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음

 

이 영화 불쾌하고 무겁다. 마치 바다에 가라 앉은 것처럼 온 몸으로 감당해야 할 무게가 스크린을 타고 넘실거린다. 영화가 끝나고 왜 이런 불쾌감이 드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니 딱 지금의 우리가 갇혀있는 사회가 영화의 선박인 '전진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부터 이야기 하자 '전진호' ... 한때는 잘 나가던 이 배는 선주가 폐선처리해야 할 정도로 낡고 고장이 잦다. 완전히 폐기하는 것이 더 이익일 수 있는 이 배... 모든 사건의 배경이 된다.

강선장.. 선장은 '전진호'를 끔찍하게 사랑한다. 이 배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 무엇인든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그리고 그는 저질러 버린다.

 

선원들... 갑판장과 기관장 그리고 선원들은 강선장의 지휘 아래 있다. 강선장도 이들을 잘 챙기는 편이다. 그러나 그이 리더십도 한계가 있는 법. 전진호의 상황은 선장의 리더십이 더 이상 통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유일한 홍일점인 홍매...조선족 밀항자인 그녀는 이 영화에서 피해자이자 구원자로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것으로 때로는 모든 이들의 갈등을 폭발시키는 매개체로...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그녀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피해자이나 구원의 상징이 되어 버린다.

 

스토리로 보면... 생존의 극한에서 벌어지는 우연적인 사고가 인간의 바닥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어디까지가 끝인지 모를 인간의 밑바닥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자 보라... 여기 인간이 있다.

 

불편했던건 '전진호'가 이 사회와 너무 비슷하다는 점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결국 마지막 밑바닥을 보여야 함에서 생존하지 못하고 자멸한다는 점에 있었다... 고 난 느낀다.

시대적 배경도 IMF로 난리가 났던 때이다. 자본의 이동은 유래없이 자유로워졌지만, 노동의 이동으 극도로 제한되는 신자유주의 시발점이 된 그 시절에 '전진호'를 살리기 위해 강선장은 모험을 한다. 이른바 밀항을 시도한 것.

 

불행한 사고로 밀항자들은 모두 죽고 홍매라는 조선족 여인 하나만 살아 남는다. 사건을 외부로 알리지 않으려면 홍매를 제거해야 하지만 홍매를 사랑(?)하는 동식은 홍매를 구하기 위해 강선장에게 대항한다....

 

이 영화를 도식적으로 풀자면 신자유주의로 돌입한 이 사회는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라는 사회가 어떻게되던 상관없이 되어 버린다. '전진호'의 쇠락과 몰락이 상징하는 바다. 그러나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들은 어떻게든 그 사회를 구해내야 한다. 그것을 대변하는 사람이 강선장이다. 그러나 이미 관철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인 질서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어림도 없다. 위험하더라도 무언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그 방법이 밀항이다. 이 밀항은 자본의 요구를 위해 노동력을 준비해야 하는 요구와 그 노동력이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소모품처럼 쓰여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가부장적인 지도력의 파괴가 준비된다. 특히 선원들 중의 막내는 이시대의 청년과 연결된다. 선원 중 막내인 동식은 '전진호'가 무너지는 것이 안타깝지만 '전진호'를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홍매로 상징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은 강선장의 리더십을 해치고 결국 '전전호'를 살리는데 방해가 되므로 철처하게 응징된다. 이때 동식은 싸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의 청년들이 사회에 복종하지만 결국 버려지는 것에 분노하듯이 그는 강선장을 따르지만 마직막을 함께 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한 거대한 비유... 그 비유에서 느껴지는 현실감에서 느껴지는 불쾌함.

이 영화가 무겁고 아프지만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다. 아직도 우리는 자욱한 해무 속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있다. 그 막막함에도 조금이라도 생존하기 위해 벌이는 싸움은 우리를 더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라는 거대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다 잊고 새롭게 경제를 살리자고 떠들어 대고 있다.

 

이런 영화가 '명량'에 밀려 고전하는 것이 아쉽지만... 결국 시간의 이 영화를 가치를 평가할 거라 믿는다.. 조조로 봤더니 하루가 좀 어둡게 느껴지는 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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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아서는 인류가 깡그리 멸망하는게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이 그렇고, 세월호 참사 후 대응하는 인간들의 악마적인 모습들이 그렇다. 이런 폭력적인 종이 지구에서 한다는 짓은 자연을 파괴하는 일 뿐이니 인류가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존재할까?

 

물론 선한 인간이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전체를 포괄하는 새로운 인류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고 등장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개인의 자유가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이상형은 결코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암울한 전망 속에서 본 영화가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이다.

 

인류와 유사한 종족이 인류와 투쟁을 벌인다. 양쪽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지만 공존의 위한 평화보다 한 쪽의 절멸을 원한다. 증오를 통한 살육이 난무하는 이 영화의 주된 축은 평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보이기도 한다. 결론은 평화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평화를 이루는 조건이 상대방에 대한 인정인데 상대방을 인정할 수 없는 한 상대를 의심하는 한 상대를 제압하지 않는 한 평화는 그저 위태로운 동거일 뿐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여 카인의 징표를 받았듯이 혹성탈출에서 유인원은 결국 유인원을 죽이고 만다. 외부에 대한 위협을 강조하여 내부를 통제하기 시작하면 폭력의 주된 희생자는 내부의 반대자가 된다. 이점에서 이 영화는 통상적으로 정치적이다. 정치란 매우 지저분한 통치행위란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권력은 결국 상대방을 통제하는 힘이기에 통제에 따르지 않는 반대자를 제거하는 것은 권력의 본질이다. 권력이 등장하면서 살인이 벌어지고 살인이 벌어진 유인원의 사회는 인간의 사회와 동일하게 움직인다.

 

결국, 인간과 유인원은 다르면서도 같은 종이라는 사실....

다름과 같음이 상대방을 절멸해야 할 이유로 작동한다는 사실...

인간의 억압에서 벗어나서 세운 유인원의 사회가 자신을 억압했던 인간의 사회와 동질화 되는 이 아이러니를 보면서 씁쓸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학살하던 제3제국의 나찌와 똑 같이 가좌지구를 무차별 폭격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인류애를 부르짖던 아우슈비츠의 유대인의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나찌와 똑 같이 사람을 대상으로 죽음을 전파하는 전체주의자들일 뿐이다. 도시의 폭격에 웃음짓고 환호하며 떠드는 이스라엘 시민들을 보면서 세상의 악은 멀리 있지 않았다.

 

유대인인 한나 아렌트가 주장햇던 '악의 평범성'을 같은 유대인이 증명한다는 아이러니...

 

혹성탈출을 보면서 들었더 잡다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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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 - Unbowe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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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많은 모양이다. 현실이냐 허구냐?

 

허구라고 치부하기에는 이 사회에서 실제 벌어져 논란이 일고 있는 사안이고,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보기에는 픽션이 가미되어 있으니 100% 현실이라 주장하기도 좀 그렇다. 타협해서 중요한 공판 장면들은 현실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뭔가 좀 미진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이면 어떻고 픽션이면 어떤가?

100% 허구의 소설 속에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사회의 단면을 캐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때 현실인가 허구인가 뒤져보는 것은 우습다. 오히려 난 영화속 주인공의 생각이 너무나 보수적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 법만 잘 잘 지켜도 세상이 살만하다는 주장은 왠지 뜬금없어 보인다. 법이란 분쟁을 해결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원천적으로 이 사회를 통치하기 위한 경계짓기의 도구이기도 하다.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다고 분노한 교수가 그가 철저하게 신봉하는 법으로 싸우지 않고 석궁을 들고 판사를 위협하려고 했다는 그 근원적 불화에 대해서는 고찰하지 않고 오히려 법이야 말로 지고의 선처럼 뇌까리고 모든 행위를 법전의 형식적 논리로 풀려고 하는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이 무언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불편함이 영화를 보는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었나 보다.

 

그럼에도 마치 이 영화는 법치주의의 훼손에 대해 분노하는 현실고발 영화처럼 되어버렸다. 법 위에서 노니는 꼴들을 너무 많이 경험하다 보니 무조건 반사처럼 재판과정에 대한 비판들이 넘실 거린다. 물론 이야기 구조 상 분노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분노의 방향이 잘못 되었다. 분노의 화살은 법치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돌아가야 했다. 오히려 현행 법률을 감싸고 돌아가는 폼새는 일종의 보수주의적 감수성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독한 보수성이 마치 진보의 길인것 처럼 여겨지는 것이 이상하다.

 

어쩌면... 가장 보수적인 사람마저도 이 땅에서는 차별받고 살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지 모르겠다. 이 영화는 현실을 재현 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가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하지 않을까? 법은 허상이고 원래 가진 놈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냉정한 현실대신 법이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적용된다면 아무 문제도 없다는 주인공의 고집....어쩌면 이 영화는 여기에서 환타지로 흐르는지 모르겟다. 다만, 가장 가까운 현실을 소재로 했기에 환타지로 느끼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논쟁도 하지 않고... 그냥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부조리한 현실로 보면 꽤 잘 만들었고 흥미진진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현실이냐 아니냐의 경계로 진입해 버리는 순간 난 이영화를 찬성하기보다 반대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다. 법정이 공정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개개인을 규제하고 처벌하는 법 자체가 공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 계속 무언가를 거스르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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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2-01-27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만으로도 영화의 면면이 들여다보이네요. 법을 희롱하는 자들이 판을 치는데 그래도 법은 지켜야지라고 말하긴 애매하죠.

머큐리 2012-01-27 19:22   좋아요 0 | URL
안녕 아치님~~^^ 새해에도 여전한 미모 유지하세요...ㅎㅎ

Arch 2012-01-30 10:14   좋아요 0 | URL
하하 새해 덕담 감사합니다.

부러진 화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네요.
 
자전거 탄 소년 - The Kid with A Bik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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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된 사회에서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 처럼 허망한 것이 어디있을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절망과 구원이라는 두 단어가 머리 속을 맴돌고 있다.

 

아버지에서 버림받고 보육원에 위탁된 시릴의 절망.... 그 절망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전화번호도 바꾸고 주소지 마저 이전한 아버지를 끊임없이 찾는 소년의 마음은 버림받은 자신의 처지를 인정도 용납도 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나이에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을 벗어나려는 것은 어쩔수 없는 현실의 장벽을 부정하는 것 뿐이다.

 

이런 시릴을 안타까이 여기는 미용실 주인 사만다는 위탁부모로서 시릴을 데리고 간다. 시릴이 사만다를 따르는 이유는 보육원을 벗어나 아버지를 찾는 것... 그러나 사만다의 노력으로 다시 재회하게된 아버지는 시릴을 거부한다.

 

자신이 소망하는 아버지와의 동거가 불가능해 짐을 깨닫게 된 소년에게 남은 길은 위탁부모인 사만다와 함께 사는 것이다. 사만다와의 삶 속에서 시릴이 만난 불량 소년 웨스는 시릴을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는 최초의 사람이었다. 물론 웨스는 순진한 소년을 통해 범죄를 저지르기 위한 편법이었지만, 부모로 부터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소년에게 웨스의 존재는 삶의 새로운 빛이 되었을 것이다. 사만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웨스와의 약속을 위해 강도짓을 하는 시릴은 댓가가 아닌 웨스가 원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나 범죄 후 웨스에게 버림받은 시릴은 결국 누가 자신에게 진정한 애정을 쏟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어떠한 상황에 처하던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으로 시릴을 돌봐주는 사만다에게 마음을 열게되는데...

 

 

이 평범한 이야기가 전해주는 울림은 평범하기에  다른다. 누군가 개별화된 이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가감없이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구원이다. 신이 사라진 시대에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면 누가 구원할 것인가?

어쩌면 이 평범한 진리를 잊고 살기에 사람들은 수없이 방황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방황의 끝에는 허무와 절망이 자리잡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과 사람의 진정한 소통이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고 존재 그 자체로 받아들여질 때.... 그때가 구원을 받는 순간이 아닐까?

 

 

그 평범함에 다다르는 길은 쉽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란 헛된 욕망이 시야를 가리기 때문일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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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크라운 - Larry Crown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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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의 배경에 자리잡은 차가운 미국의 현실만 보였다.  

그러니까 난 이 영화를 전혀 로맨틱하게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래리크라운(톰 행크스)과 테이노(출리아 로버츠)의 연애는 그렇고 그렇다. 전혀 매력적이지 않을 뿐더러 상황에 따라 너무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잘 나가는 판매원으로 '이달의 우수사원'에 8번이나 뽑힌 래리 크라운... 그의 순탄한 직장경력도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렸으니 그건 다름아닌 학력 때문이었다. 대학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우수한 실적과 상관없이 해고되는 래리 크라운... 그 억울함을 풀기위해 대학 진학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까칠하지만 자신의 학문에 대한 자부심 가득한 교수 테이노를 만나는데.... 

그리고는 별 사건 사고 없이 흘러가다.... 둘이 눈이 맞아서 해피하게... 엔딩... 

오히려 이 두사람의 연애담의 그늘에 보이는 미국에 대한 감독의 시선이 범상치 않다. 그건 실업과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부채에 허덕이며 빈곤층으로 몰락하는 중산층에 대한 시선이었고, 미국 역시 사람의 능력을 학력으로 측정하는 학력만능의 사회임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고... 그렇게 필요한 학력을 제공하는 대학이라는 곳이 사실 별볼일 없는(?) 곳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솔직히 이건 순전하게 나의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로맨틱하게 스쿠터에 여인을 태우고 달리는 이 영화의 포스터는 사실 기름값이 부담이 된 주인공이 승용차 대신 스쿠터를 타고 다닐 수 밖에 없는 사정을 나타낸다. 전혀 로맨틱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더불어 테이노와 동거하는 작가 겸 가슴 큰 여자를 동경하는 남성은 인터넷 시대의 키포드 위리어의 전형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에도 인터넷 시대의 글쟁이들과 지식인에 대한 감독의 야유가 보이지 않나 생각된다. (솔직히 가슴 큰 여자 사진을 저장해 놓고 보는 남자가 왜 야유를 받아야 하는지 난 모르겠다... 흠) 

영화가 끝나갈 무렵... 경제학을 수강한 주인공이 자본주의 경제 법칙을 깨닫고 자신의 자산을 정리하고 독자적인 자영업의 길로 들어서는 부분에선... 미국 사회를 바라보는 감독이야 말로 낭만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 남녀의 연애 보다, 현재 미국 사회에 가진 고질적 병폐에 대한 감독의 시선과 해결이 더 낭만적이게 보이는 영화....  

그러니 어차피 로맨틱이고 코메디가 아니겠는가?  

뱀발 : 예전 '댓 씽 유두' 도 전반적으로 좋았지만, 뭔가 아쉬운 느낌을 받았는데 이 영화에서도  
         그렇다. 그것이 무엇인지 딱 꼬집어 얘기 하진 못하겠지만 톰 행크스의 영화는 왠지 미적
          지근한 느낌... 그러면서도 편안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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