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
존 카치오포 외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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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있다. 행복한 사람과 외로운 사람 중에 누가 쿠키를 많이 먹을까? 답은 외로운 사람이다. 우리 뇌는 외로움을 치유하기 달콤하고 기름진 물질을 찾게 된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보다 외로운 사람이 쿠키의 맛을 더 좋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또한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외로움이 사라진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만성적인 외로운 사람이 쿠키를 많이 먹게 되어 결과적으로 비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겠지만 외로운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해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는 근거를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외로움이 불러일으키는 간섭 효과(interference effect)이며 이것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자기조절 능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간섭 효과란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것을 말한다. 가령, 눈앞에 보이는 쿠키를 먹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정작 쿠키를 먹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 방해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외로움이 불러일으키는 간섭 효과는 사회적인 유대감을 방해하면서 자신감의 결여와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악화시킨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만성적인 외로움은 사회적 고립감과 노화를 가속화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혼자 살 수는 없다. 혼자 사는 것은 혼자 있는 시간과는 다르다. 혼자 있는 시간은 뭔가에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즐거움이다. 하지만 혼자 사는 것은 사회적 고독이라는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회적 유대감이 요구되는 것이다. 만약에 사회적 유대감이 낮거나 없다고 한다면 우울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전적으로 유전자를 탓할 수만은 없다. 일찍이 에드워드 윌슨은 유전자는 우리의 행동을 제어하는 ‘규제 장치’를 제공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규제는 탄력적이며 유연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 행동에서 유전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못지않게 환경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이다. 우리는 환경에 따라 외로움을 달리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환경적인 요소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문화적 특성이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외로움을 더욱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사회적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개미나 벌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개미나 벌들은 몸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을 통하여 의사소통을 하면서 개인의 행동을 제약하면서 공동생활을 한다. 다시 말하면 사회성이 강한 곤충들은 화학물질 같은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화학물질이 아닌 문화에 의해 우리의 행동을 조절하게 된다. 결국 문화적인 규범과 개인적인 욕구 사이에서 외로움은 복잡하고 미묘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외로움이 심할수록 치유하는 방법이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사회적 조절 가설(social control hypothesis)’을 인식하게 된다. 사회적 조절 가설이란 사회적 고립이 우리의 심신을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주위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는 친구가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은 비만이 되거나 과음하거나 흡연하게 될 가능성이 훨씬 높게 된다. 사회적 유대감이 없는 상황에서는 사회적 고립감은 채찍이다. 반면에 사회적 유대감에서 느끼는 친밀감은 당근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외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만 채찍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사회적 유대감을 갖기 위한 방법으로 ‘EASE’는 아주 간단하다는 것이다. 즉 첫째, E(Extend Yourseif: 다른 사람에게 손 내밀기)다. E는 안전하고 작은 일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가령, “오늘 날씨 참 좋죠?”라는 인사말을 하는 것이다. 둘째, A(Action PIan: 구체적인 행동 계획)이다. A는 사회적 유대감은 인기 경쟁이 아니라는 것이며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데 자신의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다. 셋째, S(Selection: 선택)이다. S는 사회적 관계는 양(量)이 아니라 질(質)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령, 상대방의 외모나 지위에 이끌리는 유대감은 좋지 못하며 자신과 닮은꼴의 관계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넷째, E(Expect the Best: 최선을 기대하기)다. E는 사회적 만족을 위해 자신을 보호하려는 독단적인 행동을 포기하는 것으로 호혜주의 힘이 되는 것이다.

 

외로움. 흔히 군중 속의 고독을 말할 때 쓰는 감정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외로움이란 사회적 유대감이 사라질 때 느끼는 고통이다. 이러한 요인은 인간은 침팬지나 보노보와 달리 ‘제3의 적응 방식’으로 진화한 탓이다. 인간과 침팬지, 보노보의 DNA가 98% 이상 일치하더라도 그들의 적응방식은 달랐다. 즉, 침팬지, 보노보가 이기적인 두뇌라면 인간은 사회적 두뇌를 발달시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사회적 두뇌는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사회적 관계를 만들었다. 따라서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 ‘사회적 유대감에 신경을 쓰고,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뻗고, 끊어진 관계를 원하라고 촉구하는 자극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외로움이라는 자극제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지나친 고독감 때문에 심신을 마모시킬 정도로 자기 조절력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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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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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페투움 모빌레(perpetuum mobile)이라는 기묘한 기계 장치가 있다. 이 기계 장치는 스스로 움직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다. 즉, 운동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새로운 에너지가 투입될 필요도 없다. 그래서 페르페투움 모빌레는 모든 물리학자들에게 꿈의 기계 장치였다. 꿈은 희망인 동시에 환상이다. 희망이 많다고 하면 꿈은 실현 가능하다. 하지만 꿈이 환상적이라고 하면 실현이 불가능하여 기묘한 상태가 된다. 그런데 물리학에서는 그토록 어려웠던 문제도 사회학에서는 가능한 이유는 뭘까? 아마도 이러한 고민 때문에 사회학을 다루는 넓고 깊이 있는 생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액체 근대』,『유동하는 공포』라는 망각하기 쉽지 않은 책을 통해 알게 된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고는 근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탐색한다. 바우만은 근대를 20세기 근대와 21세기 근대로 나눈다. 20세기 근대를 근대라고 했을 대 21세기 근대는 이차 근대, 탈근대 등등 여러 가지 용어로 쓰여 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하여 저자는 감각적이면서도 쉽게 ‘고체 근대와 액체 근대’로 사고를 확장시킨다. 고체 근대가 견고해서 무거운 근대라고 한다면 액체 근대는 유동적이어서 가벼운 근대라는 것이다. 그런데 액체 근대의 주체는 자유를 누리는 듯 보이지만, 바로 그 대가로 개인의 불안, 불행에 대해 홀로 무한책임을 지도록 강요당한다.

 

그래서『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다루고 있는 통찰력 있는 사회적인 이슈들은 하나같이 주목할 만하다. 앞서 고민했던 문제에 대해 바우만은 사회적 삶은 물리학이 다루는 현상이 아니라는 독특한 주장을 펼치면서 열역학 제 2법칙(엔트로피)가 적용되지 않는 힘을 지닌 놀라운 기계장치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엔트로피를 모든 과학의 제 1법칙이라고 했다. 간략하면 엔트로피는 열은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흐르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에너지가 손실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제러미 러프킨은『엔트로피』에서 엔트로피를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사용이 가능한 것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혹은 이용이 가능한 것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또는 질서있는 것에서 무질서한 것으로 변화한다.’ 고 지적했다. 결국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액체가 되는 것이며 무질서의 상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고독은 액체일까? 고독은 단단하다. 결코 유연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눈으로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독한 인간은 생각하는 인간이다. 고독을 저울질하는 생각의 정도에 따라 고독은 얼마든지 유연해질 수 있다. 이것이 곧 고독의 액체화이며 고독을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고독이 유동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일분일초라도 손 안에 스마트폰이 없다고 하면, 트위터와 카카오톡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답답함은 고독보다 더 단단하다. 어쩌면 그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립에서 오는 불안감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트위터의 속성상 새들처럼 지저귀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우리의 생명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바우만이 지적하는 것처럼 140글자의 유행이라는 것이다. 유행이 단순히 모방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더 이상 어떤 해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우만은 물리학 용어를 사용하면서 유행이라는 운동에너지는 소멸되지 않는 ‘잠재적인 에너지’ 즉, 그 자신의 운동량만으로도 계속해서 무한정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우만의 견해에 따르면 유행이야말로 사회학적으로 가능한 페르페투움 모빌레가 된다.

 

유행은 두 가지 인간의 욕구와 열망이라는 운동 에너지에 의해 움직인다. 인간의 욕구는 ‘개성이나 독특성을 추구하려는’ 것이며 인간의 열망이란 ‘보다 큰 전체의 부분이고자 하는’ 것이다. 좀 더 살펴보면 ‘무언가에 소속되어 일체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꿈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꿈, 또한 사회적인 지원에 대한 욕망과 동시에 자율성에 대한 강한 욕망, 모방하려는 충동과 동시에 구분되려 애쓰는 충동’이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안전’과 ‘자유’다. 안전과 자유는 서로 모순된다. 그래서 안전과 자유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데 코스트 최소화(cost minimization)가 중요한 목적이 된다. 하지만 코스트 최소화는 불확실하고 위태로워 오히려 자신을 고갈시키는 창조적인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간과할 수 있다. 유행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창조적인 에너지가 될 수도 있지만 그 이면을 보면 개성의 상실이라는 역효과를 초래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유행을 소비할수록 인간 상실이라는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동하는 세상에서 ‘보여지는 존재’에 대한 욕망은 프라이버시를 해체하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프라이버시를 개인의 비밀이라고 한다면 사적이며 닫힌 공간이 된다. 만약 누군가 내 비밀을 알고 있다면 더 이상 주권(sovereignty)이 없게 된다. 주권은 ‘내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다. 하지만 우리는 네트워크된 사회에서 끊임없이 접속해야 한다. 그 결과, 우리는 공적이며 열린 공간에서 프라이버스를 해체 당하고 있다. 겉만 보면 네트워크는 인간들 상호 간의 강력한 유대를 형성하는 것 같다. 하지만 비밀이 없는 유대 관계는 오히려 인간들 상호 간의 우대들이 모두 약화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된다. 개인은 집단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잠시 인터넷을 차단하고 휴대 전화도 끄는 등등 디지털 도구에서 자유로워지면 완전한 고독을 만끽할 것이다.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의사소통의 기술은 환상에 불과할 뿐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프라이버시는 인터넷으로 일상화된 의사소통의 기술의 단념과 절제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유동하는 근대를 산책하며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44개의 편지를 보냈다. 44개 편지에 담긴 사유의 주체는 고독, 세대차이, 오프라인과 온라인, 질병 권하는 사회, 공포에 대한 공포, 경계 긋기, 운명과 성격과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사유를 통해 저자는 유동하는 근대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어떻게 얄팍하게 하는지 규명하고 있다. 가령, 유동하는 근대에서 플렉서블(flexible) 존재로 사는 방식은 하나의 질서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가『순수와 위험』에서 말한 것처럼 질서란 바로 ‘적절한’ 사물들이 그 어떤 다른 자리가 아니라 바로 정확히 있어야 하는 그 ‘제자리’에 위치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물들의 적절한과 제자리를 판단하는 것이 ‘경계’라는 것이다. 경계는 ‘질서를 보전하거나 복구하는 일’을 하기 위해 원하지 않는 것들을 제거해야만 하는 ‘청소’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계의 양면성에 따라 ‘바람직한 사람’이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람직한’에 대해 반항하게 된다. 반항의 본질은 카뮈의『시지프 신화』을 통해 보다 깊이 있게 보게 된다. 즉,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올리는 한 차원 높은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만사가 다 잘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통해 자신만의 구원하고 싶어 한다. 행복한 시지프는 부조리한 운명에 맞선 자기애이며 자긍심이다. 행복한 시지프는 자신의 고통을 자신이 짊어지고 가면서도 강인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럼에도 바우만은 반항하는 인간으로 행복한 시지프보다는 프로메테우스을 주장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주었다는 벌로 고통을 받는 존재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얼마든지 돌과 불의 문제에 부딪칠 수 있다. 돌이 자신을 위한 문제라고 한다면 불은 타인을 위한 문제다. 이때 우리가 유동하는 세상에서 선택해야 할 것은 프로메테우스처럼 타인들의 비참한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아닐까? 유동하는 삶의 위기에서『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여러모로 한 평생의 지식이 될 만큼 놀랍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장석주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리의 껍질이 아니라 진리의 낟알들을 찾고 가려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때문인데 완전히 고독한 순간까지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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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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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힐티가『행복론』에서 말했던가요? 사람이 의식에 눈뜬 최초의 순간부터 의식이 사라질때까지 가장 열심히 찾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역시 행복의 감정이라고.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바랍니다.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서 행복을 손에 넣을 수는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불행합니다. 행복의 방정식에 있어 행복한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행복하다고 합니다. 반면에 불행한 사람은 행복으로 역전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사실상 행복은 나중에 생겨나는 감정입니다. 불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이켜보면 불행이 불행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강상중의『살아야 하는 이유』는 고민의 흔적이 뚜렷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좌절과 절망을 외면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더더욱 고민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스포츠화하면서 고민꺼리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적인 잣대에서 ‘베스트 원’이 되고자 합니다. 이런 경쟁에서 이제 우리에게 호모 사피엔스는 유효하지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호모 파티엔스’(home patiens) 즉, 고민하는 인간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생각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불투명하게 한다면 고민은 투명하게 합니다. 문제는 투명함의 정도에 따라 고민은 양날의 칼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고민은 진짜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것인 반면에 지극히 사적이고 지나치다 싶으면 ‘자기추방’내지 ‘자기비방’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을 독파하면서 근대의 병인(病因)인 고민을 다섯 가지 키워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돈, 사랑, 가족, 자아의 돌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절망입니다. 돌이켜보면 다섯 가지는 지금의 고민과 상당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 기법을 빌리자면 그만큼 ‘사생’(寫生)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민에 휩싸인 사람은 겉만 보면 얼마든지 문제적인 인간이라고 속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윌리엄 제임스가『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말한 ‘거듭나기’(twice born)을 언급하면서 고민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임스에 따르면 거듭나기는 ‘병든 영혼’의 소유자가 하는 것으로 마음의 병을 앓고 나서 그때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가치, 인생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건전한 마음’의 소유자는 ‘한 번 태어나는 형’(once born)으로 인생에 대한 이런 저런 고민이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살아갈 근거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거듭나기’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을까요? 저자는 빅터 프랑클이 말한 ‘인간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세 가지로 분류’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 질문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는 창조, 경험, 태도입니다. 이중에서 프랑클은 인간의 가치 중에서 태도를 가장 중요시 했습니다. 뭔가를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를 경험하는 것도 아닌 뭔가를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도 인간다운 업적을 하는 것이 곧 태도라는 것입니다. 가령, 톨스토이의『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 일리치는 죽음의 고통 때문에 힘겨워하는 가족들뿐만 아니라 자신조차 구원받지 못한다는 태도를 깨닫고는 ‘죽음은 끝났다!’라고 하면서 비로소 행복했습니다.

 

우리들은 유한한 존재여서 행복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라는 고민에 항상 쏠립니다. 무엇이 행복의 시작과 끝이라고 여기며 모두들 미래를 바라보며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눈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살아야 하는 고민에 대해 언제든지 “예”라고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거듭나기’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창조나 경험이 아닌 태도를 통해서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비하면 어쩌면 소극적인 방법에 지나지 않을까, 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태도에는 ‘진지함’과 ‘사랑’이 책임이 뒤따라야 합니다. 만약에 진지함과 사랑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한 번 태어나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고민하는 예리한 통증을 느낄 때 비로소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행복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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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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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있다? 신이 없다?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그것은 사회를 이루는 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에 대해 제대로,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파스칼처럼 내기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파스칼은『팡세』에서 신이 있다와 신이 없다,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우리에게 수지가 맞는지를 따져보았다. 그리고 내기라는 확률론으로 신이 있다는 것이 이롭다고 하였다. 파스칼 말대로 종교는 '존중할 만하다, 인간을 올바르게 알았으므로. 사랑할 만하다, 참된 행복을 약속하므로.' 그러나 기독교를 옹호하면서 성서학의 핵심이 되는 ‘숨은 신’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이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 같아 달갑지 않았다. 또, 하나님의 심판, 즉‘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이라고 하는 따끔한 두려움은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초월적 신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삶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닌 탓에 때로는 우리의 감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모든 것을 인과의 원리로만 생각한다면 삶의 자잘한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삶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은 나약한 인간의 변명에 불과하다.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큼이나 삶을 초월하는 것은 어찌 보면 삶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초월이라는 가능성의 힘을 이용하여 인생을 좀 더 깊은 심연에서 이해하고자 열망한다. 하지만 문제는 절대자로부터 삶의 위로와 믿음을 구하는 것이 정말로 최선의 선택이라는 데 있다. 이것이 가장 종교적인 구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 시대에 가장 정상적인 삶의 모델은 뭘까? 필 주커먼은『신 없는 사회』에서 제목 그대로 ‘신 없는 사회’라는 우려를 말끔히 씻어 내리고 있다. 저자 말대로 요즘 세상이 어느 때보다 종교적이라 신이 없다, 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은 망상에 가까울 만큼 텅 빈 생각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종교적으로 떨리는 마음으로 읽으면 신이 없다, 라는 것만큼 단단한 생각은 없다고 할 정도다. 무엇보다도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는 마치 다이아몬드 같다. 다이아몬드는 가장 단단한 물체인데 놀랍게도 속은 텅 빈 상태다. 또한 무색에 가까울수록 더욱 빛이 잘 투과되어 찬란한 무지갯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가 물질의 가장 좋은 결과를 얻어내듯 신 없는 사회는 삶의 결정체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저자는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현실 속에서 삶의 결정체가 가장 좋은 결과가 나타난 곳으로 덴마크와 스웨덴을 주목했다. 이유인즉 이 두 나라는 비종교적이다. 종교적 열정이 그다지 없기 때문에 신 없는 사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두 나라가 가장 살기 좋고 쾌적한 곳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깨닫게 해준다. 흔히 종교가 없다고 한다면 현실이 지옥 그 자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강요한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고 하거나 죄악으로 도덕을 지키게 한다. 하지만 두 나라를 보면 정반대다. 두 나라는 종교에 대해 회의적이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도 ‘매끈하고 공정하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오히려 청교도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세운 가장 종교적인 미국이 종교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미국의 종교적인 갈등과 불신이 암묵적 계속 되고 있는 것은 단지 그들만의 고민이 아니라 세계적이다.

 

 

저자는 가장 종교적인 결과가 나타난 미국과 덴마크, 스웨덴을 비교하면서 종교 없이도 세상이 안정적 잘 돌아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모호하면서도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의 상식으로 종교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교회를 간다든가, 기도를 드린다, 라는 종교적 활동을 한다는 게 사실상 어려워 보인다. 한편으로는 이런 어려움을 참고 종교적 활동을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모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은 그런 모순이 아무렇지 않게 일상화 되어 있는 독특한 사회다. 가령, 두 나라에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 심지어 구원이나 부활도 믿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들이 냉소적이거나 염세적이라 그런 것일까?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다양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 있으며 그들이 ‘합리적인 회의주의자’라는 것을 자연스러운 사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들의 종교적 무관심이라는 모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는 생각이 온화하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인간의 좋은 점들을 믿는다. 그 좋은 점들이야말로 기독교의 진정한 본질이다. 다른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것, 노인을 보면 반드시 도와야 한다는 것 등등. 이런 것들이야말로 살아가면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좋은 규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이다.(p 27)

 

 

돌이켜보면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될 규칙이다. 그래서 반종교적인 사람은 규칙을 어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종교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종교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그것은 살아가면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좋은 규칙이기 때문이다.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절대적인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으며 좋은 규칙은 조금은 어겨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곧 ‘초월적 종교’와 ‘문화적 종교’를 구별하게 한다. 이 책의 의도대로 죽은 뒤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인터뷰를 통해서 두 가지 종교적 믿음을 간단하게 답할 수 있다. 즉 초월적 종교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천국에서 두 팔 벌려 나를 기다리실 거예요.” 반면에 문화적 종교의 입장에서는 “그냥 죽는 거죠.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제대로 살아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문화적 종교가 단순히 세속주의자들이 자기 이득만 생각하면 하는 것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문화적 종교는 문화적 관성으로 ‘그냥 항상 해오던 일’이다. 이러한 까닭은 문화적 종교에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기 정체성 또는 집단 정체성이며 다른 하나은 명목상의 종교 활동이다. 나머지 하나는 무신론자에 대한 반대다. 먼저 자기 정체성 또는 집단 정체성을 살펴보면 초자연적인 요소에 대한 믿음은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명목상의 종교 활동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종교적 신앙 없이도 각종 의식과 명절, 통과의례 등에 참가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무신론자에 대한 반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도 뭔가 커다란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저자는『신 없는 사회』에서 덜 종교적인 나라에 대한 깊은 호기심으로 종교적 모순과 한계를 명쾌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일까? 그동안 종교에 대해 ‘불편한 백지상태’였다면 앞으로는 덴마크, 스웨덴 사람들처럼 ‘편안한 백지상태’로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편안하다는 것은 옮긴이의 말처럼 신이 없는 사회라고 해서 정말로 신의 존재가 아예 없는 사회가 아니라 ‘종교의 힘이 약한 사회’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를 믿지 않아도 내 가치관이 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초월적 종교에 대한 불완전한 믿음보다는 ‘문화적 종교’라는 세속주의가 가장 합리적인 믿음이라고 하겠다. 종교의 위기와 사회적인 문제가 서로 겹치고 있는 시점에서 이 책이 던지는 질문과 대답은 우리에게 ‘문화적 종교’를 성찰하게 한다. 이것이 종교적인 세상에서 삶의 행복을 위한 필 주커먼의 가장 순수한 긍정이며 매혹적인 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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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일에서 만족을 얻는가 - 영혼 있는 직장인의 일 철학 연습
배리 슈워츠 & 케니스 샤프 지음, 김선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일이 없다면 모든 인생은 부패한다. 그렇지만 일에 영혼이 없다면 인생은 질식사한다.

-알베르 카뮈-

 

베리 슈워츠· 케니스 샤프의『어떻게 일에서 만족을 얻는가』에 대해 궁금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답을 하기 때문이었다. 바쁜 일상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일하는 인간, 즉 ‘호모 워크스’(homo workers)와 마주 친다. 만약에 일을 하지 않는다면 카뮈 말대로 우리의 인생은 부패할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일을 하면서도 왜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 기계적인 탓에 아무런 삶의 가치도 없을 것이다. 오직 일해야 하는 규칙만 있고 대신에 일해야 하는 영혼이 없다면 앞서 카뮈가 경고한 대로 우리의 인생은 질식사할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질식사의 위험에 놓여 있다. 이러한 까닭은 이 책의 제목에 나와 있듯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 만족’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일을 하다보면 선택을 해야 하는 수많은 순간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업무의 규율과 목적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가령, 교사는 학생들이 카르페 디엠, 즉 오늘을 즐기면서 공부를 하도록 이끌어 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학생들의 성적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에 최선이 아닌 획일적이고 표준화된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결국 교사는 무력감이라는 굴레 탓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만족의 딜레마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이 책의 저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phronesis)를 제시하고 있는데 충분히 고전적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추상적이거나 소수만 갖춘 재능이 아니라,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하는데 있어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이론이 아닌 실천의 문제로 파악했다. 즉 분노가 좋은가, 나쁜가라는 추상적인 질문보다는 ‘누구에게 얼마나 오래, 어떤 식으로 무엇을 목표로 화를 내야 하는가’가 중요했다. 따라서 우리가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똑똑함’이 아니라 ‘탁월성’을 발휘해야 한다. 탁월성

(excellences)이란 자제력, 공정성, 용기, 포용력 같은 기질을 일컬으며 달리 ‘미덕’(virtues)으로 불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된 탁월성, 즉 실천적 지혜는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사회공동체의 미덕을 요구한다. 그러려면 먼저 ‘도덕적 자각’이 절실하다. 실천적 지혜를 실천하는 사람은 특수성을 인지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이해라는 서사 구조를 지닌 존재여서 ‘도덕적 상상력’과 ‘감정이입’이 요구된다. 도덕적 상상력은 ‘다양한 상황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간파하는 능력이며 감정이입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는 정서적 기술이다. 그러나 도덕적 자각만으로 부족하여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통찰력(자기 성찰)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우리는 행동을 조율하면서 적절한 균형을 추구한다. 적절한 균형은 곧 ‘중용’이라고 하는데 산술적인 평균이 아니라 ‘공감과 거리감을 조율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내면으로는 공감하고 이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냉정함과 객관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이 책은 실천적 지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삶을 향상시키고 있다. 그리고 삶을 향상키는 목적은 행복을 조명하는 것이다. 행복학에 있어 ‘긍정 심리학자’로 불리는 마틴 셀리그먼은 자기가 하는 활동에 빠져드는 ‘몰입’과 자신이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의 삶과 연결하는 ‘의미 찾기’를 행복의 ‘대표적 강점’(signature strengths)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직업 심리학 교수 피터 워는 ‘자기 일에 만족하려면 몰두와 열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다채롭고, 일 처리 과정에서 재량권이 있어야 하며, 회사의 목적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심리학자 에이미 브제스니에프스키는 앞의 주장을 뒷받침하면서 ‘소명’(calling)과 ‘생업’(job)이나 ‘직업’(career)을 구분했다. 브제스니에프스키의 주장에 따르면 재량권을 가진 자기 일을 소명으로 하는 사람들은 일에 크게 만족한다. 이것이 바로 ‘일과 지혜의 선순환’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공공기관이나 병원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제도를 원활히 운영하기 위해서는 규율과 인센티브가 원칙적으로 필요한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원칙이 바람직하다고 해서 모두 올바른 것은 아니다. 바람직한 원칙에도 판단이 들어가지 않으면 오히려 위험해지고 만다. 즉 규율과 인세티브가 재량권을 통제한다면 실천적 지혜를 발휘할 수 없는 부작용이 생긴다. 저자 말대로 규율이 도덕적 기술을 없애고 인센티브가 의지를 꺾는다, 는 것이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결과적 똑똑한 만큼 무심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기 일을 생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한계는 최소한으로 몰입하면서 최소한의 의미 때문에 만족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일과 규율의 악순환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실천적 지혜가 일과 지혜의 선순환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현명한 선택을 한다면 우리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며 더 나아가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떠한 일의 목표나 목적을 가리켜 텔로스(telos)라고 했다. 진정한 행복은 실천적 지혜를 가지고 텔로스를 찾아내고 추구하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행복과 함께 친밀한 사회적 관계에서 ‘온전한 행복’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성과주의, 능력주의의 문화로 인해 공정성이 불안정하고 삭막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럴 때 실천적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살 맛 나는 세상’에 대한 만족감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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