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신의 봄을 여름과 바꾸어야 한다는 말인가?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봄에는 어떤 감동이 피어날까요? 봄이 오고 있음을 나무는 먼저 알고 있습니다. 나뭇가지마다 꽃망울이 부풀어 올라 머지않아 꽃망울이 터질 것이고 꽃이 활짝 필 것입니다. 우리가 봄에 느끼는 감동은 꽃의 향연입니다. 더구나 삶이 엉망진창일 때 꽃을 바라보는 것은 축복에 가깝습니다. 나무가 식물이라는 수동적인 자세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 것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무 또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배리 로페즈의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는 놀라운 에세이였습니다. 그의 탐구적인 시도는 우리 시대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우리 시대 최고의 자연 작가라는 거대한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55년간 80여 개 나라에 이릅니다. 그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인간, 비인간들을 만났습니다. 비인간의 경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간이 아닌 모든 것이 비인간이라는 발견, 이 모든 것이 삶이었습니다. 인간이나 비인간 모두 도구가 아니라 생명으로 연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간과 닮지도 않고 비슷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비인간으로부터 지혜를 얻었습니다. 마치 하늘 위 구름 한 조각, 티끌 한 점 없이 청결한 공기, 덤불숲 회색곰 등등.


그중에서도 독특하게 장소에 대한 예찬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장소는 단순히 여행의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장소는 우리의 실존적 고독감을 해방시켜주는 곳입니다. 그가 오스트레일리아 노던 준주의 타나미 사막, 아프리카 남서부 해안의 나미브 사막, 캐나다 북극권의 엘즈미어섬 등등 세계 끝까지 갔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인간과 장소에 대한 관계의 속성을 알려짐으로 교감하면서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느냐? 를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작가라는 사회적 책임에 헌신하며 자연을 위해 선도적인 대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줄곧 자연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명을 개발하고자 하는 탐욕 때문에 자연을 스스럼없이 파괴해왔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당연한 권리고 자연의 당연한 희생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절박해졌습니다. 도저히 견디기만 해서는 절박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이상하고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악몽 같은 현실을 맞닥뜨린 지 오래입니다.


우리 시대의 미래는 좋은 삶의 가능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환경으로 부터의 위협이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경각심이 되었습니다. 이제 자연의 신비로움을 되찾기 위해서는 실존적인 지혜가 필요합니다.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불신하는 잘못된 과거를 반복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느낀 저자의 생각은 공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진화해왔습니다. 우리에게도 긍정적인 지혜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연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유인즉 너 자신이 아닌 세계에 인내심 있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184p)은 따뜻하고 평화로운 연민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연민은 자신에게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오늘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의 지난 시절은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와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상처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의 고통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복수하고픈 심정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이 감당해야 할 또 다른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나머지 적당한 침묵으로 아픔을 버텨냈습니다. 침묵은 복수의 칼날이 자신을 겨누는 반복되는 슬픔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슬픔의 피해자라는 것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슬픔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화목하고자 했습니다. 좋든 싫든 슬픔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슬픔을 이해하면서 가해자의 악몽에 공감하는 큰 포용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조차 긍정하게 만드는 자기 존중이라는 빛을 어디에서 찾았는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무한히 용서하고 무안히 위로하는 빛이라는 중심축이 있었다. 유칼립투스 나뭇잎과 어도비 벽돌집의 옅은 벽면과 출렁이는 수면까지, 주위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적시는 빛이 내 존재를 지탱했다. 그 빛, 그리고 나를 하늘로, 나 자신의 바깥으로 끄집어내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던 새들이 내 삶에 희망이라 부를 만한 것을 가져다주었다.(32p)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를 천천히 읽으면서 생명에 대한 생각이 사뭇 바뀌었습니다. 그는 자연 앞에 경건했으며 죽음의 매커니즘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메타포를 깨달았습니다. 그의 기도(祈禱)하는 삶을 통해 너무 아름다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가 다 생명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사막이며 숲이며 강이며 북극이 다 생명이었습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봄, 여름이 다 생명이었습니다.


우리는 꿀벌이 사라지는 기후변화의 위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꿀벌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꿀벌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요? 라는 나침반 같은 질문을 하다 보면 봄과 여름이라는 생명에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심정으로 봄을 여름과 바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삶을 구원하는 배리 로페즈의 섬세하고 묵묵한 시선을 회고하면서 적어도 세상의 불공정한 경쟁에 끌려다니는 것을 반대하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꿀벌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꿀벌의 날개에는 아주 오래된 지혜가 살아있으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자의 후반생 - 새로운 도약을 위한 인생 화두
정진홍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는 매년 6월 16일 블룸스데이(Blooms day)라는 축제가 열립니다. 블롬은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에 나오는 주인공입니다. 사람들이 제임스 조이스를 기념하고자 소설 속 주인공처럼 더블린 시내를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행적을 따라 하거나『율리시스』를 낭독합니다.


그런데『율리시스』가 어떤 책인가요? 영문학사에서 가장 독특하면서도 난해한 소설입니다. 오죽했으면 ‘싫은 사람에게 선물하기 좋은 책’이라는 악명 높은 소리까지 들었을까요?『율리시스』는 1904년 6월 16일 하루 동안 아일랜드 더블린을 무대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단 하루, 좀 더 시간을 확인해보면 6월 16일 오전 8시부터 다음 날 오전 2시 반까지 되는 19시간여 동안 일어난 소설입니다. 한편, 6월 16일은 제임스 조이스가 평생의 반려자인 노라를 만난 첫날을 기억하는 영원한 시간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제임스 조이스를 보면서 미스터리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단 하루,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이 곧『율리시스』입니다. 단 하루 만에 방대한 분량의 『율리시스』를 쓰는 일도 놀라운데 위대한 작품이라는 영광은 더욱 놀라운 사실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떠오릅니다.


이와는 다르게 정진홍의『남자의 후반생』은 하루 만에 읽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율리시스』는 하루 만에 쓴 이야기이지만 하루 만에 읽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반면에『남자의 후반생』은 작가가 40대 시절에 걸쳐 쓴 이야기이지만 하루 만에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인생 화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 화두라는 주제는 감당하기가 어렵고 무겁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시공을 초월한 다양한 사례와 경험들은 쉽고 흥미롭습니다. 그럼에도 죽비소리가 가득 넘쳐납니다. 놀랍게도 죽비소리를 들을 때마다 ‘후반생(後半生)’을 생생하게 깨달았습니다.


무릇 삶을 전반생(前半生)과 후반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생은 정해진 운명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후반생은 “더는 이따위로 살지 않겠다.”라고 각성하며 흔들립니다. 문제는 사람마다 인생의 후반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생이 축구 경기라고 한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반전과 후반전이 명확합니다.


이런 까닭에 인생의 딜레마는 후반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 삶을 선택하는 결연한 의지라고 하더라도 선택에 따른 수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그 후반생을 후회하지 않으며 끝까지 갈 수 있을까요? 어느 것 하나 불확실한 상황에서 한 인간이 감당해야 할 후반생을 패배하지 않고 갈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우선적으로 ‘마음의 굳은살’을 떼어내야 합니다. 보통 굳은살이라고 하면 긍정적으로 여깁니다. 굳은살이 생기는 과정을 보면 반복적인 고통을 참아 내거나 노력을 한 결과물이라 그렇습니다. 이로 인해 굳은살은 마음의 창이 아니라 든든한 방패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굳은살의 선한 영향력은 안타깝게도 체념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굳은살이 박일수록 우리의 마음은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무감각해집니다. 무료한 일상을 반복하고 쉽게 지치고 맙니다. 삶의 의욕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게 보일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어왔던 삶의 가치마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저자는 마음의 굳은살이 일으키는 부작용을 경계하며 인생의 후반생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단련(鍛鍊)하라고 합니다. 단련이라는 한자를 풀이해보면 그 의미가 뚜렷해집니다. 단(鍛)은 일천 번의 일을, 연(鍊)은 일만 번의 일을 말합니다. 마음을 단련해야 비로소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한 것처럼 녹슨 ‘쇠붙이’가 아니라 날선 ‘면도날’로 살아가게 됩니다.


바야흐로 삶을 찬찬히 살펴보면 너무나 절실한 세상입니다. 정진홍의『인생의 후반생』을 읽어보면 송곳 같은 질문이 많습니다. 하나같이 절문(切問)이기 때문입니다. 절문 즉, 절실한 질문은 삶의 원동력입니다. 그러므로 후반생의 절문은 정신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히든 피겨스」(2016) 를 보면서 가슴 아픈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캐서린이 화장실로 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멀쩡한 여자 화장실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그녀는 일하는 건물 밖으로 나와서는 800미터를 뛰어 다른 건물로 들어가서야 비로소 화장실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할 수 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유색인종(흑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유색인종 화장실만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감독은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화장실 문제로 보여주면서 “나사(NASA)에선 모두가 같은 색 소변을 본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화장실이 어떤 곳인가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화장실은 꼭 필요한 장소입니다. 언제 어디서 일어날 줄 모르는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 한 번은 반드시 가야할 공간입니다. 화장실이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존재의 무거움을 참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화장실이 단지 간판으로 걸려 있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알 수 없습니다. 화장실이 어디에,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를 곰곰이 따져야 합니다. 화장실이 멀리 있거나 공간이 좁고 청결 태가 엉망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참아야 할 고통은 계속해서 남아있게 마련입니다. 볼 일을 보고도 왠지 뒤 끝이 좋지 못합니다.


화장실 같은 참사가 반복할 때마다 우리는 인간으로 실격을 당했다는 불편함을 피할 수 없습니다. 뭔가를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 실격이라는 주홍 글자가 새겨지고 맙니다. 이러한 부조리한 사회를 보며 김승섭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로 답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임상학자가 아니라 보건학자의 시선으로 타인의 고통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임상학자는 차트에 적힌 질병을 약으로 처방합니다. 반면에 보건학자는 질병에 스며든 사회 역학을 진단합니다. 질병을 개인의 잘못된 위생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환경을 원인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오줌권’ 투쟁을 계속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줌권은 말 그대로 화장실을 갈 권리입니다. 사회적 약자들 입장에서 화장실에 가는 것은 하나의 투쟁입니다. 가령,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화장실이 두렵습니다. 쉬는 시간이거나 교대 시간이 아니면 화장실에 갈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작업 인력이 부족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결국 화장실을 포기하고 오줌을 참는 게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하지만 노동자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방광염이라는 질병입니다. 이러한 방광염을 약으로 치료하면 일시적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의 고통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는다면 오줌권은 아무 소용이 없는 권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저자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기 위해서 공부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타인은 장애인, 여성, 해고노동자, 트렌스젠더, 성폭력 피해자, 세월호 유가족, 천안함 생존자 등 다양합니다. 이러한 타인은 우리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 들입니다. 우리는 보통 시스젠터(cisgender)입니다. 출생시 법적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합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는 트렌스젠터(transgender)와 같습니다. 출생시 법적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다릅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존재는 상대적으로 차별과 모멸감의 피해자가 되고 맙니다.


그들은 공기처럼 존재하는 차별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가해자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그들은 사회적 약자라는 트라우마에 갇혀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되었으며 그들의 상처 또한 아픔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슬프거나 동정심으로 끝나지 않는 현실입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안타까운 참사는 계속 일어나는 데도 사회적인 변화가 없다는 안타까움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일찍이 플라톤은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하는 것만큼 불공정한 일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어떤 고통은 치료가 아니라 응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응답은 당사자의 고통에 찬 비명이 무엇인지 투명하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자는 자기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오줌권이라는 말이 연구자의 언어인 동시에 정직한 언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유인즉, 당사자의 고통이 아닌 사회적인 고통으로 바라보게 되고 생각을 달라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평등한 세상이 되기 위해서 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틀어버림, 그게 죽음이다.

-사르트르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뭘까? 죽음이라는 불청객이다. 최선을 다하며 끝까지 살고자 하는 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어느 누구도 생명의 법칙을 파괴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있다. 일상적인 그러니까 늙고 병들거나 아파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은 자연적인 죽음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극한상황에서 자살(suizid)을 선택하는 것은 비자연적(非自然的)인 죽음이다.


자살에 대한 거부감은 극명하다. 자살은 단단한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단단한 흉터로 남는다. 흉터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자살은 죽음을 담보로 하여 삶에 반항한다. 반항하는 이미지가 차곡차곡 쌓일수록 삶으로부터의 도피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만약에 삶을 질식시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성은 마비되고 탈출이라는 고통스러운 감각은 살아남게 된다. 여기까지 충분히 면죄부가 허용된다. 그럼에도 자살에 대한 죄책감이 피부에 와 닿게 되면 이상하게도 불편하였다. 


우리는 사회적인 잣대로 뉴스 화면에 나오는 자살을 수동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장 아메리는『자유죽음』에서 우리가 제대로 인지 못하고 있는 자살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자살은 자살을 둘러싼 객관적인 사실들의 결과다. 분명 어딘가 원인이 있으며 원인에 따라 자살이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자살자에 대한 가혹한 상황이 전부일까? 자살자는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운명의 수레바퀴일까? 


그래서 ‘자유죽음(freitod)’을 생각할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하는 고민이다 보니 결코 가벼운 문제는 아니라는 것. 자살과 죽음은 죽음이라는 범주에서 보면 서로 의미가 충돌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살과 죽음 사이에 자유를 놓고 생각하면 낯선 의문들이 생겨난다. 자살이 의미하고 있듯 자살은 자유의 영역이다 보니 자유죽음과의 경계선이 흐려진다. 나를 찌르는 대상이 남이 아니라 나이며 그런 내가 죽음에 이르는 것이 자유죽음과 비슷한 궤도에 있다.


이렇게 자살과 자유죽음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도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무엇이 타당한 선택인지 선명해진다. 자유죽음을 택할 것이다. 삶의 무게감이 시시포스가 밀어 올리는 바위와 같더라도 살기 위해서 자살을 부정하게 한다. 그럼에도 ‘에셰크(echec: 돌이킬 수 없이 실패하고 만 것을 적시하는 단어)’를 구원하는 자유죽음이 이미 내 몸속에서 같이 살고 있다는 위로를 받았다.


어디 그뿐인가. 자살에 대해 질문하는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일찍이 비트겐슈타인은 “대답이 있을 수 없는 질문은 던지지 마라.”고 했다. 바꿔 말하면 대답 자체가 곤란한 질문이다. 자살은 곤란한 질문이지만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죽음은 정말이지 곤란한 질문이다. 어쩌면 대답하기 어렵다고 해서 곤란한 질문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삶에서 정말 중요한 질문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삶의 피곤함과 좌절감이 켜켜이 쌓일 뿐이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인 장 아메리는 ‘자유죽음’이라는 침묵을 깨트리고 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죽음을 성찰하면서 자유죽음에 대한 진실에 접근하고 있다. 자살과 자유죽음을 둘러싼 수동과 능동의 관점은 자살자의 내면에 얼마큼 접근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유죽음은 자살자의 내면으로 들어가 삶의 밑바닥에 가려앉아 있는 죽음을 마주한다. 그리고는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만 하는 인생은 없다.”라고 하며 실존적 부조리를 파헤치고 있다.


실존적 부조리에 따르면 우리에게 생명보다 소중한 가치는 없다. 생명은 ‘없음에서 있음’이다. 이와는 달리 죽음은 ‘있음에서 없음’이다. 우리는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견디며 살아야만 하는 정언명령을 따라야 한다. 비록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있음이 없음보다는 대단히 허무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없는 마당에 삶이 무슨 소용이라 말인가? 생명의 효율성을 최고로 여기며 살아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삶은 정반대로 작용했다. 오히려 생명의 올가미에 둘러싸인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 스스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생명이 아닌 자유죽음의 관점으로 보면 이야기는 사뭇 다르다. 가령, 운동선수는 부상을 당해 더 이상 운동할 수 없다는 괴로움에 못 이겨 그토록 안타까운 눈물을 흘린다. 물론 운동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얼마든지 먹고 살 길은 있다. 문제는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눈물 흘리는 이유를 우리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느냐에 있다. 운동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선수에게 삶의 가치를 호소하는 것은 회복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다. 더구나 죽을 듯 살아가는 정신적 황폐함으로 무작정 손을 놓아버리는 것은 개인의 희생양이라는 주홍글씨를 남기게 된다.


자유죽음이 스스로 손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정신착란이라는 몹쓸 병에 걸린 것은 아니다. 죽음의 방식으로 ‘손을 내려놓는 것’은 타인의 의지가 아니다. 타인의 의지에 일어나는 죽음이 ‘사건’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손을 내려놓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자유’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말대로 자유인은 언제까지 살 것인가 스스로 결정한다. 그리고 자유죽음을 굳이 ‘손’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나와 내 몸은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데 있다. 이러한 까닭에는 ‘나’라는 것이 공간이라면 내부세계인 자아와 외부세계인 내 몸은 시간이라는 주장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손을 내려놓으면 시간이 사라진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려보면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더 이상이 근심이 없다는 것이다.


문득, 왜 자유죽음인가? 라는 문제를 둘러싼 고민을 해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살이 아닌 자유죽음은 왜 사는가? 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까, 혹은 삶의 부당함에도 구토를 참아가며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부조리에 맞서 저자는 자유죽음이라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휴머니즘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말한다. 견디기 힘든 모멸의 순간, 마음의 문을 필사적으로 잠갔을 때 삶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는 인간의 특권이다. 어느 누구도 인간의 특권을 대신할 수 없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오직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만약에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동물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도 동물은 스스로 죽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동물에게 없는 부음(訃音)이 인간에게만 있다는 것은 죽음을 단순히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음을 삶의 진공상태가 아니라 집합체로 믿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자살이 만연하고 있는 ‘자살문화’에서 힘겹게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죽음을 자살과 곧바로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낙인이다. 자유죽음은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죽음이 아니다. 장례식장에 가본 사람은 느끼게 된다.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자유죽음은 죽음으로 뛰어내기 전 출구를 찾아 나선다. 자유죽음을 둘러싼 옳고 그름은 폭력적이다. 결과적으로 죽음의 경계선에서 자유는 삶을 파괴하지 않으며 더더욱 자살을 응원하지 않는다. 누구나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처럼 누구나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있다. 


이러한 메시지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저자의 묵직한 고백을 읽으면서 ‘자유죽음’이라는 네 글자가 죽음의 율법으로 각인되었다. 그리고는 자유죽음을 불청객이 아니라 친절한 손님으로 맞이하니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삶의 어느 순간에 자유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존엄한 삶을 더 발견하게 되었다. 자유죽음이 결코 멀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니체는『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여행자를 5등급으로 나눠 이야기합니다. 그중에서 5등급의 여행자는 ‘자신이 관찰한 모든 것을 체험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와 곧 그것을 여러 가지 행위와 작업 속에서 기필코 다시 되살려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치는 인생의 문제는 권태로운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해결책 또한 권태로운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마치 백과사전을 보면서 맞춤형 지식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고민이라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라는 굴레 때문에 어느 순간 이방인이 되어 제자리를 맴돌고 맙니다. 


하지만 에릭 와이너의『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새로운 여행입니다. 에릭 와이너는 5등급의 여행자의 시선으로 인생의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는 것을 유쾌하면서도 명쾌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지혜가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면 철학은 그 방법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철학자행 특급열차를 타고 14명의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14명의 철학자들을 만나는 순간은 인생의 단계에서 머무르는 간이역입니다. 만약에 간이역에 머무르지 않고 빠르게 지나간다면 우리는 ‘잘못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명제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으로 소크라테스와의 여행이 끝났다고 하면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오래된 지혜를 오늘날 ‘미친 지혜’로 대화를 이어나갑니다. 미친 지혜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합니다. 결과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질문왕’이 되었습니다. 질문왕이 되려면 질문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보다도 좋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순간 놀랍게도 침묵하게 됩니다. 침묵은 발화의 부재가 아닙니다. 저자의 발칙한 생각에 따르면 ‘인정사정없는 자기 심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간디처럼 싸워야 합니다. 간디의 이름을 떠올려보면 싸움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간디는 어느 누구보다도 비폭력을 주장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디처럼 싸워야 한다는 것은 폭력에 맞서 비폭력으로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저자는 간디를 예찬하는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큰 싸움이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싸우는 방식을 바꾸기 위한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티아그라하(진리의 힘)’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힘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능동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의명분을 위해서 자신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의명분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결코 죽이지 않습니다. 세상에 이처럼 좋은 싸움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밖에도 루소처럼 걷고 소로처럼 보고 쇼펜하우어처럼 듣습니다. 그리고 에피쿠로스처럼 즐기고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으며,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며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다가 삶의 종착역에 이르러 몽테뉴처럼 죽는 법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한평생 잘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최선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최악을 견디는 게 99%입니다. 이럴 때 에릭 와이너와 여행할 수 있는『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 동행하는 것은 어떨까요? 철학은 우리 삶의 꼭 필요한 GPS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