 면역학적인 공격과 방어를 최우선으로 한다. 하지만 경색성 질병은 면역학적인 처방으로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면역학의 근본 원리는 간단하다. 타자성과 이질성에 부정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타자성과 이질성은 곧 제거의 대상이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하려고 하는 부정 분자’이다. 그래서 자아는 ‘타자의 부정성을 부정함으로써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다. 면역학적 예방법이 다름 아닌 ‘부정성의 변증법’을 따른다. 그러나신경성 질병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비면역학적이다. 과잉으로 인한 소진, 피로, 질식이라는 비면학적인 시스템에서 저항력을 강화시키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긍정성의 과잉에는 부정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신경성 질병은 ‘긍정성의 변증법’을 따른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에서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런 질병들이 시대와 불가분의 관계에서 파악된다는 것이다. 즉 지난 세기는 면역학의 패러다임으로 푸코의 규율사회가 맹목적이었다. 정신병자, 감옥,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금지, 규율, 강제, 타자에 대한 거부 등등 부정성의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 성과사회다.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성과사회에서는 능력, 자기 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등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긍정성의 과잉이라는 성과사회의 질병을 면역학의 패러다임으로 치료하는 것은 시대착오에 불과하다.
우리는 규율사회에서 면역 주체 혹은 복종적 주체가 된다. 면역 주체에게는 ‘~해서는 안 된다.’가 지배적인 조동사다. 물론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과사회에서 성과주체가 된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답게 무한정 ‘할 수 있음’이 지배적인 조동사다. 겉만 보면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은 부정성에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으며 결과적으로 ‘활동과잉’이라는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능력의 긍정성이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성과사회의 새로운 인간형인 성과주체를 노동만 하는 동물로 규정한다. 노동만 하는 동물은 복종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가 된다. 그러나 성과 과잉을 위해 ‘강제하는 자유 혹은 자유로운 강제’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영혼을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역설적 자유로 인해 노동만 하는 동물은 자기 자신을 착취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노동만 하는 동물은 착취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그래서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인 우울, 피로, 소진이라는 자폐적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긍정성의 과잉에 따라 영혼이 경색되거나 탈진되고 나면 피로는 폭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자신의 괴물 이미지를 더욱 강화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사회가 우울한 까닭은 피로가 극대화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사회는 좋은 삶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생존을 위한 멀티스태킹을 강요한다. 이것은 마치 수렵자유구역의 동물과 같다. 동물은 생존을 위해 지속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노동만 하는 인간은 전혀 동물적이지 않다. 동물은 노동의 과잉이 없는 대신에 느긋함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거꾸로다. 벌거벗은 노동에 대해 벌거벗은 생명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호모 사케르’가 되고 만다. 더구나 성과사회에서 호모 사케르는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특성이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죽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한병철의『피로사회』는 ‘우울증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대한’ 효과적인 피로회복제여서 주목할 만하다. 약학적인 도핑적 피로는 성능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할 뿐 생명 활동으로 환원하지 못한다. 이것은 자아의 잉여와 반복에서 비롯되는 ‘자아 피로’에 불과하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치유적 피로’는 차원이 다르다. 치유적 피로는 한트케가 말한 ‘눈 밝은 피로’다. 눈 밝은 피로는 영감을 주는 피로다. 즉 자아 피로가 탈진의 피로이며 긍정적 힘의 피로라고 한다면 치유적 피로는 근본적 피로이며 부정적 힘의 피로, 무위의 피로다. 부정적 힘의 피로는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말한다. 만약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오늘날 우리는 피로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나 피로한 상태여서 불안하다. 이런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는 법을 달리해야 한다. 바로 저자가 제시하는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색적 삶은 곧 실천적 삶이 될 것이다. 가령, 피로가 직사각형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직사가형의 넓이를 계산하는 방법으로 피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로가 도덕적 직사각형이라고 한다면 계산만으로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보다는 사색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머뭇거리는 능력’, ‘분노하는 법’, ‘깊은 심심함’그리고 ‘돌이켜 생각하기’는 활동적 삶을 비판하고 치유하는 실천적 지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