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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이란 세상과 학문을 탐구하는 곳이다.... 난 이 이상 대학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겠다.  

대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던졌을 때, 그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타고난 재능도 사회적 지원이 있어야 발휘되는 것이다. 아무리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가 천재라고 불리워도 한국에 오면 그냥 자퇴생에 공돌이가 될 뿐이다. 그렇기에 재능이 뛰어나 사회적인 부와 명성을 일군 사람들은 어느정도 사회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대학생들의 자살... 무한경쟁... 여기에 어디 대학의 모습이 있는가? 측정하려는 학교의 순위가 내부 구성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는게 '개혁'이라 칭하는 것은 언어의 타락일 뿐이다. 대학이 이미 대학 본연의 모습을 지키지 못했을 때 '대학'이란 단어는 사라지고 없다.  

문제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 학생들이 죽어가도 총장은 경영자의 모습을 보여줄 뿐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카이스트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대학의 문제다. 카이스트는 그 모든 문제들이 극단화된 전형적인 예일 뿐이고, 문제를 피해가는 총장의 모습도 극단화된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솔직히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진중권의 글을 옮겨 놓는다. : hook.hani.co.kr/archives/25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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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13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대학이 대학이라 할 수 있을까요?
난립하고, 배움의 장터는 아닌... 저는여, 요즘
사이버 대학을 다니면서 진짜 노력하는 분들을 봐요. 그런 노력이 진짜라 생각해요.
배우고 싶어서 배우고, 무엇인가 이루려고 배우는 그런거요.

머큐리 2011-04-13 13:32   좋아요 0 | URL
아~~~ 마고님이다...우등생 마고님..ㅎㅎ

순오기 2011-04-14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착잡합니다!

머큐리 2011-04-14 09:38   좋아요 0 | URL
지금 대학생활 하라고 하면 전 못할거 같아요...
 

 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

슬라보예 지젝의 <시차적 관점>을 읽다가 ‘유물론적 신학’이라는 표현을 만났다. 신학과 유물론의 모순적 결합을 지젝은 이렇게 정당화한다. “데리다는 (…) 오늘날에는 오직 무신론자들만이 기도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수사법에 반하여 우리는 신학자들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유물론자라는 라캉의 주장이 가진 진리를 주장해야 한다.” 이 역설은 일상적인 것이다. 사실 돈의 전능을 인정하는 강남 부자 교회의 목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유물론자이며, 세상엔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믿는 좌파들이야말로 진정한 관념론자가 아닌가.

하지만 이 흥미로운 모순의 저작권은 사실 지젝이 아니라 발터 베냐민에게 돌아간다. 흔히 ‘역사철학테제’라 불리는 베냐민의 에세이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에는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분분한 해석을 낳는 베냐민 특유의 알레고리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파울 클레의 그림과 함께 등장하는 우울한 역사의 천사, ‘앙겔루스 노부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또 아리송한 것이 바로 ‘역사철학테제’의 서두에 등장하는 자동인형의 알레고리다.

유토피아적 발상에 대한 역설


“널리 알려지기를 상대가 수를 두면 맞수를 두어 늘 승리하도록 만들어진 자동인형이 있었다. 터키 옷을 입고 입에 수연(水煙) 파이프를 문 인형이 커다란 테이블 위에 놓인 체스판 앞에 앉아 있다. 테이블은 거울 시스템을 이용하여 안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그 안에 체스에 능한 등 굽은 난쟁이가 들어앉아 끈으로 인형의 손을 조정하고 있다. 철학에서도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사적 유물론’이라 부르는 인형은 늘 승리해야 한다. 그 누구와도 싸워서 이기려면 그것은 신학의 힘을 빌려야 하나 오늘날 신학은 왜소하고 추해져서 들여다보여서는 안된다.”

그 난쟁이의 이름을 베냐민은 ‘신학’이라 부른다. 그 누구와도 싸워 이기기 위해 과학적 유물론은 신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단다. 이게 무슨 뜻일까? 지젝의 책에서 ‘유물론적 신학’이라는 표현과 마주치는 순간, 불현듯 내가 5, 6년 전에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던 글이 떠올랐다. 자기 인용을 통해 그리로 다시 돌아가보자.

이 알레고리에서 등 굽은 난쟁이, 즉 ‘신학’은 곧 유토피아의 철학을 가리킨다. 유토피아적 발상이 없었다면 세상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것만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몇몇 몽상가의 유토피아가 세상을 디스토피아로 만들어버린 경험을 갖고 있다. 여기서 유토피아는 있어야 하되, 동시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베냐민의 자동인형은 바로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리라. 즉 난쟁이(유토피아)는 실제로 작동해야 하나, 그의 작업은 결코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된다.

역사의 텔로스(telos), 즉 인류의 최종 목적이 되는 이상사회를 그려놓고 현실을 강제로 그리로 옮긴다는 발상은 시대착오다. 우리는 이미 ‘역사이후’(posthistoire)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유토피아를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가 현실로 누리는 것이 한때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상사회의 꿈은 존재해야 하되 동시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터키 인형이 되어 하는 말, 쓰는 글, 하는 행동은 유토피아의 열망에 조종되어야 하나, 그 꿈 자체는 난쟁이처럼 가려져 있어야 한다.

존재하면서 부재해야 하는 유토피아


과거의 유토피아는 완성태로 존재했다. 어떤 이들은 이 설계도를 그대로 현실로 옮기려 했다. 하지만 오늘날 ‘유토피아’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면서 부재해야 한다(데리다라면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하면서’ 작동하는 이것을 ‘디페랑스’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가능한 현상이다. 가령 촉매를 생각해보라. 화학반응에서 촉매는 그 자체론 화학적 결합물에 들어가지 않으나 그것 없이는 화학반응이 일어날 수 없다. 유토피아는 촉매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내가 좌파 바바리맨을 싫어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21세기에 여전히 긍정적 유토피아 문학을 하는 그 지적 게으름도 맘에 안 들지만, 대중 앞에 옷 홀딱 벗고 빨간 자지, 노란 자지 심판하는 행태는 내 성 취향을 심히 거스른다. 현실은 무섭게 돌아가는데, 거기에 결합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제 자지 색깔의 원색성을 근거로 남들에게 ‘자유주의자’니, ‘프티 부르주아’니 딱지나 붙이는 것은 그냥 중세적 악습일 뿐이다. ‘종교재판’(inquisition)의 어원은 라틴어 1인칭 ‘내가 묻노라’(inquisitio), 즉 남의 신앙적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었다.

언어 게임에서 ‘유토피아’가 하는 역할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역사에 텔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서 어떤 정치적 목적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유토피아는 구체적으로 터져나오는 사안을 판단하는 데에 나아가 사안에 대처하는 대안을 만드는 데에 은밀히 작동해야 한다. 마치 촉매처럼. 이번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 무상급식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사실 그리 급진적인 요구가 아니나, 평등사회의 유토피아를 향한 중요한 한 걸음이 아니던가.

우리는 결코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아무 데도 없다’를 의미하는 그 낱말의 뜻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거기에 그저 무한히 근접할 수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현실에서 유리된 실험실에서 사유하는 한두 사람의 레토르트 몽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그림에 비유하자면 그것은 삶에서 유리된 정치적 수도원에 사는 몽상가들이 그리는 유화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사는 수많은 이들의 꿈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퍼즐이다.

이른바 ‘좌파’에 부족한 것은…


불행히도 우리는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유토피아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 오랜 세월이 지나 되돌아보면 우리의 꿈이 이미 실현되어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유토피아의 모습은 한 몽상가의 ‘비전’ 속에서 미리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투쟁하는 세대의 집단적 꿈속에서 ‘기억’으로 뒤늦게 현현하는 것이다. 유토피아라는 이름의 난쟁이는 거울의 반사를 이용해 등을 구부리고 책상 속에 숨어야 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은밀히 그의 조종을 받는 터키 인형이 되어야 한다.

유물론적 과학이 왜 신학의 조종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유토피아의 실현이 과학으로 대체할 수 없는 세속 종교적 신앙,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합리적 열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젝은 말한다. “신학적 차원- 베냐민에 따르면 이것 없이는 혁명이 승리할 수 없다- 이 바로 충동 과잉의 차원, ‘지나치게 많음’의 차원이 아닌가?” 사실 광적인 예수쟁이들의 문제는 열정의 과도함에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의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데서나, 아무한테나 드러내는 데에 있다. 이는 좌파 신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학은 타인을 심판하는 기준이 아니라, 자기를 움직이는 동력이어야 한다. 목소리 높은 좌파들이 번번이 그들이 ‘주사파’라 경멸하는 이들에게 패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른바 ‘좌파’에 부족한 것은, 홍세화 선생이 지적했듯이, 자기를 움직이는 열정이다(지젝은 이를 프로이트-라캉의 ‘충동’으로 해석한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이른바 ‘주사파’들은 자기의 난쟁이를 감춰놓고 터키 인형으로 행동할 줄 안다는 것이리라. 불행한 것은, 그 훌륭한 습성이 심오한 철학적 이해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의 현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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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이라는 이가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진중권을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 불렀다. 그의 구별에 따르면, 진보신당에는 한편으론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 사민주의적 전망으로 이 추악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진지한 당원들”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자유주의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촛불광장에서 활약한 덕에 당원이 늘었다”고 자랑하나, “그렇게 입당한 사람들이 지금 진보신당을 아예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근데 내가 아는 한 촛불당원들은 노선투쟁 같은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의 언급 중에서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이라는 표현은 ‘사회주의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한편 “진지한 당원들”이란 표현은 정체성에는 문제가 좀 있지만 그래도 이 추악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해서 나름 갸륵한 ‘사민주의자’를 가리키는 듯하다. 한편, 촛불 때 입당한 당원들은 일거에 ‘자유주의자’로 분류된다. 그들은 계급의 적, 즉 김규항의 표현을 뒤집으면 제 정체성을 잃고 추악한 세상을 그대로 온존시키려고 드는 진지하지 못한 당원이 된다. 아무 데서나 붉은 살 드러내는 이 좌파 바바리맨 쇼는 그냥 웃어넘기자.

흥미로운 것은 ‘자유주의자’라는 표현의 독특한 의미론이다.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함께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을 이룬다. 이른바 북구의 사회국가들도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자유주의자’에 대한 이 생뚱맞은 적의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80년대 이념서적에 난무하던 어법이다. 이렇게 21세기의 한국을 졸지에 멘셰비키와 볼셰비키가 다투던 러시아 혁명기로 만들어놓았으니, 내친김에 차라리 ‘자유주의자’ 숙청하라고 선동을 할 일이다.

정체성의 폭력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른바 근대적 강박관념이다. 가령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이란 표현을 보자. 그는 이들의 정체성이 곧 진보정당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들만으로 진보정당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그가 편협한 것은 아니다. 정체성에 조금 문제는 있지만, 사민주의자들은 당에 좀 있어도 된다(이른바 ‘견인’을 해서 끌고 가면 되니까). 그런데 왜 진보신당의 당적을 갖기 위해 그의 개인적 정체성을, 혹은 그가 “제 정체성을 간직”했다고 판단하는 그 사람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진보정당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서 이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회주의가 뭔지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그 사람들도 모른다고 하고, 사민주의가 뭔지는 직접 유럽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개념이다. 촛불당원들은 대부분 그저 한나라당이 싫고, 민주당은 구리고, 그나마 진보정당이 제 취향에 맞는다고 생각해서 입당한 이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향이 여러 가지 면에서 민주당보다는 좀더 진보적이라고 믿는다. 이런 사람들은 진보정당에 들어오면 안되는가?

여기서 “제 정체성을 간직한”이라는 표현의 폭력성이 드러난다. ‘정체성’(identity)은 동시에 ‘동일성’을 의미한다. 다른 모든 당원들을 제 형상대로 찍어내야 비로소 당의 정체성이 유지된다는 강박관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차라리 당원 받을 때에 아예 이념조회를 하는 게 낫겠다. “당신은 사회주의를 믿습니까?” “아뇨, 전 공산당이 싫어요.” “그럼 사민주의라도 믿습니까?” “글쎄요. 그게 뭔데요?” “흠,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자유주의군요. 민주당으로 가세요.”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는 딱지는 아마도 모욕을 위한 표현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 내가 ‘자유주의자’라는 것은 나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 워낙 천성이 리버럴해서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못 봐주는 편이다. 한편, 진보정당에 적을 둔 것은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 특히 강력한 사회 복지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체제 중에 유럽식 사회국가 시스템을 선호한다. 그래서 진보정당에 남아 있는 것이다.

유학 시절에 만난 독일의 한 여학생은 내가 기독교인이면서 무신론자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워 했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고, 철학적으로는 무신론자이고, 윤리적으로는 쾌락주의자고, 논리적으로는 금욕주의자고,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자고,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자고, 문화적으로는 무정부주의자다.” 그는 그 모든 규정들이 어떻게 머릿속에서 하나가 될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정체성을 왜 패키지로 가져야 하는가. 그러는 김규항도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예수 족보 팔지 않던가?

진보정당 안에는 다양한 생각이 공존한다. 거기에는 유신론자도 있고 무신론자도 있다. 자유주의자도 있고 집단주의자도 있다. 사회주의자도 있고 사민주의자도 있으며, 심지어 한-미 FTA에 찬성하는 당원도 있다. 선거연합에 찬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자후보를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당과 통합하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야청청 나 홀로 걸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보신당에 정체성이란 게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이 모든 생각들의 총합, 혹은 교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묻는다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는 표현은 아마도 ‘좌파를 가장한 우파’라는 뜻일 거다. 내가 이런 소리를 듣는 근거는, 중도에 사퇴했다고 비난을 받는 심상정씨의 말도 일단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진보신당이 더이상 이대로 갈 수는 없다고 믿는다. 거기에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일단 그로 하여금 말은 말할 수 있게 해줘야 할 터. 이 당연한 요구를 했다고, 남의 이마에 함부로 딱지를 붙여댄다. 도대체 그 딱지 붙이기로써 내 주장의 뭘 반박하려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우파가 좌파를 가장해 무슨 영광을 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와 똑같은 비난을, ‘듣보잡’이라는 이름으로 마침내 유명해질 수 있었던 어느 불행한 청년에게도 들은 바 있다. 이 우익 스토커는 내가 한-미 FTA에 대해 반대한 적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실은 여러 차례 FTA에 반대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무튼 ‘무슨 말을 했다’는 게 아니라, ‘무슨 말을 안 했다는 것’을 정체성 판단의 근거로 삼는 그 아스트랄함에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매력이 있다.

왼쪽과 오른쪽, 서로 방향은 달라도 멘털리티는 동일하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포스트모던’의 근대비판이다. 90년대 이후 20년 동안 모두들 나서서 지겨울 정도로 근대를 반성했건만, 이 모든 지적 유행의 물결도 80년대 이념서적을 유일한 교양으로 간직한 고고한 정신만은 전혀 건드릴 수 없었나 보다. 그 포스트모던도 유행이 다 지나 이제 회고를 하는 시절. 그 시점에 마주친 이 비난의 형식(“그는 양가죽을 쓴 늑대다”)은 너무 복고적이어서 그런지 언캐니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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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10-07-26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누가 쓴거에용

앗.. 찾았어용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3029&article_id=61413

머큐리 2010-07-26 13:59   좋아요 0 | URL
진중권이요...

역시 검색마왕...ㅎㅎ

라주미힌 2010-07-26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댓글 중에 제일 눈에 띄는게 씨네21에 저런글이;; ㄷㄷㄷ
 

['괴짜사회학' 대담⑤] '수난 받는 지식인' 진중권 

지난 28일 <프레시안>, 김영사, 예스24가 공동 주최한 <괴짜 사회학> 출간 기념 공개 대담이 건국대학교 새천년관 대공연장에서 열렸다. 최근 잇따라 대학 강의가 거부되는 등 '수난 받는 지식인'의 상징으로 떠오른 진중권 교수는 상상력에 기반을 둔 다른 정치를 모색하자고 강조했다.

진중권의 대담을
강연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제가 이렇게 중요한 인물인지 몰랐는데 이번 일 겪고 알게 됐네요"

요새 고난이 많아요. (웃음) 오늘(28일) 아침에도 홍익대 강의가 잘렸거든요. 이렇게 짧은 시간에 많은 강의가 잘린 경험은 처음이에요. 요즘 몰아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중요한 인물인지 몰랐다가 이런 일을 당하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웃음)

노무현 정부 때도 저는 많은 비판을 했어요. 그래도 그때는 무대라도 있었죠. 지금은 교수 자리가 다 잘렸습니다. 카이스트, 한국예술종합대는 국립대라 그렇겠거니 생각하고, 중앙대는 괜찮겠지 했는데 덜컥 잘리고, 그러면 강사 자리는 괜찮겠지 생각했는데 홍익대가 잘렸어요.
 

이 사람들은 항상 저의 상상력을 초월해요. 정말 대단해요.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저 쪽(보수 진영)에서 저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일을 겪고 안타까운 건 그분들은(보수) 생각이 없다는 걸 한 번 더 확인했다는 점입니다. 산업 혁명 이후 정보 혁명이 세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이젠 기술과 창의력이 같이 필요한 시대라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과거엔 몸을 굴렸다면 이젠 머리를 굴리는 사회란 말이죠. 창의력이 없는 기술은 기능에 불과합니다.

한예종에서 통섭 교육을 했던 것도 그런 맥락이었습니다. 창의성과 예술성이 없다면 제대로 혁신을 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사회입니다. 통섭 교육은 모든 나라에서 다 하고 있는 교육입니다. 하지만 이걸 중지시킨다니 답답합니다. 통섭 교육은 좌파의 사업이냐, 우파의 사업이냐가 아닌 미래를 위한 교육인데 말입니다.

솔직히 '그래 지금 너희가 우파 색을 첨가하면 나중에 우리가 집권할 때 좌파 색을 첨가 하마'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 사람들은 아예 플랫폼 자체를 없애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비판을 했었잖아요. 그래도 그때는 플랫폼은 놔뒀거든요. 그렇다고 이것을 중지시키고 뭘 하겠다고 하는 계획을 가진 것도 없습니다. 답답한 노릇이죠.

"MB에겐 삽질을 하면 일하는 것이고 공상을 하면 노는 것인 듯"

최근 저를 둘러싼 상황을 보면 한국 사회 대학들이 공적인 부분에서 사적인 부분으로 이동하고 있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학이라는 곳은 국가와 협력할 때는 협력을 해야 합니다. 시장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국가와 시장이 잘못됐을 때는 경고 시그널을 던져줘야 하는데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이 대학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인문학, 사회학 등은 당장 돈이 안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이러한 분야들은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몸담았던 중앙대의 전공 필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회계학입니다. 재벌 기업 이사장의 개똥철학이 이것을 대학에 '박은' 것입니다. 인문학과 사회학이 축소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미래는 아까도 이야기했다시피 상상력이 생산력이 되는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1970년대 사고방식인 단순 노동 투입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씨가 볼 때, 내가 공상을 하면 놀고 있는 것이고 내가 나가서 삽질을 하고 있으면 일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노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문제를 푸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를 내는 능력입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의, 놀이, 여가, 교양 등을 통해 문제를 내는 능력을 만들고 이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역사와 철학 없이 무슨 콘텐츠가 있겠습니까? 상상력과 창의력을 다 죽이고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지금 한국 교육의 현실입니다. 합리적이라고 하지만 제가 볼 때 이것은 시대착오적입니다. 안타깝습니다. 통섭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이를 막는 사람들을 미워하진 않습니다. 중요성을 알고 그러면 나쁜 놈인데 진짜 몰라서 그런 거라 용서가 됩니다. (웃음)

"하이힐 신고 MB아웃 외치는 촛불 집회, 이해 안 되고 당황스러웠다"

우리 국민이 그렇다고 창조성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2008년 촛불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저는 촛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니 당황스러웠습니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우리 세대가 집회를 하는 게 뻔합니다. 나오는 사람도 똑같고 발언도 똑같고…. 하지만 촛불 집회에는 전혀 그럴 거 같지 않은 사람들이 나와서 붐을 이뤘습니다. 하이힐을 신고 가슴 파인 티셔츠를 입고 나온 아가씨부터 유모차를 끌고 나온 어머니들, 여중생들….

촛불 초창기에 모인 시민들에게 '광야에서'를 부르자고 제안하니 다들 모른다고 해서 윤도현의 '오필승코리아'를 불렀습니다. 분위기 적응 힘들었습니다. (웃음) 이런 사람들이 나와 'MB아웃'을 외치는 모습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을 정도로 이해가 안됐습니다.

당시 촛불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던 잠재력이 분출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촛불 집회는 시민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촛불 집회에서 폭력을 놓고 찬반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법질서의 토대가 폭력이라는 점입니다. 프랑스대혁명 때는 10만 명이 단두대에서 머리가 잘렸습니다. 법률의 정당성은 헌법에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헌법의 정당성은 어디에 있을까요? 법을 초월한 행위인 폭력입니다. 윤봉길, 안중근 등을 폭력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이 폭력으로 강요한 법질서 자체에 저항을 했으니까요.

문제는 폭력이 발생되기 전에 그런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해법은 분명 존재합니다. 정부, 정치인, 언론이 해야 합니다. 그걸 하지 않고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뒤 이들이 폭력을 행사하면 도시테러리스트라고 치부합니다. 비합리적입니다. 용산 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해법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거야 말로 제도적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찰의 폭력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촛불 집회 초기에는 그나마 제도화된 민주주의 안에서 경찰이 시민을 대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최근 들어 제도화된 민주주의를 벗어나 시민에게 적대적인 세력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 길거리에 세워진 전경 버스에 '국민에게 달려가겠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경찰들이 뛰어오는 대형 포스터가 붙어 있었습다. 그때 느낌은 딱 한 마디로 "제발 오지 마"였습니다. (웃음)

경찰은 우리가 그동안 가졌던 이미지에서 후퇴, 1980년대 경찰의 이미지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시대가 거꾸로 가다 보니 경찰뿐만 아니라 검찰, 국세청, 사법부, 감사원이 모두 정권을 비호하기 위해 동원되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이명박 시대의 시대정신,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이명박 시대에는 코드, 즉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김대중은 남북평화, 노무현은 소통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김영삼은 하나회 척결이라도 했습니다. 이 시점에 필요한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그것을 살려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진보 진영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지금 보수 진영 싱크탱크에서 만들어 내는 것들이 얼마나 한심합니까. 여기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이것이다'를 말해야 합니다. 그것 없인 이합집산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을 하면 자연히 사람들은 모이게 됩니다.

이미 답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촛불에서 정치적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747 공약의 허구,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 대기업 중심이 아닌 중소기업 성장, 고용창출 전략 등이 필요합니다.

촛불 집회는 반대를 위한 집회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집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중이 가진 가장 저급한 욕망인 747 공약으로 대통령이 됐습니다. 하지만 대중에겐 또 다른 욕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욕망에서 시대정신의 단초를 찾아야 합니다. 현재는 시대정신이 공백에 있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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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말을 유인촌 장관에게 돌려드릴 때가 됐다. 문화부의 말죽거리 잔혹사를 막으려면, 이전 정권이든, 지금 정권이든, 정치색을 가진 문화부 장관은 물러나는 게 자연스럽다. 다른 정권에서라면 벌써 낙마했을 게다. 하지만 능력이나 자질보다 충성심을 보는 각하의 철학 덕분에, 그는 "7월초로 예상되는 개각에서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단다. ('실세들은 문화부를 좋아해', 내일신문 2009/06/10) 

다른 한편, 최근 한나라당 쇄신특위에서는 쇄신안을 만들어 청와대에 건의하기로 했단다. 쇄신안의 골자는 "총리를 포함한 개각 및 청와대 참모진의 전면적 인적쇄신"이라고 한다. 과연 누가 쇄신의 대상이 될까? 위원장 원희룡 의원은, 

'인적 쇄신' 대상과 관련해 구체적인 이름은 거명하지 않았으나 "국회나 국민들을 무시하는 모욕적이고 불손하고 부적절한 언사들을 아주 그냥 자랑스럽게 쓰는 인사들"이라고 설명했다. ('원희룡 불손하고 부적절한 언사 상습범들 인적 쇄신해야' 프레시안 2009/07/03) 

"구체적인 이름"은 거명하지 않아 쇄신대상은 국민퀴즈로 남는다. "특위 안팎에서는 청와대 정정길 대통령실장을 비롯해 이동관 대변인, 외교통상부 유명환 장관, 문화체육관광부 유인촌 장관 등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다"고 한다. 쇄신이 이루어진다면, 1순위는 누굴까? "국회나 국민들을 무시하는 (...) 부적절한 언사들을 자랑스럽게 쓰는 인사"라는 게 힌트가 될지 모르겠다.  

유인촌 장관의 주옥같은 어록 

그 동안 유인촌 장관은 주옥같은 언행으로 신문지면을 꽃처럼 수놓곤 했다. 작년 청와대에서 열린 올림픽 선수단 초청 만찬에서, IOC 선수위원으로 선출된 문대성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께서 만들어 주신 거야." ('유인촌, 그 입의 가벼움이 결국' 미디어오늘 2008/10/07)  

독재자 모시고 살아가는 제3세계 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풍경이다. 아무한테 반말 지껄이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황당한 것은 IOC 위원 된 공적마저 기어이 각하께 돌리는 저 투철함. 이승만 시절인가?

 

"학부모를 누가 이렇게 세뇌를 시켰을까" "서사창작과? 그게 잘못된 과거든" 6월 3일, 한예종 문제 관련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학부모에게 막말을 해 물의를 빚고 있는 유인촌 장관

국민들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문화부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는 학부모를 향해 "세뇌 당하셨네요"라고 말하는 장면. 사실 문화부에서 '세뇌'라는 말을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작년 촛불정국에 문화부 홍보지원국 직원 12명의 '정책 커뮤니케이션 교육' 강의자료로 사용된 문건에는 이미 "멍청한 대중은 비판적 사유가 부족. 잘 꾸며서 재미있게 꼬드기면 바로 세뇌 가능"하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대중은 멍청, 인터넷 매체 몇 푼 쥐어주면 돼' 미디어오늘 2008/05/28) 

어록의 압권은 역시 작년에 국회에서 퍼부었던 폭언. 자신을 'MB의 졸개'라 부르는 야당 의원의 발언에 유장관은 "성질이 뻗쳐서" 애먼 사진기자들을 향해 예의 반말을 지껄였다. "찍지 마! 찍지 마!" 그 뒤로는  들어주기 남세스런 상스러운 표현도 이어졌다. 황당하게도,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유장관은 "품격 있는 문화국가, 대한민국"을 새 정부 문화정책의 모토로 내세운 바 있다. ('柳문화, 품격 있는 문화국가 만들겠다' 연합뉴스 2008/09/03)   

부족한 교양이 낳은 이 우발적 사건들이 동시에 MB 문화부의 본질을 보여준다. 가령 (1) "대통령께서 만들어주신 거야." MB 정권 아래서 문화부는 실제로 정권의 치적을 홍보하는 기능을 맡았던 3공 시절의 문화공보부로 전락했다. (2) "세뇌 당하신 거예요." MB 문화부는 실제로 3공 시절처럼 국민을 계몽과 홍보, 심지어 세뇌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3) "성질이 뻗쳐서." 국회에서, 그것도 카메라 앞에서 장관이 드러낸 이 야성. 그가 지난 1년 반 동안 문화계에서 행해진 이념테러 역시 그 못지않게 거칠었다. 

문화부, 3공화국 문공부로 돌아가다  

왜 문화부가 졸지에 문공부로 전락한 걸까?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제도적 원인. 국정홍보처를 문화부에 통합시켜버리다 보니, 문화부 장관이 꼴사납게 정권홍보를 주업무로 삼게 된 것이다. 둘째는 이념적 원인. 3공 시절에 갇힌 MB의 상상력은 문화를 국정홍보의 수단 정도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셋째는 인격적 원인. MB는 유장관의 영웅이다. 의식적으로 MB를 닮으려 하니("오랫동안 옆에서 봤기 때문에 내가 닮아간 것" 한겨레 2009/07/03) 문화부가  MB의 친위대처럼 될 수밖에.  

3공 시절에나 보던 현상이 다시 나타나는 건 그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3공화국 정부는 종종 유명가수를 정권의 홍보에 동원하곤 했다. 또 그 시절 가수들은 음반의 끝에 반드시 애국심을 고취하는 '건전가요'를 끼어 넣어야 했다. MB 정권의 복고 취향은 이 해괴한 관행을 오늘에 되살려낸다.  

청와대는 전문가에 의뢰해 일명 '힘내라! 대한민국' 등의 랩송 등을 제작한 뒤 인기그룹 '빅뱅'을 비롯한 여러 유명 가수들이 돌아가면서 부르게 하는 방안을 연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나라사랑 랩송은 경제위기 극복에도 적잖이 도움이 될 것으로 청와대는 기대하고 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국민적 단합이 절실한 상황에서 (...) 애국심 고양 및 국민통합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靑, '나라사랑 랩송 만든다' 연합뉴스 2009/02/15) 

나라사랑 랩보다 우스운 것은, 그게 "애국심 고양 및 국민통합에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청와대의 믿음이다. 대중은 거국적 비난으로 이 야무진 믿음을 사정없이 비웃었다. ('랩으로 애국심 고양? 유치하다' 헤럴드 생생뉴스 2009/02/17) 저런 식으로 국민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게 정권의 문화감각이다. 문화를 담당하는 주무부서는 좀 나을까? 그 밥에 그 나물, 촌사마의 감각도 다르지 않다. (이게 다) "젊은 층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 아니겠냐." ('여론의 된서리 맞은 나라사랑 랩송' weekly경향 2009/03/05)  

문화부의 감각이 이 지경이니 '대한 늬우스' 소동은 예정된 사고였던 셈이다. 국민의 혈세 2억을 잡아가며 야심차게 추진한 이 계획 역시 네티즌들의 거센 비난에 부딪혔다. 그러자 문화부에서 부랴부랴 다음 아고라에 해명 글을 올렸다. 

'대한늬우스'라는 단어는 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젊은 세대에게는 신선함을 주기 위한 광고기법 차원에서 사용한 것입니다. (...) 문화부는 광고 상영에 앞서 영화관 주수요층을 대상으로 반응조사를 한 바 있습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재미있다, 이해하기 쉽다고 답했으며, 또한 내용 표현방식에 대해서도 좋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문화부, '광고는 광고일 뿐 오해하지 말자' 2009/06/25) 

이런 광고를 보고 "재미있다, 이해하기 쉽다"며 "좋은 반응을 보였"다는 "영화관 주(主)수요층"은 도대체 어디에 가면 볼 수 있을까? (문화부에서는 멍청한 대중만 따로 추려 반응 조사용 마루타로 관리하나 보다.) 문화부만 아는 '주'수요층 말고, 대부분의 국민으로 이루어진 '부'수요층의 반응을 보자. 

"백 투 더 퓨쳐"(뷰스앤뉴스 2009/06/24),
"히틀러 라디오에 히틀러 늬우스"(프레시안 2009/06/24),
"국민 바보로 아는 대한늬우스"(한겨레 2009/06/24),
"역사의 시계 거꾸로 돌린 블랙코미디"(오마이뉴스 2009/06/25),
"시대착오적, 강압적" (노컷뉴스 2009/06/25)
"눈물이 날지언정 크게 한번 웃자"(업코리아 2009/06/25),
"이제 하다하다 별걸 다해" (폴리뉴스 2009/06/25)
"정부가 왜 욕을 얻어먹는가 했더니" (국민일보 2009/06/26)
"유인촌의 실패한 촌티 전략"(미디어스 2009/06/26),
"대한늬우스, 또 다른 소통부재"(헤럴드경제 2009/06/26)
"대한늬우스는 또 뭔가"(중앙일보 2009/06/26)
대한 늬우스, 과거로의 회귀 (경향신문 2009/07/02)  

정권의 퇴행적 감성은 사사건건 대중의 세련된 감성과 충돌하며 국민적 반감을 사고 있다. 이 문화지체(cultural lag)가 어디 청와대나 문화부만의 문제일까? 최근 국정원에서도 이에 질세라 노인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빈티지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이로 보아 이 퇴행적 취향은 얼빠진 한 두 개인 혹은 넋 나간 한 두 부처의 문제가 아니라, MB 정권 전체에 공유되는 일반적이며 보편적 감성인 듯하다. 

'안보신권' 이벤트가 네티즌들의 질타를 받고 있다. (....) '안보신권 필살기를 연마하라' 코너에는 5명의 간첩을 찾는 게임이 등장한다. (...) 이를 접한 한 네티즌들은 "유치원생들 그림 맞추기를 한다고 안보의식이 생기겠느냐"며 "저런 문제를 내는 사람들의 정신상태가 궁금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합성사진인줄 알았는데 국정원이 실제 실시하고 있는 행사라니 놀랍다"며 "조만간 남한판 '5호 담당제'가 시행될 날도 멀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국정원 이벤트 안보신권, 네티즌 질타' 노컷뉴스 2009/06/24)

6, 70대 노인들이 가진 70년대 콘텐츠를 억지로 2,30대 디지털 세대의 표현형식에 담다 보니, 거기서 해괴하기 짝이 없는 문화적 에얼리언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나라사랑 랩, 대한늬우스, 안보신권. 다음에는 또 어떤 괴물이 탄생할까 ?

이 관제 하이브리드 문화를 유장관은 "젊은 층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라 부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MB정권도 "젊은 층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절실히 원한다. 문제는 방향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젊은 세대를 향해 '미래'로 가는 게 아니라, 젊은 세대를 자신들이 있는 '과거'로 끌어당긴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문제는 이 미션 임파서블에 국민의 혈세가 들어간다는 데에 있다.  

문화부의 '정책 커뮤니케이션' 거참 희한하네  

국민을 홍보와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6~70년대 산업화 초기의 습속이다. 당시 국민의 대다수는 농민이었고, 교육수준도 높지 않았기에 계몽과 홍보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국민의 대다수가 정보 프롤레타리아이고, (MB도 한탄하듯이) 고졸자의 80% 이상이 대학에 가는 과잉교육의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낡은 산업혁명의 자식들이 디지털 혁명의 자식들을 가르치겠단다. 이건 보수/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진화의 문제. 한 마디로 네안데르탈인이 호모사피엔스에게 문명을 가르치려 드는 격이다.  

눈 뜨고 봐주기 민망한 '대한늬우스'를 놓고, 문화부 제2차관은 "어쨌거나 이슈화되지 않았냐", "광고를 잘한 것"이라 말했단다. ('문화부 4대강 대한늬우스 자화자찬 파문' 미디어오늘 2009/07/02) 내친 김에 '대한늬우스' 2탄도 극장에 걸 작정이란다. ('대한늬우스 2탄, 이 달 25일부터 상영' 조선일보 2009/07/01) 반발을 하든 말든, 그냥 가겠다는 얘기다. 황당한 것은 문화부에서는 이런 짓을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 증세는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앞으로도 정부 정책을 쉽고 편하게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홍보 방안을 강구하여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대한 늬우스 15년만 부활…문화부 "대화가 필요해"' 서울신문 2009/06/24)

이 문화부의 처방을 뒤집으면, '그 동안 국민과 소통이 안 된 것은 정부 정책이 너무 어려워 국민이 편하게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그들의 진단을 얻게 된다. 한 마디로 국민들이 우매하다는 얘기다. 그 문건이 생각나지 않는가? "멍청한 대중은 비판적 사유가 부족. 잘 꾸며서 재미있게 꼬드기면 바로 세뇌 가능." 이거야말로 문화부에서 개그맨을 동원해 대한늬우스를 찍는 동기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게 아닐까? 

최근 문화부의 행태는 문화부 홍보지원국 직원들의 강의자료로 쓰인 그 문건을 연상시킨다. 문건의 내용은 괴벨스의 뺨을 친다. 위에 인용한 기사('대중은 멍청, 인터넷 매체 몇 푼 쥐어주면 돼' 미디어오늘 2008/05/28)에 그 문건의 전문이 실려 있다. 링크를 걸어 놓을 테니, 일독해 보시기를. 그 수준의 저열함, 그 수법의 야비함, 그 어법의 천박함이 우리를 경악시키고 남음이 있다. 한 나라의 문화를 책임진 공무원들이 국민의 혈세를 들여 고작 이런 강의나 듣고 있어야 하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8797 

문건의 작성자가 제안하는 "정책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을 보자. "대중은 조작과 영합의 대상", "이해찬 세대는 부리기에 유리한 집단", "인터넷게시판은 가난한 이들의 한풀이 공간", "비판적 미디어비평 기자들 엉겨주면 뿌듯해해", "복잡한 방송판 기생집단 활용해 관리". 거의 환생 마키아벨리다. "주둥아리로 출세하는 방법"이라는 항목이 눈길을 끈다. 배워서 출세 좀 할까 들여다봤다가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이게 문화부의 인터넷 낭인 채용규정(?)인가?

가급적 사람들이 잘 아는 '센 놈' 하나를 골라 밟아야 잘 뜬다. 몸값이나 Media 역량이 안 되면 뭉쳐서 떠든다. 정부 위원회, 자문그룹에 마지못한 척 낀다. 조금밖에 몰라도, 떠들다 보면 남들이 전문가라고 하고 정보도 생김. 무작정 / 좌우간 한쪽 편을 골라서 떠든다. 사냥개는 생각이 필요 없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생각은 불러서 쓰는 놈도 헷갈려. 진영논리에 충실해야 낙전이라도 주워 먹는다.(박찬희 '공공갈등과 정책 커뮤니케이션의 역할' 2008년 2008년 5월)

최근 권력의 사냥개가 되어 천방지축 날뛰는 자들의 인생철학이 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밤하늘에 별이 스치우듯, 문득 머릿속으로 얼굴 하나가 스치운다. 덕분에 재수가 부재하는 밤, 지는 잎새에 잠시 괴로워하다가 나한테 주어진 길을 가야겠다. 

문화부의 MB식 예술관 

문화부의 주업무인 예술정책으로 넘어가 보자. 정치적 수구는 문화적으로도 수구여야 하나? 정치적 입장과 문화적 감성 사이에도 모종의 연관이 있는 모양이다. 한겨레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유인촌 장관은 한예종의 학생을 물리친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준다. 결국 '예술학교에서 왜 이론을 가르치냐'고 하던 무식한 문화판 뉴라이트 논리의 반복이다.

최근 만난 무용원 학생이 '통섭은 트렌드이고 앞으로의 예술 방향인데, 왜 못하게 하느냐.'고 하길래 '발걸음 걷는 연습부터 해라. 명인들이 평생 발 올리는 연습을 한다.'고 말해줬다. 기량을 먼저 익혀야 한다. ("연극인 시국선언 땐 딱 관두고 싶더라" 한겨레신문 2009/07/02) 

MB의 낡은 산업화의 관념이 유장관의 입을 통해 예술론으로 환생했다. 기량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기량만으로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서커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뒤샹이 변기에 사인을 하고, 폴록이 화폭에 물감을 흘리고, 뉴먼이 화폭을 롤러로 밀고, 폰타나가 캔버스를 송곳으로 뚫고, 미니멀리스트가 철공소에 전화를 걸고, 워홀이 직원에게 작품을 만들라고 지시하고, 케이지가 4분33초 동안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는 데에 과연 얼마나 많은 기량이 필요했을까? 

한 사회의 경제수준과 예술의 상태 사이에는 묘한 평행이 존재한다. 가령 70년대 한국은 기능 올림픽 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휩쓸곤 했다. 그렇다고 당시 한국의 기술이 세계 최고였던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 몸을 굴려 기량을 연마할 때, 선진국 사람들은 정신을 굴리며 컨셉트를 잡고 있었다. 한국의 예술도 비슷한 처지에 있다. 가령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한국의 예술가들을 보라. 대부분 연주자나 무용수와 같은 퍼포머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품을 쓰는 창작자는 극히 드물다. 

훌륭한 퍼포머도 그저 기량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거기에도 풍부한 교양과 섬세한 정신이 필요하다. 가령 외국에 유학을 간 한국의 학생들은 시험곡은 능숙한 기량으로 소화해내지만, 정작 다른 작품을 해석하라고 하면 당황한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이런 예술적 상황은 묘하게도 기술의 상태와 조응한다. 가령 한국의 기술은 (메모리를 비롯한 몇몇 분야를 제외하면) 아직 창의적 기술이 아니라 모방적 기술에 머물러 있다.

MB의 예술철학(?)은 더 직접적인 형태를 띄기도 한다. MB의 머릿속에 삽 한 자루만 들어 있다 보니, 문화도 삽질을 하는 걸까? 중앙일보 기자가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는데 이명박 정부는 문화정책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고 말하자, 촌사마는 이렇게 대답한다. 

"청계천 복구도 문화라고 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 물론 건설이지만 그렇게 환경을 바꿔주면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는 거 아닌가요. 광화문 네거리에 건널목을 만든 거나 서울광장 등 그게 다 문화정책이죠. (...) 4대 강 정비도 마찬가지죠. 수질이 좋아지고 환경이 나아지면 자전거 도로가 생기고 크루즈도 뜨고 국토환경이 바뀌는 건데 (...) 문화정책이 없다는 건 난센스입니다."('파워인터뷰-취임1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중앙일보 2009/04/28)

한 마디로, 삽질이 곧 문화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뭐 하러 문화부를 따로 두는가? '작은 정부'의 모토에 따라 그냥 국토해양부에 통합시킬 것이지. 

문화부의 홍인종 사냥 

이런 수준의 교양으로 이 나라의 문화예술을 이끈단다. '예술에 왜 이론이 필요하냐'고 묻는 머리들 속의 비전이 오죽 하겠는가. 그리하여 지난 1년간 문화부에서 역점을 두고 진행한 사업이 고작 좌파척결. 전봇대 뽑는 저돌성으로 문화판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역시 박힌 사람 뽑는 것뿐이다. 이는 그 자신도 인정한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가 임명한 산하 기관장들을 내보낸 겁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지난 1년간은 이걸 정비하는 데 모든 역량을 쏟았어요." (중앙일보 2009/04/28)

지난 1년 간 "모든 역량"을 쏟아서 한 일이 고작 좌파척결. 그런 이런 기사도 있다.  부산일보 사설이다. 그 일을 하고도 자체적으로 이런 평가를 내렸단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유인촌 장관의 지난 1년간의 업무 평점이 'A' 수준을 상회한다고 자평하고 있다.('문화정책 예산지원도 지방홀대 심하다니' 부산일보 200/02/28)

'A' 수준을 상회한다니, 장관님 점수 매기기 위해 A 앞에 알파벳 문자를 새로 만들어 드려야 할 판이다. 물론 문화부 밖의 평가는 이와 사뭇 다르다. 사설은 이렇게 이어진다. 

하지만 인적 청산 작업 말고는 뚜렷이 부각되는 것도 없다는 게 중론이다. (위의 사설)

문화부 안에서는 A+를 받았으나, 문화부 바깥의 중론은 사람 잡는 일 외에 생각나는 업적이 없다는 것. 한겨레신문의 인터뷰에는 재미있는 대목이 등장한다. 기자가 "보수 인터넷 매체들의 한예종 공격과 감사 내용 등이 상당 부분 일치한다"고 지적하자, 유장관은 이렇게 대꾸한다.  

"학교에서 그런 얘길 많이 하더라. 변희재씨가 공격을 주도하던데, 황 전 총장의 서울대 미학과 후배더라.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다." (위의 기사)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가? '백남준이 독일문화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벤야민이 문화비평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는 처참한 교양의 소유자다. 어차피 수준이 비슷해 보이니 만나면 말도 아주 잘 통할 게다. 게다가 평소에 즐겨 하는 일도 비슷하지 않은가. MB 정권이 적어도 한 명의 국민(?)과는 대화가 통할 수 있다는 것. 이는 이 소통부재의 시절에 참으로 귀한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완장과 명찰의 정치 어떻게 봐야 할까 

좌파적출의 메스는 감사. 감사라고 변변할까? 감사의 수준이 거의 개그 콘서트다. '회의실 의자가 열다섯 개인데 왜 세 개를 더 샀냐'(방만한 예산집행), '총장실에 왜 북한 우표책이 있냐'(남북교류협력법 위반), '국회에서 기다리는 시간에 왜 한강 둔치에 나가 사진을 찍었냐'(근무지 이탈). 그래도 한예종 감사는 양반이다. 영화판에서는 "연간 1000만원 남짓 지원하는 조그만 영화제까지 샅샅이 뒤지고 있다." ('유인촌은 MB가 아니라 우리가 내친다' 시사IN 2009/06/22) 

문화부의 이런 조폭적 행태는 당연히 문화계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문화행정은 실종된 대신, 감찰활동은 독재시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원에 인색하고 간섭에 능하며, 심지어 공포를 주는 문화부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문화예술의 자율성을 위기에 빠뜨린 유인촌 장관은 스스로 물러나야 합니다." ('상상력에 자유를! 문화예술의 자율성 회복을 위한 미술인 성명' 오마이뉴스 2009/06/12)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들도 나섰다. 

낡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어 단죄하고 처형하는 작태는, 마치 바우하우스의 예술가들에게 공산주의자 딱지를 붙이며 독재의 기반을 다지던 과거 독일의 나치를 떠올리게 합니다. (...) 완장 찬 사람들이, 미운 놈이면 아무한테나 명찰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완장과 명찰의 정치를 예술과 학문의 영역에까지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예술과 학문은 정권의 전리품이 아닙니다. ('한예종 사태를 염려하는 영화감독 100인 선언 전문' 스타뉴스 2009/06/18) 

영화계에 이어 유장관의 옛 '나와바리'에서도 성명을 발표했다. 

연극 연출가와 배우 등 연극인 1천37명이 25일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연극인들은 시민들과 연대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 신명을 바칠 것을 엄숙하게 선언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문화와 예술의 환경조차 관치로써 재단하는 퇴행적 행태는 문화대중 및 예술인의 자존심과 정신적 생명권을 참담한 지경으로 유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현 정부에 대해 (...) 구시대적, 반예술적 문화정책 중단 등을 요구했다. ('연극인 1천여명 시국선언 동참' 연합뉴스 2009/06/25) 

연극계에서조차 자신에 대한 비판이 나오자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연극인 시국선언 때는 딱 관두고 싶더라. 명단을 일일이 다 봤다. 그 가운데 내가 가르친 애, 유씨어터에 있던 애도 있었다. 그래서 너무너무 깜짝 놀랐다. ("연극인 시국선언 땐 딱 관두고 싶더라" 한겨레신문 2009/07/02) 

심지어 자기가 가르친 제자까지도 자기에게 반기를 드는 상황. 그는 이 상황을 마음속으로 어떻게 정당화하고 있을까? 어쨌든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참상이 촌사마께서 단 1년 반 만에 이룩한 업적이라는 점이다. 불도저 같은 그 추진력 하나는 높이 사줄만 하다.

MB 코드로 볼 때에 

어차피 MB 정권에 교양까지 기대할 수는 없으니, 문화예술은 그렇다 치자. 정권 자체의 기준으로 본 유장관의 직무수행은 어땠을까? 문화부에선 A+라 자평했지만, 정부의 평가는 다른 모양이다. 거기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영화진흥위원회가 2008년도 공공기관 경영평가 결과에서 92개 공공기관 중 최하위인 E등급을 받는 수모를 당했다. (...) 이번 평가 결과는 유인촌 문화부 장관을 적지 않게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 더욱 당혹하게 하는 대목은 경영평가 결과에서 '경고' 조치를 받은 17개 기관 중 무려 23%에 해당하는 4개 기관(방송광고공사ㆍ체육진흥공단ㆍ국제방송교류재단ㆍ예술의전당)이 문화부 산하 공공기관이란 점. (...) 평소에 잘하고 있다고 칭찬했던 예술의전당 등 상징적인 단체들이 대거 경고 조치를 받음에 따라 (....) ('잘하고 있다더니, 유인촌 장관의 굴욕' 2009/06/19)  

'작은 정부'를 위해 MB는 국정홍보처를 폐지했다. 관제홍보에 국민의 혈세를 쓸 필요 없다는 문제의식만큼은 지극히 정당하다. 그렇다면 국정홍보처의 기능을 넘겨받은 문화부에서는 홍보예산을 얼마나 절감했을까? 

'관제홍보는 않겠다'며 국정홍보처를 폐지했던 이명박 정부가 집권 1년 만에 (...) '국정홍보 체제' 강화에 나섰다. (...) 2008년 90억8천만 원이던 예산은 2009년 189억8천만 원으로 2배 이상 급증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 137억 원보다 53억 늘어난 액수다. (...) '관제홍보' 논란도 심해졌다. 문화부는 설 연휴 때 방송법과 '4대강 정비사업' 홍보책자를 수십만 부씩 찍어 귀성객에게 나눠줬다. 한나라당의 언론법 홍보전단 배포에만 (...) 5억3천여만 원을 썼다. 올해 초 대통령실은 '2008 이명박 대통령 어록-위기를 기회로'를 222쪽 전면 컬러로 5천부 찍어 공공기관에 배포하기도 했다. ('귀막은 MB정부 홍보예산 2배로' 한겨레신문 1009/03/16)

어처구니없는 자가당착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간단하다. 소통=홍보라는 70년대 관념 때문이다. 70년대의 이상에 갇힌 머리가 메시아적 사명감에 넘쳐 자신을 민족의 선지자로 착각한다. 국민은 그저 대붕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참새일 뿐. 이들을 설득하려면 당연히 홍보가 필요하다. 마침 모두들 입을 모아 소통이 부족하다지 않는가? '뭐 해? 홍보예산 대폭 늘려.' 

"앞으로도 정부 정책을 쉽고 편하게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홍보 방안을 강구하여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대한 늬우스 15년만 부활…문화부 "대화가 필요해"' 서울신문 2009/06/24)

그들에게 국민과의 소통은 "다양한 홍보방안"을 문제일 뿐이다. 2009년 홍보예산 189억. 그 돈은 귀 닫고 입만으로 소통하려 드는 MB의 독특한 버릇에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이다.

돈키호테의 꿈?

외부로부터 인풋을 차단하고, 내적 동질성을 강화하며, 밖을 향해 공세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 폐쇄적인 정치체제다. MB 정권의 상태도 이와 비슷하다. 가령 "파격적"이라 평가되는 유장관의 기용은 MB식 인사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것은 '코드 정치'와는 애초에 차원이 다르다. 코드는 서로 맞춰보기라도 해야지. MB는 코드를 맞추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냥 자신의 분신을 원한다. 

유인촌 장관을 만나면서는 왜 그가 이명박 대통령과 그렇게 가까운지 궁금했다. (...)  MB는 서울시장이 되자마자 서울문화재단을 만들어 유인촌에게 대표를 시켰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장관으로 데려갔다. 파격적이다. 도대체 유 장관의 어디가 그렇게 맘에 들어서? 인터뷰를 하고 나선 나름대로 답을 얻었다. 내가 보기엔 유 장관과 이 대통령은 기질이 같은 사람들이다. ('파워인터뷰-취임1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중앙일보 2009/04/28)

기질이 같아서 그런지, 정치를 모르는 MB와 똑같이 유인촌 장관도정치적으로 매끄럽지 않다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았다. (위의 기사)

이렇게 단점을 장점으로 믿어 버리는 사람 앞에서 국민은 대책이 안 선다. 그 뿐인가? 유인촌이 본 MB의 느낌이란다.  

나도 지독한데 '참 나보다 더한 사람이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위의 기사)

심지어 지독하기까지 하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표 한 번 잘못 던진 죄로 이 두 사람의 독기를 겪고 있는 게 지금 대한민국 국민의 운명이다.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려면 주관적 환상의 힘을 믿어야 한다. 저 홀로 과거로 돌아가 주관적 로망 속에서 시대착오적 영웅문학을 한다는 의미에서 언젠가 MB를 돈키호테에 비유한 바 있다. 그런데 현실은 비유를 그냥 비유로 남겨두는 문학적 여유도 없나 보다. '명박호테'를 사모하는 유인촌 장관의 고백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잡을 수 없는 하늘의 별을 잡는다'는 구절이죠. 돈키호테와 제가 성향이 비슷한 것 같아요. 무엇보다 꿈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어쩌면 집착일지도 모르지만 예술이 결국 꿈 아닌가요.(위의 기사)

저 달콤한 로망은 MB와 둘이서만 즐기면 딱 좋을 터. 불행히도 "지독한" 그 두 사람의 손엔 권력이 쥐어져 있기에 그들의 '예술'은 국민의 짜증이 되고, 그들의 '꿈'은 국민의 악몽이 된다.

출처 : 'MB분신' 유인촌 장관의 좌충우돌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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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7-06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사 봤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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