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범상치 않은 가족사를 영화로 만들었다면 이런 영화가 될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떠나 독립된 생활을 꾸려가는 어머니.
양쪽 누구도 미워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아들의 이야기다.  

1970년대 경제성장기를 배경으로 엄마와 아빠와 아들의 관계는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유형의 가족은 아닌 것 같다. 경제성장기에 도쿄에서 적응하지 못해 고향으로 돌아와
소일하는 아버지와 남편을 떠나 재혼도 하지 않고 억척같이 아들의 공부를 위해 헌신
하는 어머니.... 여기에 부모님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허랑방탕하게 청춘을 낭비하는
아들까지... 그러나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는 가족이 무엇인가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이 존재하는 듯 하다.

성경의 돌아온 탕자와 같이 허랑방탕함을 이기지 못해 주변인으로 몰린 아들...그러나
어느 순간 정신차리고 부지런히 생계를 위해 발버둥친다. 성공하진 않았어도 빚 청산
하고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도쿄로 모셔오고, 고등학교 입학 이후 15년간 떨
어져 살던 어머니와 함께 도쿄에서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쾌활한 어머니와의 생활도 금방 지나가고 어머니는 위암으로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게 되고 아들은 그런 어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경제 발전 시기 일본의 단면이 보이는 듯하다. 도쿄타워는 일본 경제를 상징한다.
아버지세대 준공되기 시작한 도쿄타워가 아들세대에 완공되고 그 화려함을 뽐낼 때
그 사이 많은 사회 경제적 변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거기에는 가족의 변화도 포함될
것이고, 어쩌면 이 영화와 이 영화의 원작소설은 그런 세대의 흐름을 아련하게 추억하고
있는 듯하다. (소설은 나중에 한번 일독해봐야 겠다.) 

일본의 경제나 한국의 경제나 그 발전양상이 비슷한 듯 영화 속 환경을 시골 초가집으로
바꾸면, 일본영환지 우리나라 영환지 분간하기 어려울 듯 하다. 그만큼의 정서적 공감이
크다고 느껴진다. 더불어 보이는 부모, 자식간의 모습은 동양적 유교 정서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지...

가족...어머니...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나서 어머니에게 전화라도 한 통 넣을까 생각하다 그만 두었다. 웬지 너무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서... 그래도 가족이란 나에게 무엇일까 한 번은 생각하게 해 준
영화다. 단, 내가 생각하는 가족보다는 너무 낭만적이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무언가 불편했던 근원인지 모르겠다. 나에게 가족이란 그리 낭만적이지 않기 때문
이며, 사람들마다 가족은 천의 얼굴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종 드 히미코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가끔 아~ 이런 영화를 보다니 이건 행운이야라고 감탄하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이 영화가 그렇다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에 대한 도전이자 그들의 따쓰한 일상에 관한 이야기이고 소위 일반인에
대한 물음이 있는 영화였다. 동성애자도 똑같은 인간이 아니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메종 드 히미코... 남성 동성애자들을 위한 양로원이다.
그곳에는 소위 게이라고 불리는 남성들이 그들의 노후를 보내기 위한 곳이고, 그들은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피해 서로 이해하고 위안하며 살고 있는 곳이다. 
사오리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고 어린시절 떠나버린 아버지가 있는 곳이고 사오리의 아버지
히미코는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이런 히미코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남자 하루히코는 히미코를
위해 사오리를 메종 드 히미코로 데려온다.  

아버지를 증오하는 사오리는 메종 드 히미코에서 일하면서,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조금씩
깨기 시작한다. 그들의 삶에 대한 질곡들과 그들이 껴안고 가야했던 아픔들에 대한 이해를
가지기 시작한다. 더불어 하루히코에 대한 마음까지.... 

근대 사회가 이른바 이성적 계획에 따라 사회를 구조화 하면서, 비이성적인 것에 대한 극단적
부정과 관리가 가져온 편견중에 하나가 바로 동성애자들에 대한 억압이 아니었나 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환자거나, 선천적으로 또는 유전적으로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
이었다. 사회에서 용인하는 순간 사회를 무너뜨릴 전염병 같은 사람들... 그래서 국가는 사회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들의 그림자를 지워버렸다. 설사 나타난다고 해도 철저하게 격리하고
감시했다. 사회는 이들에 대한 국가의 횡포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직접적인 물리적
강제보다 사람들의 차가운 편견의 시선이야 말로 국가의 작용을 보다 용이하게 했던 것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강점은 우리가 가진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을 여지없이 부순다는 것이다.
이들도 이성애자들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헌신이 있고, 삶의 즐거움이 있으며,
슬픔도 있고, 아픔도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루히코역의 오다기리 조를
제외한 모든 배우는 남성적인 외모를 가졌다. 외모로 봐서는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와의 차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의 성 정체성이 이성애자와 다를 뿐이다.

성정체성이 다르다고 그들이 차별을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사회적으로 용인
받지 못하기에 그들 역시 어려운 짐을 지고 가고 있음을 이곳에 와서야 사유리는 깨닫는다.
성정체성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차별을 당하는 건, 그건 이성애자인 사오리도
용인하기 힘든 것으로 다가온다. 사오리는 이들과 생활하면서 이들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인정하고 타인과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
여기서 사오리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된다.

영화속에 이성애자인 사오리와 동성애자인 하루히코와의 정사 장면이 나온다. 결코 이성애를
할 수 없었던 하루히코가 사오리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정사... 여자를 사랑하지 못하는 하루히코의 모습과 그럼에도 사랑이라는 따뜻함이 느껴지는
그들의 모습은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아닌지... 

뱀발 : 오다기리 조를 여자들이 왜 좋아할 수 밖에 없는지 확실하게 보여준 영화다.
         내가 다 그를 그의 눈빛을 보면 심장이 두근거렸으니.....응( ")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도 봐야겠다. 7월 찜..영화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0-06-19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윽~~머큘님 때문에 보관함이 또 배불렀어~~~~!

머큐리 2010-06-19 22:58   좋아요 0 | URL
보셔도 후회하진 않을 겁니다..ㅎㅎ

글샘 2010-06-19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참 유쾌하게 재미있습니다. 제법 무거운 주제인데도...
삐끼삐끼... 삣~~~~~~~끼~~~~~
그 재미있는 포즈... ㅋㅋ 아직도 웃음이 나네요.

머큐리 2010-06-19 22:59   좋아요 0 | URL
맞아요...무거운 주제임에도 경쾌하게 그려내고 있지요..
우리들 삶도 저렇게 경쾌하게 흘려보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어요..^^
 
당신과 나의 전쟁 - The War You and I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봄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이제는 날씨가 뜨겁다.
이렇게 뜨거운 날... 아마 작년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이보다 더 뜨거운 날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 환상을 넘어서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을 본다는 것은 무거운 기분이다.  

생활 속에서 즐겁게 싸우자고 말한다.
극한의 처지에 몰려있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이란 무엇일까? 쌍용자동차는 경영위기를 대규모
구조조정을 통해 극복하려 했다. 사실 단위 사업장 내부의 경영의 문제와 그 해결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관심했다. 아니 어쩌면 이 사회는 더 이상 구조조정이 문제가 되는 사회가 아니다.
당연히 회사가 살기위해선 희생자가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의 편견과 싸우고 자신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이 있었을까?  

쌍용자동차의 옥쇄파업은 하나의 신호탄이었다.
IMF체제를 졸업하고도, 금융위기 이전의 사회로 복귀하는 것이 아닌, IMF체제의 일상적 수용이
그대로 드러난 사태였던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파업을 해도, 절박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듣기
보다 자본의 보존을 위해 공권력이 나서는 사회. 쌍용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모든 결정을 행한
정치권도 관료도 아무런 답변을 해주지 않았다. 다만, 너희들만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답이었다.  

빨갱이들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본을 반대하여 싸웠던가? 아니 오히려
성실하게 일하다가 자본의 논리에 치여 생존을 위해 싸우다 보니 자연스레 자본에 반대했던것
아닌가? 빨갱이라는 말은 다른 곳은 몰라도 이 사회에서 하나의 낙인이다. 공동체 성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낙인! 이 낙인이 찍히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 취급을 받게 된다.
그리고 2009년 여름 그들은 사냥감으로 몰려 결국 파업을 풀고 투항하게 되었다.
기나긴 파업이 마감되었을때... 파업에 참가한 사람도, 파업을 지지한 사람도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이른바 '산자'와 '죽은자'의 구분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자본에 의한 노동의 분할통치는 노동자를 '산자'와 '죽은 자'로 나누었고, 이른바 '산자'들의
'죽은 자'들에 대한 횡포는 이 사회가 얼마나 자인한 사회인지 극명하게 보여줬다.
자신의 양심에 반해서일까 카메라 앞에서 시종 당당하지 못한 사람들은 파업자 가족대책위의
천막을 철거하고 폭력을 휘두르며, 파업을 해산하기 위해 나섰다. 노노갈등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사실 자본과 노동의 갈등이지 노동과 노동의 갈등이 아니다.
노동자들 모두 일하고 싶었을 뿐이다. 다만, 그 일에 대한 통제가 자본에 있었을 뿐이다.  

민주주의의 회복은 이 사회에서 건강하게 노동하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을 때 달성
된다. 노동의 유연화가 아닌 노동의 보호를 통해 달성될 수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땐
우리 모두는 언제 쌍용자동차의 노동자와 똑 같은 처지로 떨어질지 모른다. 아니 이미 진행
되고 있지만, 쌍용처럼 크게 부각되고 있지 않을 뿐이다. 쌍용에서 구조조정된 수 많은
노동자들은 이미 비정규직의 대열로 흡수하고 계속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정규직이 비정규직과 단결하지 않는다면 향후 흐름은 명백해 보인다. 이른바 성공한
몇몇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비정규화...노동유연화의 극단이다.  

여기서 이 싸움이 쌍용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렇다 이것은 그들만의 전쟁이 아니다. 그들의 싸움에서 나의 싸움을 바라본다.
'당신과 나의 전쟁'이 외치는 외침이다.  

뱀발 : 영화상영 후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간담회가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말은 
        "영화를 보는 분들은 쌍차를 지원하지 못한 마음의 짐이 있는 줄 안다. 안에서는 싸움에
         패배하여 민주노총을 약화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부담을 가지고 있다"
         결국 정말 옥쇄하여 다 죽었어야 했단 말인가? 진정한 연대는 어떻게 해야 가능할
         것인가? "같이 살자"는 짤막한 말이 주는 힘과 그것을 실행할 방법에 대한 불투명함이
         마음을 무겁게 내리 누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해한모리군 2010-06-17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쌍용차 문제를 보면서 거기 싸우고 있는 사람들도 가족이 있고,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걸 사람들이 너무 쉽게 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서웠습니다. 누군가 나도 사람이 아닌 비용으로 볼까봐 물건으로 볼까봐 더 두렵습니다.

novio 2010-06-20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영화리뷰는 영화보다 더욱 뛰어날 것 같네요. 현실에 대한 냉철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리뷰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 Poetry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창동 감독은 영화를 통해 문학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질문이 계속 내 머리를 맴돌고 있다.  

나이들어 버린 여자.... 그녀의 삶은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파출부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으며, 이혼한 딸이 남긴 손자를 맡아서 기르고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 처럼 보이지 않게 세련되게 옷을 입고 다니며, 무엇보다 그녀는
'시'를 쓰고 싶어한다. 왜 '시'였을까? 늦은 나이에 그녀가 쓰고 싶었던 '시'는 무엇일까? 

한 소녀가 강에서 몸을 던졌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해자의 부모들은 어떻게든 사실을 숨기고 자식들을 보호하기 급급하고,
가해자로 나온 소년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른다.
선생들은 학교의 명예를 위해 어떻게던 이 사실을 외부로 새나가지 않도록 전전긍긍이다.
나중에 소녀의 부모도 돈 앞에 무너져 내려 버린다.  

'시'를 쓰기위해 사물을 새롭게 관찰해야 하고, 사물과 자신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밖으로
끄집어내려는 여인에게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세상의 추함이 더 눈에 밟힌다.
(의도하진 않았어도)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짓을 한 손자는 아무런 죄책감이 없고,
가해자의 부모들 역시 자식들의 안전만 생각하지 죽은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그녀는 죽은 소녀를 생각하고 그녀를 추모하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기 위해 애쓴다.  

아름다움.... 진흙 속에서 연꽃이 핀다고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햇살과 바람과
나무와 풀과 열매가 아름답고 신비하지만, 현실의 사람들 사이로 되돌아 오면 그저 처참
하기만 하다. 늙건 젊건 자신의 욕정 밖에 생각지 않는 남성들과 돈으로 모든 것을 치환시켜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녀의 '시'는 방황한다.

그녀가 느꼈던 사실을 주변과 공감하려고 해도 방법이 없다.
그저 그녀는 문화강좌에서 배운대로 아름다운 '시'를 쓰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그녀는 살아온
세월의 풍상 속에서도 아름다운 무언가를 지키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시'로 형상화시키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을 계속 그녀를 비껴 지나간다.
'시'는 그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회식자리에서 만난 젊은 시인은
이 시대를 '시가 죽어버린 시대'라 규정한다.  

그녀은 '시'를 남겼다. 그 시는 잊혀진 존재에 대한 부름이었다.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아 죽음조차도 말살되어버린 '죽은 소녀'를 애도하는 그녀의 시는
이 영화가 가진 힘을 보여준다.
애도하지 않는 이 사회, 불의와 통정하면서 아무도 그것을 고발하지 않는 이 사회
'시'가 죽어버린 사회 '문학'이 죽어버린 사회에 대한 이창동의 고해가 아닐까?  

뱀발 : 감독은 소설가였다. 그의 시나리오가 국내에서 무시당했을 때, 이미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현실이었을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령 작가 - The Ghost Writ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아마 소설을 읽으신 분들도 있고 영화를 보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원작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난 알 수 없다. 소설을 읽지는 않았으니까... 
영화 내용이 유령작가와 그를 고용한 정치인 (전 영국수상)의 자서전을 통하여 표면에 드러난
사건의 배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한 영화다.  

어떻게 보면 그냥저냥한 추리물로 전락해 버렸을 영화가 단 한가지 사실적 요소로 인하여
제법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구성하게 되는데...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에 미국을
지지하는 영국의 태도와 그 배후에 대한 의심이다. 더불어 반테러리즘의 구호 속에 벌어지는
인권탄압에 대한 메시지이다. 이 영화가 이념을 강조하거나,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세계화
속에서 벌어지는 파편적 이미지나 소재가 이제 공공연하게 대중영화 속에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필작가는 세계 어디나 공통일 것이다. 사실 유명 정치인이나 사업가 등 권위있는 사람들의
자서전은 거의 모두가 유령작가의 솜씨일 것이다. 물론 몇몇 문필가적 재능을 지닌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어디 그들이 한가하게 자서전이나 쓸 시간이 있을까?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을 남기기위해 자신을 기록하길 원하고, 평소 권력과 돈에 취해 멀리한
글솜씨는 자서전 조차도 쓰지 못할 정도일 것이다. 그러니 유령의 힘이 필요할 수 밖에...
그렇게 발행되는 서적은 픽션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사실을 인용하면서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바꾼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자신이 직접 쓰면 완벽하게 의미변용이 될 가능성이 있겠지만, 유령작가를 고용하는 순간
의미변용은 긴장관계로 들어가게 된다. 기록을 원하는 사람이 바라는대로 유령작가는
글을 써야 하는데, 유령작가도 작가인지라 사건에 대한 해석을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진실이 총체적인 사실과 어긋나거나 보이는 현실을 거꾸로 뒤집어
버리는 경우, 구술하는 주체와 유령작가는 총체적인 투쟁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영화는 양자의 구도를 가지고 진실을 찾아가는 게임을 그려낸 것이다.  

이런식의 영화는 언제나 배후의 진실을 추구한다. 세상은 우리가 보는 그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추측처럼 알고 있거나 막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들 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무서운 진실
이 담겨 있는 법이다.  그것이 드러나지 않고 막연하게 세상에 떠돌때 음모론으로 진행되는
것이고, 모든 음모론에는 어느 정도 사실성을 지니고 있기에 해석에 따라 그 생명이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것이다.  

극장문을 나오는 순간, 너무나 많은 의혹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천안함을 바로 떠올렸고, 순간 사고을 수미일관하게 작업해 낸 유령작가는 과연 없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천안함이 유령작가가 쓴 시나리오였다면, 그 수준이 너무 처참하다는
웃긴 생각까지... 아니 어쩌면 유령작가의 수준을 너무 모르는 원고 검토자들의 수준이 더
처참하다는 웃지 못할 생각을 해버렸다... (어쩌냐 이걸)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0-06-13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도 이거 보셨다는데...
나두 이제부터 영화 좀 많이 볼까봐요.
난독증있는거...이렇게라도...에효~~

머큐리 2010-06-14 19:51   좋아요 0 | URL
나중에 함 보세요.. 괜찮은 영화 같아요...^^

2010-06-14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4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